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정경(情景)
주 재순
심심하면 눈발이 희뜩희뜩 날리다가 얼마후엔 그만 둬 버린다. 겨울이
한고비를 넘어가고 있지만 금년은 눈이 많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벌써 멎어 버렸나? 그나마 서너번 흩날리며 장난치던 눈발마져 소식이
끊어진지가 오래 되었다.
눈은 펑펑 쏟아지고 수북히 쌓여야 멋이 있는데…
온 산하가 백설로 덮혀 깊이 잠들어 있고 눈부시게 청청(淸淸)한 설화
(雪花)가 있는 정경이 보고 싶다.
이젠 눈오는 모양도 많이 변덕스러워 졌다. 한바탕 눈을 쏟으려고 잔득
찌뿌렸던 하늘이 주먹 같은 눈발을 마구 쏟으면서 천지를 뒤덮던 자연의
신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대신 한시간에도 몇번씩 눈이
오다가 태양이 내비치는 묘한 눈오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일찍부터 한파가 길게 닥쳐 온다며 법석을 떨더니만 동장군(冬將軍)앞
에 단단히 무당한 월동준비 때문에 그만 기세가 꺾인 듯 싶다. ‘산불이다.’
‘식수가 바닥난다.'던 아우성은 드디어 건조경보발령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눈이 1,2 센티만 내려도 교통마비로 야단들이지만 그 사정 때문에 눈을
싫어 할 수는 없다. 눈이 없는 겨울은 상상하기 조차 싫다. 얼마나 숨막히
는 일상속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인가.
어릴적 눈이 허리춤까지 쌓이는 으슥한 밤. 아버지께서는 나즈막한 처
마밑을 뒤져 참새 한 두 마리를 잡았다. 은근한 화롯불에 구워서 통통한
뒷다리 한쪽을 뜯어 내입에 쏘옥 넣어 주었다.
“쇠고기 열점 먹을래, 참새고기 한점 먹을래.”흐뭇한 얼굴로 물으시면,
“참새고기 한점!”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 했다. 형언(形言)할
수 없는 참새구이 맛을 어찌 잊으랴.
“여자가 참새고기 먹으면 그릇을 깬다.”는 옛말은 남존여비사상을 짐작
케 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누이에게도 똑같이 먹여 주었으니 깨어 있
었던 자식사랑은 내 자식사랑으로 내려 갔다.
눈속에 갇혀 이웃의 발길이 끊기게 되면 긴 겨울밤을 그냥 넘기기엔 왠
지 허전했다. 이럴 때 어머지께서 내놓으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
구마와 얼음조각 어석거리는 동치미.
입안이 얼얼, 잇빨은 덜덜, 톡쏘는 듯 쏴아 하고, 새콤달콤한 동치미 국
물맛을 지금은 느낄수 없다. 점점 깊어 가는 밤이 눈속에 갇힌채 숨죽인
적막감으로 잠기면 왜 그렇게 외로움이 밀려 왔을까. 이 때 외양간의 암
소가 되새김질을 하며 목에 달린 요령(鑄鈴)이 ‘댕그렁’하고 들려 주는 그
윽한 요령소리는 외로움을 더욱 부채질하며 여린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도시에서의 겨울밤은 또 다른 풍경이 있다. 어떤 팔자 좋은 손님이 불
러주기를 기다리며 부는 앞못보는 안마사의 호르라기 소리가 저 멀리 사
라질 때면 괜히 슬퍼 졌다. “찹쌀떡”.“메밀묵”,“밤엿사려!” 정겹던 이 소리
는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눈이 쌓이면서 기온도 점점 내려가 몹시 바람이 분다.
깊은 눈을 말아 올려 담벼락에 높이 밀어 부치던 바람. 밤에 홀로 방에
앉아 있다가 그 바람소리가 무서워 이불속으로 숨었다. 꼭 귀신의 곡성
(哭聲)이라고 믿었던 바람소리. 전깃줄까지 함께 울어댔다. 문풍지 우는
소리까지 합세하면 눈의 적막이 공포의 소리가 되어 버렸다. 아득히 침묵
에 쌓이던 그 숨죽인 겨울밤.
거기에 바람이 세차게, 더욱 세차게 불었다. 그것이 겨울이었는데, 바로
그것이・・・
겨울답지 않은 추위라서 몸이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춥다. 마음이
춥기 때문에 육신(肉身)이 식은 화로처럼 차고 황량한 것인가 보다. 불이
꺼진 화로의 남은 재처럼 소진(消盡)된 심신이 추위에 떤다. 한줄기 찬바
람에도 두려워 귀를 세우고 부서진 재처럼 날릴까 겁을 먹는다. 이 추운
몸과 마음을 덮혀 줄 한가닥 불은 정(情)뿐이다. 서로 마음을 기댈수 있는
따뜻한 정이야말로 얼어 붙은 마음을 녹여 줄 것 같다.
아! 눈이 오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기온이 급강하던 겨울밤. 주먹
같은 함박눈이 내리는 그런 밤. 젊은 날 내 마음을 송두리 채 빼앗아간
여인의 미소가 아직 거기에 머물고 있다.
‘얼음 위에 댓닢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 망정, 오늘밤 더디 새오
시라.' 뉘라서 읊어 낸 노래라 하던가. 그래도 뒤척이며 살아가는 삶의 주
위엔 언제나 겨울 정경 같은 그리움이 아직 남아있어 바라 볼 수 있기 때
문인가 보다.
1998.
첫댓글 아! 눈이 오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기온이 급강하던 겨울밤. 주먹
같은 함박눈이 내리는 그런 밤. 젊은 날 내 마음을 송두리 채 빼앗아간
여인의 미소가 아직 거기에 머물고 있다.
겨울답지 않은 추위라서 몸이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춥다. 마음이 춥기 때문에 육신(肉身)이 식은 화로처럼 차고 황량한 것인가 보다. 불이 꺼진 화로의 남은 재처럼 소진(消盡)된 심신이 추위에 떤다. 한줄기 찬바람에도 두려워 귀를 세우고 부서진 재처럼 날릴까 겁을 먹는다. 이 추운 몸과 마음을 덥혀 줄 한 가닥 불은 정(情)뿐이다. 서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정이야말로 얼어 붙은 마음을 녹여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