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제1독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누가 미사의 은총을 받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졌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은 회당에서 중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가르쳐줍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모든 병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연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총은 착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영화 ‘신데렐라 맨’(2005)은 대공황 동안 극심한 빈곤에서 복싱 경력을 되찾은 프로 복서 제임스 J. 브래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이미 나이가 많고 부상이 잦아 권투 면허를 잃은 브래독의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일용직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부양할 돈이 없는 브래독의 사정은 정말 딱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쫓아낸 권투협회에 가서 거지처럼 구걸합니다. 전 코치 조 고울드는 그에게 많은 돈을 기부해줍니다.
어느 날 조가 찾아옵니다. 한 권투선수의 부상으로 자리가 비었는데 권투협회에 브래독을 자신이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조는 다시 권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경기로 승리를 따내고 브래독은 승승장구합니다. 오른손 부상 때문에 왼손으로 막일을 해야 해서 왼손의 파워가 급격하게 높아졌던 것입니다. 세계 챔피언 결승전은 그야말로 드라마입니다. 현 세계 챔피언은 하도 무자비하여 링에서 선수 2명을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아내와 코치는 그래도 브래독을 믿어줍니다. 브래독은 상대선수가 다른 선수를 죽도록 패는 장면을 계속 돌려보며 그의 약점을 알아내고 결국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브래독은 ‘신데렐라 맨’으로 불렸습니다. 일용직 막노동꾼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코치와 그에게 감동하여 다시 기회를 준 권투협회의 힘이 컸습니다. 권투협회는 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을까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구걸까지 하는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누구나가 부모에게 그런 자비심으로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왜 신데렐라는 다른 언니들보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축복받았을까요? 착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김학배 안젤로 신부는 평화방송 강의에서 한 장애인 변호사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장애인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은총을 주실까요? 타인의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더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장애인이 자기 동생을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혹시 길에서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 아는 척을 안 하고 그냥 지나쳐 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다는 말을 동생이 듣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매는 미사에 오면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는 착한 사람의 몫입니다. 레베카도 불쌍한 여행객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은총을 받으신 이유는 그러한 착한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들어오기 전에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를 되새기며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살아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등반하되 지나치는 순간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곳에서 인생 여정 중 최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해럴드 V. 멜처트).
사진설명: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