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화
김경인
좁다랗고 납작한 지붕 아래
여자가 있습니다.
희미해진 얼굴 대신
깨진 창문을 키우는 여자,
나선형 화분에 심긴 눈동자가
검은 씨앗처럼 흰 뿌리를 틔우는 사이,
식탁 위 주전자에 담긴 손은
차를 데우느라 분주합니다.
신발장 깊숙이 숨어든 발은
밤새 계단을 오르내리고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패브릭 소파 틈새에 숨어
공중 뿌리처럼 집을 휘감고 자랍니다.
벽지 틈에서 손가락 마디들이 파란
이파리처럼 자라나는 동안,
좁다랗고 납작한 지붕 위에 해가
커다란 빨간 풍선처럼 떠 있습니다.
둥그렇게 부푼 노을이
창틀 너머로 밀려듭니다.
거울 속 눈은 벽을 따라 거미처럼 흩어지고,
식탁 위 이 빠진 꽃병 속 가라앉은 심장이
넘칠 듯 말 듯 가만히 흔들렸습니다.
신발장 속의 발은
계단을 뛰어내리다 멈추었습니다.
여자는 잘 있습니다,
벽지 아래로 스며들어
가장자리가 말려든 잎사귀처럼
밖에는 지붕을 삼키며
해가 눌러앉고 있습니다,
빨간 풍선처럼 커다란 해가.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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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 2001년 《문에중앙》 등단.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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