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행자 35. ㅡ혼자 떠나는 여행의 의미,
세비야, 그 느린 오후에 나를 만나다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건 단순히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와의 약속도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세비야행 비행기 표 한 장만 들고 떠났을 때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이 여정은 어쩌면 나에게 가장 오래 묻어둔 질문 하나를
조용히 꺼내보려는 시도였다는 것을.
"나는 지금… 정말 괜찮은 걸까?"
스페인의 남쪽 끝자락,
햇살이 마치 오래된 와인처럼 진하고,
바람조차 리듬을 가지고 흐르는 도시, 세비야.
그곳에 도착한 첫날, 나는 멍하니 트램 창밖을 바라봤다.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어느 골목에서든 들려오고,
하얗고 붉은 벽돌 건물 위로 주황빛 오렌지 나무가 고요히 흔들렸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카페에 앉아 있었고,
늘 같은 커피를 주문하고,
늘 다른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투우 경기장과 대성당 사이의 낡은 거리,
시간이 느리게 흐르던 바리오 산타 크루스(Barrio Santa Cruz)의 어느 골목 구석에 있는
익명의 작은 카페였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나에게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했다는 것을,
누군가를 이해하느라, 누군가를 웃게 하느라
정작 나 자신에게는 제대로 말을 걸어본 적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는 비가 내렸다.
세비야의 비는 서울의 비처럼 무겁지 않았다.
가볍고 투명한 물방울이 오렌지 잎을 닦아내고,
대리석 골목 위로 고요히 스며들었다.
그날 나는 우산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젖은 돌길이 반짝였고,
어딘가 슬프고도 따뜻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날 밤,
플라멩코 공연이 열리던 작은 타블라오에서
그녀의 발끝이 바닥을 두드릴 때,
그 한 박자 한 박자에 내 안의 오래된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억눌렀던 후회, 외면했던 슬픔, 미뤄둔 꿈들까지도.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았다.
세비야의 골목을 걸으며,
꽃잎처럼 떨어진 오렌지를 밟으며,
누군가의 시선도, 역할도, 기대도 없는 공간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라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세비야는 그렇게
내가 스스로와 조용히 화해한 도시가 되었다.
더 이상 강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때로는 무너져도 된다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에게 속삭여주던 곳.
여행의 끝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알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란,
사람들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내 마음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가장 용기 있는 여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에 마주한 ‘나’는,
전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