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의 일주문이 있는 곳은 예전의 주차장이다. 왼쪽은바위벽이 솟아 있고, 이 마애불이 계신다.
일반인은 약사불이라고 하변서 합장하고 허리 굽혀 절을 한다.
그러나 이 부처님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발이 대좌 앞쪽에서 밑으로 내려와 있다. 이처럼 한쪽 다리가 밑으로 내려온 부처님이 자세를 반가상이라고 한다. 반가부좌라는 뜻이다. 반가상은 미륵불의 도상이다. 그래서 이 부처님은 미를불이다.
그리고 대좌 주위에 구름 문양이다. 이것은 천상의 상징이고, 이 부처님에 땅 위가 아니고, 천상에계신다.
학자들은 이 부처님은 동화사 창건 당시에 조성한 마애불이시고, 미륵불이라고 본다.
동화사가 미륵신앙과 관계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적이다. 팔공산(26)의 글을 읽으시고, 이 부처님을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 부처님도 약사불이라고 한다;
미륵불-민간신앙이 되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임진-병자 양란을 겪은 나라는 국가적 혼란이 심해지고 민중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들어 하였다. 기댈 곳이 없던 민중은 탄압받던 불교로 눈을 돌렸다. 불교도 살아남기 위해서 토속 신앙에 손을 내밀어 서로 결합함으로 민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려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으로 토속 신앙과 친화력이 강한 미륵신앙이 극성을 부렸다. (조선 후기에는 사찰이 살아남기 위해서 무당들이 하는 굿을 받아들여 ‘제’를 올리므로 경제적인 수익을 올렸다. 토속신앙을 수익사업으로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양란 이후에는 흉작이 거듭 되었다. 배를 굶는 백성이 많아지면서 집을 떠나 이리저리 걸식을 하면서 다니는 백성이 많아졌다. 전염병도 많이 유행하였다. 이런 현상은 특히 영남과 호남 지방에 더 심하였다. 집을 떠난 백성들은 떼를 지어 다니면서 화적이라고 하는 도적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조선을 지배하던 이념인 성리학이 해결하지 못 함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통치를 지시하던 나침반이 기능을 못하고 고장이 난 꼴이었다. 백성들은 대안을 찾아 나섰다. 이상세계를 꿈꾸면서 풍수지리, 도참설, 비기, 무속 등 말세적인 이념들이 백성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걸 맞는 미륵하생경이 유행하면서 미륵신앙은 더더욱 극성을 부렸다.
농경사회는 마을이 기본 단위가 된다. 마을을 수호하려는 마을 신앙이 왕성해졌다. 미륵 신앙도 마을 미륵의 형태가 되었다. 마을 미륵의 숭상 대상으로는 불교 탄압의 와중에 목이 잘린 부처상이나 크게 훼손된 불상이 그대로 미륵불이 되었다. 바위 위에 불두를 만들어서 얹어두기도 하였지만 팔공산 주변에는 그와 같은 미륵불 형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바위에 선각이나 낮은 부조로 조성된 부처님도 계신다. 팔공산에는 이와 같은 마애불이 비교적 많다. 거의가 약사불로 불리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미륵불로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촌노들이 갓바위 부처를 미륵불로 불렀다는 증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또 하나는 부처님의 하체가 반 쯤 땅 속에 묻혀 있는 형태이다. 이들 부처님은 억불정책으로 사찰이 파괴되자 불상을 보호하려 땅에 묻어 둔 것일 수도 있고, 버림 받고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땅에 묻힌 부처님일 수도 있다. 나중에 마을 사람이 이런 부처님을 발견하면 일부러 땅에 묻힌 체로 두고 미륵불이라면서 숭상한 경우도 있다. 미륵하생 신앙에서 미륵불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땅에서 솟아오른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 생의사(生義寺) 돌미륵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돌미륵이 땅에서 솟아 올랐다고 되어 있다. 팔공산의 가루뱅이에 있는 부처님도 땅속에 하반신이 매몰된 체 있다. 그대로 두고 기도를 드리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미륵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을 것이다. 가루뱅이는 동화사에서 부인사로 꺾어 오르는 길의 중간 쯤에 있다.
1960년 대 초에 부계면의 군위 삼존불이 처음 언론에 공개 되었을 때 경주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와서 봉림역에 내렸다. 친구 셋이 걸어서 한밤 마을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때도 길에서 반 쯤 묻힌 부처님을 본 일이 있다. 여러 해 전에 부계 마을의 절에 모셔둔 부처님이 그때의 부처님이 아닐까 싶지만 절집은 문을 잠궈 두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미륵불을 신앙하는 민중은 현세이익적인 민간신앙을 더 선호한다. 미래를 기다리며 무작정 세월을 보낼 만큼 여유가 없다. 이래서 마을 미륵도 민중이 뜻을 쫓아서 현세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약사불 신앙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미륵불을 보면 어딘가 조각 기술이 모자라서 조잡하고 유치하다. 세련미라든지 우아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마을에 사는 농사군의 모습이고 이웃 아저씨를 닮은 모습이다. 불상의 모습인데도 도상에서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특히 손의 처리에는 불상과 차이를 드러낸다. 수인이 돌할망이나 돌 하르망의 손에 가깝다.
전라도의 미륵신앙은 뿌리가 깊다. 운주사의 천불동에는 미륵불상이라고 하는 인체상이 많다. 육계도 있고, 백호도 있고, 귓불도 어깨까지 늘어져 있어 불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느낌은 선돌 같고, 장승같다. 더욱이 손의 위치가 불교도상에 소개하는 수인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한 쪽 손을 가슴에 붙이고 다른 손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형태가 많다. 좌상의 경우는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그냥 아래로 쫘악 펴서 있는 경우가 많다. 돌 하르방처럼 두 손을 가슴에 모우고 있는 경우도 있다.
팔공산의 동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석불 입상도 전체적으로 조잡하게 느껴진다. 오른 손은 안쪽으로 늘어 뜨리고 왼쪽 손은 가슴 앞에서 들어 올려서 지물을 쥐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불상의 전통적인 수인에서는 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이 부처도 통칭 약사불로 통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미륵불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굴불사의 암부처라고 불리는 부처님도 수인이 조금 이상하다.
염불암의 마애보살 좌상도 두 손은 보상화(寶相花)를 쥐고 거수설법형(擧手說法形)을 하고 있으나 이것도 일반적인 불교 도상에서는 흔치 않다. 신무동 삼성암지 마애불 입상도 수인은 동봉의 여래입상을 닮아 있다. 이들 모두를 약사불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웬지 내게는 운주불의 부처님과 닮아 보일까?
불상의 수인 형태로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미륵불이라고 부르고 싶은데도 미륵불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부처님은 어디에도 없다. 약사불만 계시는 곳이 팔공산이다. 백제의 옛 땅과는 역사적 뿌리가 달라서인지 미륵 부처님이 거처를 정하기는 불편하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