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네.
: 그녀의 말투를 흉내내자 그녀가 또 눈을 흘겼다. 귀여운 여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쯤 위 같은데 차림새는 훨씬 더 젊고 세련됐다. 집 바로 앞에 있는 비디오가게 대신 5분이나 걸어야 하는 이곳을 단골로 삼은 것도 환히 비치는 창문 앞에 서서 컴퓨터를 두드리던 그녀의 우아한 실루엣에 끌려서였다.
: 그때 그녀는 미스티 블루의, 까만 단추가 수박씨처럼 오종종 박힌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에리 없이 목이 브이자로 파진 것이어서 고개를 숙일 땐 금목걸이가 둘러진 흰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위로 오린 듯 정갈한 모습이었다.
: 그녀에 대해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혼자 사는 걸 보면 결혼은 안했거나 했다가 갈라섰거나 둘 중에 하나일테고 전직은 은행 여직원이나 간호사였을 것이다. 느낌이 그랬다.
: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어떨까. 가게 앞을 지나치면서 나는 종종 그 생각을 했다. 다시 소설을 써야지 생각했지만 뭘 써야 할 지 감이 잡히질 않아 이 것 저 것 얘기가 될만한 꺼리들을 모아 제멋대로 부풀려내고 있는 중이었다.
: -이거 어때?
: 그녀가 반납한 테잎들 맨 밑에서 하나 꺼내 내 눈앞에 흔들었다.
: -라 빠르망?
: -아파트란 뜻이래. 빠르망은 아파트고 라는 여성명사 앞에 붙는 관형사 같은 거고.
: -근데 왜 아파트가 여성명사예요? 이해가 잘 안되네.
: -글세, 왜 그럴까. 기차가 남성명사인 건 알겠는데 아파트가 왜 여성명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테잎을 내려다보았다.
: -기차가 남성명사예요?
: -그럼, 남성명사지. 터널을 통과하는 데 여성명사일리가 있어요?
: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농담을 알아듣고 깔깔댔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 -내일 모레까진 꼭 갖다줘야 해요. 용이씬 지각 대장이더라.
: 참 요령있는 여자였다. 말을 저렇게 밉지 않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 가게를 돌아나오면서 문득 후회가 스쳤다. 지난번에도 나는 빌린 테잎을 하나도 안보고 그대로 되짚어 반납했었다. 이상하게도 막상 돈을 치르고 나면 고를 때의 흥은 이미 반쯤 달아나버리고 1박2일 동안 해치워야 할 숙제를 받아 쥔 것처럼 떨떠름한 기분이 되곤 했다.
: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봄꽃처럼 부지불식간에 번지는 어둠.
: 골목 안은 더 캄캄했다. 가로등도 꺼져 있어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팔을 뻗어 가로등의 스위치 캡을 열었다.
: 가로등이 환하게 켜지는 순간, 석현의 웃는 얼굴이 안개 걷힌 후 섬처럼 둥싯 떠올랐다. 가로등을 켠 게 아니라 OHP를 켠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솟을 정도였다. 홱 고개를 돌린 듯 그 애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꺼진 후에도 나는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하디 묘한 기분이었다.
: 생각해보니 석현은 학교에서부터 집 앞까지 나를 따라왔다, 마치 연애할 때 그랬던 것처럼.
: 석현이 나를 대문 안으로 밀어 넣은 뒤 껑충하게 서서 한참을 빙긋이 웃고 서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애틋했던 시절이 화락락 폈다 우수수 지는 벚꽃처럼 아련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렀다. 삼 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 그런데 석현은 왜 하필 오늘 내 뒤를 밟은 것일까.
: 사귀던 남자들과 모조리 헤어져 혼자가 됐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연예인 토크쇼에서처럼 진실게임을 한다면 어떤 말들이 다투어 쏟아져 나올까.
: 하지만 이처럼 엉뚱한 공상 꺼리를 가지고 지지고 볶으며 즐거워 할 때에도 석현은 제외였다. 죄책감도 있고, 혼자 빙긋 웃을 만큼 유쾌한 기억도 별로 없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꼭꼭 싸 골방에 처박아 둔 기억보따리를 일부러 끌러 그 이름을, 그 얼굴을 들여다볼 작정을 하지 않는 한 그 애 생각을 3분 이상 이어가 본 경우는 거의 없었다.
: 그런데 왜?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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