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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세상이 거짓 평화에 물들어 있고, 그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분열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이요, 어둠으로부터 오는 분열이 아니라 빛으로부터 오는 분열입니다.
그렇습니다.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 1,2)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했던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자신들의 어둠이 들통나는 것을 막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일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루카 12,50)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희에게 ‘피의 세례’를 베푸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과 ‘피의 세례’는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불로 어둠을 태우고 자신을 분열시켜야 하는 일이요,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진실되게 마주하고, 거짓된 자신과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불안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말씀의 영’께서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하오니,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이제는 제게서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가 중병에 걸린 까닭입니다.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불같이 타오르고 칼같이 끊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얼핏 보면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의미가 있고 옳은 말씀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보면, 이 분열은 틀림없이 좋은 분열이고 거룩한 분열일 것입니다
그 분열은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그러나 타파해야 할 그런 분열이 아니고,
분명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는 분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분열은 자기중심적 분열이고 악마적이지요.
우리는 이해득실을 따져 이합집산하고, 좋으면 합치고 싫으면 갈라서는 그런 분열이잖습니까?
그리고 악마가 노리는 것은 늘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고 그 백성을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거잖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하느님 뜻을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분열이고, 그래서 거룩한 분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평화롭지 못하면서도 평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치를 살지 못하면서도 일치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일치를 원하면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평화와 일치를 살지 못하는데, 거룩한 일치와 분열은 더더욱 살기 힘들겠지요.
그런데 거룩한 일치는 무엇이고 거룩한 분열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일치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일치는 알겠는데 거룩한 분열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분열의 두려움이 있지요.
그래서 신자들조차 하느님과의 분열보다 사람과의 분열을 더 두려워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불의와 타협하며 같이 사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일치도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열은 악령들과는 결단코 맞서고 갈라서는 분열이고,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칼같이 끊는 분열입니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반대하는 육신의 아버지와 칼같이 갈라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버지로 모시기로 하였지요.
그런데 불의를 칼같이 끊기 위해서는 사랑이 불같이 타올라야겠지요?
뒤집으면 하느님 사랑이 불같이 타올라야 불의를 칼같이 끊을 수 있겠지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분심이 심하더라도>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지리라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든 것과 대항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가족에게까지 몰이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 복음의 불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
…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
…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
(미카 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이십니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불은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갈라지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와 맞서는 새로운 체제를 갖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창시자로 기억됩니다.
많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수도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실현할 수도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젊은 안토니오는 약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을 때 부자 청년의 복음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문제가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팔고 사막으로 들어갔고, 20여 년을 수련한 후에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은둔 수도회의 초창기 형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안토니오에게 떨어졌던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이는 혼자만 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불타도록 만들라는 명령과 같았습니다.
불은 붙어 있는 것들을 함께 태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혼자만 타게 만드는 불은 없는 것입니다.
동방의 수도회 시초가 성 안토니오라면 서방은 성 베네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연대상으로 2백 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청년 때 로마에서 교육받다 도시의 부도덕한 생활에 실망하여 수비아코라는 곳의 바위 동굴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창설하고 “일하고 기도하라”라는 깨달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체제는 진실보다 강합니다.
공동체는 진리보다 강합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바보 마을에서 해시계는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공동체에게 합당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진리에 합당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성령의 감도가 숨을 쉴 수 없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소화성 궤양과 위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발견은 의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발견은 궤양이 주로 스트레스, 매운 음식 또는 과도한 위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오랜 믿음에 도전했습니다.
이 발견을 한 호주의 두 과학자인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 박사는 수년 동안 의료계에서 거부당해왔습니다.
이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샬 박사는 헬리코박터균 배양액을 마셨습니다.
며칠 내에 그는 위염이 발생하여 박테리아가 위염을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체 실험은 위험했지만,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직화된 의학계가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연구하는 집단을 세우고 끊임없는 반복 실험과 결과를 제공하자 어쩔 수 없이 의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력이 10년 뒤에 결실을 거둬 둘은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수도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교회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중에야 교황이 회개하여 탁발수도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더불어 성화聖化의 여정 -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답이다”>
더불어의 구원, 더불어의 성화의 여정입니다.
“성화되십시오.”
언젠가 수도형제에게 배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요즘 강론 주제로 우리 믿는 이들은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중에 있다고 많이 강조했습니다.
“성화의 여정”, 얼마나 긍정적이요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마디인지요.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성화라는 말마디가 반가웠고 즉시 강론 제목을 성화의 여정으로 택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참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은 불법의 종이 아니라 의로움의 종이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이라는 복된 신원임이 드러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화의 여정 결과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성화의 여정을 충실히 살고 있는 분들을 대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2023년도 <분도> 계간지 가을호, “훈훈한 대담”에 소개된 서경윤 알벨토 원로사제 역시 성화의 여정중의 모범이며 그분의 인터뷰 마지막 대목입니다.
“나도 마지막에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갖게 된 것도 은총입니다.”
삶은 모두가 은총이란 자각에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도 샘솟습니다.
신부님의 고정 칼럼 “노수老樹단상”이란 제목도 산뜻했습니다.
기품있는 노년을 상징하는 노목老木같은 어른이 바로 노수老樹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름드리 노송老松이나 노목老木은 제 삶의 스승입니다.
어느 절이나 수도원에 가든 맨 먼저 살펴보는 것이 두 보물인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 1면에 소개된 제16차 주교 시노드 회의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 “교회는 누구나에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라는 제하의 마지막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시다.”
성화의 여정의 궁극 희망이자 목표는 예수님이요 새삼 성화의 여정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얼마 전부터 아침식사 후 수도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수도원 하늘길을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두 길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수도원 정문에서 주차장 앞까지 "하늘길"에 이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고 그 끝 지점에 축복의 집, 제 집무실 천장암天藏庵이 있습니다.
맨발 걷기, 이 또한 저에겐 깨어 있음의 기도와 훈련입니다.
메타세콰이어 거목巨木들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의 내적성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2009년 심을 때는 작은 나무들이였는데 14년이 지나니 거목들이 되었습니다.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의 내적성장도 이 가로수들처럼 계속 더불어의 성장중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육신은 노쇠해도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영혼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고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제 마음은 26년전 써놨던 “사랑”이란 시의 마음 그대로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예수님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1997.3
바로 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더불어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깊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충격적 말씀이 회개와 더불어 우리의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 봅니다.
1.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 성령의 불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불붙여 주시어 새롭게 타오르게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주님의 불이 되어, 사랑의 불이 되어 타올라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불, 사랑의 불이 되어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어둠을 밝히며 주님의 영원한 현역으로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2.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죽음의 세례입니다.
물론 부활로 이뤄지는 죽음의 세례이지만 주님은 늘 죽음을 예견하며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파스카의 삶을 사셨음을 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가 우리 역시 날마다 이런 종말론적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성 베네딕도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이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3.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은 결코 거짓 평화를, 값싼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주심으로 거짓 평화를 폭로 하십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평화요, 빛이요, 선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임재 자체가 심판이자 분열입니다.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이요 결코 악의적, 고의적, 파괴적 분열이 아닙니다.
참평화 앞에 거짓 평화는 탄로되고, 빛 앞에 어둠이, 선 앞에 악이, 진리 앞에 거짓이, 생명 앞에 죽음이, 희망 앞에 절망이 폭로되니 저절로 심판이요 분열입니다.
잠정적 일시적 분열로 참평화와 빛, 선과 진리, 생명과 희망의 일치에 이르는 과정상의 분열일 뿐이요,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뎌내야 합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은총이 이런 한결같은 지혜와 주님 향한 신망애 덕을 지니게 합니다.
참평화는 지난한 창조적 분열후의 열매들로 결코 값싼 평화가, 거짓 평화가 아닌 겁니다.
우리는 파괴적 분열이 아닌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로 성화의 여정도 날로 깊어져 주님을 더욱 닮아가게 됩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립되는 의미의 단어들이 줄곧 등장하여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분 맞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한때 평화라 믿었던 현실이 안주와 고착으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을 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하여 현실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진실이었던 것이 여전히 진실인지, 그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직도 공동선에 유익한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는 이가 필요하지요.
그 안에서 질문을 일으키는 존재는 불, 곧 성령이십니다.
물론 그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기득권자들을 불안하고 성가시게 한 죄로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칫 사회 부적응자나 반동세력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지요.
그가 제기한 논점은 사라지고 질문을 제기한 자체로 상종 못할 인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이제 그가 감히(?) 깨뜨린 평화가 진정한 평화였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라 믿던 안위와 무탈과 야합의 가면을 찢고 진정한 평화에 이르려면 균열과 진동, 맞섬과 갈라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을 이루는 두 진영을 선명히 대조시켜 줍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로마 6,19)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더러움과 불법을 일삼고, 결국 죄와 악의 종이 되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끝은 결국 죽음이지요.
그가 어떤 제도에 속한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자기 선택에 따라 영혼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질식되고 악이 기승을 부리는 놀이터가 되고 말지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22)
그간 죄와 맺었던 달콤한 동맹을 깨고 죄에서 갈라져 나와 그동안 주인이었던 죄와 맞서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기울기대로 굳어져서 존재의 방향으로 틀어 올리려면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 주인 자리를 다시 내어드린 이는 그간의 더러움이 어떠했어도 다시 거룩함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구원 의지를 믿는 그 자체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화답송)
얕은 살얼음판 같은 거짓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영혼에 놓으신 성령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면,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에 귀기울여 볼 일입니다.
시편 저자는 죄와의 오래되고 끈질긴 동행을 끊어내고 거룩함의 길에 들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진리의 불길이 닿으면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인간적 세속적 관계들에 얽혀 있다면, 그 관계가 어디서 양분을 받으며 유지되는지, 이 관계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곁으로 모아 주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진정한 평화를 향해 흔연히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의 날개만으로는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는 서로 대립하거나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 주는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는 여당과 야당이 있습니다.
여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일정기간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입니다.
야당은 국민의 선택은 받지 못했지만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이 국가를 위한 것인지 살펴보고, 다음에는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정당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야 합니다.
국민은 보지 않고 상대방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정당만 있다면 그런 국가는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3류 국가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1류 국가를 만들어 복지와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3류 국가를 만들어 독재와 폭력으로 가난과 공포가 만연하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냉철한 판단과 불의에 맞서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는 시민들의 용기만이 문화와 복지가 넘쳐나는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땀과 열정, 때로는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라보는 성찰입니다.
깊은 성찰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낳습니다.
회개와 결심이 없는 성찰은 울리는 징과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있지 못하는 불충한 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때리고, 주인이 보낸 외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나쁜 소작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곳간에만 재물을 채우고 좋아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만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었던 부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면서 남들도 들어가기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하고 회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가진 것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는 늘 ‘패자부활전’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입니다.
성찰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라면, 식별은 그런 성찰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입니다.
고독과 위안이 식별의 기준은 아닙니다.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우리는 악으로부터도 고독과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적인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욕망과 욕심에서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방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채워지는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를 육적인 고독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육적인 위로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던 부자입니다.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아놓고 좋아했던 부자입니다.
명예와 권력, 재물에 취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적인 위로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독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영적인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산상수훈’은 영적인 위로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런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불은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불은 영적인 위로와 고독을 식별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찰과 식별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생각하지 말고 다음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천재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자는?’
저의 경우 이에 대한 대답으로 모나리자,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빌 게이츠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 없이 답변하면 ‘뻔’한 결과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처음에 나오는 자동적으로 나오는 대답은 썩 재미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이나 의미 있는 대답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나오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철저히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즉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너무 섣부르게 생각합니다.
이 섣부름이 예수님을 자기와 상관없는 분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지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천천히 떠올리려 하기보다 ‘나를 미워하신다, 불공평하신 하느님이다.’ 등의 불평불만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나왔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그리고 이어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말씀도 하시지요.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말만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은 폭군인가? 예수님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회 부적응자인가?' 등의 생각이 곧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느린 사고를 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단순히 힘 앞에서 굴복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함께 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과정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의 불을 심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평화보다 주님의 평화를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천천히 그리고 느린 사고를 받아들여 보십시오.
분명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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