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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덮어주는 옷, 은사 (고전3-13)
2026년 7월 17일 (금요일)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본문 : 고전 12:1-31절
☞ https://youtu.be/-J5j1vjSrBE?si=fH3oYeUnf6RmtMXt
7월 쉼의 시간 나는 삶의 스케줄을 완전히 바꾸었다. 늘 쫓기듯 살던 나의 삶을 바꾸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고 있다. 묵상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가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을 하나하나 다 찾아가며 깊이 정리하니 참 행복하다.
이렇게 하면서 내 속에서 정말 나누고 싶은 것과 전하고 싶은 것이 올라오는 것이 조금씩 생겨남을 느낀다. 조급함을 버리고 속도를 오직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주님이 지시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고 싶다.
어제 병원에서 1주일치 약만 먹으면 대상 포진도 완전히 치료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통증은 사라졌다. 하나하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감사함을 올려드린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 공동체성을 다루고 있다. 11장에서 성찬을 통해 하나를 이룬 교회가 어떻게 다양한 지체들로 조화를 이루는가를 다루고 있음을 본다.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교회의 은사 경쟁을 언급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과 신비적 경험을 앞세우는 자들이 교회 내에서 스스로를 '영적 엘리트'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방언'처럼 눈에 띄고 신비로운 은사를 가장 고차원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반대로,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이나 봉사의 은사를 가진 이들을 낮게 평가했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런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은사나 사역의 열매를 내 목회의 성적표처럼 여기며, 눈에 띄는 사역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회개하게 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바울은 매우 중요한 정리를 해 준다. 11절
‘이 모든 일을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신 선물이 아니라,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교회 공동체를 치유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같은 한 성령님이 행하신 일이며, 그분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은사의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선포한다.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렇다. 성령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통로이며, 주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사용된 '유익하게(쉼페론, sumpheron)'는 '함께(sum)'와 '가지고 오다(phero)'가 합쳐진 단어다. 이 말은 나 혼자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은사를 가져와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함께 합쳐놓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는 내 개인의 영성 성장을 위한 '개인적인 상장'이 아니란 말이다. 내 은사는 함께 예배드리는 형제를 살리고,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준 도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은사를 썼을 때 교회가 서로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내 은사를 썼을 때 연약한 지체가 더 존중받게 되었는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유익'이란 말이다. 이것이 성령이 은사로 나타나게 하신 목적이란 말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는 유기체적 비유를 통해 이런 은사들이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소중함을 전하고 있다. 21-23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교회를 '몸'이라는 유기체적 비유로 설명하면서 바울은 우리 공동체가 서로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운다. 눈이 손에게, 머리가 발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유일한 지체들이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바울은 세상의 기준에서 '덜 귀하게' 보이고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아름답지 못한 지체일수록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주신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능력 중심 질서'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돌아보면 나는 은사에 대한 오해로 인해 은사를 비교와 경쟁의 수단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나의 성과로 착각하는 참으로 무지한 삶이었음을 자백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나의 전반전은 <더 잘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약한 지체를 무시하는 무서운 교만함이 있었음을 자백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사가 나를 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핍을 채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지혜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내게 어떤 은사를 주었던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선물이요 지혜임을 선포한다.
그 은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요긴한' 지체들의 아픔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은사는 타인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칼이 아니다. 또 더 잘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랑의 옷'이 되어야 한다.
주님, 나의 전반전은 은사를 '더 잘하는 것'의 성과로 착각하여, 형제의 아픔보다 나의 탁월함을 앞세우는 무지한 삶이었습니다. 작은교회에 신문지 한 장이 되겠다고 출발한 저의 삶이 거꾸로 흘러왔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신 나의 은사는 결코 타인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약한 지체들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며,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랑의 옷'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 나의 은사가 교회라는 몸 전체를 살리는 유익한 통로가 되게 하소서. 멈춤의 시간 동안 나를 다듬으신 주님, 나의 후반전은 지식의 칼을 내려놓고 사랑의 옷을 입히는 사역이 되게 하옵소서.
한줄 묵상 :
<은사는 나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지식의 칼이 아니라, 형제의 허물과 결핍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어주는 은혜의 옷입니다.>
적용질문 :
1. 지난 목회 여정에서 내 은사를 '남들과 비교하는 칼'로 사용하며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은 없었습니까?
2. 오늘 내 눈에 보기에 '연약해 보이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누구입니까?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옷'으로 입혀줄 수 있겠습니까?
3.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을 위해, 이번 주 내가 포기해야 할 나의 권리나 은사의 독점은 무엇입니까?상대를 덮어주는 옷, 은사 (고전3-13)
2026년 7월 17일 (금요일)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본문 : 고전 12:1-31절
☞ https://youtu.be/-J5j1vjSrBE?si=fH3oYeUnf6RmtMXt
7월 쉼의 시간 나는 삶의 스케줄을 완전히 바꾸었다. 늘 쫓기듯 살던 나의 삶을 바꾸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고 있다. 묵상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가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을 하나하나 다 찾아가며 깊이 정리하니 참 행복하다.
이렇게 하면서 내 속에서 정말 나누고 싶은 것과 전하고 싶은 것이 올라오는 것이 조금씩 생겨남을 느낀다. 조급함을 버리고 속도를 오직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주님이 지시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고 싶다.
어제 병원에서 1주일치 약만 먹으면 대상 포진도 완전히 치료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통증은 사라졌다. 하나하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감사함을 올려드린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 공동체성을 다루고 있다. 11장에서 성찬을 통해 하나를 이룬 교회가 어떻게 다양한 지체들로 조화를 이루는가를 다루고 있음을 본다.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교회의 은사 경쟁을 언급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과 신비적 경험을 앞세우는 자들이 교회 내에서 스스로를 '영적 엘리트'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방언'처럼 눈에 띄고 신비로운 은사를 가장 고차원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반대로,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이나 봉사의 은사를 가진 이들을 낮게 평가했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런 고린도 교회의 모습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은사나 사역의 열매를 내 목회의 성적표처럼 여기며, 눈에 띄는 사역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회개하게 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바울은 매우 중요한 정리를 해 준다. 11절
‘이 모든 일을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신 선물이 아니라,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교회 공동체를 치유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같은 한 성령님이 행하신 일이며, 그분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은사의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선포한다.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렇다. 성령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통로이며, 주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사용된 '유익하게(쉼페론, sumpheron)'는 '함께(sum)'와 '가지고 오다(phero)'가 합쳐진 단어다. 이 말은 나 혼자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은사를 가져와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함께 합쳐놓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는 내 개인의 영성 성장을 위한 '개인적인 상장'이 아니란 말이다. 내 은사는 함께 예배드리는 형제를 살리고,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준 도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은사를 썼을 때 교회가 서로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내 은사를 썼을 때 연약한 지체가 더 존중받게 되었는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유익'이란 말이다. 이것이 성령이 은사로 나타나게 하신 목적이란 말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는 유기체적 비유를 통해 이런 은사들이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소중함을 전하고 있다. 21-23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교회를 '몸'이라는 유기체적 비유로 설명하면서 바울은 우리 공동체가 서로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운다. 눈이 손에게, 머리가 발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유일한 지체들이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바울은 세상의 기준에서 '덜 귀하게' 보이고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아름답지 못한 지체일수록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주신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능력 중심 질서'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돌아보면 나는 은사에 대한 오해로 인해 은사를 비교와 경쟁의 수단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나의 성과로 착각하는 참으로 무지한 삶이었음을 자백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나의 전반전은 <더 잘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약한 지체를 무시하는 무서운 교만함이 있었음을 자백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사가 나를 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핍을 채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지혜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내게 어떤 은사를 주었던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선물이요 지혜임을 선포한다.
그 은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요긴한' 지체들의 아픔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은사는 타인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칼이 아니다. 또 더 잘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랑의 옷'이 되어야 한다.
주님, 나의 전반전은 은사를 '더 잘하는 것'의 성과로 착각하여, 형제의 아픔보다 나의 탁월함을 앞세우는 무지한 삶이었습니다. 작은교회에 신문지 한 장이 되겠다고 출발한 저의 삶이 거꾸로 흘러왔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신 나의 은사는 결코 타인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약한 지체들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며,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랑의 옷'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 나의 은사가 교회라는 몸 전체를 살리는 유익한 통로가 되게 하소서. 멈춤의 시간 동안 나를 다듬으신 주님, 나의 후반전은 지식의 칼을 내려놓고 사랑의 옷을 입히는 사역이 되게 하옵소서.
한줄 묵상 :
<은사는 나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지식의 칼이 아니라, 형제의 허물과 결핍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어주는 은혜의 옷입니다.>
적용질문 :
1. 지난 목회 여정에서 내 은사를 '남들과 비교하는 칼'로 사용하며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은 없었습니까?
2. 오늘 내 눈에 보기에 '연약해 보이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누구입니까?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옷'으로 입혀줄 수 있겠습니까?
3.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을 위해, 이번 주 내가 포기해야 할 나의 권리나 은사의 독점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