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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잃어버린 한 가지 (고전3-12)
2026년 7월 16일 (목요일)
찬양 : 부름 받아 나선 이몸
본문 : 고전 11:17-34절
☞ https://youtu.be/Ikgl87-snXo?si=3jyhd9E6zYnaw1LK
쉼의 자리를 통해 후반전을 준비할 시간을 누리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린다. 어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나누며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새삼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날마다 나의 삶을 이끄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이 아침에 감사와 찬양을 고백하게 된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변질된 성찬 모임을 책망하고 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성찬의 모임이 해로운 모임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그 해로움이 분쟁과 파당임을 말하면서 바울은 매우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19절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은 역설적으로 파당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의도로 생겨나지만, 하나님은 그 파당을 통해 누가 진짜 신앙인인지를 '공개 검증'하신다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지식파'들은 스스로를 '강한 자', '성숙한 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찬에서 가난한 이들을 무시했다. 바울은 파당이라는 시험을 통해, 입으로는 지식을 말하지만, 실상은 사랑이 없는 자들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고 있는 겸손한 자들을 증명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20-21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당시 성찬은 식사를 겸했다. 이때 부유한 성도들은 주로 부유한 성도들과 함께 먼저 식사를 시작했고, 가난한 성도들이나 노예 출신 성도들은 그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교만하여 생긴 것도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과 부족한 배려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긴 측면도 있다. 고린도 교회는 공적 건물이 아닌 가정집에서 모였다. 공간의 여유를 가진 부유한 성도는 자신의 거실에 식탁을 마련했는데, 물리적으로 모든 성도를 한꺼번에 수용하기 어려웠다.
결국, 주인과 가까운 부유층은 일찍 와서 자기들끼리 먽저 음식을 즐겼고, 노동과 주어진 업무로 늦게 온 가난한 성도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는 겸손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는 장소'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질책한다.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당시 부유한 성도들은 성찬의 떡을 보며 "예수님의 몸"이라는 신학적 의미만을 생각했을 뿐, "함께 떡을 나누는 교회 공동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내 옆에 있는 가난한 형제, 노예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인식 자체가 사라졌고 함께하기 부담스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교회는 '영적 지식을 공유하는 클럽'이었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맺어진 한 가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을 매우 정곡을 찌르며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대안을 제시한다. 33-34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 잡으리라’
바울은 여기서 성찬을 두 가지로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하나는 성찬은 ‘죄인된 나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과 언약’을 기억하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확인하며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자리라고 말이다.
바울이 가르치는 성찬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의식이 아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수직적 자리이자, 내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형제와 '한 몸'임을 증명하는 수평적 자리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그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들은 늦게 오는 이들을 기다리며, 수준과 대화가 통하지 않음에도 기다리며 함께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성육신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목사로서 그동안 성찬을 주관하고 참여해 왔으나, 고백하건대 나는 성찬을 오직 '나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고 기억하는 개인적 시간'으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성찬이 '나의 권리를 내려놓고 타인을 기다리는 공동체적 순종의 자리'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운다.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수직적 자리인 동시에, 내 자아를 꺾고 지체들과 한 몸이 되는 수평적 훈련의 식탁이다. 죄인인 나를 위한 희생을 기억하는 자라면, 이제는 나 또한 이웃을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성찬적 삶'을 살아야 함을 깊이 깨닫는다.
오늘날 예배 중심의 교회가 되면서 성찬과 함께했던 '애찬'이 사라진 것은, 서로의 속도를 기다리고 함께 먹고 마시며 한 몸 됨을 실천하던 그 소중한 '현장의 성찬'을 잃어버린 이유이며, 어쩌면 합리를 위해 불편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나의 후반전은 성찬이 가진 이 두 가지 차원—'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수직적 자리'와 '지체를 위해 권리를 포기하는 수평적 자리'—을 분명히 기억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다짐해 본다.
주님, 멈춤의 시간 주님을 온전히 배우며 그 배움이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진정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세워지게 하소서.
한줄 묵상 :
<진정한 성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수직적 고백에서 시작되어, 형제의 속도를 기다리며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수평적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적용질문 :
1. 나는 그동안 성찬을 '나의 유익을 위한 위로의 식탁'으로만 제한하지 않았습니까? 내 옆의 지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분별하는 '사랑의 자리'로 확장하고 있습니까?
2.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나의 '합리성'이나 '권리'를 잠시 내려놓고 형제의 속도와 불편함을 기다려주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3. 성찬의 수직적 은혜와 수평적 훈련을 균형 있게 실천하려면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