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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4일 토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여호 24,14-29
복 음 : 마태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평생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지금 막 태어난 아기 외에는 어떤 사람도 거짓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게 된 시작점은 언제였을까요?
결혼하고 나서? 아니면 어른이 되고 나서?
당연히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을까요?
어른들이 하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은, 진실을 이야기했는데
그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던 순간부터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불신이 아이를 거짓말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이렇게 상대방의 믿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진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의심하고 봅니다. 믿지 않다 보니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믿어주시기에 계속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요?
어린이처럼 부족함을 많이 간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처럼 철없는 모습으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어린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질들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까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예수님 앞에 가려고만 합니다.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어준다는 것을, 그래서 아이 역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 거짓을 배우며 거짓말을 늘려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이웃을 향해서도 믿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주고 지지하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삶이 우리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와 같은 우리가 될 때,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처럼
손을 얹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계속해서 받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마태 19,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는 것이
힘들수록
희망
또한 간절하다.
자기
희생 없이는
우리의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희망이 있다면
바로
자기희생이다.
희망과
희생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의 희망은
이념과 사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예수님의 희망은
모든 생명과
하나 되는
나눔이다.
콜베 사제는
당신의
생명을 나누신다.
희망은 새롭다.
우리 자신이
있는 곳이
희망을
실천해야 할
희망의 자리이다.
절망은
간절한 희망을
이길 수 없다.
콜베
사제같이
빛이 되는
삶이 있다.
삶의 방향을
바꿀 때이다.
다시 시작하는
희망과 희생의
실천이다.
되새겨보아야 할
희망의 삶이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보를 다니면서 잘려진 나무를 볼 때가 있습니다.
나무에는 둥글게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무의 둥근 나이테는 사실 대부분 죽어 있다고 합니다.
나무는 가운데 부분으로만 양분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죽어 있는 나이테가 나무를 지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둥근 나이테처럼 우리사회를 지탱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청소차가 와서 집 앞에 내어 놓은 쓰레기를 가져가 줍니다.
그분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동네는 마비가 될 것입니다.
고마운 분들입니다. 2주에 1번씩 잔디를 깎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집 앞의 정원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누님들은 재봉틀을 돌렸고, 가발을 만들었습니다.
서독으로 간호사가 갔고, 광부가 갔습니다.
우리의 형님들은 멀리 중동에 가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겨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을 향해 늦게까지 일하던 산업현장의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퀸즈 한인성당에도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시는 분은 수녀님입니다.
미사시작 2시간 전에 나오셔서 문을 여시고, 앰프를 키고, 에어컨을 틀어놓습니다.
복사, 반주자, 해설자, 독서자도 일찍 와서 준비합니다.
미사를 마치면 많은 봉사자들이 다음 미사를 위해서 의자를 소독합니다.
로사리아회에서는 물품판매를 위해서 아침 일찍 탁자를 마련합니다.
주차봉사자들은 차량이 쉽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마당에서 안내합니다.
사제가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나이테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2살 이하의 아이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성탄이 지난 3일 후에 무명의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오늘 교회를 지탱하는 나이테가 되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다른 이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그런 따뜻한 마음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들어오듯이 따뜻한 마음에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미움이 들어오곤 합니다.
그런 것들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불평과 불만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 바람 속에서는 좋은 기억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학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권력으로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 갈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나눌 수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나이테’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앞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 하느님 신앙에 대해 거듭 다짐을 받습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여호 24,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여호 24,23)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복이 끝나고
여호수아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 힘 주어 이야기합니다.
경외심과 온전한 의탁, 진실된 섬김,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에게도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자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이미 닳고 닳아 신앙의 순수와 열정을 잃어버린 기성세대에게서보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서 하늘 나라로 가는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직 어리고 약하고 부족한 어린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그들은 생존을 위해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나 친지의 돌봄을 받고,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존재들인 겁니다.
하느님은 어리고 약하고 부족해도 당신께 다가와 의탁하는 이들을 기꺼워하십니다.
세상사에 능한 어른들이 능력 있고 부유하고 수완 좋은 이들과
인맥을 쌓으려 혈안이 된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어주는 이를 계산 없이 반기시는 어린이와 같은 분이시니까요.
"그냥 놓아 두어라. ... 막지 마라."
이 말씀은 오늘날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던지시는 일갈이기도 합니다.
윤리와 규범으로 무장하고 죄인과 의인을 가르며 흑백을 구별하느라
마음의 온기를 잃어버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만 존재하시는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 서품, 서원 연차나 지위, 신분에 기대어, 스스로 주님께 다가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여호수아가 일깨워준 신앙인의 모습에서 다시금 방향을 정돈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을 진실하게 섬기고,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하느님을 향한 기울기를 간직한 이는
나이가 몇이건 어떤 신분이건 하늘 나라에 "와락" 받아들여질 어린이의 영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도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어린이의 영혼으로 자신의 안위를 계산하지 않고,
누군가를 대신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진정한 목자요 순교자셨지요.
성인은 그 영혼 그대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져 우리를 위한 전구자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느라 우리 각자가 잃어버린 어린이다움은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회복하는 오늘 되시길,
그리고 그대로 주님의 축복의 손길 아래로 "와락" 달아드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실 하늘 나라 입성의 자격은
신분도 학식도 능력도 재물도 업적도 아닌, 그저 믿고 의탁하는 순수한 마음이랍니다.
엄지를 척 올리며 "아빠 최고!" 하는 어린이의 기대에 찬 눈망울로
오매불망 주님을 향하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창조론자의 살리는 사랑, 진화론자의 죽이는 사랑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가족입니다.
하느님 가족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어린이들은 사랑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왜 어른은 사랑할 수 없고 어린이는 사랑할 줄 알까요?
형제간의 우애는 어린이가 좋을까요, 어른이 좋을까요? 당연히 어린이가 좋습니다.
하수구가 있어 자신보다 더 어린 여동생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준 동영상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진정 순수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니면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같은 부모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면 형제에 대한 사랑도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그 ‘나’는 뱀과 같은 이기적인 본성입니다.
어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사랑하려 하면 그 나 때문에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나를 만들어주신 분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이것을 압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엄마, 나 어디서 나왔어?”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본성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창조되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부모로부터 창조된 형제를 부모를 사랑하듯 사랑하겠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춘기 전까지만 영향을 줍니다.
그 이후에 부모가 나의 창조자가 아님을 알게 되면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관심을 끄게 만들어
결국엔 사랑을 해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세상에도 큰 해악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기적인 ‘나’가 죽고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부모와 형제를 위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회는 거짓 사랑으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세상이 됩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뿌린 냉각제가
온 세상을 얼려버리는 지구 멸망을 초래했다는 배경에서 시작합니다.
열차의 앞칸으로 갈수록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뒤 칸은 그들을 증오하지만,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단백질 덩어리로 박해당하며 살아가는 하층민들이 있습니다.
꼬리 칸의 지도자인 커티스는 반란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앞쪽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남궁민수란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빙하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커티스는 맨 앞 칸까지 가서 기차를 만든 윌포드를 만납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엔진부속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윌포드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어가라고 제안 받습니다.
그러나 커티스는 낮은 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낮은 자들을 계속 부품으로 이용하며 사는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쪽 팔을 잃어가면서 부속품으로 있는 아이를 꺼내 냅니다.
그리고 남궁민수에게 기차 문을 열라고 마지막 남은 성냥 하나를 건네줍니다.
그것이 있어야 크로놀을 폭파해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아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며 두 남녀 아이들만 살아남고 모두 죽게 됩니다.
두 아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빙하기가 끝난 세상의 새로운 인류가 됩니다.
커티스는 짓눌리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윌포드는 자신이 만든 기차 때문에 살아있는 이들을 약간은 부속품으로 여겨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사랑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죽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새로운 창조’를 희망했습니다.
기차로 상징되는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아담과 하와를 위한 창조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는 창조자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조자가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듯,
부모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었듯, 창조 때문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까운 이들의 불합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커티스도 이 사랑에 동참하여 둘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팔도 잃고 생명도 희생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인 이유는 어린이들은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찾을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부모의 창조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형은 동생을 위해 부모처럼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이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 때문에 사랑한 것이기에
사랑을 잃으면 마치 전부를 잃은 것처럼 자기 삶도 포기합니다.
하지만 형제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죽은 형제의 몫까지 더 살아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바쳐도 남의 생명은 빼앗지 않습니다.
자신의 원천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창조자처럼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본성입니다. 어린이 중 진화론자는 없습니다.
다 부모가 필요합니다. 부모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본받습니다.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우리도 어린이처럼 되어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리려면 이웃을 내 형제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웃을 창조한 하느님을 부모로 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다른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를 기뻐하실 수 없으십니다.
창조자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이 세상은 생명이 충만한 하늘 나라가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