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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 개입 경위
1950년 6월 24일(토 : 미국 현지시각) 휴가지에서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격노하였다.
그는 “우리는 모든 수를 써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고 하였다.
그는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이 위협받고, 세계 반공 전선에서 미국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지시했다.
UN은 신속히 움직였다.
6월 25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퇴각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인 27일에는 UN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서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대한민국이 유엔 결의로 태어난 국가였기 때문이다.
유엔에 의해 성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곧 유엔을 침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7월 초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을 도우려고 파병 16개 국, 의료지원 5개 국 등 총 21개 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39개 국이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 60개 국이 나섰다.
한편 미국은 이와 별도로 남침 개시 다음 날인 6월 26일부터 동경의 주일 미 해군과 공군을 투입하였다.
6월 29일에는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이 한강 남한 영등포에 와서 전선을 시찰하고
미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는 등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엔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다.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 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작전지휘군 : 1994년 12월 1일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 합동참모의장이 가지게 됨으로써 전시작전통제권만이
연합군사령관에 귀속되어 있으며, 전시작전통제권은 아직도 환수 시기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 참전국
6.25전쟁 당시 참전국은 1951년 초까지 총 16개국이었다.
군대파견을 신청한 국가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을 한 16개 국은 미국, 캐나다, 콜럼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튀르키예 16개국이다.
이들 참전국들은 유엔이 요구하는 최소규모인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하였다.
주요 참전병력은 1953년을 기준으로 영국 약 1만 4,200명, 캐나다 약 6,100여 명,튀르키예 약 5,500여 명,
호주 2,200여 명 등이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총 3만9천여 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할 경우 16개국 총 34만 1천여 명에 이른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국군.(출처=국방부)
또한 유엔 결의문에 따라 회원국 및 국제기구들이 각종 지원을 했는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5개국이 병원 혹은 병원선 등 의료지원을,
그리고 40개 회원국과 1개 비회원국인 이탈리아와 9개 유엔전문기구가 식량제공 및 민간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2012년 5월에 한국전쟁 당시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발칸 반도 전역이 공산화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공산화를 면하고,
내전 후 확고한 반공 국가가 된 그리스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다.
유엔군들이 적의 동태를 마을사람들에게 묻고 있다.(1951.3.13.춘천)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머나먼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만 명이 넘는 군대를 파견한 데에는
국제평화의 이상에 대한 수호정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못지않게 자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리스는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 둘러쌓여 공산화 위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트루먼 독트린의 직접 당사국으로서 미국의 참전 요청을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나토에 가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지를 한국전쟁 참전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1952년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호주역시 UN군의 일원으로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필리핀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상륙하였으며, 필리핀 전대통령 피델 라모스는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태국은 한국 전쟁에 육, 해, 공군을 모두 파견한 8개국 중 하나이다.
네넬란드는 과거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수리남(1975년 독립) 등 속령지역 용사들도 동원하여 참전했다.
콜롬비아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콜롬비아 말고도 전투 병력을 파견한 국가가 있는데 바로 멕시코다.
1943년 발효되어 1952년까지 유지되었던 '멕시코와 미국 간 상대국 거주 자국민 병역에 관한 협정'으로 미국에
거주하던 멕시코 국적자들이 미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
멕시코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참전했지만 미군으로 분류되어 표기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 중 3.5%는 멕시코계 군인이었다.
뉴질랜드는 마오리족 까지 참전했다. 이들이 퍼뜨린 노래가 바로 '연가'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셀라시에 1세 황제가 특별히 자신의 친위대를 내줘서 파병했다.
단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 제대로 된 상비군이 친위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벨기에와 룩셈브르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80명 남짓한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는 룩셈부르크군 자체가 1000명 내외의 소규모 군대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병력이다.
또한 병력 대비 사상자의 비율은 전체 유엔군 중 가장 높았다.
'유엔군 참전의날' 기념식서 입장하는 참전국 국기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프리카의 잊어져버린 6.25 참전국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국내 매체들도 에티오피아만을 아프리카 유일의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기억한다.
남아공이 에티오피아와 달리 6.25 참전국에서 빨리 잊어진 것은 당시에 영연방 국가였기 때문이다.
전쟁 때 파병 인원의 규모도 작았고 공군 병력만 파견한 것도 주요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826명 중 36명이 전사하고 8명이 포로가 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사실 대만도 3만 명대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미국은 대만의 참전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3차 세계대전이 터질 가능성,
중공군이 대만에 빈집털이를 시전하는 것 등을 두려워해 대만을 말려 물자 지원에 그쳤다고 한다.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미국령 푸에러토리코 출신이 엄청나게 많이 참전하고 전사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력 약 180만 명 중 약 18만 명이 히스패닉 계열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중 멕시코계
병력은 약 12만 명,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 병력은 약 6만 명이었다고 한다.
약 800명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나바호족 역시 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한국전 당시 병력을 파견한 16개국,
의료지원을 파견한 노르웨이, 스웨덴, 이탈리아, 덴마크, 서독 5개국 외에 국내 사정으로 물자나 재정지원만을
한 39개국도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는 전 세계에 되돌려 줄 수 없는 빚을 졌다.
부산에 있는UN 기념공원에는 2,300명의 각국 UN군 전사자가 모셔져 있다.
유엔기념공원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1분 동안 유엔참전용사를 기리며 유엔기념공원이 있는 부산을 바라보면서
참전용사를 기리는 묵념을 올린다. 유엔기념공원은 국제연합에서 관리하는 전 세계 유일한 유엔군 묘지다.
-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한반도 통일의 좌절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7월 15일부터였다.
이 날짜로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인천상륙작전안을 상신하였으나,
이를 위한 군사력의 분산과 인천이 지형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오히려 부산 교두보에 증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의 간만의 차가 9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하여 사용 가능하며,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집결하기 때문에 인천 방어가 소홀하고,
더구나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빨리 탈환하는 것은 군인과 민간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드디어는 9월 8일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는다.
인천상륙작전은 5천 분의 1이라는 확률이라고 부를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륙작전이었지만,
결국 맥아더의 고집대로 진행되었고 전선은 대반전을 이루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는 드디어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 다음날에는 인천을 함락시켰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진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한반도의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고,
완전히 회복한 뒤인 9월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수도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선에 가깝게 계속 북상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으며, 이 기간 동안 공산군 포로는 1만 2500명에 달하였다.
서울 수복과 전세의 호전은 한국 정부로서는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유엔군의 참전 목적과의 일치 여부로 논란거리였다.
인천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이승만은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해방과 통일 의지를 명백히 하고,
북한대표의 협력을 얻어 그 통치권을 전체 한반도에 미치도록 할 것을 바랐지만,
유엔은 한국의 권한을 38선 이남에 국한시키고 있는 상태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는 유엔군의 힘에 의존한 북한의 수복은 결코 한국 통일정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것을
어렵게 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은 1차적으로 유엔의 전쟁 목적 아래 방해를 받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세계대전으로 터 전황은 다시 역전되었고
그 희망은 무산되었다.
- 맥아더 장군의 해임
중공군의 개입 문제를 놓고 판단에 오류를 범하였던 맥아더는 계속 중국 동북부인 만주지방을 성역으로 놓아
두는 것에 반대하고 폭격을 주장함으로써 휴전을 모색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하였다.
4월 11일 트루만은 이례적인 심야 기자회견을 통하여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였고,
그 후임에 릿지웨이(Ridgway, M. B.) 제8군사령관을 임명하였다.
웨이크회담 이후 지속되었던 군 통수권자인 트루만 대통령과
현지 사령관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갈등은 군에 대한 민간인 통제라는
강한 미국의 정치질서의 전통 속에서 맥아더 해임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1951년 4월에 들어서면서부터 공산군의 춘계 공세는 7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을 동원한 공격이었고,
이에 대한 역공세가 되풀이되면서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제한전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전반적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다.
<참고 : 국가기록원>
헨리 트루먼(왼쪽)과 맥아더 사령관
맥아더는 전쟁에서 얻은 승리로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고,
트루먼은 전쟁을 끝낼 리더십이 부족하는 미국내 비판이 거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