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를 화선지 삼아 동양화 여백과 먹의 농담 잘 드러내
[한국 가톨릭 미술 여성 작가들] 남용우 마리아 화백<상>2019.10.27 발행 [1536호]
▲ 남용우 화백의 유리 그림. 1971년 작
▲ 남용우 화백과 1955년 작품 ‘머리병풍’. 국전 특선작인 '머리병풍'은 한자를 추상화한 작품이다.
필자가 남용우(마리아, 88) 화백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한창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전혀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한 지인으로부터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자 한다면 남용우 작가를 반드시 만나야 하고, 서울 흑석동성당에 그의 작품이 있으니 직접 가 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는 곳은 일단 다 가 보자’고 마음먹고 있던 때여서 그 길로 흑석동성당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작품을 살펴보고 작가를 직접 만나기 위해 연락처를 어렵사리 알아냈다. 작품의 스케일로 보나 작가의 이름으로 보나 막연하게 남성 작가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통화를 해보니 여성 작가여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남용우 화백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 역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연구하고 서술할 수 있었다.
1931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난 남용우 화백은 1970년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1세대 작가로 활약했다. 그는 한국인 처음으로 독일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 모자이크 기법을 연구했고, 현재까지 국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100여 곳에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 모자이크작품을 남겼다.
남 화백은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유럽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양식을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요소와 융합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작품 활동 외에도 국내의 유리 관련 자료 수집과 대학 강의를 통해 당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국내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남용우는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해 응용미술을 전공했다. 그는 재학시절 미술대 학장이었던 장발(루도비코)의 영향으로 기초 구성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탐구는 재학 시절과 1954년 졸업 후 이듬해 제1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추상적 경향의 구성 작품에 그대로 반영됐다. ‘囍’(1952), ‘후리-홈(Free form)’(1953)과 같은 그의 초기작은 상형문자와 선, 원, 사각형과 같은 기초적 조형 요소의 가능성을 실험한 작품이다.
여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 미술대학에 입학한 남 화백은 “남학생 못지않게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여성 작가로서의 섬세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춘하추동(春夏秋冬)’(1955), ‘무제’(1955), ‘환희’(1955)와 같이 규모 있는 작품에서는 남성 작가 못지않은 힘과 대담함이 엿보인다. 이와 같은 대규모 작품 제작은 훗날 그가 교회의 대규모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를 제작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남용우 화백의 1955년 작품인 ‘환희’는 한복을 입은 단아한 성모 마리아의 모 습을 표현하고 있다.
남용우는 1954년 졸업 후에 진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4년 성미술전에 ‘성모칠고(聖母七苦)’와 ‘환희(歡喜)’를 출품했고, 1955년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1955년 국전에 ‘머리병풍’을 출품해 특선으로 입상했다. 당시 그의 작품은 주로 한자(漢字)와 기초 형태를 응용한 추상적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성미술전 출품작인 ‘성모칠고’와 ‘환희’는 기존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묘사한 구상작품으로 완성됐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때문에 겪게 되는 일곱 가지의 큰 고통을 그린 ‘성모칠고’는 남용우가 1954년 성미술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앞서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1955년 작인 ‘환희’는 한복을 입은 단아한 성모의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원작의 소재가 불분명하다. 1954년 성미술전을 기획했던 장발은 당시 작가들에게 보다 한국적인 성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 결과 예수와 성모, 성인들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거나 동양 화법으로 그린 성화들이 등장했는데 남용우의 ‘환희’ 역시 이러한 한국적인 표현의 한 예이다. 1920년대에 이미 장발이 한복차림의 한국 성인들을 그린 유화를 제작하였지만, 주로 서양인으로 표현되던 예수와 성모, 성인들까지 한국적으로 표현한 것은 1950년대부터이며 1954년 성미술전 출품작을 통해 이와 같은 경향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기초 구성과 순수 형태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한 남 화백의 초기 작품 세계는 1958년 독일 유학길에 오르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장발에게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를 배우라는 권유를 받았던 남 화백은 1958년 독일 쾰른 공예학교에 입학해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을 이용한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재료의 특성을 살려 화면의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고자 했던 남 화백의 노력은 독일 유학을 기념하는 1958년 제2회 개인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천에 파라핀을 붓고 굳힌 뒤 구겨서 균열을 만들고 그 사이에 짙은 색 염료를 넣어 착색시키거나 흙색 톤을 만들어 내기 위해 화면에 직접 흙을 붙이기도 하면서 독특한 질감 표현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이후 남 화백은 1960년 뮌헨 미술대학교로 옮겨 1964년까지 오버베르거(Oberberger) 교수에게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사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와 글라스 페인팅을 통해 유리 고유의 물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유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외에도 글라스 페인팅을 통한 회화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표출됐다. 그는 안틱크글라스와 납선을 이용한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 기법 외에도 투명 백색 유리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가마에 구워낸 소규모 작품들을 여럿 선보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1971년에 제작한 유리그림들은 그가 즐겨 그렸던 동양화의 기법과 유리 특유의 물성을 접목시킨 새로운 시도의 결과였다. 산수화(山水畵), 화조화(花鳥畵), 민화에 등장하는 문자도(文字圖) 등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종이와 먹 대신 유리에 안료를 써서 표현했음에도 동양화의 여백과 먹의 농담(濃淡)을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남용우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이와 같은 유리그림과 함께 본격적으로 국내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 남용우
화백의 1955년 작품 ‘환희’ 원작을 찾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작품 원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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