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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술통 속의 정사(情事)
①
강호무림에는 태자당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게 번져나갔다.
삼삼오오 무림인이 모이는 곳이라면 예외없이 태자당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태자당이 결성된 직후, 무림주유에 오른 그들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화제는 사뭇 섬뜩한 것이었다.
태자당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피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보에는 수많은 마두(魔頭)들의 수급이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부질없이 뒹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림의 신진고수들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모두 일기당천의 무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명문가 출신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벌써 백여 명이 그들의 검날 아래 고혼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마도의 군소방파가 십여 개 이상 괴멸되었다. 이렇게 되자 백도에 몸담고 있는 무림인들은 태자당의 눈부신 활약에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는 이 없었다.
그러나 태자당의 강호주유가 탕마멸사(湯魔滅邪)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태자당의 당주(黨主)이자 용봉칠영 중 한 명인 칠절신군 남궁청운은 강호선배에 대한 예의를 다 한다는 명분으로 각 지역의 명가와 무림명숙들을 방문했다.
물론 각 명문방파와 무림명숙들은 후기지수들의 방문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남궁청운은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비무(比武)를 요청했다.
각 방파의 명숙들은 남궁청운의 비무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 수 지도하겠노라며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남궁청운은 가공할 절기로 여지없이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만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비무가 벌어졌으며 패배한 방파의 수뇌들이나 명숙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리 명가의 후손이라 해도 한낱 후배에게 고배(苦杯)를 든 것은 평생을 두고도 씻지 못할 치욕이 되고 만 것이었다.
남궁청운의 독보행(獨步行)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무림의 양대산맥인 무당파와 소림사까지 방문하여 비무를 벌였다.
그 결과는 더욱 무림계를 진동시키고 말았다.
무당이 자랑하는 오행검진(五行劍陣)은 물론, 소림사의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 그에게 변명의 여지없이 파해되면서 무당과 소림사의 명예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었다.
다만 소림, 무당의 공동전인인 혜왕은 마침 천축으로 수행 중이라 같은 용봉칠영에 속해 있는 남궁청운과의 비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림, 무당 양대문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백 년을 내려오며 무림의 양대지주로 불려온 그들의 명예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이제 태자당이 가는 곳은 강호인들이 구름처럼 몰리게 되었다. 그들 이십여 명의 청년고수들은 난세(亂世)를 평정할 영웅으로 지칭되었으며, 향후 무림의 태양과 같은 존재로 숭앙받게 되었다.
강서성(江西省) 길안(吉安).
두두두두!
자욱한 황진(黃塵)을 날리며 이십여 필의 준마들이 질풍처럼 달리고 있다.
마상에는 선남선녀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은 아랑곳없이 오만한 표정으로 채찍을 이따금 휘두르며 관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선두의 청년이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자 이십여 기의 인마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멈추었다.
"하하! 이제 귀찮은 자들을 어느 정도 떼놓았으니 천천히 가도록 합시다."
낭랑한 웃음을 터뜨린 자는 가슴에 용문양을 새긴 백포를 걸친 준수한 용모의 청년무사였다.
남궁청운.
바로 태자당의 당주이자 풍운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정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이십여 명의 인중용봉(人中龍鳳)들을 둘러 보았다. 그들은 모두 태자당 소속의 영재(英材)들로 그를 따르고 있었다.
남궁청운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좌측으로 접어드는 길은 산로(山路)로 위로 오르면서 험준한 산세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부터는 말을 두고 올라가도록 합시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이때 누군가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남궁당주,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소?"
말을 한 청년은 강직한 인상의 흑삼청년이었다.
그는 역시 용봉칠영 중 한 명으로 철검장의 소가주인 비천검(飛天劍) 철무영(鐵無影)이었다.
그는 무림군왕성의 회합에서 검존 철자성이 태자당에 입당시키기를 꺼려했던 바 있던 인물이었다. 결국 대세에 몰려 태자당에 입당하긴 했으나 다른 청년들과 달리 태자당의 집단행동에 회의적인 인물이었다.
남궁청운은 짙은 검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철형, 왜 또 그러시오? 혈영자(血影子) 능사익(凌査益)은 과거 악명을 날렸던 일대마두였소. 비록 지금은 산중에 은거했다고는 하나 악인이 어디로 가겠소? 차제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거하는 것은 무림평화를 책임져야 할 우리 태자당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소?"
실로 청산유수와도 같은 달변이었다.
철무영은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이때 한 청년무사가 재빨리 동조하고 나섰다.
"당주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한 번 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자가 개과천선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남궁청운의 비위를 맞추듯 나선 청년은 유일하게 태자당에 속하지 않은 자였다.
그는 남궁청운의 종복으로 줄곧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잠혼도객(潛魂屠客)이란 별호를 지니고 있었다.
이름은 종리무(鍾里戊).
밀납처럼 창백한 안색과 가늘게 번뜩이는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남궁세가에 들어와 종복이 되었으나 일반 하인과는 격이 틀렸다. 무예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어릴 적부터 총관 소손방에 의해 추천되어 특별히 무예를 전수받고 남궁청운의 호위무사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남궁청운의 곁에서 일정한 거리를 뗀 적이 없었다. 마치 그림자인 양 줄곧 주변을 맴돌았다.
한편 남궁청운의 곁을 맴도는 인물이 또 한 명 있었다.
그것은 화산옥검(華山玉劍) 연채령(燕彩玲)이었다.
그녀는 화산 장문인이자 모친의 추천으로 태자당에 가입한 이후로 지난 수 개월 동안 한시도 남궁청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올해 나이 십팔 세인 그녀는 유난히 붉은 입술과 큰 눈을 지닌 미소녀였다.
그녀는 코웃음치며 남궁청운의 편을 들었다.
"흥! 맞아요. 능사익은 지난 날 태화천에 패퇴한 후 수하들을 해산한 후 금분세수(金盆洗手:강호인이 은퇴하기 위해 하는 의식)하고 지금까지 은거하고 있다지만 누가 알아요? 몰래 마공(魔功)이라도 은밀히 연공하고 있을지? 이 기회에 처단하는 것이 옳다고 봐요."
연채령은 생글거리며 남궁청운을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정랑(情郞)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전형적으로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남궁청운은 그녀에게 일별도 하지 않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히 철형이 마음 내키지 않는다면 여기서 소연과 함께 말들에게 풀이나 먹이며 기다리고 계시오. 얼마 걸리진 않을 거요."
그러자 샐쭉 토라진 듯한 소녀의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흥! 내가 왜 철공자와 함께 남아야 해요? 수선 언니라면 또 모를까?"
그녀는 다름 아닌 중원쌍미(中原雙美)의 한 명인 천향옥녀(天香玉女) 남궁소연(南宮小蓮)이었다.
그녀는 남궁청운의 누이동생으로 빼어난 미색과 출중한 무예로 용봉칠영의 반열에 당당히 끼어있는 기녀였다. 특히 그녀의 미색은 무림 청년들의 선망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도발적일 정도로 늘씬한 몸매는 가히 만개한 장미의 화사함을 능가하여 뭇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중원쌍미 중의 또 한 여인인 황보세가의 벽월선자(碧月仙子) 황보수선(黃甫水仙)은 안색이 붉어지며 황급히 말했다.
"연매! 무슨 실없는 소리를.... 철소협, 일단 함께 올라가 혈영자가 어떻게 지내는가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그녀는 남궁소연보다 세 살이 많았다.
따라서 그녀의 자태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했다. 뿐만 아니라 매사에 톡톡 튀는 남궁소연에 비해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녀 역시 용봉칠영에 속할 정도로 무예 또한 비범했다.
철무영의 얼굴도 붉어졌다.
"예, 황보소저의 뜻이 그렇다면......."
그는 사뭇 당황한 모양이었다.
남궁청운은 그런 두 사람을 야릇한 눈으로 바라보다 결론을 내렸다.
"그럼 다 함께 올라갑시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어깨도 흔들지 않은 채 허리만을 꺾어 신형을 날렸다.
휙!
한순간 그는 일학충천(一鶴沖天)의 신법으로 훌훌 날아올랐다. 놀랍게도 한 번 솟구침에 십여 장을 날아 산중턱을 향해 섬광처럼 사라졌다. 가히 절륜한 경공술이었다.
②
낙산(落山) 홍엽곡(紅葉谷).
인적이 드문 계곡 안에 허름한 모옥(茅屋) 한 채가 쓸쓸히 자리잡고 있다.
슥슥!
비질을 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모옥 앞마당에 쌓인 눈을 열심히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이는 십칠팔쯤 되어 보였다.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이긴 했으나 깜찍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하여 마당을 깨끗이 쓸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
문득 소녀는 비질을 멈추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기로 지난 십여 년 동안 홍엽곡을 방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야 말로 적막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이십여 명이나 되는 남녀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태자당의 청년고수들이었다.
"누구... 세요?"
소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도리어 물었다.
"이곳에 혈영자 능사익이 살고 있지 않소? 낭자는 능사익과 어떤 관계요? 그리고 낭자의 이름은 어찌 되시오?"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옥선공자(玉扇公子) 호사붕(胡司朋) 이었다. 중원제일의 거상 만금대인 호금수의 장자로 늘상 사치스런 생활에 젖어있는 위인이었다.
특히 그는 여인에 관심이 많은 위인으로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추파를 던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소녀는... 능파(凌波)라고 해요."
"호! 그럼 능사익의 딸인가?"
이번에 나선 자는 중원 북동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기문(鐵騎門)의 소문주 철갑신장(鐵甲神將) 장건웅(張健雄)이었다.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의복 대신 청동갑주과 투구를 쓰고 손에는 여덟 자 길이의 장창(長槍)을 든 위인이었다. 그는 성격이 화급하고 직선적이었다.
소녀 능파는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그분은... 소녀의 조부님이에요. 그런데 어찌하여......?"
이때 음침한 인상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종리무였다.
"네년이 마두의 핏줄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슈욱!
바람을 가르는 경풍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춤에서 검이 뻗어나갔다. 발검에서 운검까지 군더더기라곤 전혀 없는 매끄러운 공격이었다. 그의 검은 끝부분에 두 개의 뾰족한 갈고리가 달려있는 오구검(吳鉤劍)이었다.
능파는 크게 놀랐으나 즉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허리를 젖히며 두 발을 교차시켜 물흐르듯 유연하게 공격권을 벗어났다.
"혈영보(血影步)!"
종리무는 놀라 중얼거렸다. 능파의 보법이야말로 지난 날 강호를 누볐던 혈영자의 독문절기였던 것이다.
능파는 뒤로 물러선 뒤 허리에 손을 얹고 쌀쌀하게 말했다.
"왜 살수를 쓰는 거죠? 난 당신들과 일면식도 없고 할아버지 또한 십 년 넘게 홍엽곡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대체 우리 조손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건가요?"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화룡팔장(火龍八掌)을 받아봐라!"
종리무를 젓히고 신형을 날린 자는 강호의 신흥세력 중 하나인 구룡방(九龍幇)의 열화권(烈火拳) 마휘(馬輝)였다.
그동안 그는 태자당의 절세기재들에게 눌려 자신의 절학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 못하던 차에 이번 기회에 위세를 떨쳐보려 작정한 것이었다.
위이잉!
장과 권이 위맹한 경기를 뿜으며 사위를 뒤덮었다.
능파는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빗자루를 팽개친 후 작은 손바닥을 교차시키며 맞섰다. 그녀의 손바닥은 붉은 꽃잎처럼 분분히 허공을 누볐다.
퍼펑!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각각 뒤로 밀려나갔다.
"억!"
비명을 지른 것은 마휘였다. 그는 비틀거리다 중심을 잃으며 눈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의 입과 코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한편 능파는 모옥의 벽까지 밀려난 채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 한 번의 격돌로 우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놀랍게도 차기 구룡방주로 내정된 마휘가 일개 무명소녀에게 밀린 것이다.
남궁소연이 놀라운 듯 종알거렸다.
"오라버니, 방금 저 소녀의 손바닥에서 발출된 붉은 빛은 적혈강(赤血 )이 아닌가요?"
남궁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낭자, 어린 나이에 이미 조부의 무예를 십성 성취한 듯하구려. 더구나 여인의 몸으로는 연성하기 어렵다는 적혈강마저 익혔으니 본 공자에게도 한수 가르침을 부탁하오."
남궁청운은 명가의 후예답게 정중히 공수의 예를 표했다.
능파의 안색이 변했다.
'이... 이 사람은 정말 무서운 고수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영준한 청년이야말로 방금 전 상대한 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수였다.
"낭자께서 선공하시오."
남궁청운은 여유있는 자세로 그녀의 앞에 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능파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기회를 놓치면 끝이야. 그렇다면.......'
스스스!
능파의 몸이 움직였다. 교족이 엇갈리는 순간 태자당의 청춘남녀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신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과연 일대를 풍미한 신법은 다르군."
뒷짐을 진 채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던 남궁청운의 입에서 감탄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희뿌연 그림자가 남궁청운을 향해 다가들며 붉은 광채를 쏘아냈다. 그 빛은 남궁청운의 현기혈(玄機穴)과 신정혈(神庭穴)로 동시에 뻗어나갔다.
능파는 확신했다.
'흥! 여유가 지나쳐 오만이 된 것이 너의 패인이다.'
그러나 능파의 판단은 너무 빨랐다. 남궁청운을 향해 뻗었던 적혈강기가 갑자기 맥없이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남궁청운의 손이 뻗어왔다. 그 손은 매우 느리게 뻗어왔다. 능파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있을 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퍽!
능파는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실 끊긴 연처럼 붕 떠 날아갔다. 그녀는 삼 장 밖의 바닥에 무참하게 떨어졌다. 그녀의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남궁청운은 포권하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낭자의 무예가 워낙 고강하여 본인도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소. 만일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면 잠시 여유를 줄 테니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시오."
말은 그럴 듯했다. 정중한 태도와 부드러운 음성 모두가 명가의 후손으로 손색이 없는 행동이었다.
"남궁당주! 이제 그만하세요."
벽월선자 황보수선이 다소 노기 어린 음성으로 제지하며 나섰다.
"아무 죄도 없는 여인이에요. 죄가 있다면 오직 옛 마두의 혈육이라는 것 뿐인데 너무 심하지 않은가요?"
황보수선은 수려한 아미를 찌푸리며 능파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였다.
슈슈슉!
그녀보다 한 발 앞서 종리무가 신형을 날렸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능파를 향해 잔혹한 살검을 전개했다.
'아!'
능파는 눈을 감아버렸다. 너무도 짧은 인생.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멈추시오!"
갑자기 굵직한 호통과 함께 한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쩡!
귀청을 찢는 금속음과 함께 종리무의 검은 방향이 비틀어졌다. 오구검은 능파의 왼쪽 뺨을 스치면서 지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뺨에 길게 검흔(劍痕)이 새겨지며 선혈이 튀었다.
"누구냐!"
종리무는 살기어린 눈으로 홱 돌아섰다. 그의 앞에 철무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미 중상을 입고 저항할 힘이 없는 소녀에게 무슨 악독한 짓이오?"
"뭐라고? 당신이 뭔데......."
종리무가 불끈하는데 남궁청운이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철형, 진정하시오. 종리무는 사마외도의 무리들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소. 그래서 다소 흥분한 것 뿐이오. 이해하시구려."
그는 종리무를 향해 돌아서며 명을 내렸다.
"종리무. 너는 집안을 뒤져봐라."
"예, 소주."
종리무는 깍듯이 남궁청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철무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홱 몸을 돌려 모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콜록! 콜록! 무슨 일이냐, 파아(波兒)야?"
문득 기침소리와 함께 한 노인이 모옥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산길로부터 땔감을 지게에 가득 실은 채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이... 이런! 파아야!"
노인은 놀라 부르짖으며 지게를 던지고 달려왔다. 그는 마당 안에 있는 불청객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능파를 부축했다.
"운공해라, 얘야."
그는 능파를 똑바로 앉게 한 후 등뒤에 손바닥을 갖다 붙였다. 연후 그는 내공으로 그녀의 상세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연채령이 노인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혹 혈영자인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한때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었소."
노인의 대답에 태자당의 인물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 혈영자는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마두 중의 마두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은 평범한 산촌의 나뭇꾼 노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에게서는 예전의 흉폭한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볼 수가 없었다.
철무영이 앞으로 나서며 깊숙이 포권했다.
"능선배님, 후배는 철검장 출신으로 철무영이라 합니다. 우연히 길안을 지나던 중 이곳에 은거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들리게 되었습니다."
뒤따라 황보수선도 나붓이 세류요를 굽히며 말했다.
"소녀는 황보가의 수선이에요. 잠시 사소한 오해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만 능소저에게 해를 끼쳤어요. 뭐라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혈영자 능사익은 손녀를 모옥의 벽에 기대어 앉힌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검존과 신주수사가 자식 농사는 잘 지었군. 그래, 영존들께서도 무고하시오?"
"예, 덕택에 평안하시옵니다."
두 남녀는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 졌다. 그러나 그것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남궁청운이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능선배, 어찌하여 이런 험곡에서 십여 년씩이나 두문불출하고 계시오? 또한 저 낭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절정마공을 연성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이오?"
능사익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럽기만 했다.
"자네는 누구신가?"
연채령이 끼어들었다.
"이분은 무림군왕성의 소성주시며, 태자당의 당주이신 칠절신군 남궁청운 대협이세요."
턱을 한껏 치켜든 연채령은 자랑스러운 듯 설명했다.
능사익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용비신군의 보물이로군. 약관의 나이에 이런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으니 용비신군께 경하드릴 일이로군."
이때 모옥 안에서 걸어나온 종리무가 대뜸 앞으로 나오면서 호통을 발했다.
"늙은이! 쓸데없는 너스레는 그만 떨고 당주님의 질문에 답변이나 해라! 대체 이곳에서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거냐?"
능사익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자네는 또 누구신가?"
종리무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왔다.
"흥! 아마도 관(棺)을 봐야만 눈물을 흘릴 모양이구나."
번뜩!
종리무의 검이 뻗어나갔다. 언제 발검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다.
탁!
종리무의 검은 허공에 정지되었다. 능사익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나뭇가지로 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로 미루어 그의 내공이 얼마나 정순한지를 알 수 있었다.
"허허, 살기가 넘치는 검법이로군. 만일 자네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노부는 감당해 내지 못할 것 같군."
능사익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안색이 창백한 젊은이는 그저 팔푼 정도의 내력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그는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제법이다, 늙은이! 다시 한 번 받아봐라."
종리무가 재차 검을 뻗으려는 순간,
"물러서라."
남궁청운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생이 능선배에게 한 수 배움을 청하고자 하오."
철무영과 황보수선은 아미를 찌푸렸다. 두 사람은 능사익이 비록 과거에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마두였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미루어 개과천선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청운의 하는 양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남궁청운이 장삼을 벗었다. 연채령이 즉시 두 손을 내밀어 장삼을 받았다. 그것은 영락없이 지아비를 대하는 여인의 태도였다.
"고맙소, 연낭자."
남궁청운은 사의를 표한 후 능사익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에서 정광이 번쩍 일어났다.
능사익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음을 굳힌 듯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겠구나. 태화천이 사라진 후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손녀를 쳐다보았다. 능파는 고통을 참는 듯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능사익은 청년들을 둘러보았다. 태자당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재들이었다. 그는 철무영과 황보수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남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능사익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달싹였다. 전음입밀을 시전한 것이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당부요. 내 손녀 아이를 부탁하오. 태어나서 한 번도 타인을 해친 적도, 그럴 기회도 없이 외롭게 살아온 아이요. 초면에 과한 부탁이긴 하지만 들어주기 바라오.)
능사익은 불행을 예감한 것 같았다.
철무영과 황보수선은 안색이 변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심전심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받으시오, 선배!"
남궁청운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우우웅!
그는 이미 공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듯 쌍장을 떨치자 강기로 뭉쳐진 듯한 두 개의 강환( 環)이 무서운 기세로 쏘아나갔다.
"음!"
능사익은 신음을 발하며 즉각 전력을 다해 적혈강을 전개했다. 사실 그는 은퇴한 이후로 이렇다하게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체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정면승부보다는 풍부한 실전경험을 활용하여 대응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콰쾅!
두 사람의 장력은 정면으로 격돌했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으악!"
능사익의 복부에 강환이 적중되며 구멍이 뻥 뚫렸다. 그는 뒤로 날아가 모옥의 벽을 부수며 떨어졌다. 남궁청운은 그저 뒤로 두 걸음 밀려나갔을 뿐이었다.
"악! 할아버지!"
능파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가 능사익을 안았을 때, 능사익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복부에 뚫린 구멍으로는 시커멓게 탄 내장토막이 흘러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능파의 절규가 홍엽곡에 메아리를 일으켰다.
철무영은 치를 떨었다. 그는 남궁청운을 노려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정말 잔인하구려, 남궁당주."
황보수선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능사익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추궁했다.
"당주, 이 노선배는 오래 전부터 무림과 인연을 끊고 손녀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소. 그런데 어찌 이토록 잔혹한 살수를 쓴단 말이오?"
남궁청운의 검미가 치켜올라갔다.
"철형, 나역시 괴로운 건 마찬가지요. 하지만 능사익의 손녀가 펼치는 무공을 못 보았소? 장차 그녀가 강호에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매사에는 안전이 제일이오. 모두가 무림의 평화를 위한 조치니 더 이상 날 추궁하지 마시오."
철무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때 마휘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남궁당주의 말이 백 번 옳소! 아예 이 참에 저 작은 마녀의 숨통까지 끊어놓는 것이 후환을 제거하는 일이오."
마휘는 능파에게 당한 것이 못내 분한 듯 흥분하고 있었다. 이때 종리무가 능파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소주님, 뒷처리는 소인이 하겠습니다."
"안돼요!"
느닷없이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황보수선이 교구를 날려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치켜올리며 꾸짖듯 말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당신들은 억지논리와 명분을 앞세워 마치 사냥을 즐기듯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요. 더 이상은 안돼요! 당신들의 영웅놀음은 이것으로 끝나야 해요!"
종리무의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비켜주시오."
"흥! 날 쓰러뜨리기 전에는 아무도 이 소녀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능파의 앞을 막아선 황보수선의 결연한 모습에서는 평소의 온화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종리무의 가느다란 눈에서 반짝 살기가 일어났다. 그는 수중의 검으로 그녀의 가슴을 겨누었다. 두 개의 뾰족한 갈고리는 약간만 뻗으면 피를 볼 것 같았다.
"마지막 경고요. 비키시오, 낭자."
이때였다.
"무엄하다, 종리무! 감히 누구에게 검을 겨누느냐? 어서 황보소저께 사죄하고 물러나 있거라!"
남궁청운이었다. 그는 안색을 무겁게 굳히며 꾸짖었다. 종리무는 즉시 검을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소인이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깍듯이 사죄하며 물러서는 종리무의 행동에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주인과 종복의 사이라지만 그들은 누누히 종리무의 무공이 태자당 소속의 청년고수들에 못지않다는 것을 보아왔었다.
그런데 남궁청운의 한마디에 이토록 절대복종하고 있으니 은연중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남궁청운은 황보수선에게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황보소저, 수하의 불찰을 용서해 주시오. 소저의 뜻대로 저 여인은 그대로 둘 테니 이만 마음을 푸시고 내려가도록 합시다."
그러나 황보수선의 반응은 냉랭했다.
"먼저 가세요. 소녀는 능선배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드려야 겠어요. 또 저 소녀의 상처도 돌봐야겠어요."
철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은 말이오. 그럼 무덤은 내가 만들테니 소저는 그 소녀를 치료해 주시오."
"......!"
남궁청운의 영준한 얼굴에 찰나적으로 얼음장 같은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돌아서는 황보수선의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다 남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좋소. 그럼 먼저 갈 테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시오."
남궁청운은 일행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가 신형을 날리자 태자당의 청년들은 일제히 뒤따라 자리를 떴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능파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모옥을 흔들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군자라고 자처하는 모든 인간들을... 흐흑... 모두 처참하게.... 죽여버릴 거야!"
소녀의 한맺힌 외침은 홍엽곡을 물들이는 석양빛에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③
출렁출렁.......
술통은 파도에 흔들리며 어디론가 쉬임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술통 속에 갇힌 두 남녀는 한정된 공간 속에 엉켜 있었다. 장성한 청년과 성숙한 여인이 함께 들어있기에 그곳은 너무도 비좁았다. 만일 사사도를 탈출하기 위한 묘안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술통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사영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조탁의 커다란 장삼은 이리저리 술통이 움직이는 바람에 벌써 벗겨져 바닥에 깔려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전신이 온통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비좁은 술통에는 죽지 않을 정도 만큼의 공기가 통할 뿐, 사방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살인적인 더위였다. 온몸이 땀으로 미끈거렸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사사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와류의 무서움을 경험했으므로 조만간 닥쳐올 재난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백육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비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건장한 사내의 옷을 벗기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한참을 땀을 흘린 끝에야 겨우 그의 옷을 벗길 수가 있었다. 백육호도 겉옷만 입고 있었으므로 알몸이 되고 말았다.
성숙한 남녀가 좁은 통 속에 들어있으니 몸이 밀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땀으로 미끈거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엉기고 있었다.
사사영은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벗겨낸 두 사람의 의복을 길게 찢어냈다. 먼저 한 조각으로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가린 후 백육호의 하체에도 적당히 천으로 가려주었다.
연후 천조각을 길게 연결시켰다. 그것으로 서로의 몸을 단단히 묶었다. 앞으로 닥칠 와류의 소용돌이를 견뎌내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술통 속에서 서로 몸을 묶고 고정시키지 않으면 와류 속에서 퉁겨져 나가거나 다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사사영은 숨이 턱에 찼다.
그녀는 순결한 처녀였다. 처녀의 몸으로 아무리 의식을 잃고 있다지만 건장한 사내와 몸을 맞대고 있으니 죽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술통의 구조상 두 사람의 자세는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백육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은 영락없이 남녀지간의 이상한 체위(體位)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이런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로 백육호의 허리를 바짝 조이고 있었다. 만일 자세가 바뀌면 중심이 이동하여 술통이 옆으로 쓰러지기 때문이었다.
동사군도의 절벽에서 최초로 떨어졌을 때, 술통은 옆으로 넘어진 채 오랜 시간을 떠 있었다.
그때 그녀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백육호의 몸을 깔고 엎드린 채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굴과 얼굴이, 가슴과 가슴이, 복부와 복부가 맞닿은 채 술통을 바로 세울 때까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술통을 바로 세운 후에는 줄곧 이런 자세를 유지해 온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순결한 소녀의 입장에서 이런 자세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파도에 술통이 떠올랐다 가라앉을 때마다 백육호의 하체 중심부와 자신의 은밀한 부위가 밀착될 뿐아니라 마찰하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다가 머리를 부딪치곤 했었다.
이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자 마침내 그녀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
은은히 파도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점차 거칠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사사영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그 무서운 와류에 접근해 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은 점차 뛰기 시작했다. 이미 와류의 무서움을 충분히 겪었기에 더욱 겁이 났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백육호를 껴안았다. 비록 의식이 없다고 하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이상한 용기를 주고 있었다.
술통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결국... 와류에 들어왔구나!'
사사영은 더욱 강하게 백육호의 몸을 끌어안았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몸이 밀착되었다. 의복을 찢어낸 끈으로 서로의 몸을 단단히 묶어놓긴 했으나 안심이 되지가 않았다.
쿠콰콰콰.......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술통도 심하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아니, 악마의 호곡성과도 같았다. 사사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백육호를 껴안았다.
술통이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무엇엔가 부딪치며 술통은 아래 위로, 좌우로, 때로는 빠른 속도로 솟아 올랐다가 무섭게 하강하기도 했다.
'아아! 신이시여!'
사사영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규했다.
굉음은 고막을 터뜨릴 듯 점점 더 커졌다.
쾅! 하는 음향과 함께 술통에 무서운 충격이 가해졌다. 그 바람에 백육호의 몸이 앞으로 꺾이며 사사영에게 덮쳐왔다. 사사영은 얼른 그를 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술통은 중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산발적으로 요동치던 통이 빙그르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집혀지고 말았다.
"악!"
사사영은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강하게 부딪친 것이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통은 뒤집힌 채로 무섭게 진동하는 것이었다.
사사영은 죽어라 백육호의 목을 양손으로 껴안은 채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힘주어 감았다. 그녀는 백육호의 몸을 타고 앉은 채 혼신의 힘으로 고통의 순간을 견뎌나갔다.
통이 산발적으로 요동하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수없이 멍이 들고 말았다.
너무나 고통스런 나머지 그녀는 포기하고 싶기만 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설사 머리가 깨어지고 눈알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살아야만! 살아야만 해!
쿠르르릉!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사사영과 백육호는 한 덩어리가 된 채 수없이 곤두박질치면서 견뎌내야만 했다.
사사영은 어느 순간부터 백육호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는 이미 일각쯤 전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분명 조탁의 목을 꿰뚫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왜 이리 덥고 답답하단 말인가? 게다가 칠흑같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차 전신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꼭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그 물체는 미끈거릴 뿐아니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입술을 핥아 보았다. 짭짜름한 맛이 느껴졌다. 그것은 땀이었다. 한 번 돌아온 감각은 점점 더 되살아나서 이제 코로는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체취가 코로 기분좋게 들어왔다. 또한 귀로는 쉴새없이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악!"
문득 가냘픈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린 듯했으나 곧바로 코앞에서 들려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
부드럽고 물컹한 여인의 피부가 만져졌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비록 캄캄하긴 하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사영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꽉 껴안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코앞에는 소녀의 유방이 있었다. 앵두알처럼 작은 유실도 분명히 보였다.
그는 방금 전의 비명이 사사영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이제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온몸이 붕 떴다가 가라앉았고, 다시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바람에 정신이 아찔아찔했다.
'술통!'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비로소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는 육노인이 만든 술통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비좁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사사영과 그가 술통 속에 든 채 사사도를 맴돌고 있는 죽음의 와류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사영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발가벗은 채 그를 껴안고 있는 것일까!
사사영은 결코 음란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청순한 소녀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앞으로 엎어졌다. 그 바람에 얼굴을 사사영의 유방 사이에 박고 말았다.
"아앗!"
사사영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를 떠밀기는커녕 더욱 손에 힘을 주어 머리를 껴안는 것이 아닌가? 백육호는 숨이 콱 막혔다. 그는 사사영의 부드러운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문득 육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낄낄대며 웃음짓는 익살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육노야! 어쩌면 그 노인이 장난을 쳤는지도 모른다!'
엉뚱한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청순하기 그지없는 사사영이 어째서 이런 도발적인 자세로 그를 껴안고 있는지 설명이 되지가 않았다.
'맞아! 그 노인이 우리를 이 좁은 통 속에 넣으면서 몽혼약 따위로 장난을 친 게 틀림없다. 아마도 그 약성분은 춘약과 같은 것일지도.......'
육노인은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맺어주기 위해 그런 일을 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백육호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미끈거리는 여체가 찰싹 휘감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그의 단전으로부터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뿔사! 그 영감이 내게도 약을 먹였구나.'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한 번 피어오른 열기는 좀처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전 아래 불덩이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급해졌다.
"소저......."
그는 사사영을 불렀다. 사사영은 그의 말을 못들은 듯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작은 음성으로 불렀던 것이다.
더구나 쉴새없이 굉음이 울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작은 음성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백육호는 더욱 참기가 힘들어졌다. 술통이 요동할 때마다 무릎 위에 걸터앉은 사사영의 매끄러운 둔부가 허벅지를 마찰하면서 야릇한 충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술통이 뒤로 기우는 순간 그는 손으로 사사영의 탄력있는 둔부를 움켜잡았다. 또 한손으로는 그녀의 젖가슴을 잡았다. 손바닥 가득히 전해지는 뜨거운 감촉은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되어 그의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백육호는 이미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의 남성은 무섭게 발기되어 사사영의 둔부를 찔러대고 있었다. 사사영은 여전히 그를 꼭 껴안은 채 더운 입김을 그의 귓전에 토해내고 있었다.
'사사영도 날 원하고 있어!'
백육호는 지레짐작했다. 이제 더 이상 꺼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눈앞에 흔들리고 있는 소녀의 젖가슴을 덥석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사영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주 껴안고 있는 자세가 조금만 손을 움직여도 서로의 신체를 구석구석 애무할 수가 있었다.
한편, 사사영은 점차 의식이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거의 실신지경이었다. 만일 살아야겠다는 의지만 없었다면 벌써 혼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백육호의 목숨도 그녀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온 것이었다.
진저리쳐지는 굉음과 와류의 요동! 숨이 막힐 정도의 살인적인 더위! 폐쇄된 공간이 주는 막막한 공포....... 아직까지 혼절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녀는 백육호가 벌써 깨어났으며 그녀의 젖가슴을 빨고 온몸을 어루만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육호는 체력을 거의 회복하고 있었다.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육노인이 먹인 탕약으로 인해 이미 기해혈의 금제가 풀렸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력 또한 상상할 수 없이 증진되어 있었다.
지금 그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그의 숨결이 풀무질하듯 거칠어져 있었다. 그는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사사영의 입술을 찾았다. 코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었으므로 쉽게 입술을 맞출 수가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까칠하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감미로웠다. 다행히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려 있어 그는 깊은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
황홀했다. 비록 술통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의 향긋한 체취와 달콤한 입맞춤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 유일하게 자신이 걸치고 있는 천조각을 뜯어냈다. 잠시 후 사사영이 걸치고 있는 작은 천조각도 벗겨냈다.
이제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술통이 기울어졌다. 그는 사사영의 둔부를 바짝 당겨 안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아랫배가 밀착되었다.
그의 무릎을 타고 앉아 허리에 발을 감고 있는 사사영은 여인의 소중한 문이 활짝 개방된 상태였다. 그야말로 방사를 치르는 자세가 된 것이다.
사사영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실로 해괴망칙한 꿈이었다. 어떤 사내가 그녀의 온몸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그녀의 둔부는 물론 가슴까지 거침없이 더듬을 뿐만 아니라 자꾸만 입맞춤을 해대었다.
'안돼.......'
그녀는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내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녀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마구 주물러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중한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 안돼!'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때였다. 그녀는 자신을 애무하고 있는 것이 백육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그녀는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고... 공자님!"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제껏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던 통증이 밀려들었다. 뜨겁고 단단한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파과(破瓜)의 순간이었다.
"악!"
사사영은 입술을 딱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순간 술통이 무섭게 아래로 하강했다. 너무나 급속도로 하강하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그만 자신도 모르게 백육호의 목을 강하게 껴안고 말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
감사합니다! !!!
즐독입니다
잘~~~감사합니다~~~
잘 읽었읍니다
감사...
즐~감 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이젠 한몸이 된건가요?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산절로 물절로 천지간에 나도절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