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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6,12-18
형제 여러분,
12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앞 장면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에 이어,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단지 잠들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깨어있으려면, 먼저 ‘대체 무엇이 맡겨졌고’, ‘무슨 일이 맡겨졌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루카 12,42)
이는 먼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사실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곧 ‘나에게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양식은 이미 정해져 주어졌고, 그것을 때에 맞추어 소홀함이 없이 잘 챙겨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 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은 ‘슬기로움’으로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일입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
(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
(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오늘의 말·샘 기도>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정체성에 대하여>
요즘 Identity란 말을 많이 씁니다.
정체성 또는 신원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자기 정체를 잘 알아야 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고 확고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귀도 주교 앞에서 상속권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부터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한 다음 집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누구냐고 물었고 이에 망설임 없이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답합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는 이미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같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지요.
신학교 첫 수업에 강의실을 잘 찾지 못해 좀 늦게 들어갔더니 칠판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여 있었고, 그래서 옆의 친구에게 물으니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10번에 걸쳐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는 신학생이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 이런 식으로 10번을 써야 하는데, 저는 10번을 다 김찬선이라고만 썼습니다.
그해 십여 명의 동기생들이 이 응답을 잘못하여 입학하자마자 퇴학당했는데, 그 이유가 5번 이내에 나는 신학생이라는 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퇴학당하지 않은 것은 제가 교구 신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저는 이때 주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은 물론 프란치스칸 정체성도 없었고, 정체성의 혼란이랄까, 아무튼,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미성숙이고 어리석음입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고 동시에 주님의 집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데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를 집사라고 부르지요.
형제라는 호칭도 좋지만 주님과의 관계에서 집사라 부르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서로 그렇게 부르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주님의 종이요 집사라는 것은 어떤 것도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재물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고,
내 아내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내 아들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고,
내 형제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심지어 나 자신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누구도 그리고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나 자신도 내 좋을 대로 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저는 30대 중반까지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주님’ 하며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 하며 기도했습니다.
사제요 수도자인 제가 그렇게 주님의 종이 되고 집사가 되기 싫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자였습니까?
저라는 인간이!
그리고 그렇게 30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좋을 대로 하고 있으니!
집사 노릇에 충실할 때 행복하다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나는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제가 이러면서도 그 행복이 참 행복일까요?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낫다>
어린 시절 기억입니다.
시골에는 ‘아이스께끼’ 장사가 있었습니다.
일주에 한두 번 고물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비료 포대, 고무 신발, 구리철사 등 그야말로 돈 되는 고물은 무엇이든 받아 챙기고 어름을 채운 나무통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내어 주었습니다.
비료 포대 하나도 귀했으니,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였지만 먹지 못한 채 구경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너무 먹고 싶었는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있다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1원짜리 동전 하나였습니다.
1원이면 아이스크림 두 개입니다.
신이 나서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습니다.
옆에 아이들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쫓아 오신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며 놀랬습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깁니다.
저는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돈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서 얘기하지만, 전에는 작은집 사립문 울타리를 엮어놓은 구리철사를 풀어다가 엿을 사 먹은 일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하신다.”(히브 12,6)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히브 12,10)
우리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꾸짖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루카 12,47-48)
따라서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다행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매를 맞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관리인은 주인이 바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충성스러움이 요구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 것을 내 것인양 남용하여 멋대로 쓴다면 주인은 더 이상 그에게 관리를 맡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것을 관리하도록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과 능력, 재물 등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고 하셨으니 누군가 나에게 요구한다면 많이 받은 줄로 생각하고, 또 주님께서 많이 맡겨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도 하느님 은총의 덕으로 오늘을 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몇 명의 영혼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샤를로트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 (The Yellow Wallpaper)는 19세기 후반의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및 사회적 억압에 관한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의사인 남편 존, 그리고 그들의 아기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대형 저택을 임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술자는 최근에 아기를 출산한 후 임신성 우울증 또는 신경 쇠약과 같은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존은 아내를 일시적인 신경성 장애로 진단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휴식을 취하고,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와 같은 활동을 피하도록 권장합니다.
이들은 저택의 최상층 침실에 머물게 되는데, 이 방에는 누런색의 이상한 벽지가 붙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처음에는 그 벽지를 싫어하지만, 점차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권장에 따라 아무 활동도 하지 않게 된 서술자는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벽지 뒤에 여성이 갇혀 있다고 믿게 되며, 이 여성이 밤마다 벽지를 긁으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서술자가 점점 더 광기에 빠져들면서, 그녀가 벽지를 완전히 찢어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벽지 뒤의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은 여성이 아픈 이유는 남성처럼 공부하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여성은 본래 약한 존재라는 선입견에 맞서는 최초의 페미니즘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길먼은 그렇게 벽지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먼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홀어머니와 어려움 속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혼한 남편도 결국 길먼의 신경 쇠약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녀는 휴양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를 깨고 소설을 씁니다.
여성도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에 퍼져있던 무거운 분위기와 홀로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휴양을 마치고 나와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미국 여성주의자, 소설가, 시인, 강사로, 여성의 권리, 사회 개혁, 그리고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산길을 간다고 생각해도 이미 나 있는 길과 내가 헤치고 가는 길은 상당한 어려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보람으로 남을까요?
어려운 길로 나아가 길을 낸 사람일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결국 행복한 결과를 주는 일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일보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당신의 제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부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조금은 편한 수녀의 생활을 접고 더 힘든 길을 택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고, 온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평생 부담감으로 살아온 축구선수 메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많이 맡기신다는 말은 그만큼 인정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받으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가 누구이냐에 대한 나의 믿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능력과 일, 성과가 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되었는데 진료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의사가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일을 해야 그만한 보람이 옵니다.
그 보람은 바로 내가 믿는 그 사람이 되었다는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행복을 얻으려면 그만큼 많이 일해야 합니다.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려는 꿈을 꾸고 있나요?
‘나는 가족도 구하지 못하는데 뭔 큰일을 하겠느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면 나 자신을 벽 속에 가두는 것이 됩니다.
누런 벽지의 길먼처럼 벽지를 뚫고 갇혀 있는 나를 꺼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나에겐 더 많은 고난의 십자가가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때 느끼셨던 그 기쁨과 더 가까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갚아주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천국의 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이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알콩달콩 재미있고 기쁘게 살아가고 계시는 한 수도회 세미나 동반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또래 형제들, 저와 동종업계에 종사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도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만 쌩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공동체 형제들 고생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정객들을 위한 시설 관리며 주방이며, 빨래 청소며 다들 손수 하시는 분위기였습니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삶을 기쁘게 살아내고 있다는 그 자체로 제게는 너무나 큰 위로요 힘이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 주제가 깨어있음이요, 철저한 준비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장 39~40절)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께서 남기신 명언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 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 저녁 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 “행복하여라, 책임을 다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주소서.”
(시편 17,8)
어제 강론은 흡사 깨어 있음 예찬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강론 중 몇 가지를 후에 추가했고 만족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위로입니다.
깨어 있음은 치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후에 추가하고 보니 새삼 깨어 있음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깨어 있음의 영적훈련과 습관이 참 중요하다 생각되었습니다.
어제는 매월 갖는 예수성심자매회 월례 모임이 있었습니다.
2005년 태동되어 시작됐으니 무려 18년 역사를 지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요셉 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들입니다.
어제 7명의 참석자매들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웃는 모습이 참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기 좋았습니다.
10년을 훌쩍 넘으니 가을 인생에 접어든 모습들이 노화老化보다는 성화聖化되어가는, 저물어가기보다는 여물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연스럽고 성화되어 가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세월이 흘러도 모두 변함없는 모습입니다. 신부님도, 저희들도...”
한 자매와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한분 한분이 모두 한결같이, 변함없이 가정공동체라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 온 충실하고 슬기로운 자매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과 일치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어제 “깨어 있어라”는 내용의 복음은 모든 제자에게 내리는 권고라면 오늘은 관리자로서 형제자매들을 책임진 이들에게 내리는 권고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런저런 책임을 진 모두에게 해당됨을 봅니다.
막연한 믿음이, 사랑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참 사랑은 그 책임을 다할 때 입증됩니다.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 책임을 다하는 사랑이 참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들이요, 바로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 모두가 그러합니다.
일년사계로 하면 가을철에 속한 연세들로 잘 익어가는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오늘 사진 나눕니다!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수산나 자매님! 오늘 자매님 참석 못하신 것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멋진 신부님, 사진으로라도 뵈니 평화가 오네요. 신부님 사랑합니다.”
제가 감동하고 놀라워하고 고마워하는 점은 무려 15년 이상을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그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15년 이상 매월 모임에 한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입원중이라 어제 처음 모임에 참석치 못한 것입니다.
자매님은 물론 많은 분들이 10년을 넘어서니 내적 아름다움이 빛을 발합니다.
한결같이 깨어 제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온 삶이기에 이런 맑고 향기롭고 기품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요즘 배밭 사이를 산책할 때의 느낌도 참 각별합니다.
지난 10월19일로 배밭의 수확이 완료되었습니다.
배나무들 역시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처럼 묵묵히 제 삶의 자리에서 제 책임을 다하였기에 풍성한 배열매들을 낼 수 있었습니다.
큰 배열매들을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하느님과 사람들과 배나무의 공동책임을 다한 노고의 결실이, 기도와 일의 결정체가 배열매들입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기적,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니 수확 후의 배밭은 “텅 빈 충만의 사랑”입니다.
배열매들 수확 후의 배밭을 산책할 때는 참 흐뭇하고 넉넉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느낌입니다.
배밭의 배나무들처럼 제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이런 열매 풍성했던 노년의 가을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말그대로 “텅 빈 충만의 사랑이요 행복이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만일 흉작으로 인해 수확이 없는 가을 배밭같은 가을 인생이라면 그 인생 “텅 빈 공허와 허무”와 같아 참 쓸쓸하고 외롭고 춥게 느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과는 대조적인 후반부의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종의 경우가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참으로 태만하고 무책임했던 종이었고, 이런 불충실한 종에 대한 주인의 책임추궁이 참 단호합니다.
주인 탓이 아닌 스스로 태만과 방심,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생활로 불행을 자초한 어리석은 종입니다.
복음의 결론 같은 말씀이 마지막까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되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끝까지, 한결같이 많이 받은 만큼 제 삶의 자리에서 분투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주님의 순종의 종, 의로운 종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순종의 종이 되었고,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답게, 또 주님의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답게 살게 하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위에 있나니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제 그들을 살게 하시도다.”
(시편 33,18-1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순례 두 번째 날에는 ‘정난주(명연) 마리아 묘’와 ‘용수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신앙 때문에 남편 황사영 알렉산델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 갔고, 2살 아들은 추자도에서 생이별하였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저의 고향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1963년 4월 15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6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5대조 할아버지께서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피난 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제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가서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우촌에서 지내는 많은 분들이 미사에 함께 해 주었고, 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비록 관노의 신세였지만 정난주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고, 고인이 되었을 때도 고인을 존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묘소를 잘 돌보았습니다.
지금 고인의 무덤은 많은 신앙인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도, 2살 아들과의 생이별도, 평생의 관노생활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용수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탔던 배가 상해를 출발해서 제물포로 가려했는데 도중에 태풍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제주도 용수포구에 도착했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선원들은 용수포구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배를 수리한 후에 다시금 출발하여 나바위 성지에 도착하여 무사히 조선에서의 사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용수성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생애를 볼 수 있고, 제주 교구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 교구에서는 고증을 고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타고 왔던 ‘라파엘 호’를 복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라파엘 호에 승선한 사람들이 직접 배를 몰고 제주 앞바다를 나갔는데 평온한 날에도 멀미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건장한 사람들이 하루도 못 견디는 배 위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5개월 넘게 지냈다고 합니다.
순례에 함께 한 분들 앞에도 심한 파도처럼 삶이 장애물이 있습니다.
물론 제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순례자들과 저는 ‘라파엘 호’에 잠시 머물면서 우리가 장애물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제1독서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율법과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의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율법과 기득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오늘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보내는지 생각하며, 문득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고, 읽고, 사랑하고, 웃고, 나누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막스 플랑크 생물학적 인공 두뇌학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울창한 숲으로 데리고 가서 ‘직선으로 걸어가라’라는 간단한 지시를 했습니다.
이 숲속에는 실험 참가자들을 안내하는 어떤 표지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향 감각과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능력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몇몇 참가자들은 자신이 직선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GPS 분석을 관찰하니, 그들은 지름 20미터 이내에서 원을 그리며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걷는 방향에 대한 믿을만한 단서가 없으면, 실제로 원을 그리며 걷는다.’
걷는 것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도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삶 안에서 명확한 이정표가 앞에 없으면, 인간은 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정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만 계속 매여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니 주님 뜻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삶 안에서 계속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이시기에 지금 당장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도 따르지 않으면서,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금 나 좋을 대로 살다가 주님만 맞이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결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 역시 모두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로 가장 빨리 직선으로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또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내게 가장 먼 나라가 될 뿐입니다.
지금 자리에서 맴도는 삶이 아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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