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집사람과 거시기를 하던 중에 결정적인 순간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었다. 일단 마무리를 하는 결정적 순간이므로 왠만하면 될 것 같았으나, 그 통증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픈 기억이 거의 없었을 정도의 통증이다. 관자놀이부터 시작해서 뒷목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통증은, 군 시절 야메로 했던 거시기 수술 후유증으로 터진 부분을 마취 없이 생으로 꿰매던 통증의 수 십 배를 능가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심장이나 혈관 쪽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극도의 흥분으로 심장이 빨리 뛰어 혈관계에 이상이 생기면서 두통이 오고 사정이 되지 않는구나” 하는 자가진단에 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마누라 위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매우 쪽 팔리고 아크로바틱한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나서 마누라 몰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이 군대 말년 시절 한 달을 보내는 것보다 길게 느껴졌다.
결과는“정상”이었다. 십 여장의 파일에 나타난 수치는 심장, 신장, 간, 당뇨 등등 대부분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이 내 담당의사도 술 마시지 말고, 담배 끊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였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행여 돌팔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아 씨바, 나도 의사나 함 해볼까”하는 심정은 누구나 느꼈을 터다.
정상 판정을 받고 병원문을 나서면 서도 내내 찜찜했다. 거시기 마무리가 안 되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은 한 달쯤 후에 밝혀졌다. 우연히 목동 모대학병원의 레지던트를 (그것도 매우 우아한 젊은 여의사다)만나 운행 중, 쪽팔림을 무릅쓰고 문의한 결과였다. 이 여의사 대뜸 물어보길 “혹시 커피 끊으셨어요?”였다. 여의사의 어머니가 커피를 끊고서 매우 심한 편두통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원인은 직장 생활 중 사내 볼링대회에 나갔다가 상품으로 받은 커피 머신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를 이 기계를 한동안 방치하다가, 원두의 우아함을 느껴보려고 시작한 커피가 발사 실패의 원인이었다. 원두를 내리는 동안 집안에 퍼지는 커피의 은은한 향과 더불어 신기하게도 브람스나 소니 롤린스와도 어울리는 것이다. 자판기에 길들여진 혀와 뇌가 서서히 녹아 내릴 즈음, 하루에 1리터가 넘은 양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 년간 커피를 마시면서 나도 모르게 카페인에 중독이 된 모양이었다. 아시다시피 커피 원두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진짜 고급 원두는 키로에 수 십 만원을 호가하고 그 이상 가는 것도 꽤 많다. 나야 그 정도의 호사를 누리지는 못하고 200g에 4~5천원 정도하는 저렴한 0플러스표 원두를 주로 먹었지만, 사단은 이 커피 머신이 고장나면서 부터이다. 이 참에 커피를 끊어 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커피를 두어 달 간 끊은 결과가 “심한 두통으로 인한 발사 실패”였다. 그 여의사의 전언에 의하면 호주 사람들은 하루 평균 2리터 이상의 커피를 마신단다. 또한 카페인은 중독만 될 뿐 인체에 어떤 해를 끼치는 물질은 아니란다. 물론 매우 심하면 문제가 되지만 호주 사람 정도의 양이면 괜찮다는 말이다. “그냥 부담 없이 드시고 싶을 때마다 드시면 됩니다”가 그녀가 알려 준 처방이었다. 세상에 이런 명의가!
그 다음날 바로 커피를 사다가 한 대접 끓여 먹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난 후, 테스트 삼아 다시 마누라에게 도전하여 성공하였다. 그날 이후 이제 마누라 위에서 죽는 상상은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 여의사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하려고 목동에 갈 때 마다 PDA를 노려보며 긴장하지만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녀가 술을 끊은 듯 하다.
PS
커피는 적도를 기준으로 남북 30’에 걸친 지역에 분포하는데 대부분 도로가 없는 열대우림과 사막, 고원의 오지에서 자란다. 거대한 농장도 있지만 거의 소규모 경작지에서 키운다. 당연히 경작자는 변방의 소수민족이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국의 공식어로 말할 줄 모른다.
전세계 교역 액수로 치면 석유가 1위이고 커피가 2위이다. 이동거리도 같은 순위이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커피 생산량의 50% 이상을 미국과 유럽이 소비한다. 북유럽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원두 10kg이 넘는다. 미국이 4.1Kg, 우리나라는 1.8Kg정도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은 2009년 기준 74Kg이다.
석유나 커피의 생산자는 모두 불행하다. 커피의 생산자 가격과 소비자 가격의 차이는 300~400배에 달한다. 차액은 수많은 중간상인 차지이다. 희한하게도 커피가 소비되는 지역에선 부가 쌓여가지만 생산지에서는 빚만 늘어간다. 커피 생산지의 일용 노동자들은 하루 1달러도 벌기 힘들다.
커피 경작지는 안타깝게도 분쟁지역, 특히 지뢰매설지역과 겹친다. 니카라과 커피농장에는 13만개의 지뢰가 묻여있고, 콜롬비아에서는 커피노동자가 하루에 세 명꼴로 지뢰에 희생된다. 앙골라의 인구는 400만명인데 전국에 살포된 지뢰는 700만개다. 그래서 앙골라는 전체 수출의 90%가 커피였으나 지금은 2%도 안 된다. 커피를 수확해도 도로 곳곳에 널린 지뢰 때문에 항구까지 안전하게 수송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Ps-Ps
이 추신에 있는 자료는 딘 사이컨의 자바트레커(Javatracker, 2009. 황소걸음)에서 저자의 동의 없이 인용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가격이 착하므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국내에도 공정무역 커피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히말라야00이라고 네팔에서 생산된 원두로 알고 있습니다. 남미산의 저렴한 원두보다 2배 정도의 가격이지만, 네팔 산속에 이름모를 커피 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해 한동안 먹어 본 적이 있습니다. 최고의 커피라곤 할 수 없지만 고급 미각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면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내게 다시 커피 머신이 생긴다면 이것을 먹을 예정입니다.
참, 공정무역 마크가 붙은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커피는 아닙니다. 일부 커피생산지에서는 공정무역으로 지불된 돈을 그 곳의 관리들이 삥땅을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끝까지 자금을 추적해서 실제로 노동자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는지를 감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랍니다.
글을 마무리 하려다가 혹시라도 “나는 자판기가 최고다”라는 분이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저도 자판기 좋아합니다.
일산 백석 신선설렁탕 자판기가 100원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요, 제가 아는 유일한 100원짜리 자판기는 정왕동 단지촌 자판기입니다. 영통 농협 건너 식당 자판기는 200원데 가끔 삑사리납니다. 강남 반포 미도 아파트 골목 설렁탕집 자판기와 도곡1동사무소 건너편 주택가에 있는 자판기가 강남에서 200원하는 자판기로 알고 있습니다.
일산 중산동 산들마을 사거리 화로구이 자판기는 눈치 안채게 살짝 누르면 공짜입니다. 병점(사실은 진안) 먹자골목 공용주차장 옆 자판기는 관리를 하지 않아서 비추입니다. 가끔 400원짜리 자판기도 보이는데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8잔만 팔면 전기세가 나오는데요
첫댓글 맞습니다~~저도 커피를 많이 하는데 딱 끊고나서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죽을거같아 편의점서 캔커피 하나 마시니 스르륵 낫더군요
커피중독 이어습니다 요새는 7시전 하루 2~3
잔으로 줄여습니다
저도 커피 무지 조아라합니다. 오죽하면 커피전문점 사장까지 했네요. IMF때 쫄딱 망했지만서도 ㅠㅠ
커피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언제 한번 뵙고 커피한잔 나누지요.
전 모카 카프치노가 참 좋습니다.
커피의 달인으로 인정합니다 나열하신 것들을 저도 다 섭렵했습니다 ㅎㅎ
일나와서 커피로 시작합니다 비로서 활동할수있는 준비입니다 ㅎㅎ
다비도프에다가 내려서 우아하게 커피향을 음미하며 마셔보던 그때가 있었던가?...
몇백그람에 기십만원하는 원두커피는 마시질 못해도 특히 갓볶은 원두 2~3만원대면 스타벅스나 여타 브랜드커피 전문점에서 구입할수가 있답니다..하지만 요즘은 초록색 띠가붙은 믹스커피(3300원대)나 수프리모 모닝아로마(4000원대) 즐겨마십니다..것도 하루에 5~6잔 정도..너무 많이 마시는거 아닌가 늘 스스로 고민 해대면서 마시곤 했었는데 혈계님의 글을읽고 조금 안심입니다..ㅎ~
커피에 대해 남다른 사랑으로 쓰신글과 정보 잘 읽었습니다..건강하세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커피를 좋아 하면서도 조금은 자제 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럴 필요가 없군요.
올만에 혈계님 좋은글 보고 갑니다...................^.^*
마누라랑 몇년만에하시길래 그리 흥분을 ㅎㅎ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셧네요!! 20년 이상을 하루15잔에서 20잔 이상 마시던 것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서
한달정도 깊으잠을 못자서 고생하곤 다시 원상복귀 했음니다.
롯데 원두 칸타타 캔커피만 하루에 2~3개 마십니다. 프림 넣은 것은 커피가 아닙니다. 기름덩이 마시는거죠.
저도 최근 3년 정도 커피를 끊었는데...가끔 뒷목부터 올라오는 편두통이 있네요..인체의 신비인지...3년가량을 안마시던 커피를 최근 몇일전부터 2~3일에 한잔씩 찾게 되네요..그러고 보니 두통도 없어진듯하고...가끔 한잔씩 마셔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