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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군은 전사자 14만 7000여 명, 부상 70만 9000여 명,
그리고 실종 13만 1000여 명을 내 전체 손실이 98만 7000여 명에 이르렀다.
북한의「통일조선신문」은 북한군의 인적 손실을 61만 1206명, 민간인의 인적 손실을 268만 명으로 보도하였다.
이것을 합치면, 북한의 인적 손실은 약 329만 명이다. 유엔군도 약 15만 명의 인명 손실을 내었다.
이 자료들을 종합할 때, 남북한을 합친 한국민의 인명 손실은 무려 520만 명선이다.
실로 엄청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는데, 특히 비전투요원의 인적 손실이 전사상 유례없을 만큼 컸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비참성이 있다.
한국전 당시 유엔군 초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1951년의 의회 청문회에서 그는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본관과 같은 군인에게조차 이러한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하고 말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인적 손실과 함께 지적해야 할 점은 방대한 규모의 이산가족 발생이다. 이산가족의 수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1000만 명 규모인 것으로 말한다.
끝나지 않은 전쟁...남북 이산가족 상봉
인적 손실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물적 손실이다.
한반도 전체를 통하여 학교 · 교회 · 사찰 · 병원 및 민가를 비롯, 공장 · 도로 · 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남북한 모두의 사회 및 경제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된 것이다.
북한을 보면, 1949년 수준에 대비할 때, 광업생산력의 80%와 공업생산력의 60% 및 농업생산력의 78%가
감소했다.
금속제품 · 전기제품 · 건설재 · 어업 부문에서는 생산이 60∼90%로 떨어졌다.
선철 · 구리 · 알루미늄 · 알칼리 화학비료 부문에서는 생산의 감소가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하였다.
90만 6500에이커의 농지가 손상되었으며, 60만 채의 민가와 5,000개의 학교 및 1,000개의 병원이 파괴되었다.
남쪽은, 휴전 직후 집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재민의 수가 200만여 명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직면한 인구가
전체인구의 20∼25%나 되었다.
1949년 1년의 국민총생산에 맞먹는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농업생산은 27%가 감소했고,
국민총생산은 14%가 감소되었다.
약 900개의 공장이 파괴되었고, 제재소와 제지공장 및 금속공장을 비롯한 작은 생산소들은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다.
약 6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특히 교통 및 체신 시설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러한 인적 및 물적 손해도 손해려니와,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손해는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다.
서로 상대방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평화적인 통일의 분위기를 가로막고 있다.
남과 북 모두에서 흑백논리의 사고방식이 크게 자라나 의식세계가 경직되었으며,
상대방과의 타협과 대화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남과 북 모두에서 중도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세력이 성장할 수 없었고,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이념과 세력만이 집권하게 되었다.
- 국내 정치적 영향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적인 정신적 분위기를 높였다.
공산주의는 ‘살인주의’ 또는 ‘비인간주의’와 같은 것으로 매도되었고, 반공태세를 강화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여기서 반공은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의명분인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해 나가기도 하였다.
반공주의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권위주의가 합리화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정치인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반공적 국가질서를 강화했다. 우파가 중심이 되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준비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반공적 정치질서를 고착화했다. 물론, 좌파 성향의 흐름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흐름은 잠재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조봉암이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만 표 규모로 득표한 사실은 혁신세력에 대한 지지를 말해 준다.
그러나 이승만의 신익희. 조봉암의 정적제거는 반공적 질서가 굳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 경제적 영향
한국전쟁은 한국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산업생산시설이 파괴되었고,
일반 주거용 주택은 약 60만 호가 파괴되었으며, 철도는 전체시설의 약 47%가 피해를 입었다.
철도를 비롯한 도로와 교량 등의 사회간접자본의 훼손도 컸다. 제조업의 경우에는,
경인공업지대와 삼척공업지대가 결정적인 손해를 입었고, 방직공업을 비롯하여 조선 · 기계 공업과 인쇄 ·
출판업은 물론 피혁과 제지의 화학공업 부문도 큰 손해를 입었다.
1951년 말 정부 조사로, 공업 부문의 전쟁피해는 건물이 44%, 공장시설이 42%의 원상 피해율을 나타내었다.
광업의 피해도 컸다. 1951년 8월 말 현재 남한의 전체 전쟁피해액의 23. 3%를 광업 부문이 차지하였다.
전력 부문을 보면, 총 발전시설의 약 80%가 손상되었다.
이들 광공업 및 전력 이외의 다른 산업 부문, 예컨대 농업이나 기타 3차산업의 피해도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경제원조와 그리고 미국 주도 아래 이루어진 유엔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경제를 복구해 나갔다.
그리하여 미국의 원조는 195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생산 활동뿐만 아니라 국민경제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53∼1961년 사이에 미국이 총 22억8000만 달러의 막대한 원조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규모는 전적으로 미국측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1954∼1961년 사이에 총투자율이 연평균 12.0%였으나 그 가운데 국내 저축률은 연평균 3.7%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투자는 미국 원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조의 내용은 곧 한국산업구조의 변화를 결정하였다.
미국의 원조는 우선 원자재로서의 소비재와 양곡이 주종을 이루었다.
철도차량 도입을 중심으로 한 교통 부문과 기타 교육 및 후생 부문에 대한 도입에 치중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는 자주 성장의 가능성을 사실상 잃어버린 것이다.
수혜국의 경제적 요구나 필요와는 관계 없이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소비재 경공업을 뼈대로 하는 공업화가 추진됨에 따라 공업의 대외 의존적 성장과 농업의 정체현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전쟁중에도 형성된 임시시장
- 군사적 영향
한국전쟁은 대한민국 군부를 급격히 성장시켰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국전쟁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그 성장은 다른 사회 부문의 성장보다 월등히 커서 사회 여러 세력과 ‘불균형 성장’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국내 정치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 증대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는 군부의 직접 정치 개입은 억제되었다.
군부의 중립적 입장은 1960년 4.19혁명을 성공시키는 요소로까지 평가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부쿠테타의 정권장악은 그 전통을 깨뜨렸다.
군부의 성장과 팽창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1953년 10월 미국과 군사동맹이 성립됨에 따라 대한민국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체계화되었다.
1950년 7월 한국전쟁중에 체결된 대전협정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사실상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양함으로써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 사회적 영향
한국전쟁은 하나의 ‘민족대이동’을 낳았다.
전쟁 동안에만 약 29만 명이 월북하였거나 납북되었으며, 약 45∼65만 명이 월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구 대이동은 북한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남한사회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이 시기에 도시인구의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남하열차 화물칸의 지붕위까지 피난민으로 가득하다
휴전의 성립과 더불어 정치상황이 비교적 안정되자 출산율이 높아져 1955년 이후 연평균 2.9%의 기록적인 인구성장률을 나타냈다.
이러한 높은 성장률과 더불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과,
역시 전쟁의 피해로 그 기능을 잃은 지방의 중소도시를 떠나는 도시 하층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막노동과 품팔이 및 서비스업 따위의 고용기회를 찾아 큰 행정도시와 미군부대 주둔지 및 관광지대로 몰려 들었다.
이처럼 도시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1950년대 중반과 후반의 실업률은 심각할 정도로 높았다.
1960년 실업률은 34.2%에 이르렀다.
이것을 다시 농가와 비농가로 나누면, 농가의 총실업률은 29.1%이며, 비농가의 경우는 42.0%이다.
한국전쟁은 또한 많은 수의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을 낳았다.
‘상이용사’들의 생활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미군의 주둔에 따른 국제결혼이 발생하였고, ‘양공주’와 혼혈아의 문제가 뒤따랐다.
이와 더불어, ‘양키문화’로 불리는 낮은 수준의 미국문화가 유입되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미국문화의 유입이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학문과 예술에서 긍정적인 접촉이 지속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의 미국 유학과 연수를 자극하였으며,
그것 자체가 새로운 문제를 낳은 측면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전후 한국의 학문과 기술 및 예술의 발전에 적지 않게 이바지하였다.
- 문학적 영향
한국전쟁은 한국의 문학세계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대표적 소설로 꼽히는 작품들이 대부분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으며, 전쟁문학’또는 '분단문학' 이란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전쟁을 겪고 난 나라에서는 반전문학이 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 여건은 반전문학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 인간을 누르는 경직된 체제와 이념에 대한 냉소,
약소민족의 운명을 자의로 처리하는 강대국가들에 대한 반발, 그리고 전쟁의 피해자들을 향한 깊은 동정 등이
강조되었으며 국제적 수준의 문학성을 보여 주는 것들도 있다.
1. 1957년 하근찬의 '수난 이대'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와 6·25 때 전쟁터에 나갔다가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오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인 한쪽 팔 없는 아버지가 한쪽 다리 없는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전쟁의 상처에 대한 작가의 소리 없는 외침이며 이 분야의 압권으로 기록된다.
2. 선우휘의 ''불꽃', 손창섭의 '잉여인간', 이범선의 '오발탄'은 1950년대 말 이 분야의 대표적 단편 수작들이다.
이범선의 '오발탄'의 경우는 월남한 가족의 아픔에 관한 문제를 심도 있게 제기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때 오발탄은 술집 상호로도 쓰여 간판을 볼 때마다 한번씩 소설 내용을 상기하곤 한다.
'오발탄'은 1961년 유현목 감독의 최무룡. 문정숙 주연으로 영화화 되어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 그리고 김기영 감독의 남궁원. 윤여정 주연
'하녀'와 함께 60년대의 3대 대표작으로 꼽힌다.
3. 1960년대로 들어서면 무엇보다 먼저 황순원의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그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경지, 즉 비탈에 선 인물들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다.
작중 주인공들은 모두 일그러진 삶을 사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한국전쟁으로부터 유래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전쟁 자체에 대한 고발뿐만 아니라,
그것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젊은이들의 삶의 파행성을 통하여 고발하는 작품으로서 이 분야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기록된다.
4. 최인훈의 장편 '광장'은 한국 전후문학의 가장 탁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 6·25의 발발과 인간의 고뇌, 사랑을 통한 구원과 좌절 등의 문제를
폭넓게 다룬 이 작품은 작가의 지속적 개작 과정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작품은 전후 최대의 수작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정치적 허무주의라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5. 이호철의 '판문점', 전광용의 '꺼삐딴 리'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1962년에는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발행한 '전쟁문학집'이 출간되었는데 전쟁을 직접적인 소재로 삼아 쓴
작품들을 수록한 단편소설집이다.
이 작품집에는 김동리의'눈발 속의 부두', 박영준의 '양지를 찾아라',
황순원의 '솔메마을에 생긴 일', 안수길의'갱생기', 선우휘의 '전선 풍속도 3제', 이범선의 '그는 용감하였다',
염상섭의 '동기 同氣' 등 중견작가들의 전쟁문학 작품 21편이 수록되어 있다.
6. 1970년대에는 홍성원의 '남과 북'과 이병주의 '지리산'이,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조정래의
장편대하소설 '태백산맥'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태백산맥'의 경우는 전쟁의 과정과 분단의 의미를 방대한 분량을 통하여 담아냈고,
특히 빨치산의 활동에 대한 조명이 이 작품에서 두드러졌다.
7. 1970년대 후반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은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전쟁 문학 가운데 주목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쟁 중의 인간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 서술을 통하여 전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개성적 시각을 뚜렷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 1980년대에는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이른바 새로운 세대에 의한 전쟁문학이 발표되었다.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이창동의 '소지' 박완서의 전쟁체험을 통한 일련의 연작등이 이예 속한다.
9. 박상연의 장편소설 'DMZ'는 2003년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크게 성공했다.
새로운 세대에 의한 전쟁문학은,
전쟁 그 자체보다는 전쟁 이후의 분단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점들에 대한 문학적 탐구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민음사,1997년 12월 1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감독. 박찬욱
주연. 송강호, 이병헌, 이영애, 김태우, 신하균
개봉. 2003년 1월 14일
- 한국전쟁의 의의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이미 70년 이상 지나면서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점점 사라지고 전후 세대가 크게 자라났다.
전쟁 이후에 출생한 국민은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한다.
이 전쟁 미체험세대는 전쟁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전쟁의 참극을 잊지 못하거나 여전히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세대와 달리 훨씬 더 많은 자신감과 자주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이미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거니와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도
더욱 확산될 것이다. 북한에서도 전쟁 이후세대가 진출하고 있다.
남북한 모두에서 이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남북한 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참고문헌
- 국가기록원
- 분단시대의 사회 (이효재, 한길사, 1985)
- 북한 30년사(유완식·김태서, 현대경제일보사, 1985)
- 한국전쟁사(김양명, 일신사, 1981)
- 실록남로당(김남식, 신현실사, 1975)
-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김점곤, 박영사, 1973)
- 북한공산화과정연구(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 한국동란시의 영·미관계(나종일, Cambridge University, 1971)
- 전후문학의 새물결(李御寧 編, 新丘文化社, 1962),
- 신세대작가론(金相善, 日新社, 1964),
- 문학과 역사와 인간(고은 외, 한길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