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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는 지식에서 사랑하는 지식으로 (고전3-11)
2026년 7월 15일 (수요일)
찬양 : 겸손히 주를 섬길 때
본문 : 고전11:1-16절
☞ https://youtu.be/d698Cy9-9L0?si=-18_D2BNFh07GiWO
벌써 7월이 절반이 되었고, 초복이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이렇게 시간은 언젠가 주님의 날에 이를 것이다. 오늘 내가 만나는 크고 힘겨운 일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느 날은 별것 아닌 날이 이를 것이며, 전혀 기억조차 없는 일일 수 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멈춤의 신호 아래 다음 신호를 기다리듯 쉼의 시간을 보내는 내게는 이전에 중요했던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게는 다음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봄에는 봄옷을 입어야 하고, 여름에는 여름 옷을 입어야 한다. 과일도 제철 과일이 맛나고, 생선도 다 자기 시간에 맞게 먹을 때 맛나다.
인생도 그럴 것이다. 전도서의 고백처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이제 내게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한 그 하나님의 신호를 따라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신호에 집중하며 멈춤의 자리에서 겸손히 기다리고 있다. 멈춤의 시간을 통해 주님은 나를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영혼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듬으시려고 하신다.
15일의 멈춤을 통해 조금은 바쁘게 움직이던 내 생각과 시선을 멈추고 하나님과 영혼을 향한 제대로 된 시각이 무엇인지를 느껴가고 있어 감사하다.
이날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이 알기를 원했던 소중한 것인데 신학적으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우선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알리고자 애를 쓴 이유를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시 고린도 사회는 남성이 가정을 대표하고 권위를 갖는 가부장적 구조가 매우 강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에, 교회 내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고 공적 예배에 참여하는 행위는 당시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급진적이고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외출 시 수건을 쓰는 것은 정숙한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사회적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당대 수건을 쓰지 않는 여성은 창녀와 노예만이 쓰지 않았고 수건을 쓴다는 것은 가문에 속한 여성임과 남편에게 속한 여성임을 드러내는 사회적인 질서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질서에 대해 바울은 이것을 신학적인 재해석을 알려주려고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은, <여성은 열등하니 억압받아야 한다>는 것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너희는 자유롭지만,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아버지/남편의 보호) 아래 정숙한 여성으로 인정받으며 복음의 평판을 지키라>는 의미였다.
당시 사회에서 '남편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안전을 의미했다. 기독교인 여성들이 예배 때 수건을 벗어던지는 것은 사회적 관습인 <보호의 신호>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를 우습게 여기는 것>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혹시라도 모를 오해를 위해 이렇게 분명히 정리한다. 11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바울이 알려주려고 한 것은 당시 관습을 따르라고 한 것이 분명히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권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밖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바울은 그래서 1절에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외쳤다. 즉 복음으로 새로 태어났지만, 우리가 가진 자유를 가지고 세상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처럼 살면서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관습을 존중하면서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는지 신학적인 정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변화시켜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세상의 관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도, 무조건 거부하는 자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빛으로 그 관습을 비추어, 하나님의 질서가 드러나게 하는 ‘복음의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멈춤의 시간을 보내는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세상에 대한 존중도,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도 없이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으로 판단과 정죄와 무시를 일삼는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언제나 내 감정이 중요하고, 내 생각이 중요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며 살았던 전반전이 아니었을까?
멈추고 보니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소중하지 않는 자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무시하고, 외면하고, 대충 처리했던 무지한 내 삶의 자리들을 회개하며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호를 기다리며 나를 정돈하게 된다.
주님, 나의 전반전은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멈춤을 통해, 판단의 자리에 서 있던 발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상대방의 아픔을 담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는 나의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사람을 얻는 후반전이 되길 소망합니다. 멈춤의 시간 주님을 온전히 배우기 위해 나를 완전히 버리게 하소서.
한줄 묵상 :
<진정한 성숙은 지식의 정죄를 멈추고, 상대의 아픔을 담는 사랑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적용질문 :
1. 나는 나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복음의 문턱을 높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위해 기꺼이 나를 낮추어 '복음의 문턱'을 낮추고 있습니까?
2. 내가 그동안 나의 얄팍한 지식과 판단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했던 '소중한 자리와 사람'은 누구입니까?
3. 전반전의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와, 오늘 후반전을 시작하기 위해 내 안에 채워야 할 '하나님의 긍휼'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