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한다.
지니고 있는 슬픔 모두를 바람에 실려 날려보낼 수 있도록.
하프를 연주한다.
그 신비로운 멜로디에 나의 눈물을 가득 담아.
아름답지만 슬픈…오히려 슬프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삶.
눈물 번진 미소를 띈 채 한없이 걷는다.
그리고 모든 걸 노래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의 그림자를 노래한다.
어둠 속에 숨어서 어둠을 찬양한다.
살아있다는, 그 작고도 너무나도 소중한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지만
나에게 주어졌던 고달픈 삶은 떠올리기도 싫기에
빛에도 그림자가 있고 어둠에도 한 줄기 빛이 있듯이
가리워진 곳을 노래한다. 겉의 요란스런 포장에 의해 드리워진 그늘을 노래한다.
노래에 나왔던 표현 그대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랫 소리였다.
미묘한 선율을 자아내는 금빛 하프…그 금빛 하프의 날카로운 줄들을, 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재빠르고 조심스럽게 스쳐가는 가느다란 손가락들.
갈색 탐스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살며시 드러난 흰 목은 햇빛에 비추어 대리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 사슴같은 목이 조금씩 떨릴 때마다 입술에서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미성(美聲)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다. 음유시인의 외모에도 그 목소리에도 하프 소리에도.
항상 무료하고 따분한―틀에 박힌 듯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그들에겐 더할 수 없는 눈요기 거리였다.
음유시인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눈꺼풀을 내리깔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점차 노랫 소리를 작게 하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끝마쳤다.
모두가 미친 듯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음유시인의 곁에 다가가서 한 마디씩 했다.
"정말…정말로 멋있어요!!!"
어린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두 손을 마주쳤다.
"좀 슬픈 과거를 가지고 계신 것 같네요.음―하지만 그렇게 고달파하진 마세요.언젠간 희망이 올 거에요."
중간 정도의 나이를 지닌 사람들은 인생이 뭔지 이미 안다는 듯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힘겨우신가 보죠?하지만견뎌내십시오.제 경험으로 인해 알건데 꼭…행복은 올 겁니다.잠시 나마 저희를 기쁘게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좀 나이 먹은 이들은 매우 점잖고 예의바르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음유시인이 바랬던 말은 이런 쓸데 없는 위로의 말 따위가 아니였다. 음유시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음유시인의 손이 축 늘어뜨려졌다.
'이 번에도…찾지 못하고 마는가.'
음유시인은 허탈함에 잠겨 피식 웃고는 하프를 어루만졌다. 너무나도 손에 익은 자신의 하나 뿐인 소중한 보물.
요즘엔 별로 손을 봐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때 '태양의 하프'라고 불리웠던 하프.
자신과 함께 먼 거리를 여행해다닌 탓에 약간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긁힌 자국도 여러 군데 있었다.
음유시인은 하프의 긁힌 자국을 볼 때마다 자신의 가슴을 긁힌 듯이 마음 아파했다.
하프는 자신의 분신이였다. 아니,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자신보다도 더 소중했다.
"저,하루 묵어가시겠어요?"
음유시인은 고개를 들었다. 쾌활해 보이는 소녀가 수줍어하며 권유하고 있었다.
음유시인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근심들을 남에게까지 피해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마을에 얽힌…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괴로운 기억들이 많지만 이미 그런 것들에 대해선 초연해져 있었다.
지금껏 지나쳐온 마을들에게도 역시 얽혔던 기억들이 많았다. 이 마을은 그런 기억들이 좀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음유시인은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이미 상처 받은 마음에 더욱 큰 상처가 남더라도 무슨 상관이겠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전 인생은 고통스러웠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수심과, 미간에 잡힌 가느다란 주름은 그 것을 확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억지로라도 미소를 띄어 보이면 그 것들은 단번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의 보석같이 화사한 미모가 어두운 부분같은 건 말끔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강한 자에 의해 소리 없이 제거되는 약한 자처럼.
"이리로…."
안내하는 소녀를 따라 음유시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살랑대는 머리카락이 나풀되는 모습은 환상적이였다. 갈색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란 걸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음유시인은 그 마을 사람들에겐 이방인(異邦人),그 자체였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미모에 가슴을 찢는 것 같이 처연하고 섬찟해질 듯이 매력적인 노랫 소리.
하프가 낼 수 있는 최상의 멜로디인 것 같이 생각될 정도로 맑고 꾸밈 없고 명쾌한 하프 소리.
사람들은 신선한 기쁨에 취한 채 오랜 만에 찾아온 이방인을 반겼다.
이방인인 음유시인은 그들의 말대로 이 곳에 하루를 묵고 가기로 했고 그 사실에 모든 사람들은 환한 얼굴로 다시 그 연주를 듣기를 희망했다.
음유시인은 만면의 피로함을 감춘 채 보기 좋은 미소를 띄었다. 위선이라고 여겨질 만큼 꽃다운 미소.
"물론 괜찮습니다.제 보잘것없는 노래와 연주를 다시 듣고 싶으시다니 황송할 따름이군요."
정말로…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이런 걸까?
모든 사람들은 그 음유시인이 신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혹시 신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한 건 분명 오만한 행위라고 생각될 지도 몰라도 그 행동이 당연하게 생각될 만큼 음유시인은 달라 보았다.
소박하기 그지 없는 마을 사람들 앞에 서있기에 더욱 그랬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통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갈 정도로.
그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나오더니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훈계하듯 말했다.
"안 돼요.안 그래도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고 힘겨우실 텐데 우선 좀 쉬셔야죠."
음유시인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말이였다. 음유시인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유시인의 손은 얼음같이 싸늘하지도, 불같이 뜨겁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의 온도와 비슷했다.
음유시인이 소년의 머리에서 손을 치운 뒤에도 소년의 머리카락에 남아있는 약간의 온기.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고 멋쩍게 웃었다.
음유시인은 그 미소에 답이라도 하듯 활짝 웃어 보였고 장미같이 매혹적인 그 미소에 소년의 얼굴은 더욱 발그레해질 뿐이였다.
음유시인은 안 그래도 피곤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선망의 눈길에 못 이겨 마지 못해 승낙한 것이였는데 소년이 이런 말까지 해주니 정말 고마웠다.
음유시인은 입가에 배어나오는 만족스런 미소를 참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좀 피로한 것 같기도 하군요.그럼 이 소년의 말을 감사히 받아들여 좀 쉬도록 하지요."
그런데…분위기가 좀 어색해졌다.
음유시인은 혹시 자신의 말 중에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보았으나 억양도 말투도 완벽했다. 자신의 기쁨이 드러나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음유시인은 좀 불안해 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모두들 입을 가리며 키득대고 있었고 그 소년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되어가지고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음유시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말을 잘못했습니까?"
"…쿡…쿠쿠쿡……."
마침내 침묵을 뚫고 한 소녀가 키득댔다.
음유시인은 좀 불쾌함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 웃음소리는 비웃는 것처럼 들렸고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이 여겨졌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음유시인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음유시인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방금의 소녀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죄송합니다.그러니까-저희들이 웃은 이유는 …그러니까…….…쿡…."
소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다시 웃었다.
그리고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열심히 웃음을 참았다.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소녀의 얼굴은 좀 찡그려져 있었다. 그만큼 우습다는 뜻이리라.
소녀는 손가락으로 전의 소년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식 웃고 있었고 음유시인은 그들의 무리에서 자신이 제외된 듯한-그러니까 쉽게 풀이해 따돌림 당한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음유시인은 이방인이였고 당연한 일이였지만 음유시인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런 느낌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였다.
소년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고 있었고 소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다시 한 번 소년을 가리키며 설명하듯 말했다.
"저 앤…무성(無性)이거든요.안 그래도 자신의 특이한 체질에 대해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데 자신을 남자, 혹은 여자 하고 쉽게 단정지어 버리는 이를 보면 매우……쿡…."
무성…. 음유시인은 머엉했다.
분명히 특이한 체질이였다. 특이한…정말로 특이한. 음유시인은 야릇한 미소를 띄었다.
희망.
지금껏 자신과는 무관했던 그 단어가 자신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음유시인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마음 속 깊숙히 숨긴 채 태연스레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