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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북정마을 산비탈을 오른다.
만해 한용운이 살던 집인 ‘심우장尋牛莊’으로 가는 언덕길이 가파르다. 만해는 집을 지을 때 보기 싫은 조선총독부를 등지도록 했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심우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담한 한옥에서 만해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 언덕길을 수없이 오르내렸을 텐데 우리는 한두 번 가는 것도 숨이 찬다. 아픈 다리를 참는 것부터 깨달음을 배우는 과정인가 싶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 오른쪽 주변은 지붕과 지붕들이 맞부딪히는 쪽방 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집 가운데 심우장에서 풍기는 만해의 애국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에 옷깃을 여민다.
북정마을은 사람들이 오가며 가슴이 맞닿을 정도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다. 그 골목길에선 현대의 문명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멋이 있다. 그곳 주민들에겐 집이 비록 오두막집이지만 대궐 같은 집이 부럽지 않은 자부심이 있을지 모른다. 조촐한 집에서 욕심 없이 사는 자연인과 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나뿐일까.
심우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시가 걸려있는 언덕에 다다른다. 그곳을 ‘비둘기 쉼터’ 또는 ‘비둘기 공원‘이라고 부른다. 김 시인의 시에서 도시개발에 쫓긴 비둘기들이 갈 곳 없어 헤매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곳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발아래 펼쳐진 북정마을을 바라보면 올망졸망한 집들이 엎드려 있다. 개발이 되지 않고 낡은 집 그대로 보존이 잘돼 있고 적당한 숲도 있어 오히려 떠나간 비둘기들이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북정마을 골목길은 자드락의 고샅길을 오르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이태리의 소도시나 퀘벡의 좁은 도시 골목을 연상하게도 한다. 벽 사이 공간에 갇혀 설렘과 낭만을 불러오기도 한다. 인근의 한양도성 성문으로 가는 길은 바닥이 울퉁불퉁하여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 삐뚤삐뚤하게 여기저기 그어진 길의 연속이라 초행자는 헷갈리기 쉽다.
경로당 할머니에게 가는 길을 물어보니 자세히 알려준다. 조금 가다가 시골의 육각정 같은 정자 쉼터에서 앉아있는 노인에게 다시 목적지 길을 확인한즉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성의가 있고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다.
현대의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는 따뜻함을 그분들에게서 느낀다. 우리 어릴 적 농촌의 인심이 그렇지 않았던가. 그들 삶도 다른 소시민과 마찬가지로 괴롭고 즐거움을 함께 겪었을 것이다. 너와집같이 지붕을 때우고 벽이 갈라진 집에 살고 있지만, 서로 기쁨을 조각조각 나누고 눈물도 닦아주는 인정이 그들에게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달님도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벗이 되기 위해 제일 먼저 찾아주는 동네가 바로 그곳이 아닐는지.
한가한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주민은 주로 노인층이다. 삶의 여정에 산전수전 겪은 주름이 있는 그들을 ‘작은 거인’이라 부르고 싶다. 굳이 대문을 닫지 않고 미니멀리즘*을 만끽하며 여유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황금만능이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늘의 삶에 만족해 보인다.
근래 개축한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으면서 우뚝 솟은 빌딩 숲이나 화려한 상가가 없는 성북동 시내를 먼발치로 내려다본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친화적인 도시 같다. 발아래 한눈에 보이는 북정마을은 더욱 그렇게 보인다. 북정마을의 유래는 조선시대 군대가 진을 쳐서 북적거렸고, 영조 때 메주 끓는 소리가 북적북적, 사람도 북적북적거려서 그 발음이 변해서 북정마을이 됐다고 한다. 지금은 북적대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돌올突兀하거나 꾸밈이 없는 마을의 정기를 가슴에 안고 하산하는 나의 발걸음에 그들의 애환이 따라온다. 왠지 놓치기 싫은 미련이 있어 그림자라도 그곳에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 되도록 소수의 단순한 요소로 최대 효과를 이루려는 사고방식. 더 적을수록, 더 작을수록 더 풍성하다는 예술론이라고 할 수 있음.
2013년 11월, 월간 ‘문예사조’ 시부문 신인상 수상
2015년 7월, 월간 ‘한국수필’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청숫골문학회 회장 역임,
에세이 강남문학회 회원, 미국 워싱턴문인회 회원, 문예사조문학상 수상,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시집 : ‘그림자 따라가기’, ‘구부러진 그림자’
이메일 : hwlee@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