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객 김광석을 추억하기 위해 네 번째 만난 이는 '예지의 노래꾼' 백창우(56) 시인이다. 그는 김광석과 함께 준비하던 시와 노래를 결합한 새로운 시·노래 운동 '노래로 만나던 시(詩)'의 기획자이자 김광석이 세상을 뜨기 직전 마지막 귀갓길까지 함께했다. ■별이 되어 떠난 벗과 함께한 마지막
고인과 시·노래 결합 새 장르 기획 임종 10시간 전까지 앨범 작업 "이제 음악에 눈뜨는 것 같다"
술 마시며 더 이야기 했더라면… 마지막 귀갓길 동행해 더 애잔 오래 살았으면 '시 전도사' 될 뻔
1996년 말, 그해 초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 남긴 유작 녹음과 그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의 노래가 실린 음반 '가객(歌客)'이 '부치지 않은 편지'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애장 앨범이라 자부하고 있는 이 음반은 정호승의 시(詩)와 백창우의 가사(歌詞)가 지닌 격조, 대중음악사의 아픈 상흔으로 기억되는 김광석, 참여 뮤지션들의 '포효하지 않는 울분'을 담은 절창이 어우러진 '비극적인 품위'를 오롯이 담고 있는 최고의 트리뷰트(tribute) 앨범으로 꼽힌다. 세상을 떠나기 전 1995년 가을 백 시인과 함께 '노래로 만나는 詩'라는 음반을 준비 중이었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와 백창우 작사·작곡의 '어머니'라는 두 곡을 녹음했다. 이 중 '어머니'는 워낙 상태가 안 좋아 지워버리고, '부치지 않은 편지'만 보관해 왔다.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기 전날 밤 김광석은 백 시인과 음반 문제를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 시인은 김광석이 죽기 전날 밤을 이렇게 회상했다. "1월 6일이니까…. 전날 5일 낮에는 안치환과 같이 있었다. 안치환의 집이 인천이어서 같이 김광석을 만나지 못했다. 안치환이 자리에서 일어선 뒤 혼자 한참을 있다가 김광석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블루스하우스로 갔다. 그런데 약속 시간에 광석이가 안 나타났다. 전화를 걸었는데 "광석이가 고단했던지 잠을 자고 있다. 곧 갈 거다"라고 와이프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얼마 후 광석이가 왔다. 기억해 보니 광석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10시간도 채 안 될 때였다. 블루스하우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이야기하려면 거의 소릴 지르다시피 해야 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 논의해야 했기 때문에 근처 커피숍으로 자릴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광석이와 의논한 건 다름 아닌 한국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광석이가 세상 떠나기 몇 달 전 1995년 가을 대학가 집회에서 마주친 광석이에게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운동에 앞장서 달라고 제안했는데 광석이가 조건 없이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해 구체적인 계획을 함께 세우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광석이가 '한국 현대시 대중화의 전도사'가 됐으면 했는데 아쉬움이 너무 크다. 광석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많은 진전이 있었을 것 같다.
도종환,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 시인의 작품에 곡을 붙여 10여 편씩 발표할 예정이었다. 시인 한 명당 앨범 하나에 해당하는 곡을 새로 만들자는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아무튼 밤이 깊어져 자정이 넘었고 1시 가까워졌다. 그날 밤엔 완성도 높은 앨범을 만들기 위해 편곡, 앨범, 재킷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광석의 유작 녹음이 담긴 음반 '가객'. 페이퍼레코드 제공
그날 광석이는 이런 이야길 했다. "이제 음악에 눈이 뜨이는 것 같다." 4집 앨범에 가장 많은 자작곡을 넣었다.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자유롭게' 이 3곡이 자작곡이었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에는 시인 류근의 시에 곡을 붙였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눈이 열린 셈이었다. 그 전엔 송라이팅보다는 선곡 능력이 정말 빼어났던 김광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광석이를 붙잡고 더 많은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안치환이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이다. 그때 집으로 가지 않고 몇 시간 기다렸다가 광석이를 함께 만났더라면 아마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거다. 술도 많이 마셨을 것이고. 분명 새벽까지 자리가 이어졌을 테고 광석이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 잤을 것이고.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헤어지기 전 한 잔 더 할까 했지만 왠지 들여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광석이를 집에 바래다주며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나는 성남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왠지 잠이 안 왔다. 커피 탓이려니 했는데,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이었다…."
■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가객
앨범 '가객(歌客)'이 나온 뒤부터 김광석은 '가객'이란 칭호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 앨범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의 세 가지 버전의 녹음이 실려 있다.
하나는 1995년 가을 김광석이 녹음한 것을 그대로 실었다. 현악기 연주는 김동석 등 8명의 현악팀과 동명의 기타 연주자 김광석의 어쿠스틱기타 아르페지오가 김광석의 처연한 목소리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비장한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두 번째 녹음은 통기타 중심으로 김광석의 포크 음악 분위기를 살렸다. 김광석의 노래 파트 외에 연주와 녹음, 편곡 등을 모두 일본에서 작업했다.
세 번째 녹음은 록(Rock)적인 느낌으로 편곡해 이정열과 노래마을이 노래하고, 사랑과평화가 연주한 것이다. 최선배의 하모니카와 트럼펫 연주와 역시 김동석 등 8명이 현악 연주를 맡았다. 앨범에는 김광석이 평소 좋아하던 노래들을 동료, 선후배들이 다시 편곡해 부른 곡들도 실려 있다. 이 앨범의 기획자이자 낮은 곳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보낸 백 시인은 "김광석은 우리와 한 시대에 태어나 잠깐 만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문득문득 소용돌이치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다. 우리 마음에 그가 남아있는 한 그는 우리와 함께한다"고 전했다.
'부치지 않은 편지'에 부치는 글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그가 남긴 눈물은 그를 아끼던 이들의 가슴에 강물로 남아 출렁이고/그의 사랑은 노래가 되어 우리들 가슴속에 소용돌이친다./그는 떠났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그의 노래가 남아 있는 한 그는 살아있다./우리들 가슴속에,//이런 마음을 담고 싶었다./그가 그리워하던 따뜻한 세상,/그가 꿈꾸던 좋은 노래,/그것은 이 음반에 참여한 여러 노래꾼(가객)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가객'이란 음반 제목은 바로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삶을 바쳐/한 시대를 노래하는 노래꾼들의 '숨결'을 상징한다.(앨범 '가객 : 부치지 않은 편지' 머리말 중)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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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