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에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 이단에 맞서 투쟁하였고,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면서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253년 6월 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갈리스토 카타콤에 묻혔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210년 무렵 카르타고(현재 튀니지 일대)의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46년 무렵 체칠리아노 사제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품을 받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모범적인 덕행과 저술로써 교회를 훌륭히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유배당하고, 신임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재판받다가,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헌신적인 목자 복된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를
불굴의 순교자가 되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로 한결같은 믿음을 길러 주시어
저희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하소서.
제1독서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면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1,17-26.33
형제 여러분,
17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18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19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20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21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22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23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33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
복음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2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3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8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톨릭이 살길은 최대한 많이 베푸는 일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민족을 사랑해서 회당까지 지어주고 자기 하인을 위해 그 민족의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치유를 청합니다. 그가 종교는 다를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신 이유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의 새라면, 믿음과 희망은 사랑이라는 몸통을 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위로 오르려는 의지가 있을수록 믿음과 희망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뜻도 됩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왕비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이들은 남편 루트비히를 설득하여 그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였지만, 어느 날 관료들과 함께 그녀가 옷에 무언가 숨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루트비히는 국고를 탕진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벳에게 옷에 무엇을 숨기고 나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옷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한겨울이었음에도 장미가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이렇게 기적을 부르고 기적은 그 당사자와 주위에 있는 이들의 믿음을 증가시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녀가 하루는 문둥병자를 궁궐에 들였습니다.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궁궐을 병으로 물들게 만들려고 한다고 일러바쳤습니다. 루트비히는 또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뒤져야 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간병하는 침대를 열어젖히자 그 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도 이제 가난한 이들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제 둘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병원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연 사랑에 대한 의지엔 언제나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달립니다.
알렉시스 카렐은 혈관을 꿰매는 기술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저명한 의사입니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통에 신앙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2년, 카렐 박사의 친구인 한 의사가 리옹에서 루르드로 가는 기차로 이송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돕도록 그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우정과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을 거부할 수 없어서 기차에 탑승합니다.
그는 기차에서 급성 결핵성 복막염과 큰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상당한 복부 팽창을 앓고 있는 마리 바이를 만납니다. 마리 바이는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카렐은 루르드에 도착한 후, 아니면 그 전에 그녀가 매우 빨리 죽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차에 탄 다른 의사들도 이 진단에 동의했습니다.
기차가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 마리는 동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세 개의 물병이 그녀의 팽창한 복부에 쏟아졌습니다. 첫 번째 부은 후, 그녀는 뜨거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 부은 후, 통증이 완화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은 후, 그녀는 기분 좋은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그녀의 배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캐럴은 마리(다른 의사들과 함께) 뒤에 서서, 그녀의 복부에 물이 부어지는 동안 메모를 적었습니다.
“엄청나게 팽창하고 딱딱한 복부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30분 이내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몸에서 분비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는 침대에 앉아 저녁을 먹고(토하지 않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음 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기차를 타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 상쾌한 기분으로 리옹에 도착했습니다.
캐럴은 여전히 그녀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4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와 의사의 모니터링을 요청했습니다. 병이 나은 후 마리는 자선 자매회에 입회하여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약 35년을 더 살아 1937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카렐 박사는 노벨 의학상 수상자임에도 종교와 과학이 상반되지 않고 보완한다고 말해 의학과 과학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작은 봉사의 마음에서 다시 불붙여졌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시다. 믿음과 희망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사랑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 자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세 자녀의 육아 대부분을 그녀 혼자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리, 청소, 빨래, 아이들 숙제 도와주기, 아이들 등하교 운전 등 모조리 자기가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 남편은 아이들과도 잘 놀아주고, 요리나 청소도 해주던데 자기 남편은 전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자매의 불만은 정당할까요?
그런데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졌고,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계속 누워있으며 투병하는 남편을 통해, 이 자매는 불공평한 역할 분담을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기 전까지 잔업을 많이 하면서 넉넉한 수입을 가져다준 남편이었습니다. 또 고장난 집 안 수리는 늘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프고 나서, 수입이 끊기고 청구서가 쌓여만 갔습니다. 여기에 고장난 가전제품에 막막해 하면서 남편이 이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힘든지, 또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해야 할 몫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른 남편은 안 그런데, 다른 아내는 안 그런데….’라며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친구, 내 자녀, 내 부모…. 이 모두가 자기의 큰 몫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고마움을 갖지 않으면 불평의 크기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몫을 대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만이 감사의 삶, 기쁨의 삶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자기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살려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려고 하자, 친구들을 보내어서 이렇게 아룁니다.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종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몫을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백인대장의 뜻대로 노예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행복의 크기를 잽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굳이 그 크기를 재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상대를 죽이고 싶으면 백까지 세라(토머스 제퍼슨).
사진설명: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