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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13:9~13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찬송의 제사와 겸손한 순종 13:14~17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오늘의 말씀 요약]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은혜로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고난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증언하며, 선과 나눔을 행하고, 인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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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13:9~13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훈에 이끌리면 안 됩니다(9절).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나 ‘음식 정결법’ 등을 구원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행 15:1; 골 2:16). 그러나 음식 규례에 대한 준행은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언약의 은혜’로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를 뿌린 후 제물을 ‘성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레 16:27). 그처럼 예수님도 자신의 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 골고다에서 고난받으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성문 밖’ 곧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13절). 성도의 선교지는 세상입니다.
● 더 깊은 묵상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성문 밖’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도가 ‘성문 밖’ 곧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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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의 제사와 겸손한 순종 13:14~17
성도는 십자가로 구속받고 영원한 도성을 약속받았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값없이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림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인 찬송을 제물의 피보다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15절; 호 14:2). 서로 나누고 선을 행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16절). 삶의 경건은 제사보다 우월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를 지키고 감독하며 마지막 날 하나님께 보고하는 책무를 맡았습니다(17절). 성도는 진리로 양육하는 이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들이 사역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딤전 5:17). 감사와 섬김과 존경은 교회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힘입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제사는 어떤 것인가요?
나는 일상에서 찬송과 선행과 나눔을 얼마나 활발하게 이어 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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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우는 대못
런던 템플교회의 성도 에밀 메틀러는 식당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돈 없는 이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구제 기관에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한 선교 단체에서 찾아와 기부를 부탁하자, 그는 선뜻 금고에서 돈을 꺼내서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선교 단체 직원이 보니 돈 상자 안에 대못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왜 거기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메틀러는 15cm 정도 되는 대못을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이런 못에 박히고,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으려고 이 못을 돈 상자 안에 두었습니다. 이 못을 보면 내가 누구를 도와야 할 때 인색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생명까지 주셨으니까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생의 복을 얻었다는 사실을 정말 안다면, 삶이 안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건성으로 믿으니까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이제 더는 죄에 종노릇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묵상하면, 깨끗한 마음으로 자기 것을 내주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자 / 유기성 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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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히브리서 13장 13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영문(성문) 밖' 골고다를 향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영문 밖'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영문 안'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넓고 편안한 '영문 안'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스스로 '영문 밖'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주님이 가신 그 길입니다.
십자가 은혜로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면 예배와 감사, 순종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응답하게 된다. - 베른 포이트레스
오늘의 기도
주님, 헛된 사상을 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옷 입어 세상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제 마음을 은혜로 채워 주소서. 모든 곳에서 순결함과 지혜로 선을 행하며 주님을 높이게 하소서. 진리로 이끄는 영적 리더십에 겸손히 순종해 참된 유익을 누리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15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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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사람 사랑을 실천해 나가고, 구별된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예배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②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만들어 가고, 하나님과 더욱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분의 세밀한 음성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③ 나눔과 섬김을 삶 속에서 성실히 실천해 나감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도록 하자
우리의 믿음과 구원과 영광은 모두 제사에 기초한 것입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시50:5)
그래서 세 가지 제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제사는 당연히 십자가 제사(막8:34)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한 속죄제 십자가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따라서 우리도 그 고난의 제사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두 번째 제사는 찬송의 제사입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십자가 제사가 삶을 드리는 것이라면, 찬송의 제사는 입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시119:108)
제사란 가장 중한 것을 드리는 것인데, 입술처럼 중한 것도 없습니다 꼭 영업직이나 교수나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말하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입술처럼 중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송아지가 아니라 입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14:2)
세 번째 제사는 선행의 제사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그러므로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항상 선을 행하기 원합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이러한 제사가 곧 주를 섬기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그리하면 제사로 언약한 나의 성도들을 모으라 명령하실 그때에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줄 믿습니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73:24~25)
형제 사랑하기를 지속하기 위해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기억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며 거룩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세상적 유혹과 거짓 가르침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만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장벽을 치고 스스로를 그 테두리 안에 갇혀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레위기 4장에는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피를 제단과 지성소에 뿌리고 그 죽인 사체는 재 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태워야 하는 예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 12절에는 그곳을 오히려 ‘정결한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아가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 모두의 죄악을 태우시는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 간의 삶과 예배당 만이 거룩한 곳으로 여기기 쉽지만
세상 밖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곧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것이 진정으로 거룩한 삶,
정결한 장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이어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증거하는 주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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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대조하여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며 오르지 바른 교훈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자는 내용입니다. 더불어 세상에 바라 볼 것이 없으니 장차 올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과 베풂의 삶을 살자는 권면으로 맺음 지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끌리지 말아야 할 교훈, 따라야 할 바른 교훈, 추구해야 할 영원한 도성, 인도 자들에 대한 순종 등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은 제사와 음식규정으로 사람이 온전하여 질 수 있다는 유대교의 교리를 말합니다. 이를 저자는 전면 부정합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이지, 동물제사나 음식물규정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적 유익이 없는 것들이지요. 따라서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습니다. ‘다른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음식이 아니라 은혜로 강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규정에 얽매인 사람은 아무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영문 밖’은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후자가 통설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은 '영문 안'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 당하셨다는 것은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되었고,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이 세상의 도성은 극히 일시적인 것이지만 장차 올 도성은 영원한 도성이기 때문에 그곳을 갈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통치하는 하늘의 도성을 말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함’은 남을 배려하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누어 주기' 역시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착한 행동을 말합니다. 또한 히브리 기자는 '찬송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제사’도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입술뿐만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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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기자는 영구한 도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냥 찾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에 보면 애써, 전심전력으로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장차 가야 할 그 나라인데 왜 여기서 찾아야 하는가? 즉, 이미 우리는 그 곳에 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렇게까지 혼신을 다할 필요가 있느냐의 질문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으로 진군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저절로 그들 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들 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을 다 하여야 한다는 말로, 순종은 늘 사람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처럼 영구한 도성도 흡사합니다. 그것을 이 땅에서 힘써 찾아야 합니다. 마치 경쟁을 하듯이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믿음이 좋아서 자식도 덩달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그곳도 철저하게 개인으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그 순종 역시 사람들의 몫이지요.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믿음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한 것 같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비행기에서 보면 재미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땅 위에 닦여진 도로가 아닙니다. 험난한 산맥을 가로지르고, 강도 건너고, 심지어 돌산도 뚫어 건설된 도로입니다.
그런 엄청난 장애물을 누가 치워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일의 당사자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영구한 도성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세우기 위해서도 그렇게 방해물이 많았는데 적어도 그것보다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장애물은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처리 된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살아서 주인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합니다. 예전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실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만큼 그것은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역시 포기하는 것만큼 개입도 사라질 것입니다.
대신 꼭 붙들 것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적어도 우리 자아보다는 크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을 굳게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버릴 것은 버리고, 그 대신에 붙들 것은 꼭 붙드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거룩한 도성이 우리들에게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들이 먼저 그 도성에 들어 갈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주적인 종말보다는 개인적인 종말이 한결 빠를 것 같기 때문이지요.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처럼 기어이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 고속도로를 놓아 우리 믿음의 후배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에필로그:
히브리서는 장장 13장에 걸쳐있는 장문의 편지입니다. 내용으로 보면 이방인 신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꽉 찬 매우 난해한 서신서입니다. 그것을 히브리 기자는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겉치레 인사말 같지는 않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정말 그 내용을 쉽게 이해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인들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신앙적 토대 위에 작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근본 배경은 여호와 신앙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고할 수 없는 훈련이 어려서부터 아니 모태로부터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더구나 이 편지를 받는 히브리공동체에는 개종한 제사장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배경이라면 이 편지를 받자 마자 한 눈에 읽고 충분히 납득하였을 것입니다. 도저히 이방인들이 넘볼 수 없는 부러운 신앙의 배경을 갖고 있는 그들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 받아 들기만 하면 됩니다. 구약적 사고에 갇혀 있는, 나무에서 저주 받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기 어려운 예수그리스도! 그 분을 우리는 구원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택함이 없어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 분의 장성한 분량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감히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온전함이란 완전한 영적 경지를 말하는 바, 사람의 노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해 졌습니다. 2장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과 우리는 한 하나님에게서 난 축복된 존재라는 뜻으로, 따라서 근본이 같으니까 우리도 온전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케 되는 씨가 우리 마음에 생명으로 심겨져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잘 자라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직 없는 축복된 생명의 씨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결국 그들까지 번질 영광스러운 씨로, 히브리서를 통해 발견된 씨입니다.
9~12
그러므로 구원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곧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9절). 유대교의 제사 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불태웠습니다(11절).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그날 드려진 제물의 어떠한 것도 먹을 권리가 없었기 때문(10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12절).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그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만을 붙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내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여 세상일에 욕심내지 않고, 거짓된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도록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사망의 값을 지불 하셨고,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나아가 내 자신의 거룩함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사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신앙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하여야 합니다(13~17절).
저자는 우리 역시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에 있는 그분께로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13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 역시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발자취를 좇는 삶을 살아가자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 그리고 하나님께서 손수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주실 영구한 하나님의 도성 즉, 새 하늘과 새 땅(14절)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는 맺으며(15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십니다(16절).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도록 하라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7절).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삶을 위해서는 십자가가 있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이 주는 유익함에 매이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도 감내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얻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을 고난으로만 여겨 포기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 안에서 나의 것을 나누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극복해 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생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의 예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욕심을 버리고 사랑의 삶을 통해,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거룩한 자로 세우시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붙잡는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9월28일 청라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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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절 :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그 말씀대로 살다가 결말(죽음)을 맞이한 지도자들의 믿음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으라고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으신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지도자들이 따라 살아낸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가감 없이 이어받아야 합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믿음으로 가르쳐 주신 스승들도 감사하다.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모든 환경에 감사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동일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그 나라 갈 때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다른 교훈은 불완전하다.
어떤 교훈은 거짓이다.
진리를 따라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장 좋은 스승은 예수님이시다.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따르길 다짐한다.
10-16절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절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계할 사람처럼 경성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존경합시다. 그들에게 순종하되 즐거움으로 합시다.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많이 둘 만큼 말씀에 충실한 지도자가 됩시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순종이 아니라 복종하라 하셨다.
바른 지도자를 만남이 중요하다.
거짓 지도자도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지도자여야 한다.
인격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자여야 한다.
도덕적으로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여야 한다.
그런 자들의 가르침을 존중하자.
그 가르침을 따르고 순종함이 마땅하다.
충성된 지도자와 충성된 제자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유대교의 진안으로 회귀하려는 히브리(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유대교 장막의 제단 음식을 일반 백성이 먹을 수 없는 것과 달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제단에서 드리신 영원한 제사의 살과 피를 삶에 담아 살아갑니다. 유대교에서는 짐승의 피로 진 내부만 정결해지므로 진 안에 머물러야 하지만, 예수님은 진 밖에서 피를 흘리셨으므로 유일하고 최종적인 십자가 제사의 효력은 유대교가 금기시하는 '영문 밖에 있습니다. 이제 진 안의 '의식'은 폐지되었고, 진 밖에서 예수님의 수치를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새로운 예배가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증언하는 찬송의 제사, 선행과 나눔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제사를 드리는 자만 영구한 도성, 즉 영원한 구원에 참여할 것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나눔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주님이 기뻐하신다 하셨다.
내 입술의 찬양, 생활의 찬양이 필요하다.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손을 펴야 한다.
인색한 모습을 회개한다.
주님!
다른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순종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에게 바르게 살라고 하기 전에 먼저 바르게 살게 하소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라보기 전에 저의 잘못을 먼저 보게 하소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식하며 행동하게 하소서.
나눔을 실천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연약한 몸과 마음이 주님 안에서 담대함을 갖기 원합니다.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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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올 도성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4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장차 올 도성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히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장차 올 도성을 준비하는 삶으로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과 장차 올 도성은 연결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장타 올 도성에서의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이 땅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성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이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제사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첫째는 찬송의 제사입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는 우리의 찬송을 별 가치 없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들도 찬송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전에 드리는 찬송이든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이든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찬송의 제사는 그것 자체로 매우 중요합니다. 열심히 많이 찬송하십시오.
둘째는 선을 행함(양선)의 제사입니다. "선을 행함과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6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는 복종의 제사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7절) 복종의 제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복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함께 어우러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축구 선수들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 하여도 서로 전술을 짜지 않고 함께 맞추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교회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결국은 교회가 파괴되고, 자기 자신이 손해가 됩니다. 여전도회장이 나보다 못났습니까? 그러면 그 때 복종의 훈련을 하십시오. 앞에 있는 리더들이 즐거움으로 봉사하게 하여야 합니다. 목사가 즐거워야 성도가 유익합니다. 자신의 교회 목사님은 목회할 때 즐겁게 할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 때문에 즐거울까? 그를 즐겁게 하십시오. 그래야 유익합니다.
장차 올 도성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도성을 생각하며 열심히 세가지 제사를 드리십시오.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초점맞추고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올 도성을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을 과보호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깨트리십시오.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사십시오. 장차 올 도성을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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