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제1독서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8,1ㄷ-7.11-13
형제 여러분, 1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7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11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법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환경이 만듭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이킹은 먹을 것이 없는 춥고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이 더는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약탈자가 된 예입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할까요? 척박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람은 어째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주님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착할 수밖에 없고, 서로 자주 싸우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은 집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머무느냐에 의해 내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을 탈출시킨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원 예물을 받아 성막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전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치하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부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판사는 그 전 해 12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며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2010-8-3, 조선일보 기사 참조]
모 부장판사는 왜 판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그리 비관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심판을 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 환경 안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피오렐로 라 과르디아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제99대 뉴욕시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법률 경력을 쌓았으며 뉴욕에서 판사로도 재직했습니다.
라 과르디아가 뉴욕시의 판사였을 때 한 남자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그 앞에 끌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법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했지만, 상황은 비극적이며 사회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즉시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법정으로 향하여 그에 대한 책임은 뉴욕 모든 시민에게도 있다고 하며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던 그 사람에게 돈을 모아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은 돈은 피고인과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달되었습니다.
왜 같은 위치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심판관의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성전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 사람이 믿고 사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해 창조가 진행되는 때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지만, 재판정은 이제 사랑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에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재판관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예수님만이 성전 중앙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 옆에 세웠습니다. 신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심판관이 아닌 엄마처럼 보이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서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가수 패티킴의 히트곡 ‘그대 없이는 못살아’의 가사 일부입니다. 어렸을 때 그냥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였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너무 부담되고 무서운 내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없어. 나와 함께할 거지? 그러면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일 것 같습니다.
깊이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행복을 책임져 달라는 정말로 대책 없는 말이 아닐까요? 종종 데이트 폭력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까?’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착은 죄가 됩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집착은 추합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은 입으로 사랑을 말할 뿐 집착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헤어지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사랑에 집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짜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랑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를 뛰어넘습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잘못된 사랑인 ‘집착’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은 집착의 모습도, 욕심과 이기심이 담긴 모습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전혀 받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사랑하라고, 혹시 반대의 마음이 들 때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사랑에 가까워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조지 엘리엇).
사진설명: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