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준의 스포츠현장탐색' 세 번째 시간에는 '야생마 이상훈 선수'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첫번째 이야기에 이어서, 극적인 선수 인생을 살았던 이상훈 선수를 만나보시죠.
긴머리를 휘날리던 '야생마' 이상훈 선수
(4) '독립투쟁' - 해외진출을 향한 뜨겁고도 외로운 몸부림
이상훈 선수는 입단 3년차인 1995년에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부터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욕심을 품게 됩니다. 그 당시 재미야구협회장이자 메이저리그 보스턴레드삭스Boston Redsox 구단의 아시아지역 에이전트였던 고 박진원씨가 미국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거주했던 이상훈 선수의 인척을 접촉하면서 그의 해외진출을 향한 염원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유계약제도(FA)'가 시행되기 전이었습니다. 프로야구의 FA제도는 미국의 메이저리그가 1976년, 일본은 1993년, 우리나라는 1999년부터 도입되었습니다. 이상훈 선수에게 외국의 유혹이 시작 된 1995년은 FA 자격을 얻어서 해외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한국프로야구 규약의 제한에서 자유로웠던(KBO 미지명) 박찬호 선수가 1994년 1월에 엘에이다저스LA Dodgers에, 조성민 선수가 1995년 10월에 요미우리자이언츠에 입단하였고, 11월에는 선동렬 선수가 소속팀 해태타이거즈(이하 '해태')의 배려로 주니치드래곤즈(이하 '주니치')에 입단하면서부터 국내선수의 해외진출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점차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훈 선수가 LG구단에 본인의 해외진출 의사를 최초로 표명한 것은 1996년 1월 8일에 개최된 LG구단의 신년하례식 직후 인터콘티넨탈 호텔 커피숍에서 있었던 저와의 연봉협상 테이블에서였습니다. LG가 1995년에 비록 2년 연속 우승에는 아깝게 실패했지만 최다관중 동원 신기록과 함께 이상훈 선수의 개인기록도 워낙 빼어나서 구단에서는 전해의 4,800 만 원에서 대폭 인상된 1억 원의 연봉을 책정해서 저는 비교적 여유로운 마음으로 협상테이블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연봉에 관한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가 저에게 던진 첫마디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단장님! 올 시즌이 끝난 후에 저의 해외진출을 허용해 주시면 올해 연봉은 한 푼도 안 받겠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돌출발언에 한동안 멍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연봉협상을 진행 할 수가 없었고, 이상훈 선수가 던진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폭탄을 안고 구단으로 돌아와서 강정환 사장, 이광환 감독과 함께 대책을 협의했습니다. 며칠간의 숙의 끝에 LG구단이 내린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첫째, 현 시점에서 이상훈 선수의 해외진출은 허용할 수 없으며 둘째, 만일 LG가 우승(V3)을 하게 되면 그때에는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LG는 워낙 전력의 조화도 뛰어났고, 팬의 절대적인 성원과 그룹의 부러울 것이 없는 지원 등을 고려했을 때 또 다른 우승의 순간이 그렇게 멀지 않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단의 결정은 해외진출의 꿈에 부풀어 있었던 이상훈 선수 측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었고, 이후 그는 ‘(전지)훈련 불참, 야구포기, 2년 뒤 완전자유계약 요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구단을 압박해왔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기나 긴 시간 동안 이 사태를 중재하느라 저를 비롯한 구단 프런트는 매우 힘든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광환 감독을 비롯한 현장스태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 유명한 임선동 선수 일본진출 파동 역시 그 무렵 법정투쟁에 돌입하였기 때문에 LG로서는 산 넘어 산인 격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스포츠신문이 여론을 주도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해의 성적부진과 함께 스포츠신문의 배달판과 가판은 온통 LG기사로 도배가 되었고, 저와 구단 프런트는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상훈은 혼자만의 독립투쟁으로는 단단하게 굳어 있는 기존의 구단으로 단단하게 엮어진 카르텔(Cartel)을 깨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일종의 독자적으로 선수협의회를 구성하는 것도 시도했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휴전으로 이어진 1996년과 1997년이었습니다.
(5) 'U - 턴' - 미국 -> 일본 -> 미국 -> LG -> SK로의 연속 U턴
SK로 다시 트레이드 된 이상훈 선수
한편, 시간이 지나면서 LG 구단도 야구규약과 구단의 입장을 앞세워서 그의 해외진출을 계속 반대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상훈 선수와 프로입단 동기인 해태의 이종범 선수가 1997년 시즌 종료 후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여론도 자유계약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이상훈의 해외진출을 허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LG구단도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먼저 레드삭스 구단과 비밀리에 접촉을 해서 11월 27일과 12월 16일에 1. 임대기간은 2년으로 임대료는 250만 불 2. 이상훈 선수의 연봉은 220만 불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담긴 가假 계약서를 접수하였습니다. 마침내 1997년 12월 24일, LG는 “이상훈 선수의 해외진출을 허용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나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집요하게 이상훈의 입단을 시도했던 레드삭스를 제외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반발에 따라 자유계약에서 포스팅시스템(Posting system : 공개 테스트 후 입찰계약)으로 조건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훈 선수는 그 당시 공개적인 테스트를 받을 만큼 몸 상태가 완벽하지 못했고, 2월 19일 엘에이의 세리토스Cerritos, LA대학교와 3월 25일 피닉스 글렌데일Glendale, Phoenix 시립구장에서 개최된 두차례의 워크아웃Workout에서 만족할 만한 기량을 선보이지 못했고, 참가했던 18개 구단 중에 단지 5개 구단만 입찰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나마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한 레드삭스 구단은 당초의 약속을 배신하고 형편없는 이적료(60만 불)를 제시해서 LG가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이상훈 선수의 미국진출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즈음 LG의 자매구단인 일본의 주니치 구단이 그의 미국진출이 무산되자마자 곧바로 입단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훈 선수가 일본행을 거부하면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LG의 강력한 항의에 레드삭스는 4월 7일까지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LG는 이를 거부했고 마침내 4월 9일, 레드삭스는 ‘이상훈 영입포기’를 확정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상훈 선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서 일본으로 U-턴해서 주니치에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이상훈 선수는 일본 진출 후 ‘삼손’이라는 애칭으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고, 주니치 구단이 1999년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주니치가 제시한 계약연장을 위한 고액의 제시를 뿌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미국 무대(레드삭스)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미국 무대에서의 활약은 기대에 못 미쳤고, 2002년 4월에 친정 팀 LG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러나 LG에서는 뜻하지 않게 이순철 감독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고, 마침내 LG구단은 “이상훈을 트레이드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이례적인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이상훈 선수는 2004년 1월에 SK로 트레이드 되어서 SK의 단장이었던 저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LG는 2004년을 ‘제2 창단의 해’로 선언하고 대대적인 체질개편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순철 감독에게 전적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그 일환으로 감독과 갈등 중이었던 이상훈 선수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어 놓게 된 것이었습니다. 협상전략상 이쪽의 카드를 먼저 공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치였지만 그 때의 LG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언론은 당연히 촉각을 바짝 세우고 연일 취재에 열을 올렸는데 대부분의 여론은 ‘삼성’과 ‘롯데’를 트레이드 대상으로 거론했으며 SK는 일체의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SK의 조범현 감독이 이상훈 선수의 영입을 강력하게 요구 했습니다. SK는 2003년에 못 다한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투수진의 보강, 그 중에서도 탄탄한 마무리진의 구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조웅천과 함께 훗날 실패로 끝난 더블스토퍼Double stopper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의 트레이드 요청에 대해서 과연 그것이 적절한 선택인지를 숙고한 끝에 제가 협상테이블의 전면에 나서기로 결정했고, LG구단의 고 유성민 단장, 이순철 감독과 몇 차례 비밀협상을 진행한 끝에 전격적으로 트레이드가 결정되었습니다. 운명의 신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했습니다.
(6) '로망스' - 예체능의 결합, 이상훈과 기타(Guitar)의 인연
로커로 변신한 이상훈 선수
잘 알려진 것처럼 이상훈은 야구선수 은퇴 직후에 한동안 록그룹 ‘왓!What’의 리더로서 밴드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홀연히 유니폼을 벗어던진 이면에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과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모르지만 치열했던 선수생활의 와중에서 이상훈에게 야구는 ‘도전’이었고, 음악 특히 기타는 ‘안식처’와 같은 포근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 클래식기타의 명곡인 ‘로망스(Romance de Amor)’를 듣고 기타음악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이후 하늘을 날 듯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타와 음악은 그에게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처음 확인한 것은 입단 3년차인 1995년 2월 말이었습니다. 그 무렵 LG는 1994년의 완벽한 우승의 환희를 뒤로하고 새롭게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그해 2월 22일에 구본무 구단주가 LG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신임회장의 첫 번째 해외출장지가 야구단의 전지훈련지인 오키나와로 결정되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뭔가 특별한 환영행사를 펼치기로 했습니다. 선수대표 몇 명이 무대공연을 준비했는데 이상훈 선수가 기타반주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날 그의 연주솜씨를 보는 순간 보통수준 이상으로 프로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훈 선수가 미국에서 LG로 돌아 온 뒤에 이순철 감독과의 갈등 끝에 SK로 트레이드가 된 배경에도 기타가 등장했습니다. LG가 2004년 1월에 호주로 전지훈련을 떠날 때 이상훈 선수가 기타를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이순철 감독이 이를 제지하면서 그것이 결국 서로 헤어지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7) '요코즈나橫綱' - 요코즈나 식의 결연한 은퇴결정
이상훈 선수가 SK에서의 두 번째 시즌 중이었던 2004년 6월 6일, 그 당시 SK의 단장이었던 저는 며칠 전에 갑작스럽게 은퇴의사를 밝힌 이상훈 선수와 인천문학경기장 내의 단장실에서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의 눈빛 속에서 이번의 은퇴결정이 결코 번복할 수 없는 확고한 결심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92년 11월에 입단협상을 위해서 처음 만난 이후 영광과 고난의 순간들을 오랫동안 같이 해 온 이상훈 선수였기에 느낌이 남달랐습니다. 그가 3억 6천만 원이나 되는 거액의 잔여연봉까지 과감하게 포기하고 시즌 중간에 유니폼을 벗기로 결정한 것을 보고 “과연 이상훈 답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의 은퇴결정에서 일본의 국기 스모相撲의 최고단위인 요코즈나의 은퇴가 떠올랐습니다.
일본 스모선수는 요코즈나가 되면 부와 명예와 함께 명실상부하게 일본을 상징하는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요코즈나의 은퇴 결정과정이 바로 스포츠 맨 다운 모습입니다. 만약 요코즈나가 두 개 대회 연속으로 성적이 5할 승률 이하가 되면 자동적으로 은퇴를 선언해야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만일 그럴 위험이 닥치면 부상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은퇴를 미룰 수도 있지만 대개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스스로 은퇴를 깨끗하게 발표하고, 일본 국민들은 그러한 요코즈나의 결단에 감격합니다.
이상훈 선수가 자기의 공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과감하게 은퇴를 선언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습니다. 스포츠현장에서는 현역은퇴를 앞두고 이런저런 미련이 남아서 쉽게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선수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조금 더 본인다운 멋진 모습을 보인 뒤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싶은 욕심이 은퇴결정을 미루게 하지만 역사는 그러한 모습에 결코 많은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현역은퇴 결심을 최종적으로 통보하면서 이상훈 선수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LG의 유니폼을 벗게 되었을 때 은퇴를 결심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역시 이상훈 다운 말이었습니다.
이상훈 선수의 야구인생은 ‘끊임없는 도전과 투쟁’ 그리고 ‘성취의 역사’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현역은퇴 후 음악활동에 전념하던 그의 야구재능을 아까워했는데 그는 2012년 말부터 고양원더스의 코치를 맡으면서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고, 올해부터는 두산의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부디 선수로서 그가 남긴 뛰어난 성과에 못지않게 지도자로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겨서 “최고의 선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힘들다.”라는 속설을 과감하게 타파해 줄 것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두산 코치로 거듭난 이상훈 선수
Q : 이것으로 이번 회의 스포츠현장탐색을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A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