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철교 폭파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28분,
한강인도교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
북한군이 미아리 저지선을 제치고 서울로 입성한 지 두 시간 만에 한강철교는 엄청난 섬광과 천지를 뒤엎는
폭음과 함께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무뇌인의 참으로성급한 결정이었다.
서울시민 100만 명의 발이 묶였다.
병력과 물자 수송이 막히면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중화기와 차량 등 다량의 군수품을 적에게 내줘야 했다.
1950년 새벽 2시 28분에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폭파로 50여대의 차량이 부서지고500~800명이 희생되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당시 수백만 서울시민을 아무 대책 없이 적 치하에 묶어놓았다.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두어 소위 '민주개혁'을 강제하고 시민들을 전시 동원 체제하에
편입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시민들이 공산화 되었다.
서울의 정체성을 통째로 바꿔 버린 것이다.
동족끼리 상호 적대적 체제 선택이라는 숙명을 안겼고, 부역과 전향이라는 천형을 새겼다.
참으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 미처 파난을 떠나지 못한 공산치하에서 소설가 박완서씨의 전쟁체험은 등단작 '나목,(1970년) 이후,
‘엄마의 말뚝’(1982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년)
연작 시리즈에서 공산치하에서의 서울시민의 처참한 삶이 잘 묘사 되어 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수많은 시민들이 한강다리 앞에서 서울역까지 몰려있었다.
그들은 다음날 한강 교량들이 폭파되어 발이 묶이고, 서울시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한강 이북에는 국군 병력들도 많이 남아있었는데 이로써 국군 전력에도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폭파를 명령한 후에 시흥으로 향하였다.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한강다리가 끊기자 병사들은 제각각 배를 마련해 도강했다.
- 한강 다리 폭파 전날 이승만은 이미 ‘서울을 탈출'했다, 녹음방송으로 서울시민 기만
전쟁이 발발하자 6.27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대부분의 각료들이 급히 서울을 빠져나갔다.
6.27.저녁에 충남도지사관저에서 제작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로 알려진 이승만의 육성이 녹음된 방송이
KBS 제1라디오로 밤 10시에 방송되었다.
“국민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방송 전인 27일 새벽 4시에 이미 서울을 떠난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였다.
25일 밤 9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함께 이승만을 만난 무초 대사는 수도 서울에 최대한 대통령이 머물러야
함을 주장했으나 그는 전선에서 멀어지는 '안전'을 선택했다.
그는 이날 새벽에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돌려 대전에서 내렸다.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전일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100만 서울시민들은 짐을 풀고 도로 주저앉았다.
이들은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까지 석 달 동안 꼼짝없이 적 치하를 견뎌야 했고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서울에 잔류한 서울시민 105만 명 가운데 56만여 명이 부역자 혐의로 조사를 받거나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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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공 신익희 선생(申翼熙, 1894년 ~ 1956년 5월 5일, 향년 64세)
민주당의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해 선거전에 나선 해공은 전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갑자기 숨졌다.
숨지기 이틀전인 1956년 5월3일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정권교체를 강력히 촉구한 뒤
5월5일 새벽 호남유세차 호남행 열차에 올랐으나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63세로 숨을 거둔 것이다.
제3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이승만과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이 대통령후보에 올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관권과 폭력을 동원해 민주당 등 야권의 선거운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을 허용한다는 헌법 개정안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불법통과시켰다가 국민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해공의 급서 소식은 그를 지지하던 국민들에게 큰 허탈감을 줬다.
5월 15일 실제 선거일에는 그에게 185만여 추모표가 던져져 우리 나라 선거역사상 전무후무한 대량 무효표가
나왔다.
해공은 3.1운동 때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며 해외독립운동원과 국내 지도자들과의 연락임무를 맡았고,
그 뒤 상하이로 망명해서는 임시정부의 내무부장,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사망 6년 뒤인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 이승만에 대한 학계연구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우리 근. 현대사의 중요 인물과 시기에 항상 이승만이 등장한다.
상해 임시정부를 말아 먹은자, 권력욕에 눈이 멀어 민족의 분단을 초래한 독재자,
양민학살, 부정부패, 3.15부정선거..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 - 김구. 신익희. 조봉암선생...독립운동의 거목 박용만 선생 등등등
정적제거를 위해서는 간첩죄를 씌우고 정치깡패 동원도 서슴치 않았다.
심지어는 여순반란 사건을 정적제거에 이용했다는 미CIA보고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승만의 천성은 자유민주주의와는 맞지 않다.
이승만은 차라리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유린하고 짓밟았다.
자기 노선과 다른 정적들은 가차 없이 제거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집권 기간동안‘경찰국가’ 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1910년 '소년병학교' 군복을 입은 박용만선생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도 선생이 미국에 세운
독립군 양성 사관학교인 '소년병학교' 졸업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