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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命理學의 起源과 發展
1. 일반적으로 사람의 生年月日時를 四柱라 하고 이 四柱로써 사람의 운명을 헤아리는 것을 四柱學이니 命理學니 四柱算니 한다.
命理學의 분명한 기원은 대개 漢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문자로 나타낸 것으로는 주로 白虎通義와 王充(27~약 97년, 東漢)의 論衡등의 저작 속에 들어 있는데, 論衡이 대표적이다. 왕충의 論衡에서 命理에 관해 말한 編目으로는 「命祿」 「氣壽」 「幸偶」 「命義」 「無形」 「吉驗」 「偶會」 「初稟」 「物勢」등이 있다. 이런 곳에서 왕충은 천명의 필연적 존재성을 전에 없이 드날렸을 뿐만 아니라 운명의 오묘함에 대한 탐구방법에 있어서도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命錄」에서 王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행운을 만나거나 해를 당하는 것은 모두 命 때문이다. 死生壽夭의 命이 있는가 하면 貧富貴賤의 命도 있다.…… 命이 응당 부귀하다면 비록 빈천하게 만들려고 해도 복을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命이 귀하면 천한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命이 천하면 귀한 자리에서 스스로 위태롭게 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재주가 많고 행위가 품위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부귀하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고, 지혜가 부족하고 덕망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빈천하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라고 王充은 주장한다.
王充은 태교의 중요성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예컨대 “임부가 토끼 고기를 먹으면 아이가 태어나 입술이 갈라진다.”라고 했다) 五行과 十二生肖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논했다. 이것은 후대 命理學家의 기초를 세워 준 셈이 된다. 王充의 말을 옮겨 본다.
한 사람의 몸에는 五行의 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행위에는 五常의 규범이 있다.…… 寅은 木이고 그 짐승은 호랑이이다. 戌은 土이고 그 짐승은 개다. 丑未도 土인데 丑의 짐승은 소이고 未의 짐승은 양이다. 木은 土를 이기기 때문에 개와 양과 소를 호랑이가 이긴다. 亥는 水이고 그 짐승은 돼지이다. 巳는 火이고 그 짐승은 뱀이다. 子는 水이고 그 짐승은 쥐이다. 午는 火인데 그 짐승은 말이다. 水가 火를 이기기 때문에 돼지가 뱀을 잡아먹는다. 火는 水에 의해 해로움을 당하므로 말이 쥐똥을 먹으면 복창(腹脹)이 생긴다.
이와 같이 王充은 五行으로 命을 논하는 근거를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진일보하여 生肖의 상극과 사물의 대립은 모두 命이라는 이론까지 망라하였다. 따라서 命理術 발전의 실제적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저술을 통해 보면 일반적으로 전국시대의 鬼谷子, 珞祿子 등을 算命術의 시조 자리에 앉혀 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好古的인 습관 때문에 모든 것을 옛 사람에게 가탁하기를 좋아하는 데 기인한 견강부회로 여겨진다.
2. 東漢 이후 魏晉南北朝時代에는 天命에 대한 지식계층의 신봉이 더욱 만연되었다.
魏書 「孫紹傳」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손소가 일찍이 여러 각료와 함께 조알하러 갔는데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아 앞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손소가 吏部郞中 辛雄을 밖으로 불러내어 살짝 말하기를 “여기의 모든 사람이 얼마 후면 다 죽을 테지만 나와 경만은 장수와 부귀를 누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신웅이 깜짝 놀랐으나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河陰의 변란이 있었다. 손소는 祿命을 잘 추산해 알아맞히는 일이 매우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3. 晉나라 사람 葛洪의 작이라는 抱朴子內篇 「辨問」에서 인용한 玉鈐經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만나는 길흉이 부모가 임신하자마자 결정되는 까닭은 그날 만나는 하늘의 별자리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張車子의 설이다. 그러면 무엇이 장거자의 설인가? 張車子에 대한 평가는 晉代의 干寶가 지은 搜神記卷10에 나온다.
주람책(周擥嘖)이란 사람은 가난하지만 학문을 좋아하였다. 부부가 밤늦도록 일을 하다가 피곤하여 누워 쉬는데 꿈에 신령님께서 지나가다가 애처롭게 여겨 좀 도와줄 것이 없을까 하였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선이 그 사람의 운명을 짚어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람이 가난한 운명을 타고나 이 이상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직 張車子라는 사람이 나와 천만금을 주어야만 됩니다만 張車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꾸어 주기를 청합니다.” 신선의 이 말을 들은 신령님은 “좋다.”라고 하고는, 그렇게 꾸어 주라고 하였다. 그들 부부는 열심히 노력하여 밤낮으로 재산을 모았는데 하는 일마다 잘 되어 재산이 천만금에 다다랐다.
이전에 張嫗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周擥嘖의 집에 와서 품팔이를 하다가 야합하여 임신을 하였다. 달이 차 해산하게 되자 밖으로 나가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았다. 주인이 가서 보고는 그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 미움을 쒀서 먹였다. 주인이, “당신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겠소?”라고 물으니 장구가, “이제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또 꿈에서 신령님께서 이름을 張車子라고 하라 하였소.”라고 대답하였다. 周擥嘖이 깨닫고는, “내가 이전에 꿈에서 하느님에게 돈을 꾸었는데 張車子의 돈으로 나에게 빌려 준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재산을 이 아이에게 돌려주어야만 되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날이 갈수록 周擥嘖의 재산은 줄어들었고 車子는 커서 周씨 집안보다 더 부자가 되었다.
이 이후 張車子의 이야기는 항상, 인생의 부귀빈천은 하늘이 결정한다는 典故로 사용되어 왔다.
4. 梁나라 때 劉勰은 新論에서 다음과 같이 命과 相을 논하였다.
命은 相의 근본이요, 相은 命을 도와 이루게 하는 것이다. 命은 형체에서 형성되지 않으나 相은 형체에서 형성된다. 命이 있으면 반드시 相이 있고 相이 있으면 반드시 命이 있어서 똑같이 하늘에서 받으며 서로 보완되어 이루어진다. 사람의 命과 相에 보이는 賢과 愚, 부귀와 빈천, 壽와 夭, 길과 흉 등은 처음 잉태되었을 때 이미 결정된다. 그 가운데 진묘한 자는 전설의 황제, 해, 달, 별, 용 등의 꿈을 꾸는 따위의 영험한 신물에 감응되어 이루어진다. 또한 일반서민의 경우도 모두 천명을 타고나기는 한다. 모두 하늘의 별자리에 영향 받으며 길한 별자리를 받으면 길하고 흉한 별자리를 받으면 흉하다. 처음 氣를 받았을 때 相과 命이 이미 결정되면 귀신도 바꿀 수 없고 성현도 돌이킬 수 없다.
말들이야 이러하지만 방법론으로 보면, 後魏의 孫紹가 祿命을 추산하고 陶弘景이 三命抄略을 쓴 이후로도 오랫동안 算命의 방법은 매우 조잡하고 단순하였다. 단지 태어난 날의 별자리를 가지고 추측한다든지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체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三國 魏晉南北朝 시대의 算命家들의 공동모색을 거쳐 唐나라에 이르면, 비로소 한 차례의 일대 발전이 있고 질적 비약이 일어난다. 그 원인은 陰陽五行과 출생의 年月日時를 좀 더 긴밀하게 결합하여 일생의 길흉을 추단하는 학설이 당나라 시대에 방법상의 확인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동서 문화의 유례없는 교류에 힘입어 인도와 서역의 점성술이 연이어 들어와서 算命術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宋나라와 元나라 사람들의 문헌을 통하여 보면, 星象과 曆法에 비추어 命을 아는 일은 당나라 貞元 연간(785~805)부터 비롯되었는데 당시 서역 康居國에서 온 李弼乾이란 술사가 인도 바라문의 방술서 律斯經을 전했다. 원래의 토양에 외국에서 들어온 술수법의 촉진이 곁들여져서 중국 본래의 산명술은 날개를 펴고 치솟는 발전을 하였다.
5. 당나라에서 算命術이 급속히 발전하고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그 핵심적 인물은 李虛中, 승려 一行(본명:張遂), 桑道茂 등이다. 특히 李虛中은 당 德宗 貞元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뒤에 殿中侍御史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평소 陰陽五行을 정밀히 연구해서 年月日의 天干地支로써 일생의 길흉화복을 추정해 내는데 “백에 하나 둘도 틀리지 않았다.”라고 한다. 이것은 唐代의 대학자인 韓愈가 지은 「殿中侍御史李君墓誌銘」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리하여 후세인들은 그를 命理學의 開山祖師로 떠받들게 되었다. 東漢時代의 王充의 학설은 李虛中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조잡하고 완전한 체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6. 이상은 지금까지 정론으로 되어 있다. 즉 李虛中은 時는 사용하지 않고 年月日만으로 命을 추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편저자는 생각한다. 四庫全書總目提要補正에 의하면 문제의 이 묘지명의 내용을 두고 후대인이 잘못 해석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最深於五行書, 以人始生之年月日所直日辰, 支干相生勝衰死生旺相斟酌, 推人壽夭貴賤利不利云云에서생각해보건대 천(天)에는 12진(辰)이 있기 때문에 일일(一日)은 12時로 나누어지고 日이 某의 辰에 이르게 되면 곧 時이다. 그러므로 時 또한 日辰이라고 부른다. 國語에 ‘星과 日辰의 位는 모두 北維에 있다라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韓愈가 지은 李虛中의 묘지명 가운데 ‘日辰’이란 말을 잘못 해석해서 마치 李虛中이 時를 쓰지 않고 算命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李虛中命書三卷이 永樂大典에 실려 있고 그 내용을 보면 八字를 모두 논하고 있다는 것이 四庫全書總目提要補正의 내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五代末 宋初의 徐子平의 四柱法은 그 연원이 李虛中에 있다고 해야 한다.
徐子平의 名은 居易이며 당시 관상술에 뛰어난 麻衣道人, 陳圖南과 함께 華山에 은거하여 命理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徐子平에 의하여 中國의 命理學은 더 완숙된 체계를 갖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徐子平洛祿子賦注二卷이 있는데 明나라 陶宗儀가 편찬한 說郭이라는 총서에 편입돼 있다. 후인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命理學을 ‘子平術’이라고도 한다.
7. 四柱法은 宋代에 이르러 널리 유행하게 되었고 유학자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朱熹의 친구 徐端叔도 그러한 사람이다. 朱熹가 쓴 「贈徐端叔命書」의 한 대문을 여기에 옮겨 본다.
……대개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는 陰陽五行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것이 굽혀지고 펴지며 자라고 사그라지는 가운데의 복잡한 변화는 참으로 깊이 캐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사물이 부여받은 賢과 愚, 부귀와 빈천의 차이는 단지 어둠과 밝음, 두터움과 엷음의 근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치를 쉽사리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서단숙은 유학자로서 이런 이치를 이미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구 의식이 매우 치밀하고 논리 전개가 대부분 합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학자들이 만약 그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서단숙의 방법이 옳음을 알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태어나면서 받은 것이 본래 그 정도였으며, 부귀영화는 탐욕을 갖는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고, 빈천곤궁은 교묘한 재주가 있다고 해서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 朱熹, 朱子全書, 上海:上海古籍出版社, 2002. 文75, pp. 3610~3611.
이상은 命理學을 朱子가 지지한 것으로 되고, 命理의 근본원리를 아주 적절하게 말했다고 할 것이다.
현재까지 유행하는 淵海子平은 宋의 徐子升이 徐子平의 연구 결과를 집적하여 재편집한 것으로 중요한 저술의 하나이다.
8. 元代에는, 통치자들은 비록 한족에서 몽고족으로 교체되기는 했으나 한족사회에서 산명의 풍토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이 시기의 저술로서는 陶宗儀의 輟耕錄과 李欽夫의 子平三命淵源注등이 있을 뿐이다. 元이 단명한 탓이다.
9. 明나라에 들어와서 算命術의 유행은 전대미문의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의 개국공신 宋濂은 「祿命辨」이란 글을 지어 算命學의 역사 연원에 대해 처음으로 계통적으로 밝혔다. 이 시대에 들어와 命理書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適天髓原注는 明初의 重臣 劉基의 손에서 나왔는데 참고 가치는 오늘날까지 대단하다.
沈孝瞻의 子平眞銓, 萬育吾의 三命通會, 張楠의 神峰通考命理正宗등도 매우 훌륭한 저서들이다.
10. 淸代에 이르러서도 算命術은 여전히 성행하였다. 紀昀과 兪樾 같은 지식인들이 부추기고 개입해서 사회적으로 命理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매우 짙었다. 주요 저술로는 陳素庵의 命理約言과 滴天髓輯要, 任鐵樵의 滴天髓闡微, 그리고 저자미상의 欄江網)(뒤에 窮通寶鑑으로 冊名이 바뀌었다) 등이 있다.
11.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명리연구는 東漢 말년에 개념을 확립하고 초보적 형태를 형성한 이후 唐나라 李虛中에 의해 四柱法의 기본체계가 이루어졌고, 뒤에(宋初) 徐子平의 四柱法에 의해 더욱 성숙하게 되었다.
徐子平 이후 宋元明淸代는 사람들이 운명에 희망을 걸고 산명술을 신봉하는 것이 마치 봇물이 터져 나온 것처럼 수습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천하의 가장 존귀한 황제마저도 술사를 불러 앞으로 시운이 어떻게 될 것이며 본인이 장수할 수가 있는지 등을 묻곤 하였다고 한다. 황제의 보좌에 앉아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늘 불안한 상태였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그러니 압제와 핍박을 극도로 받고 있는, 살길이 보장되지 못한 일반대중이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中華民國이 수립된 후 대군벌과 대관료들은 蔣介石을 위시하여 모두 命理를 믿었다. 옛 상해에는 名相術을 생업으로 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는 학문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었다. 袁樹珊과 韋千里가 명성을 떨쳤다.
四柱算命術(命理學)의 起源과 發展
1. 산명술(算命術)의 분명한 기원은 대개 兩漢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문자로 나타낸 것으로는 주로『백호통의(白虎通義)』와 왕충(王充)(27~약97년, 東漢)의『논형(論衡)』등의 저작 속에 들어 있는데,『論衡』이 대표적이다. 王充의『論衡』에서 命理에 관해 말한 編目으로는「명록(命祿)」「기수(氣壽)」「행우(幸偶)」「명의(命義)」「무형(無形)「길험(吉驗)」「우회(偶會)」「초품(初稟)」「물세(物勢)」등이 있다. 이런 곳에서 王充은 天命의 필연적 존재성을 전에 없이 드날렸을 뿐만 아니라 運命의 오묘함에 대한 탐구방법에 있어서도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命祿」에서 王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행운을 만나거나 해를 당하는 것은 모두 命 때문이다. 사생수요(死生壽夭)의 命이 있는가 하면 빈부귀천(貧富貴賤)의 命도 있다.…… 命이 응당 부귀하다면 비록 빈천하게 만들려고 해도 복을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命이 귀하면 천한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命이 천하면 귀한 자리에서 스스로 위태롭게 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재주가 많고 행위가 품위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부귀하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고 지혜가 부족하고 덕망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빈천하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라고 王充은 주장한다.
王充은 태교의 중요성을 제시했을 뿐만아니라 (예컨대 “임부가 토끼 고기를 먹으면 아이가 태어나 입술이 갈라진다”라고 했다.) 五行과 십이생초(十二生肖)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논했다. 이것은 후대 命理學家의 기초를 세워 준 셈이 된다. 王充의 말을 옮겨 본다.
한 사람의 몸에는 五行의 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행위에는 五常의 규범이 있다.…… 寅은 木이고 그 짐승은 호랑이이다. 戌은 土이고 그 짐승은 개다. 丑未도 土인데 축의 짐승은 소이고 未의 짐승은 양이다. 木은 土를 이기기 때문에 개와 양과 소를 호랑이가 이긴다. 亥는 水이고 그 짐승은 돼지이다. 巳는 火이고 그 짐승은 뱀이다. 子도 水이고 그 짐승은 쥐이다. 午는 火인데 그 짐승은 말이다. 水가 火를 이기기 때문에 돼지가 뱀을 잡아먹는다. 火는 水에 의해 해로움을 당하므로 말이 쥐똥을 먹으면 복창이 생긴다.
이와 같이 王充은 五行으로 命을 논하는 근거를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진일보하여 생초(生肖)의 상극과 사물의 대립은 모두 命이라는 이론까지 망라하였다. 따라서 算命術 발전의 실제적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저술을 통해 보면 일반적으로 전국시대의 귀곡자(鬼谷子), 낙록자(珞祿子) 등을 算命術의 시조 자리에 앉혀 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好古的인 습관 때문에 모든 것을 옛 사람에게 가탁하기를 좋아하는 데 기인한 견강부회로 여겨진다.
2.東漢 이후 魏晉南北朝時代에는 天命에 대한 지식계층의 신봉이 더욱 만연되었다.
『위서(魏書)』「손소전(孫紹傳)」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손소가 일찍이 여러 각료와 함께 조알하러 갔는데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아 앞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손소가 이부랑중(吏部郞中) 신웅(辛雄)을 밖으로 불러내어 살짝 말하기를 “여기의 모든 사람이 얼마 후면 다 죽을 테지만 나와 경만은 장수와 부귀를 누릴 것이외다” 라고 하였다. 신웅이 깜짝 놀랐으나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하음(河陰)의 변란이 있었다. 손소는 녹명(祿命)을 잘 추산해 알아 맞히는 일이 매우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3. 晉나라 사람 갈홍(葛洪)의 작이라는『포박자내편(抱朴子內篇)』「변문(辨問)」에서 인용한『옥검경(玉鈐經)』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생 동안 살아가면서 만나는 길흉이 부모가 임신하자마자 결정되는 까닭은 그날 만나는 하늘의 별자리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장거자(張車子)의 설이다. 그러면 무엇이 張車子의 설인가? 張車子에 대한 평가는 진대(晉代)의 간보(干寶)가 지은『수신기(搜神記)』卷10에 나온다.
주람책(周擥嘖)이란 사람은 가난하지만 학문을 좋아하였다. 부부가 밤늦도록 일을 하다가 피곤하여 누워 쉬는데 꿈에 신령님께서 지나가다가 애처롭게 여겨 좀 도와줄 것이 없을까 하였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선이 그 사람의 운명을 짚어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람이 가난한 운명을 타고나 이 이상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직 張車子라는 사람이 나와 천만금을 주어야만 됩니다만 張車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꾸어 주기를 청합니다.” 신선의 이 말을 들은 신령님은 “좋다.”라고 하고는, 그렇게 꾸어 주라고 하였다. 그들 부부는 열심히 노력하여 밤낮으로 재산을 모았는데 하는 일마다 잘 되어 재산이 천만금에 다다랐다.
이전에 장구(張嫗)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람책의 집에 와서 품팔이를 하다가 야합하여 임신을 하였다. 달이 차 해산하게 되자 밖으로 나가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았다. 주인이 가서 보고는 그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 미움을 쒀서 먹였다. 주인이
“당신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겠소?”라고 물으니 장구가,
“이제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또 꿈에서 신령님께서 張車子라고 이름하라 하였소.” 라고 대답하였다. 주람책이 깨닫고는
“내가 이전에 꿈에서 하느님에게 돈을 꾸었는데 張車子의 돈으로 나에게 빌려 준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재산을 이 아이에게 돌려주어야만 되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날이 갈수록 주람책의 재산은 줄어들었고 車子는 커서 주씨 집안보다 더 부자가 되었다.
이 이후 張車子의 이야기는 항상, 인생의 부귀빈천은 하늘이 결정한다는 典故로 사용되어 왔다.
4.양(梁)나라 때 유협(劉勰)은『新論』에서 다음과 같이 命과 相을 논하였다.
命은 생의 근본이요, 相은 命을 도와 이루게 하는 것이다. 命은 형체에서 형성되지 않으나 相은 형체에서 형성된다. 命이 있으면 반드시 相이 있고 相이 있으면 반드시 命이 있어서 똑같이 하늘에서 받으며 서로 보완되어 이루어진다. 사람의 命과 相에 보이는 賢과 愚, 부귀와 빈천, 壽와 夭, 길과 흉 등은 처음 잉태되었을 때 이미 결정된다. 그 가운데 진묘한 자는 전설의 황제, 해, 달, 별, 용 등의 꿈을 꾼는 따위의 영험한 신물에 감응되어 이루어진다. 또한 일반서민의 경우도 모두 천명을 타고나기는 한다. 모두 하늘의 별자리에 영향 받으며 길한 별자리를 받으면 길하고 흉한 별자리를 받으면 흉하다. 처음 氣를 받았을 때 相과 命이 이미 결정되면 귀신도 바꿀 수 없고 성현도 돌이킬 수 없다.
말들이야 이러하지만 방법론으로 보면, 후위(後魏)의 손소(孫紹)가 녹명(祿命)을 추산하고 도홍경(陶弘景)이『삼명초략(三命抄略)』을 쓴 이후로도 오랫동안 算命의 방법은 매우 조잡하고 단순하였다. 단지 태어난 날의 별자리를 가지고 추측한다든지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체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三國 魏晉南北朝時代의 算命家들의 공동모색을 거쳐 唐나라에 이르면, 비로소 한 차례의 일대 발전이 있고 질적비약이 일어난다. 그 원인은 陰陽五行과 출생의 년월일시를 좀더 긴밀하게 결합하여 일생의 길흉을 추단하는 학설이 唐나라 시대에 방법상의 확인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동서문화의 유례 없는 교류에 힘입어 인도와 서역의 점성술이 연이어 들어와서 算命術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宋나라와 元나라 사람들의 문헌을 통하여 보면, 星象과 曆法에 비추어 命을 아는 일은 唐나라 貞元 연간(785~805)부터 비롯되었는데 당시 서역 강거국(康居國)에서 온 이필건(李弼乾)이란 술사가 인도 바라문의 방술서『율사경(律斯經)』을 전했다. 원래의 토양에 외국에서 들어온 술수법의 촉진이 곁들여져 중국 본래의 算命術은 날개를 펴고 치솟는 발전을 하였다.
5. 唐나라에서 算命術이 급속히 발전하고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그 핵심적 인물은 이허중(李虛中), 一行스님(본명: 張遂), 상도무(桑道茂) 등이다. 특히 李虛中은 唐 德宗 貞元 年間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뒤에 殿中侍御史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평소 陰陽五行을 정밀히 연구해서 年月日의 天干地支로써 일생의 길흉화복을 추정해 내는데 “백에 하나 둘도 틀리지 않았다“ 라고 한다. 이것은 唐代의 대학자인 한유(韓愈)가 지은「전중시어사이군묘지명(殿中侍御史李君墓誌銘)」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리하여 후세인들은 그를 命理學의 개산조사(開山祖師)로 떠받들게 되었다. 東漢時代의 王充의 학설은 李虛中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조잡하고 완전한 체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6.이상은 지금까지 정론으로 되어 있다. 즉 李虛中은 時는 사용하지 않고 年月日만으로 命을 추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편저자는 생각한다. 『四庫全書總目提要補正』에 의하면 문제의 이 묘지명의 내용을 두고 후대인이 잘못 해석한 데 기인한 것이 된다. 즉最深於五行書, 以人始生之年月日所直日辰, 支干相生勝衰死生旺相斟酌, 推人壽夭貴賤利不利云云에서생각해보건대 천(天)에는 12진(辰)이 있기 때문에 일일(一日)은 12時로 나누어지고 日이 某의 辰에 이르게 되면 곧 時이다. 그러므로 時 또한 日辰이라고 부른다. 『國語』에 ‘성(星)과 일진(日辰)의 위(位)는 모두 북유(北維)에 있다라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韓愈가 지은 李虛中의 묘지명 가운데 ’일진(日辰)‘이란 말을 잘못 해석해서 마치 李虛中이 時를 쓰지 않고 算命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李虛中命書』三卷이 『永樂大典』에 실려 있고 그 내용을 보면 八字를 모두 논하고 있다는 것이『四庫全書總目提要補正』의 내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五代末 宋初의 徐子平의 四柱法은 그 연원이 李虛中에 있다고 해야 한다.
徐子平의 名은 居易이며 당시 관상술에 뛰어난 마의도인(麻衣道人), 진도남(陳圖南)과 함께 화산(華山)에 은거하여 命理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徐子平에 의하여 中國의 命理學은 더 완숙된 체계를 갖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서자평락록자부주(徐子平洛祿子賦注)』二卷이 있는데 明나라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설곽(說郭)』이라는 총서에 편입돼 있다. 후인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命理學을 ‘子平術’이라고도 한다.
7.四柱法은 宋代에 이르러 널리 유행하게 되었고 유학자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주희(朱熹)의 친구 서단숙(徐端叔)도 그러한 사람이다. 朱熹가 쓴 「증서단숙명서(贈徐端叔命書)」의 한 대문을 여기에 옮겨 본다.
……대개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는 陰陽五行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것이 굽혀지고 펴지며 자라고 사그라지는 가운데의 복잡한 변화는 참으로 깊이 캐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사물이 부여받은 현(賢)과 우(愚), 부귀와 빈천의 차이는 단지 어둠과 밝음, 두터움과 엷음의 근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치를 쉽사리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서단숙은 유학자로서 이런 이치를 이미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연구의식이 매우 치밀하고 논리전개가 대부분 합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학자들이 만약 그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서단숙의 방법이 옳음을 알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태어나면서 받은 것이 본래 그 정도였으며, 부귀영화는 탐욕을 갖는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고, 빈천곤궁은 교묘한 재주가 있다고 해서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朱子大全』冊九,(臺北:臺灣中華書局:1983,文75, pp3~4)〕
이상은 命理學을 朱子가 지지한 것으로 되고, 命理의 근본원리를 아주 적절하게 말했다고 할 것이다.
현재까지 유행하는『淵海子平』은 宋의 徐子升이 徐子平의 연구 결과를 집적하여 재편집한 것으로 중요한 저술의 하나이다.
8.元代에는 통치자들은 비록 한족에서 몽고족으로 교체되기는 했으나 한족사회에서 산명의 풍토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이 시기의 저술로서는 도종의(陶宗儀)의『철경록(輟耕錄)』과 이흠부(李欽夫)의『子平三命淵源注』등이 있을 뿐이다. 元이 단명한 탓이다.
9. 明나라에 들어와서 算命術의 유행은 전대미문의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의 개국공신 송렴(宋濂)은「록명변(祿命辨)」이란 글을 지어 算命學의 역사연원에 대해 처음으로 계통적으로 밝혔다. 이 시대에 들어와 命理書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적천수원주(適天髓原注)』는 明初의 중신(重臣) 유기(劉基)의 손에서 나왔는데 참고 가치는 오늘날까지 대단하다.
심효첨(沈孝瞻)의『子平眞銓』, 만육오(萬育吾)의 『三命通會』, 장남(張楠)의 『신봉통고명리진종(神峰通考命理眞宗』등도 매우 훌륭한 저서들이다.
10.淸代에 이르러서도 算命術은 여전히 성행하였다. 기윤(紀昀)과 유월(兪樾) 같은 지식인들이 부추기고 개입해서 사회적으로 命理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매우 짙었다. 주요 저술로는 진소암(陳素庵)의『命理約言』과『滴天髓輯要』, 임철초(任鐵樵)의『滴天髓闡微』, 그리고 저자미상의『란강망(欄江網)』(뒤에『窮通寶鑑』으로 冊名이 바뀌었다.)등이 있다.
11.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命理硏究는 東漢 말년에 개념을 확립하고 초보적 형태를 형성한 이후 唐나라 李虛中에 의해 四柱法의 기본체계가 이루어졌고, 뒤에(宋初) 徐子平의 四柱法에 의해 더욱 성숙하게 되었다.
徐子平 이후 宋元明淸代는 사람들이 운명에 희망을 걸고 算命術을 신봉하는 것이 마치 봇물이 터져 나온 것처럼 수습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천하의 가장 존귀한 황제마저도 술사를 불러 앞으로 시운이 어떻게 될 것이며 본인이 장수할 수가 있는지 등을 묻곤 하였다고 한다. 황제의 보좌에 앉아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늘 불안한 상태였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그러니 압제와 핍박을 극도로 받고 있는, 살길이 보장되지 못한 일반대중이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中華民國이 수립된 후 대군벌과 대관료들은 장개석(蔣介石)을 위시하여 모두 命理를 믿었다. 옛 상해에는 명상술(名相術)을 생업으로 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는 학문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었다. 원수산(袁樹珊)과 위천리(韋千里)가 명성을 떨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