|
https://www.youtube.com/live/RqisrXUYEl0?si=29tDWwXyEXF2UJYu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 11:8~10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11:11~16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오늘의 말씀 요약]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해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많은 후손이 생육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지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 11:8~10
믿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떠남’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수십 년간 자신의 생존과 보호의 울타리였던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8절) 나아갔습니다. 불분명한 목적지를 향한 떠남이지만, 하나님 약속을 신뢰한 순종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임시 거처인 ‘장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땅에 대한 약속을 받았음에도 그곳을 ‘안주할 땅’이 아닌, 언젠가 떠날 ‘이방의 땅’처럼 여긴 것입니다(9절). 그는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진 도시를 소망했습니다(10절). 믿음의 사람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은 어떠했나요?
아브라함처럼 내가 계산 없이, 믿음으로 순종할 일은 무엇인가요?
------------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11:11~16
아브라함뿐 아니라 사라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잉태할 능력을 얻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후손은 하나님 약속대로 창대하게 되었습니다(창 12:2; 22:17).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전에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며 소망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이 외인이요 나그네라는 것을 증언하며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본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본향’이 아닌 ‘더 나은 본향’(16절)을 사모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미쁘신 약속을 믿고 순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영원한 나라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성도의 소속은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더 깊은 묵상
생전에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음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떤 태도로 살았나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내가 계속 기도를 심을 일은 무엇인가요?
============
가장 좋은 길 선택하기
오래전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모 기업의 광고 카피가 유명해진 일이 있다. 좋은 가전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은 문구였다. 그런데 인생에는 가전제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결혼이나 진로 선택처럼 10년이 아닌 일생을 좌우하는 선택도 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타의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아쉬움이 자못 클 수밖에 없다. 자기 삶에 대한 욕심이 있고 꿈이 클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려면 자기가 원하는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실이다. 기술이 발전해 디지털 시대와 네트워크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하나님 뜻을 앞지르는 인생의 지름길이란 없다. 저마다 자기 삶을 통해 가장 큰 부가 가치를 창출해 내려고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드는 길은 없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때, 기쁜 마음으로 순종을 선택하자. 내가 원하지 않는 그 길이, 내 삶의 지경을 넓혀 주시는 하나님 은혜가 펼쳐진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네 인생의 라스트 피치를 올려라 / 허철_ 두란노
==============
한절묵상:히브리서11장 16절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육신의 고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 '사모하다'라는 말은 강력하게 열망하는 마음과 그러한 마음의 지속성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도의 마음과 생각은 항상 영원한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그곳은 이 땅에서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본향의 문을 여는 열쇠는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욕망에서 떠나는 결단을 할 때 주님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 어윈 R. 맥마너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나그네 인생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임을 깨닫습니다. 이 땅에서 풍족하고 안락하게 살지 못해도, 더 나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힘을 얻게 하소서. 말씀 따라 믿음으로 결단하고 행할 때 최선의 길로 이끄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오늘의 찬송(새 287 예수 앞에 나오면)
------------------
믿음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게 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것들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을 때는 보이는 것은 찰나에 불과함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순간뿐인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이 땅에서는 단지 외국인으로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그래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 아버지 집을 향해 믿음으로 꾸준히 끝까지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도 없는 나그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아브라함도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거류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23:4)
야곱도 자신의 생애를 나그네 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그러므로 우리도 나그네와 행인으로 이 땅을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들아"(벧전2:11)
우리가 이같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가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삶인 것을 이 세상에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11:14)
그러므로 오직 위의 것을 찾기 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왜냐하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위에서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본향(14절).. 더 나은 곳(16절)’
생명에 대하여는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자식 문제나 목숨을 걸고 하는 일에는 언제든 변수와 불안 요소가 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만 속한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기 아내를 이집트 왕, 바로에게 넘겨주는 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언약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해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고 다시 돌이키게 하십니다.
최소한 그에게는 그 위대해 보이는 이집트의 왕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는 눈이 열렸을 것입니다.
그가 100세가 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았고 세상에서는 여전히 나그네로 살았지만 그분의 약속을 붙들었으므로 그는 열국의 아버지로 믿음의 조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했고 그를 믿어 기다려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본향에서 거할 곳을 예비하시는 여호와의 전능하신 손길을 붙들며 여호와로 인해 허락된 믿음으로 담대하게 걸어가는 성령 충만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은 핍박과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을 향하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본받아 끝까지 믿음으로 살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약속한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믿음의 선진들이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곳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 믿음으로 출산한 사라,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 돌아갈 본향 등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오직 순종하므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야기해 준 후에 비로소 안 것입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오르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길을 떠났다는 것을 부각시킨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믿음을 따라 죽은 그들은 약속한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으며, 세상에서는 외국사람과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말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약속이 성취되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는 일단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말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여기서 ‘본향’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고향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지상의 고향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겼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땅의 고향을 그들의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위해 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사람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묻히기를 기꺼이 원합니다. 메소포타미아가 그들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겨 기꺼이 그들을 위해 그분의 도성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는 그야말로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끄럽다’의 원어는 ‘매우 민망하다’는 의미로, 그것의 정반대이므로 ‘매우 기쁘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기쁘고 자랑스럽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땅에서 살면서도 이 땅에 만족하지 않고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아브라함으로, 그는 저택에 산 것이 아니라 장막 곧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저택이 없던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은 물론, 그의 조카 롯도 성의 저택에서 살았는데요. 또 우리들 주변에도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시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민입니다. 그중에는 남한에서 열심히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부동산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집을 사자고 아무리 졸라도 절대로 사지 않으니, 정착하면 고향을 잊을까 봐서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그리운 북쪽 고향 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젓 셋집이나 월셋집을 전전긍긍했으니, 눌러앉으면 사모함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분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습니다. 비록 바라보는 것은 달랐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을 갖고 있던 분들입니다.
본향이라는 말은 매우 축복된 말입니다. 본래 그곳에 있었던 자들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없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쓰다니 우리는 매우 영광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막대기 두 개와 못 세 개로 돌아갈 그 길을 만드신 결과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정체성이 확고해집니다. 영광스러운 도성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믿음의 선배들은 멀리서 볼 뿐 약속을 받지는 못했으나, 우리는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은 절대 부동이라 그렇습니다. 조금 늦게 왔다고 이게 웬 호사인가요? 구약 사람들과 비교하여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지 않으려야 견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저택에 살았다면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알았을지라도 그렇게 사모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장 편하고 안락한데요. 그러고 보면 부족한 것이 좋습니다. 조금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럴수록 더 만족한 것을 원하고, 보다 완전한 것을 사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택이 아니고, 장막입니다. 고향이 아니고 본향입니다.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전, 소망, 꿈입니다. 잠시 사는 이 세상입니다. 이 땅에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즐겁더라도 여름휴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휴가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에 있어 무능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 나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뜻을 따라 살기를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으며 살게 된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믿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런 하나님께 어찌 감사 없이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우리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아닐까요?
세상을 살면서도 그 고백을 따라 본향을 바라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며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7~12절).
하나님은 노아에게 120년 뒤에 있을 홍수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노아가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세상이 홍수로 멸망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현재의 삶에 붙잡혀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7절)...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아 새 인류를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경외신앙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되 즐겁게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 이삭과 야곱 역시 장막에 살았습니다(8~9절). 믿음으로 사라 역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11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12절,새번역).
믿음은 내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정함에 있어서 내 뜻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는 볼품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품게 되면, 놀라운 인생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동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나그네의 인생은 어떤 삶입니까?
➲ 하늘의 성소를 사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3~16절).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자손과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성취는 보지 못하고 다만 그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줄로 믿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거하면서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칭했고, 야곱은 이 땅에서의 삶을 가리켜 ‘나그네 길’(창 47:9)이라고 칭했습니다. 바울(빌 3:20)이나 베드로(벧전 2:11) 역시 세상의 삶은 나그네 생활이요, 성도의 진정한 본향은 하늘에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믿음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새 하늘과 새 땅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때가 차매 곧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 가운데 펼쳐지리라는 것과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 성소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내 자신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을 향해 나그네와 같은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8-12절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안전과 번영이 보장된 땅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길을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로 삼아 떠났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해서도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이 설계자와 건축자가 되셔서 지으실 성(하나님 나라)을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 누렸습니다. 또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죽은 것과 같은 아내 사라의 불임의 태에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믿음 =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천국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믿는다.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믿는 것이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찬송가의 가사처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 알려주셨으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믿는다.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증거를 보이심도 믿는다.
다시 오신다 하심도 믿고 심판이 있다는 것도 믿는다.
날 구원하심도 믿는다.
그 은혜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다.
연약하지만, 사탄은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때론 고난의 길이지만 그 길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벨도 에녹도 그 믿음을 따라 살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하여 갔다.
믿음의 약속을 믿고 따랐던 믿음의 선진들이다.
오늘의 말씀도 얼마나 귀한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약속하신 것을 믿는다.
불완전한 세상 속에 있지만 소망을 가진다.
잡히는 것 아무것도 없지만 약속을 믿는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소망으로 세상을 이겨나가는 것이다.
13-16절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은 약속의 땅을 끝내 소유하지 못했지만, 저 멀리 있는 더 나은 약속을 '실상'(11:1) 으로 바라보는 믿음을 따라 살았습니다. 본향을 너무도 사모한 나머지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하는 외국인이자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본향 메소포타미아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을 앓았다는 게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지상의 임시 거처이자 약속의 그림자일 뿐이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성을 궁극적인 약속이자 영원한 본향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부끄러운 나그네일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는 천국 백성으로 산 그들을 하나님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는 나그네처럼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땅의 것들로 한정하고, 지상에서 내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믿음을 따르진 않습니까?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나그네 길을 가고 있다.
나그네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는 것이다.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멀지는 알 수 없다.
하루하루 주어진 길을 걸을 뿐이다.
때론 지치고 피곤한 길이다.
때론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다.
그 길에서 실패도 맛보고 성공도 맛본다.
그러나 영원히 머무를 길은 아니다.
반드시 그 길의 끝이 있는 것이다.
그 끝은 돌아갈 본향이다.
돌아갈 날이 점점 다가온다.
그날이 영광의 날이 되길 기대한다.
찬란한 그곳으로 들어가는 날 모두가 함께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믿음은 그렇게 작고 모호하고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크고 영광스러우며 환한 빛 가운데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 믿음이라는 구체적인 수단을 통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데 우리같은 죄인이 영광의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한걸음씩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중보자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말씀하신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찬란한 영광의 삶을 사십시오.
이미 오래전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서 영적 거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오직 믿음만이 열일합니다.
그것이 가장 영광스럽고 실제적인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미래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갇혀 있지 않고 미래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하늘에까지 이어집니다.
1.멀리서 보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완성이기 보다는 미완성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13, NKSV)
앞에서 인용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수많은 자손은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목표점이었습니다.
아주 멀리 있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따라갔지만 그곳까지 도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기에 그것에 가까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비록 약속한 것을 자신의 시대에 다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그것을 바라보고 가까이 걸어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믿음을 말할 때 사람들의 실수 중에 하나는 '믿음으로 복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고자 합니다. 물론 믿음으로 복을 받습니다. 믿음은 복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그 복을 '이 땅에서의 복'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믿음은 땅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복보다는 먼 미래의 복과 관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늘의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삽니다.
그가 약속으로 받은 것은 먼 미래의 일이며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땅에서 살 때는 길손과 나그네로 삽니다. 그들은 그것이 먼 미래의 일이라 하여 그들이 받을 복이 약화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멀리 있는 그것도 오늘 이곳에 있는 것처럼 즐거워하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아주 분명하게 확신하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나 미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나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시간의 차이가 존재의 차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것도 현재의 것처럼 동일하게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2.더 나은 본향
믿는 사람이 하늘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히브리서 11:16, NKSV)
하늘의 것을 갈망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갈망하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믿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탐욕으로 구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을 보십시요. 참으로 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이 세상의 것을 탐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하고 다투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면 어찌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름만 믿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이름만 먹칠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십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라면 진정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히 11:8-19
아브라함의 믿음
1.믿음으로 아브라함은(8-10)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또한 거기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족장들과 함께 장막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장차 그들이 완전히 거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믿음으로 사라 자신도(11-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원래 불임여성이었고, 아브라함도 나이가 많아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음으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3.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13-19)
아브라함의 모든 삶은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본토에서 가나안땅으로 나온 것, 가나안땅에 거하면서 장막생활을 한 것, 독자 이삭을 바친 것, 이 모든 삶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한평생을 장막에 거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또한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을 믿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있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19). 우리의 삶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9월21일 퇴근후 상동역과 청라호수공원에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또한 그 변치 않는 신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 새로운 길을 여시고 두려움과 무서움을
기쁨으로 변화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 가운데
그 복된 소식 전하는 발걸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과 그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지진과 홍수 등
온갖 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주님의 양들을
다시 건져 내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묻고
또 행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