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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5,12.15ㄴ.17-19.20ㄴ-21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 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루카 12,35)
주님!
허리에 띠를 매고 임을 반겨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시중들 수 있게 등불을 밝히고 빛 속에 있게 하소서!
빛 속에 있는 일도, 깨어있는 일도,
깨어날 수 있음도, 깨어있을 수 있음도,
오직 깨어 계시는 임께서 함께 계신 까닭이오니,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불행으로부터 회개>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사람!”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어쩌면 오늘 주제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회개가 묵상이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란 불행에 주저앉은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란 불행에서 회개한 사람이라고 묵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에 깨어있어야 하고
반대로 불행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왜 불행해야 해?
나는 무조건 행복할 거야!
불행하면 나만 손해잖아?'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내가 불행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시중드신다는 것도, 고작 밥상에서 시중드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복 시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중드시는 것이 고작 밥상에서뿐이겠습니까?
엄마만 해도 자식에게 배나 부르라고 밥해주지 않고 행복하라고 해주지 않습니까?
어제도 저는 예약 밥상을 했고 이 밥상을 차리기 위해 지난주 시골에 갔을 때부터 재료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렸는데, 만약 어제 드신 분들이 그 정성과 사랑은 느끼지 못하고 그저 음식이 맛이 있네, 없네, 하며 드셨다면 저는 매우 섭섭했을 것이고, 드신 분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이고 행복에 깨어있지 못한 것이지요.
오늘 독서에 비추어 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은총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죄에 머물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에 짓눌려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려면 죄의식에서 벗어나 은총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죄로 향했던 시선을 하느님 은총으로 돌리는 것,
너의 죄로 향했던 시선도 하느님 사랑으로 돌리는 것,
내 죄가 큰 것만큼 하느님 용서가 큰 것을 느끼는 것,
이것이 회개이고 은총에 깨어있는 행복입니다.
은총에 깨어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죄에 머물고 죄에 짓눌려있는 불쌍하고 불행한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1베드 5,8-9)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만하면 됐다’ 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방심이나 어중간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집 정리를 잘해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해했습니다.
물론 집 정리가 잘 되었다고 마음도 꼭 맑은 것은 아닙니다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의 준비와 영혼의 깨어있음은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어서 행복한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종들 각자의 행동에 따라 결정됩니다.
항상 깨어 안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루 종일 깨어있으려면 머리는 지치고 마음은 마른다>
영화, 과거를 잃게 되면 인생을 잃게 된다는 내용의 <내가 잠들기 전에>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매일 아침 이전의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납니다.
남편이 앞에 있습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출근하면 어떤 다른 남자에게 전화가 옵니다.
남편은 자신이 사고로 밤마다 기억이 지워진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담당 의사인데 사실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옷장의 박스를 보면 사진기가 있는데 그것을 틀어보라고 합니다.
그것 안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녹화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국 아침마다 그렇게 쌓아놓은 지식으로 자기 남편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이겨내고 참 자기를 찾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음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죄를 짓기 위해 주님 현존을 잊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그러니까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계속 기억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연습』의 로랑 수사님은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몸으로 체험하고 가신 분입니다.
이분은 매 순간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짧은 기도문을 계속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대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은 매 순간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금방 지쳐버립니다.
책 『정리하는 뇌』는 인간의 뇌가 지친다고 말합니다.
머리로 계속 기억하려다가는 지치는 것입니다.
맛없는 무를 먹느라고 지친 사람과 맛있는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같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누가 끝까지 견뎌낼까요?
당연히 지치지 않은 뇌를 지닌 초콜릿을 먹은 사람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초콜릿을 먹는데 자기만 무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린 사람들은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침부터 지친 뇌를 지니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 영화의 예처럼 하면 됩니다.
아침마다 자기가 누구인지 되새기면 됩니다.
아침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머리’로 인식하면 그것이 믿음의 방울이 되어 ‘가슴’에 담깁니다.
이는 마치 발효주를 끓여 증류주로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머리는 살아가며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머리로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믿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 머리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생각하면 그것이 증류되어 가슴에 담깁니다.
도수가 낮은 발효주는 많이 마셔야 취하지만,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작은 양만 마시면 금방 취합니다.
따라서 아침에 기도하여 믿음을 가슴에 저장하여 둔 사람은 잠깐만 꺼내서 마셔도 금방 다시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순간순간 주님 현존을 기억해내려는 사람은 지친 뇌를 가지고 결국 실패한 하루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도 이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아침마다 기억이 사라지는 이 여자는 자기에게 청원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침마다 의심해야 하고 아기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짧게나마 녹화해서 매일 아침 1시간만 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게 합니다.
결국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주님의 기도를 한 시간씩 하며 제가 누구인지 되새깁니다.
살아가면서 가끔 이 믿음을 꺼내서 마십니다.
그러면 하루 동안 거의 주님의 현존을 잊지 않습니다.
물론 증류주도 마시면 말라버립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나 자신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첫 키스만 50번째>는 애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 위해 남자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깨어있게 하시기 위해 당신 현존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항상 깨어있는 종이 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지막 피정, 어느 젊은 사제의 영적 유언>
존경하는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님께서 정성껏 번역하신 파블로 도밍게스 프리에토(1966-2009)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성바오로 출판사)을 행복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한 열정과 겸손의 덕을 겸비한 사제,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 감각을 갖춘 사제, 깊은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젊은 사제 파블로 신부님은 스페인 사라고사에 위치한 시토회 봉쇄 수녀원 수녀님들의 영신 수련 피정을 동반해드리러 갔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피정이었습니다.
2009년 2월 11일부터 15일까지이니, 불과 닷새 동안의 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가 얼마나 재미있고 심오했던지, 수녀님들은 짧지만 지상천국을 맛본 듯했습니다.
그리 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수녀님들의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나게 했고, 믿음에 확신을 갖게 했으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파블로 신부님은 암벽 등반 전문가였는데, 닷새간의 피정 동반을 마친 신부님은 수녀원에서 올려다보이는 몬카요 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실족사하게 됩니다.
겨우 43세였습니다.
책 내용은 말 마디 그대로 파블로 신부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피정’ 강의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은 영성으로 가득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이제 한국어로 잘 번역되고, 멋진 책으로 출간되어 한국 땅에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피정>을 읽으면서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마치 파블로 신부님이 강사석에 앉으셔서 영성 강의를 펼치시고 저는 연피정에 참석한 느낌입니다.
딱딱하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강의였습니다.
마지막 장을 탁 덮는 순간, 8박 9일간의 은혜로운 연피정을 끝낸 기분이었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도 연피정 강의를 좀 더 정성껏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정 강의 안에는 여러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람,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 이야기, 디하우 나치 포로 수용소 안에서 사제로 서품된 카를 라이스너 신부님 이야기, 32살에 직장암 진단을 받는 볼리비아 선교사 헤수스 신부님의 신앙 간증...
파블로 신부님 자신을 비롯해서 신부께서 강의 중에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띠를 꽁꽁 동여매고 손에는 환한 등불을 켜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파블로 신부님의 말씀은 허리에 띠를 매고 손에 등불을 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포옹이요, 사랑하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그 죽음의 날, 우리가 맞이할 그 은총의 시간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열망하고 경외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죽음의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될 그 마음과 시선으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께 간청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 부차적인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차적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깨어 있어라.”
우리 문도미니코 수사님의 종신서원 상본 성구이기도 합니다.
요셉 수도원 성전 뒷면 양쪽에도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환히 빛나는 눈을 지닌 커다란 올빼미 그림이 걸려 있고, 제의실 방에도, 제 집무실에도 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지닌,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필란드 흰 올빼미 도자기 작품이 놓여져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궁극 목표가 깨어 있음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동체의 전례기도도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공동체의 일치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의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진실입니다.
깨어 있음의 일치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훈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내입니다.
깨어 있음은 준비이며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기다릴 때 항구히 인내하며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깨어 기다림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한 두 번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늘 한결같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 주님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어 살 때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제가 특히 좋아하는 전례기도서 3시경 찬미가 2절에서 소개되는 주님입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
이런 주님을 기다리기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살아 계신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면 실감나게 이해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명령이요 짧지만 강렬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흡사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깨어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주님의 당부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여기 또 행복 선언이 나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주님은 우리를 섬기러 오신 겸손한 분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분은 바로 우리를 시중들러 오신 겸손한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평상시 깨어 주님을,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며 오실 주님을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며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너무 잘 아시며 오실 때 이런 우리를 식탁에 앉히신 다음 시중을 드신다 합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장면인지요!
바로 우리가 오매불망, 순수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깨어 기다리는 분은 이런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분명히 잘 드러납니다.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비교입니다.
참으로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요!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의 실패를 순종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분발하여 깨어 있게 합니다.
언젠가 오시는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미사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형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늘 깨어 기다리는 삶이 절대적입니다.
이래서 깨어있음의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즘 널리 시행되고 있는 향심기도, 비움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수행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이런 깨어 있는 삶입니다.
저 역시 늘 호흡에 맞춰 성구를 되뇌이며 오전, 오후 30분씩, 명상기도를 수련해오기 30년이 넘었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의 훈련에 좋은 기도들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 역시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깨어있음을 위한 참 좋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는 영성훈련에 충실할 때 건강한 영혼, 건강한 정신, 건강한 마음입니다.
“깨어 있어라!”
늘 깨어 살 때 참행복입니다.
깨어 살 때 늘 영원한 오늘, 영원한 현재를 삽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깨어 지낼 날은 오늘입니다.
오늘 깨어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은 저절로 내려놓게 됩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우리 인생 여정을 압축하면 현재의 시점이 나오고 더욱 분발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 경우를 보면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시점時點은 오후 4:30분,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시점時點은 초겨울, 이런 확인이 죽음도 머지 않았다는 자각과 더불어 깨어 있는 삶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 또한 깨어 살기 위한 참 좋은 실제적 수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도록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다음과 같이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한 종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루카 12,3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10월 1일에 퀸즈성당에서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성인 성가대에서 음악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날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고향의 봄과 아리랑’이었습니다.
고향의 봄과 아리랑은 멀리 타국에서 들으니 더욱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아리랑 랩소디’를 연주하였는데 그동안 들었던 아리랑과는 달리 역동적이었고, 경쾌하였습니다.
청소년들은 같은 아리랑이지만 한과 우수에 젖은 아리랑이 아니라 한류의 힘과 발랄함을 표현하였습니다.
성인 성가대는 ‘나는 천주교인이요와 아베 마리아’를 들려주었습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노래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제가 성가대원들을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합창단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이기에 감동이 더 컸습니다.
그분들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 와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세탁소를 하는 분, 차량 정비소를 하는 분, 음식점을 하는 분,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분, 핸드폰 대리점을 하는 분, 통증 병원을 하는 분, 변호사를 하는 분, 학생을 가르치는 분도 있었지만 모두가 성가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음악회를 다 감상하지 못하고 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국 성지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새벽 0시 50분 비행기를 탔고, 시차가 있기에 다음날 새벽 5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인천에서 다시 김포공항으로 갔고, 거기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뉴욕, 인천, 김포, 제주로 가는 여정이었고, 길은 멀었지만 4년 만에 가는 한국이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주의 첫날 황사평 순교자 묘지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자 기념관을 순례하였습니다.
황사평 순교자 묘지에는 무명 순교자 27명과 4명의 유명 순교자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제게 감동은 준 것은 순교자의 무덤도 있지만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김기량은 제주도 첫 번째 신자이고, 제주도의 첫 번째 순교자이고, 제주도의 첫 번째 복자입니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다가 2번이나 난파되었습니다.
한번은 40일에 걸쳐 홍콩까지 갔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는 영국의 상선에 의해 발견되었고, 홍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신학생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행운의 사나이라는 의미의 펠릭스와 제주도의 사도가 되라는 의미의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의 사도가 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선교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난파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일본 나가사키까지 흘러갔습니다.
그곳에서도 교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제주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기량의 삶에 2번의 난파가 있었지만 모두 하느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도의 교우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육지로 나갔다가 이번에는 포졸들에게 잡혔습니다.
포졸들은 배교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지만 그는 기꺼이 순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삶에 3번째 난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졸들에게 죽으면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포졸들은 그를 곤장으로 때려서 죽은 것 같았는데 보통은 그 정도 맞으면 죽었습니다.
그런데 김기량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포졸들은 김기량이 말한 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포졸들은 곤장을 때리는 대신에 목을 매달아 죽였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는 3번의 난파 끝에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지 안내를 해 주시는 형제님은 교구장이셨던 김창렬 바오로 주교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바티칸 교황청에 가서 교황님께 자랑했지.
한국에서 개신교회 신자보다 천주교회 신자가 많은 곳은 제주교구 밖에 없습니다.”
형제님은 주교님께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는데 천주교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와 같은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 사람보다 제주도를 더욱 사랑하였던 임피제 신부님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와 열정으로 깨어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35년째 보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분명히 매일 보고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1년에 한 번씩은 다 봅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일까요?
바로 성무일도입니다.
신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바치기 시작했던 성무일도, 그 책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해서 많이 낡았고 성무일도 안에는 많은 밑줄이 그어 있지만, 이 성무일도를 오래되었다고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의 책은 몇 번 보고 나면(몇 번 계속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지겨워서 펼치지도 않게 되지요.
하지만 성무일도는 다릅니다.
성경책도 그렇습니다.
지금 본당에서 매주 금요일에 성경 강의를 하고 있기에 계속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부님은 성경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하셨으니까 강의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분명 많이 읽었고 또 공부도 계속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마치 처음 보는 책인 것처럼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거 일회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의 삶에 비추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지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당시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알람’ 기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를 예수님을 끊임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고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으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때의 모습을 상기시켜 줍니다.
구원이 닥칠 때 곧바로 그분을 따라나서려는 것이었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깨어서 잘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 말고도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뻐합니다.
오실 주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지금 하고 있나요?
주님의 말씀은 과거의 일회적인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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