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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일찍이 이런 정권은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75년, 민주화 3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역대 최악의 정권이 탄생했다. 어떤 독재정권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 왕의 권력을 행사한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국가의 모든 활동은 오직 집권 보수세력의 이해와 관심,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덮을 수 있는 억지 정책과 논리 반복, 내년 총선 승리와 보수의 영구집권을 위한 언론 장악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 편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법치와 정의가 완전히 실종됐다. 오늘과 미래의 국민들에게 실로 심대한 영향을 미칠 외교 안보 정책 결정을 하고도 국민의 비판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뭉개고 넘어가는 이런 권력을 나는 ‘벌거벗은 권력’이라고 부르겠다.
이 벌거벗은 권력 앞에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삶은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homo sacar)가 된다. 조국 가족, 윤미향 의원처럼 ‘적’으로 지목된 인물에 대한 무자비한 압수 수색과, 비례성의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비상식적인 형벌 부과는 지금이 ‘대역죄인의 시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대통령실, 검찰로 대표되는 권력은 행사되기만 할 뿐 책임을 지지 않으니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한다. 이태원 참사처럼 160여 명의 죽음에 대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장관이나 경찰 지휘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죽은 청년들은 애도와 동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가 사라진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급기야 민족의 독립을 기념하는 8.15 축사에서는 민주, 인권과 국가 발전을 위해 애쓴 사람들을 ‘공산 전체주의’자들이라는 역사나 이론에도 나오지 않는 용어를 동원하여 ‘적으로 모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어떤 대통령도 이런 8.15 경축사를 한 적은 없다.
지난 1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 임기 중 발생한 거의 모든 것이 벌거벗은 권력 행사의 양상을 갖고 있지만, 검찰 국방부 기무사 대기업 등 그들이 ‘내 편’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의 범죄는 그 아무리 국가의 기강과 법치의 기초를 뭉갠 심각한 것이라도 수사 기피, 사면복권 등의 방식으로 봐주고, 자신의 정적인 야당 대표, 시민운동가들의 범법 의혹이나 회계 처리 상의 약점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검사들을 총동원하여 기어코 죄를 밝혀내고 망신을 주겠다는 의지를 발동하였다. 그리하여 온 사회가 뒤죽박죽이 되고 언어가 타락했다. 친일이 애국이 되고, 전체주의가 자유가 되었으며, 주권상실이 동맹이 되었다.
응답(response) 없는 권력의 난폭한 질주
외교권, 인사권,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 사항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의 헌법상 책무를 위반하는 결정을 하는 것까지 용납되지는 않는다. 특히 대통령의 헌법상의 책무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무시하는 대북 전쟁 불사 발언,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심각하게 위배한 일방적인 대미. 대일 굴종 외교, 특히 동해의 일본해 표기에 대한 침묵,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이 정부가 항의를 하기는커녕 일본 대변인 역할을 한 일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대통령이 헌법상의 책무인 평화통일,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장, 그리고 법치에 부합하지 않는 결정을 했을 때는 반드시 국민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모든 어민의 생계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달려있을 수도 있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오히려 국내 정치적 이유로 방류 시기를 앞당길 것을 요청했다는 믿기 어려운 일본 언론의 보도는 지금 한국이 주권국가인지, 정부가 국민들이 선출한 정부인지 정말 헷갈리게 만드는 사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의 정당한 질문,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국민들의 유족이나 상식적 시민들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은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 권력이란 누리기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후대에까지 연결되는 막중한 책임까지도 져야 한다. 책임이란 영어로 응답 가능성(responsibility)이다. 국민들의 정당하고 합당한 질문을 아예 뭉개버리고, 지금처럼 국민들이 일본 오염수 문제에 대해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는 이런 상황에서 아예 언론에 나타나지도, 상황을 해명하지도 않는 것은 공화국 대통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 조선시대의 왕들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던 무책임한 모습이다. 5년 단임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장차 국가와 국민의 백년의 운명이 달린 문제는 단임 대통령이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안보상 국가의 중대 기밀일 경우 대통령이 그 내용을 모든 국민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비밀리에 추진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방사능 오염수가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현재 과학 수준으로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장차 심각한 피해를 줄 위험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일본이 처리비용을 줄인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원전 오염수를 방류해 일본 주변 바다와 한국과 중국의 바다, 나아가 태평양까지 오염시키려는 행위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심각한 범죄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한국이 오직 일본의 이익만을 위한 이런 결정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 어민들을 위한 생계 대책, 향후 방출수에 대한 인근 국가 중국과의 공동 조사 등을 당연히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는 그 반대로 간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으로 이미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관련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만도 이렇게까지 한국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평화선을 긋는 등 엄포를 놓는 정치쇼라도 했고, 통일을 해야겠다고 휴전을 반대하고 반공포로 석방까지 하면서 미국을 압박하는 벼랑 끝 전술이라도 폈다. 국가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한국 청년들의 목숨을 베트남 전쟁에 바친 박정희도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국 병사의 월급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지속적인 협상을 했다. 이들 독재자들은 비록 국민의 생명은 우습게 여겼지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인지하고서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정치의 틀 속에서 나름대로 몸부림친 흔적은 있다. 그런데 이 윤석열 정부는 협상은커녕 애초부터 줄 것은 알아서 다 주자는 입장인 것 같다.
벌거벗은 권력은 국민주권 이전 시대의 권력이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에는 미국과 일본의 이익이 곧 우리의 이익이라는 근거없는 전제 아래 행동하는 것 외에 국가와 국민의 개념 자체가 없다. 사실 이 정권에게는 힘있는 사람들만 국민들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이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돈이 있기 때문에 보호를 받고, 권력과 돈이 없으면 보호받지 못한다. 죽는 놈만 불쌍하다.
국가 부재, 주권 부재를 넘어서려면
대외적 주권 부재는 대내적 국민주권 상실이다. 즉 대통령의 자의적인 인사권과 사면권 행사, 정치검찰의 압수수색과 구속기소에 국민들의 인권, 알 권리, 언론자유는 압살된다. 고 채수근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는 수사단장을 항명죄로 기소하고, 이 병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단장은 아예 수사선상에서 빼버렸다.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하고 기무사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계엄령 문건 작성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소강원 기무사 참모장을 8.15 특사에 포함시켰다. 채수근 상병의 죽음은 원인 모를 죽음으로 덮여질 가능성이 커졌고, 세월호 유족은 두 번 죽게 생겼다. 그래서 국민의 생명은 자연적 사회적 위험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왜 한국은 갑자기 이런 주권 이전의 상태가 되었을까?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도 있고, 언론도 있고, 시민단체도 있는 지금,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정권이 교체된 지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우리의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취임 후 단 한 번도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일, 국민을 향해 협박성 8.15 기념사를 할 수 있는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당 내부에서도 어떤 이견이나 견제도 없고, 언론의 견제도 없는 이 전체주의 상황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것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 도발로 12만 명의 자국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도 그것을 종식시키는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러시아 상황과 다를 바 없고,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여 자국의 군인 5천 명이 목숨을 잃어도 그 전쟁을 끝내자는 집단적 항의가 없었던 미국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민주주의의 실종, 독재자나 권력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교정하지 못하는 기성 정당이나 정치가들의 기회주의와 언론의 타락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양, 즉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권력자의 결정을 견제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에도 책임이 있다. 근본적으로는 선거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지금과 같은 선거 민주주의와 과거의 국민주권 부재의 전제군주 시절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 모른다. 민주화가 되고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이러한 주권 상실의 초유의 사태는 110여 년 전 일제가 총칼을 들고 조선의 주권을 유린하고 헌병경찰 통치를 시작했을 때 조선 사람들이 그런 폭력적 질서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오늘의 한국인이나 110여 년 전의 한국인들이나 생존의 압박, 즉 먹고 살기 위해 너무 바쁘고 정치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는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쳤는가 나중에 탄식하면서 울부짖는다.
민주당 다선 의원들 대다수는 내년 총선 당선을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것 같고, 몇 초선 의원들만 정권 비판에 바쁘다. 그런데 이 벌거벗은 권력의 행사를 중단시키지 않는 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도 어렵지만, 아예 그 전에 국가가 무너질 수도 있다. 각자 가진 권력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가.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시민 모두가 이 주권 부재 상태에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소리를 질러야 한다.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우는 일을 모두가 시작해야 한다.
벌거벗은 권력 앞의 호모 사케르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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