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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리안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 원문보기 글쓴이: 오두
- 오두의 역사산책 -
박근혜와 선덕여왕의 역사적 비교 분석
- 당나라를 무찌를 때 신라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세워 불러낸 해신의 정체 -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자 국민들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박근혜를 떠올렸다. 나는 이 글에서 선덕여왕이 당나라를 무찌른 문무대왕이 문두루비법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현재의 한나라당의 모든 친이세력들을 극복하고 민주당의 기습전을 이기기 위한 상징적 비법을 선덕여왕의 역사에서 찾아내 보이고자 한다.
E. H. Carr의 책 [What Is History(역사란 무엇인가)]의 핵심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역사적인 일로만 치부하고 현재 일에 대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역사가 아니라 죽은 사물에 불과하게 된다.
선덕여왕을 현대정치에 맞추어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이유도 그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선덕여왕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분석하면 그 역사적인 교훈으로부터 박근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을 추적해 보이고자 한다.
삼국통일에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무찌른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비하여 통일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 이야기는 별로 자주 이야기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면서 수만 명의 군사가 탄 당나라 배들을 바다에 침몰시킨 특별한 비법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 비법의 배경을 추적해보면 문무대왕이 그의 선대 왕인 선덕여왕 여신을 받들어 "용궁에서 배워 온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명랑(明朗) 법사가 "용궁에서 배운 비법"으로 신라 바다로 들어온 당나라 군사들을 바다에 침몰시켜 죽게 했는데, 그 장소는 낭산(狼山) 남쪽에 신들이 거니는 수풀이라는 신유림(神遊林)에 안치한 선덕여왕 왕릉 아래에 임시로 비단 휘장으로 만든 사천왕사(四天王寺) 신당이었다. 그 장소는 바로 선덕여왕 왕릉 바로 아래였으며 문무대왕은 선덕여대왕의 신령함에 의존하고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당나라를 무찌르면서 특별히 선덕여왕의 지혜를 빌리는 의미로 사천왕사를 세워 그곳에서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킨 것이다.
당나라 수만 명의 군사들을 바다에 침몰시키기 위하여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아래에 짓고 그 무속적인 의식을 행하였다는 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신라 왕실의 특별한 숭앙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문무대왕은 선덕여왕릉을 도리천(도利天)으로 삼아 그 아래에 사천왕사 신당을 세우고 "대왕(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운 뜻"을 의존하여 그와 같은 비법을 행한 것이다.
당나라와 대결하면서 당태종과 지혜 대결을 벌였던 선덕여왕의 신령함에 빙의하고자 한 것을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공주로 있을 때에 당나라 황제가 보낸 수수께끼를 풀어낸 지혜에서 당나라 술수를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그 속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선덕왕(善德王)과 지기삼사(知幾三事) 편에는 당나라 태종과 지혜를 겨루는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절의 지혜 대결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덕만(德曼) 공주가 당나라 태종이 사신을 시켜 보내온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을 비롯 모두 세 가지의 신기한 지혜를 선덕여왕이 보여준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기록에 대하여 흔히 사람들은 선덕여왕의 지혜 정도로만 해석하고 만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이 낸 수수께끼를 덕만공주가 풀었던 사실은 나중에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당나라 군사들을 몰아낼 때 선덕여왕 여신 앞에 특별한 기원을 하여 물리치는 데까지 작용하는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 글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먼저 <삼국유사>의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내용 가운데 당나라 태종이 보내온 수수께끼 부분을 살펴보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삼국유사>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편
모란(牧丹)은 목단이라고도 하고 작약으로도 불리는 꽃이다. 당태종이 보내온 그림 속의 모란에는 붉은 색, 자주색, 흰 색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덕만공주는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아냈다. 이 수수께끼에 대하여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 뒤에 그렇게 알아내 당나라에 그 뜻을 여보란듯 보낸 것에 대하여 신하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 지를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국유사>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편
여기에서 당태종이 이 수수께끼로 선덕여왕을 '희롱했다'고 한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당나라와 신라의 대결 국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그 대결에서 선덕여왕이 이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나비'가 없게 그렸다는 것은 당태종이 선덕여왕을 신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비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비는 신선도가사상에서 장자(莊子)의 나비꿈에서 보듯이 신선을 의미한다. 신라는 당시에 '神國의 道'를 가진 신선을 중시한 나라로 당나라에서 주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에 간 신라 사신에게 신라의 여왕제도 신라인들이 믿는 '神仙의 道'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파악하고자 하는 내용이 나온다.
앞선 필자의 글 <역사산책: 후금(後金)의 '愛新覺羅'와 <흥부전> <박씨전> 유행의 新羅的 배경> 에서 소개했지만, 신라의 김대문의 기록으로 알려진 <화랑세기>에 따르면 화랑의 신라 사신 예원공(禮元公)이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 사람(唐人) 유향(柳享)이 '神仙의 道'를 묻고 신라의 일광신(日光神)에 대하여서도 캐묻자, 예원공(禮元公)은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은 '日光神'이 신라의 시조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혼인하는 道에 대하여 물으니 예원공이 우리의 神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神이 그 시조냐고 묻자 "日光의 神이다"라고 답하였다. (김대문著, 이종욱역주 <화랑세기>, 소나무, 1999, 181-2쪽)
당제국은 신라의 독자적인 종교와 사상 그리고 정치제도인 여왕제도에 대하여 대단히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배경에서 선덕여왕에게 향기가 없는 목란 꽃을 일부러 가려서 그린 그림과 함께 목란꽃 씨 서 되를 보내 온 것은 다분히 신라 여왕에 대한 비아냥의 저의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선덕여왕이 대권을 가지기 전 공주시절 덕만공주가 알아냈던 것이다.
특히 덕만공주는 목란의 씨 서 되[升]를 땅에 뿌려서 그 꽃을 피워보게 하여 향기가 없음을 증명시켰다는 것은 한번 말한 것에 대하여서는 시간이 걸려서라도 증명을 해보였다는 의지를 보인 것을 의미한다. 꽃이 세 가지 색으로 보낸 것은 당태종이 신라의 세 여왕이 있게 될 것을 알고 그것을 희롱한 것이라고 <삼국유사>의 저자인 승 일연은 해석하고 있다.
送花三色者. 蓋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 眞德, 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꽃을 세 색갈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내다보는 면이 있었다. <삼국유사>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편
당태종이 신라의 여왕이 장차 두 명 더 나올 것을 미리 알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나는 당태종이 붉은 색, 자주색, 흰 색의 세 가지 다른 목란꽃을 보내온 의미에 대하여 일연과는 달리 해석하고자 한다.
향기만 없는 꽃이 아니라 목란꽃의 다양한 색 가운데 붉은 색과 자주색 흰 색의 목란을 보내온 것은 그 촛점이 흰색 목란에 있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일광신(日光神)은 태양의 신인 선도성모를 의미하고 당나라와 나중에 송나라에서는 동방 신라의 신이라는 의미인 동신성모(東神聖母)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일광신상은 신라 때에 흰 색이 칠해졌다. 햇빛이 희다는 것에서 '해'라는 우리말이 '희다'에서 나온 것처럼 흰색은 신라의 일광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의 신은 현대 신학적인 무형의 신이 아니라 인물신에 빙의하는 원시형태의 태양신이었다. 선덕여왕 자신이 흰 색의 태양의 여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 태양숭배 국가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지배자는 태양신 그 자체이기도 했다.
선덕여왕이 등극하기 전에도 이미 신라의 왕실에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에 의한 왕의 계승에서 왕후의 신격이 왕의 왕격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 있었음을 <화랑세기> 및 박창화의 다른 필사본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장차 덕만공주가 여왕으로 오를 것이라는 신라의 정세를 내다보고 당태종은 신라의 여왕등극과 함께 신라 왕실 전통의 태양의 여신인 동신성모가 왕실의 왕후들과 여성 권력자들에게 비아양을 그렇게 그림으로 보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삼국유사>의 승 일연의 세 가지 다른 색갈에 대한 의미를 풀이하면서 '장차 있을 세 여왕에 대한 예언적 해석'이라는 지극히 점술적인 해석보과는 전혀 다른 보다 현실감 있는 해석이라고 자부한다.
이러한 동신성모(東神聖母) 태양신숭배 국가인 신라의 왕들은 신으로서 숭배되었음을 선덕여왕 살아생전 사용한 그 왕호가 성고황조(聖祖皇姑)라는 칭호에서도 그 신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聖祖皇姑'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의 신라인들의 일광신(日光神)에 대하여 당태종은 거부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볼 때 신라의 일광신(日光神)이 '해 색' 즉 흰색만을 강조한 것에 대하여 목란에도 세 가지 다른 색이 있을 수가 있는데 무슨 흰색의 신이냐 하는 비아냥이 당태종이 보내온 세 가지 색으로 각각 그린 목란 꽃 그림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세 가지 각각 다른 색이 꽃들이 피는 것을 실험해보라는 의미에서 씨까지 서 되를 보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당나라 태종이 홍자백 세 가지 색의 목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 서되를 보내왔다)"는 것은 결국 신라의 일광신을 비웃은 동시에 신라의 왕후들에 이어져 온 일광 여신 숭배에 대하여 비웃음을 보내온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씨 서 되는 모두 흰 색의 목란씨였을지도 모른다.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다 하여 향기없는 의미에만 촛점을 맞추어 서 되가 각각 색갈 별로 한 되씩으로 잘못 해석했을 개연성도 있다. 신화적으로 보통 다섯 되 또는 다섯 말이 의미를 가지는데 그보다 모자란 서 되를 보내온 것도 어딘가 폄하의 의도가 있어 보인다. 중국에는 쌀 다섯말을 내고 가입하는 오두미교가 있고 <삼국유사> 주몽신화에는 알의 크기가 '닷되들이 만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더더욱 필자는 붉은 색, 자주색, 흰 색에 대하여 그 시대의 신화학적으로 풀이해 보고자 한다. 신라시대 및 당나라 시대의 우주관에는 하늘의 일월성신에 대한 숭배가 있었는데 그 색갈들이 다양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날 때 그 색갈이 자주 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자주색 알이 있었는데 혹 푸른색의 큰 알이 있었다(有一紫卵.一 云靑大卵)"고 <삼국유사>의 혁거세왕 편에 기록하고 있다.
자주색(또는 푸른색)은 남성의 달의 색을 의미한다. 일본의 아마테라스 태양의 '여신'에서 보듯이 본래는 태양이 여신이며 달이 남신이었다. 우리의 전통 일월신 전설에는 '해순이' '달순이' 식으로 여신의 해를 볼 수 있다. 그 해는 흰 색이다. 그런데 붉은 색이란 별을 의미한다.
붉은 색, 자주색, 흰색이 목란꽃을 그린 것은 이러한 별과 달과 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전혀 이에 대하여 왜 세 가지 다른 색의 목란을 그렸는지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신라의 일광신은 흰색의 선도성모(동신성모)라는 것에서 흰색을 홍자백(紅紫白)으로 마지막에 배치한 것 또한 신라를 깔보는 저의가 들어 있었다고 하겠다.
당태종이 신라를 비하하여 조롱하려던 의도는 덕만공주에 의하여 꿰뚫어 밝혀졌다. 당나라 태종이 서 되의 목난 씨앗을 보낸 것은 이들 여왕의 자손이 서 되의 목란씨만큼 많아져도 '향기없는 꽃의 자손"이라는 비아냥으로 그렇게 많은 씨앗을 보냈을 것이다.
이러한 예지 능력의 대결에서 당나라를 이겨낸 선덕여왕의 지혜는 신라 왕실에서 후대 왕들에게 전해져 30대 문무대왕에게까지 깊이 존숭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여왕이다. 선덕여왕을 모셨던 김춘추가 곧 태종 무열왕이 29대 왕으로 즉위하고 그 아들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했다. 문무대왕이 통일된 신라 땅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때 바다에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문무대왕은 "선덕여왕이 당태종과의 대결에서 이긴 사실"을 연유로 하여 사천왕사를 짓고 선덕여왕을 불러내서 당나라 군대를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선덕여왕의 지혜는 백제 복병이 신라에 몰래 침략해 들어왔을 때도 알아냈다. 그것이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의 두번 째 지혜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백제군사들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음을 알아내고 물리치게 한 내용이다.
그 사실을 알아낸 것에 대하여 선덕여왕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 지혜의 비밀을 설명하고 있다.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삼국유사>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편
여자이지만 남자와의 모든 관계를 꿰뚫어 알아내 백제군사가 신라의 여근곡에 들어와 숨어 있는 것을 미리 간파하여 물리치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자의 빛은 흰 빛'이라고 한 것은 선덕여왕이 흰 빛의 해신(태양의 여신)임을 말하는 것이다. 박혁거세 신화에서 그 알이 '자주색'(또는 청색)'이라고 <삼국유사> 혁거세왕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여신(흰색), 남신(자주색 또는 청색)의 대조되는 색갈을 보여주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에서 남성과 여성의 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통일 전쟁 전이지만, 백제의 기습을 미리 알아낸 선덕여왕의 지혜는 선덕여왕시대의 인물인 김춘추가 직접 경험한 일이었고 무열왕에 등극하여 그의 아들 문무대왕에게도 전해져 선덕여왕의 지혜를 기리게 했었던 것이다. 때문에 문무대왕이 당나라군사를 몰아낼 때에 선덕여왕릉 아래에 신당인 사천왕사를 차려 문두루 비법을 행하였다는 것은 선덕여왕을 도리천(도利天)의 여신으로 불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그녀가 죽어 묻힐 곳을 미리 정했으며 그 죽는 날까지 알아냈다. 그것이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의 세번째 일이다. 이 세번째 일도 당나라 군사를 바다에 침몰시키는 문두루 비법에 직접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문두루 비법을 행한 곳이 바로 선덕여왕의 왕릉 아래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왕릉은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스스로 정해놓은 자리에 선덕여왕의 왕릉을 쓰도록 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 문무대왕을 말함)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삼국유사>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편
문무대왕이 선대 여왕인 선덕여왕을 여신으로 받아들인 자세는 현대감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될지 모른다. 고대 신화들은 지배자들의 조상신과 우주신의 일체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선대 왕은 신이며 신의 역사로 왕실이 이어져 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고대 신화적인 개념에서 조상신과 우주신의 일체화된 신관으로서 선덕여왕은 신라왕실에서 용왕신(요왕신)으로 받들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선덕여왕릉이 있는 곳을 문무대왕은 도리천(도利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이 모든 신라왕실의 신관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 이어 설명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래서 '대왕(大王: 선덕여왕을 말함, 필자 주)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四天王天之上有( )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무대왕이 당나라 군사를 바다에 침몰시킬 수 있는 지혜를 선덕여왕릉에 비는 의식으로 그 앞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무속적인 '문두루 비법'을 행했던 것이다. 문두루 비법에 대해서는 앞선 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풍랑을 일으키는 에밀레종과 풍랑을 잠재우는 만파식적(萬波息笛)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다.
선덕여왕의 평가는 지금 이 시대의 평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후대 왕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문무대왕은 선덕여왕을 그야말로 도리천의 여신으로 받들어 그 여신을 불러내서 당나라 군사가 탄 배를 바다에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作文豆婁秘密之法. 時唐羅兵未交接. 風濤怒起. 唐舡皆沒於水
문두루의 법을 행하니 당나라군사와 신라군사가 교전을 하기도 전에
거센 태풍과 파도가 일어나 당나라 배를 모두 물에 침몰시켜버렸다.
<三國遺事> 卷第二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 편
신라 왕들 특히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대왕이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고자 했던 위태한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어떤 정신적인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면 선덕여왕에 대한 후대 왕들의 평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삼국통일 시기에서 절대적인 숭배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낭산 신유림에 스스로 왕릉 자리를 지정하고 죽어 선덕여왕릉이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사천왕사는 선덕여왕릉 아래에 비단으로 휘장을 만들어 가설하여 당나라를 몰아내는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 나중에 당나라 사신이 와서 그곳을 보자고 하니 가짜 '사천왕사' 신당을 만들어 보여준 곳이 사천왕사 자리 아래쪽으로 그곳이 나중에 망덕사지 위치로 남아 있다. 망덕사는 당나라 황실의 제신을 모시는 곳이라고 당나라 사신에게 알려준 것은 겉으로는 외교적으로 당황제의 신을 모시는듯 하면서도 안으로는 선덕여왕을 모시고 당황제의 신당은 맨 아래쪽에 배치하고 있었던 것은 신라왕실의 외교적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서라벌, 낭산 신유림에 선덕여왕릉이 있고 그 아래에 사천왕사가 있고 다시 그 아래에 망덕사가 있다.
문무대왕이 당나라 해군 군선을 침몰시키기 위하여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임시로 비단으로 가설하여 그곳에서 행했다.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풍랑을 일으키는 에밀레종과 풍랑을 잠재우는 만파식적(萬波息笛)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
삼국통일을 한 문무대왕의 기상과 그의 종교적인 배경은 불교가 아니라 해신신앙을 바탕하고 있었다는 것을 문두루 비법에서 알 수 있다.
문두루 비법은 명랑법사가 부처님이 아닌 "용궁에서 배워 온 비법"이라고 <삼국유사>에서 소개할 뿐 아니라 "죽어서 해중대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대왕에게 지의법사(智義法師)가 용을 짐승이라고 비하하면서 "왜 짐승이 되려 하십니까"라고 만류했으나 "짐승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거절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신앙은 인간이 죽어서 짐승이 되는 것은 지옥과 같은 것으로 보며, 신선풍류도에서는 죽어 동물이 되는 것은 신선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짐승이 되는 것을 문무대왕은 자처한 것이다.
그 문무대왕의 종교는 선덕여왕을 신라를 지키는 도리천의 해신으로 보았으며 그것은 용궁신앙을 바탕한 고래토템이었던 것이다. 문무대왕이 붕어하여 "고래나루에 장사지냈다(粉骨鯨津)"고 했을 뿐만이 아니라 대왕암은 신문왕이 외뿔고래(한 그루 대나무가 있는 떠더니는 섬)를 보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문무대왕은 죽어서 귀신고래가 되어 만파식적과 에밀레종 스토리의 주인공들인 신문왕과 성덕대왕, 경덕대왕의 '조상귀신고래'로서 바다에 '해중대룡(海中大龍)이 되어 그의 자손 대왕들을 '고래 신룡들'로 태어나게 했던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당나라를 무찌른 호국지대룡으로서 귀신고래는 신라대왕들의 토템이었다는 것을 필자는 누누히 주장해 온 것이다. 귀신고래는 엄동 겨울이 시작되면 알라스카에서 동해안으로 내려왔다가 여름이 가까와 오면 다시 알라스카로 올라가, 거기에서 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의 바하 캘리포니아까지 내려갔다. 이러한 귀신고래의 이동로를 바탕으로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학설을 필자가 최초로 주창하게 된 것이다.
1914년 미국의 고고학자 로이 채프만 앤드류스에 의하여 동해안 귀신고래는 Korean stock of gray whales(한국계귀신고래)로 명명되었으며,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울산 인근 동해바다는 1962년 천연기념물 제126호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으로 지정됐다.
귀신고래의 가족 사랑은 사람처럼 암귀신고래가 죽으면 숫귀신고래도 그 새끼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고 함께 잡힌다고 한다. 세계 80여종의 고래 종류 가운데 국립수산과학원이 파악하고 있는 한반도 연해에서 발견되는 고래는 대형 고래류 9종, 소형 고래류 26종로 모두 35종이다.
20세기 초까지 동해안 고래의 반은 귀신고래였다.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는 세계 최고 오래된 암각화이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신라 화랑들의 기록들이 들어 있을 정도로 신라인들의 고래토템 숭배의 성지였다. 장생포를 중심으로 동해바다에 귀신고래를 비롯한 고래들이 코리안 선조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일찍이 울산과 영일만 일대를 경해(鯨海)로 불렀던 것이다.
1849년 무렵 한반도 연안에서 조업한 미국 포경선의 포경일지에는 ‘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 논다. 셀 수조차 없다.’고 기록돼 있다. 20세기초까지 '물반 고래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해물은 고래바다였다.
신라인들에게 동해바다에서 고래는 조상이 죽어 환신한 신이며 대왕과 같은 의미로 숭상되었다. 신라의 문무대왕은 죽어서 '고래나루'에 장사되었다는 그 나루는 고래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는 의미로서 대왕암에 묻혔다. 그만큼 문무대왕은 용궁의 비법을 숭상하고 있었다.
'고래나루' 즉 경진(鯨津)은 <고려사 > 에서 송나라 사신이 와서 '고래나루가 고려 왕실의 숭상을 받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其有三韓舊域, 百濟遺封, 地控鯨津, 誠尊象闕
삼한 옛 땅에 백제의 남은 땅에 고래나루가 있어
대궐의 숭상을 받고 있다. <高麗史>
조선시대 태조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간 권근은 조선땅을 소개하면서, "곳곳이 모두 고래 노는 바닷가(鯨海濱)"라고 소개하고 있다.
문무대왕이 선덕여왕릉을 도리천이라 한 것은 고래나루의 바다 속 용궁이 여왕의 왕릉으로 의미한 것이다. 그 여왕릉 아래에 비단으로 휘장을 만들어 사천왕사를 임시로 세워 당나라를 무찌르는 문두루비법을 행하고 당나라 군선이 바다에 침몰하자 그에 대하여 '선덕여대왕의 신령함을 알겠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전후 문맥을 보면 선덕여왕을 문무대왕이 그렇게 높이 숭상한 것은 용궁과 고래토템숭배에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에 의하여 퇴출된 당나라 고종(高宗)이 31대 신문왕 때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서 당나라 태종(太宗)과 같은 시호를 삼은 태종 무열왕의 '태종(太宗)'이라 시호를 못쓰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다. 이때도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일종의 대결국면이 있었는데 신문왕은 당 고종에게 지지 않고 무열왕을 태종으로 그대로 쓰도록 관철시키는 결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것은 선덕여왕이 당태종과 겨룬 것의 후예라 할 사건이 었다. <삼국유사>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삼국유사>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편
당나라 고종이 태자로 있을 때에 김유신의 꿈을 꾸었다는 것은 분명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김유신이 두려워 꿈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그로 인하여 '태종(太宗)' 시호 사용에 대하여 더 이상 문제삼지 않게 된 것이다.
신문왕은 당태종이 신하를 잘 얻어 천하를 통일했다면, 신라 태종대왕도 김유신장군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니 '태종(太宗)' 시호를 가질 수 있다고 강변하여 당나라 고종의 주장을 접게 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신문왕의 자신감은 그 선대 여왕인 선덕여왕의 지혜를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앞선 글에서 신라의 골품제도는 고래품제도로서 고래뼈로 만든 경골홀(鯨骨笏) 또는 고래 이빨로 만든 경아홀(鯨牙笏)이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태종(太宗 武烈王) 때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다(是王代始服中國衣冠牙笏)고 했다.
그동안 신라시대 왕궁에서 품계의 상징으로 사용한 고래토템과 관련된 홀(笏 club)은 태종 무열왕 때에 당나라 의관과 아홀(牙笏)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는 고래뼈로 된 홀을 사용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홀(牙笏)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자장법사는 불교문화로 신라 고유의 고래토템숭배에서 기원하고 있는 고래뼈로 된 홀(笏)인 경골홀(鯨骨笏) 또는 고래 이빨로 만든 경아홀(鯨牙笏)을 싫어하여 당나라 아홀(牙笏: 필히 코끼리 상아홀이었을 것)로 바꾸도록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래토템숭배 민족인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고래뼈로 된 클럽(鯨骨笏)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다루었다.
*마오리족의 '골품제도'의 고래뼈 홀(笏). 고래를 닮아 있다.
Tawhiao Matutaera Potatu Te Wherowhero (with whalebone-club)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신라의 '고래품 제도' 골품제도(骨品制度)
다시 말해서 문무대왕이 선덕여왕 왕릉 아래에 비단 휘장으로 가설한 임시 사천왕사 신당을 만들어 그 안에 풀(草)로 신인상을 세우고 당나라 군사를 무찌르는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는 것은 선덕여왕의 종교가 불교중심이 아닌 전래의 고래토템숭상을 바탕한 무속적인 배경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선덕여왕 왕릉을 '용궁'의 의미로 부여하고 그 아래에서 제단이라 할 '비단으로 된 사천왕사'를 만들어 문두루 비법의 무속을 행했다는 것은 선덕여왕이 당나라를 벌하는 신라 고유의 '용왕'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문무대왕의 명으로 당나라 군사를 바다에 침몰시키도록 문두루 비법을 행한 명랑(明郞) 법사와 유사한 신라 고유의 신성풍류도의 도사인 밀본(密本) 법사가 있었다.
명랑과 밀본은 모두 불교의 승려들과 대결하여 이기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그들은 불교 법사가 아닌 신라의 음양신선풍류도의 도사였다. <삼국유사> 밀본최사(密本최邪) 편에는 다음과 같이 선덕여왕이 공주 때에 병을 치유한 밀본(密本)이 불교 승려를 척결한 특이한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선덕왕(善德王) 덕만(德慢)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법척(法척)이 임금(26대 진평왕)의 부름을 받아 덕만의 병을 치료했으나 오래 되어도 효력이 없었다. 이때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덕행(德行)이 나라 안에 소문이 퍼져서 좌우 신하들이 덕만의 주치의를 바꾸기를 청했다. 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밀본은 신장(宸仗)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경을 다 읽고 나자 가졌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法척)을 찔러서 뜰 아래에 거꾸로 내던지니 덕만공주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때 밀본(密本)의 이마 위에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쳐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삼국유사> 밀본최사(密本최邪)
선덕여왕의 병을 낫게 하지 않는 흥륜사 절의 승려를 늙은 여우와 함께 육환장(六環杖)으로 찔러죽이는 장면은 거타지(居타知) 신화의 내용과 일치된다. "중의 탈을 쓴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죽이는" 장면은 그대로 거타지(居타知) 신화에도 나오는 것으로 신선 도사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이 밀본(密本) 법사인 것이다.
거타지(居타知)가 늙은 여우가 둔갑해 있던 중을 활로 쏘아죽이고 서해약(西海若)이라고 자신을 밝힌 용왕 가족을 살려낸 것과 같이 밀본(密本) 법사는 늙은 여우를 중과 함께 죽이고 선덕여왕을 살려냈다는 것은 선덕여왕이 '용왕'을 의미하고 있다 것을 두루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거타지 신화의 구조로 볼 때 선덕여왕의 위치는 용왕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선덕여왕은 신라왕실에서 '용왕'으로 숭상된 것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이 신라왕실에서 용왕으로 받들어진 증거들
1) 30대 문무대왕이 당나라 배를 침몰시킬 때 사천왕사 신당을 선덕여왕릉 밑에 세우고
선덕여왕을 도리천이라 하며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 군선이 침몰하자 여왕의 신령함이라 한 것.
2) 거타지(居타知)가 늙은 여우와 중을 죽이고 죽어가는 용왕가족을 살린 것처럼 밀본(密本) 법사가
늙은 여우와 중을 그의 육환장(六環杖)이 날아가 죽임으로써 병에서 살아난 선덕여왕의 위치가
'용왕'과 같은 위치에 적용된 것.
3)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의 태종 무열왕의 '태종'이라는 시호를 쓰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하여
31대 신문왕이 반박하는 과정의 모델이 선덕여왕이라는 것.
이렇게 볼 때 선덕여왕은 신라 왕실에서 '용왕'으로서 당나라를 무찌르게 한 '신령한 대왕'으로 문무대왕에게 숭상되고, 백제 기습군을 알아내 물리치게 한 배경에서, 그리고 선덕여왕이 '용왕'으로 되살아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신라왕실의 평가는 가히 선덕여왕이 신라 왕실에서 용왕으로서 여신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여론조사에서 가장 앞서가는 여성인물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이다.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처럼 박근혜는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호불호를 떠나 우리 민족사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여왕이었던 신라의 선덕여왕에 비견될 수 밖에 없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시사한 것 또한 박근혜 현상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선덕여왕에 대입하고자 한 것은 그 때문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선덕여왕을 조명한 것은 물론
미실을 등장시켜 신라의 여신숭배와 그 권력적 배경을 조명하려 했던 것은 <화랑세기>와 더불어
박창화의 다른 필사본들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글: <역사산책> 선덕여왕과 미실(美室)의 여성적 권력 발생의 배경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경주 남산의 상선암에서 문노가 산신에게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고증을 따랐다면 고래해신 '요왕님'에게 더 큰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왔어야 했다.
나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가 서라벌 남산 상선암에서 산신제를 올리는 것을 보면서 보다 확실한 고증을 따랐다면 고래해신 '요왕님'에게 더 큰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다만 선덕여왕에 캐스팅된 탈랜트 이름이 '이요원'이라는 것은 '요왕님'과 유사한 음운이 난다는 데서 흥미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과감하게 박창화의 필사본인 <화랑세기>와 그의 다른 남다유고들을 참고하여 드라마 각본을 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려중기에 쓴 불교와 고려왕조의 입김으로 만들어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만으로는 신라인들의 토속적인 신화와 사상들을 다루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 등에서 보여주는 신라왕실의 여성 권력자들의 종교적인 지위는 신라왕실 문화의 중요한 코드이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을 조명한 것은 물론 미실을 등장시켜 신라의 여성권력과 여신숭배의 그 권력적 배경을 제대로 조명하지는 못했지만, <화랑세기>와 더불어 박창화의 다른 필사본들도 참고했다는 면에서 돋보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선덕여왕과 미실 현상 등에 대해서 필자가 특별히 다룬 글은 <역사산책> 선덕여왕과 미실(美室)의 여성적 권력 발생의 배경에서 그리고 <역사산책> 유황(幌宮)궁주의 숭배로 본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나는 미실(美室)의 권력...에서 볼 수 있다.
다만 박근혜를 의식한 <선덕여왕>의 드라마가 인기가 높아지자 애초의 50회를 넘겨 제작자를 교체해 가면서까지 10회분을 추가편성한 내용에서 선덕여왕 때에 쿠데타 실패 사건인 비담의 난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던 것은 박근혜 인기에 제동을 걸고자 한 이명박 정권이 정치적인 개입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서는 <문화비평>박근혜는 선덕여왕 비담(毗曇)은 이명박에서 비판한 바 있다.
박근혜는 신라시조 박혁거세 후손이다. 선덕여왕은 김알지 후손으로 김씨였다. 신라왕실은 박,석,김 삼성이 왕조를 이어온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혁거세(赫居世)'라는 칭호는 향언(鄕言)일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뜻은 '불구내(弗矩內)' 왕으로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고 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많은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박근혜'는 흥미롭게도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의미인 '불구내(弗矩內)'의미가 밝은 복지의 의미를 부여하는 뜻이 된다.
박혁거세 신화는 그 왕후인 알영부인과 선도성모와 함께 여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삼국유사>에서는 '불구내'와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불구내'는 '밝은 해'의 의미로 볼 수 있다.
因名赫居世王.(盖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 )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
이에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 -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 혁거세왕 편.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서 복지를 강조하는 박근혜 대통령 시대는 '불구내 - 밝게 세상을 다스리는 해'의 시대를 이미한다. 국회의원 128명의 추인으로 발안된 박근혜 복지정책이란 '불구내-박근혜'의 밝은 세상을 위한 복지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혹자들이 시기하여 박근혜 대통령 시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세습'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그것은 박정희와 박근혜 사이에 '참혹한 흉기 사건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특별한 사실에서 그렇다는 것을 나는 강조한다.
특히 박정희 - 박근혜 사이가 세습이 아닌 것은 불법적인 흉한의 총기와 칼이 동원되어 그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육영수여사에 이어 박정희대통령도 총기에 의하여 서거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05년 5월 20일에 한나라당 대표로 현장 활동을 하고 있던 박근혜 대표에게 민주당 성향의 50대 남성인 지충호씨로부터 이른바 면도칼 피습을 당했던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박정희 육영수 권력에서 그리고 박근혜 자신에게서도 그 사이의 권력의 끈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력적인 세습이나 그 어떤 보호도 없이 단절된 상태를 노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세습이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 권력의 단절은 권력의 상실이 완벽히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박근혜의 등장은 권력자가 세습시켜준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지지에 의해서이다.
권력의 후계자라면 위로부터 물려받아 지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두 부모를 잃고 20년이 지나 국민들의 지지로부터 일어난 사람이다. 이점은 다른 여러 대통령들의 2세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때마침 경호원의 제지도 없이 혼자 힘으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위험천만의 위기를 극복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일어나 저 유명한 '대전은.."이라는, 한나라당 선거에 대하여 염려를 먼저 했던 것은 유명한 말로 남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 권력은 육영수 여사의 서거까지 완전히 권력이 단절된 결과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여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총탄에 암살되어 그 모든 권력은 거기에서 세습된 것이 아니라 단절되었다. 그 단절된 터 위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표로 일어나 지금까지 새로운 대통령 위치를 창출해내고자 부모의 서거와 자신의 위기를 딛고 독립적으로 국민적 지지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심청전>으로 말하면 인당수 물에 들어갔던 상태에서 연꽃을 타고 되살아난 것을 의미하며, <춘향전>으로 말하자면 옥중에서 다시 회생한 것을 의미하며, <별주부전>으로 말하자면 토끼가 다시 물 위로 올라와 환생한 것을 의미하며, 바이블의 요나로 말하면 고래 뱃속에서 다시 환생한 것을 의미한다. 무속적으로 말하자면 <바리공주 설화>에서처럼 지옥에서 돌아와 부모를 살려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혈혈단신 일어난 독자적인 차기 대통령 후보로 국민의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천막당사로 쓰러졌던 한나라당을 새로 일으킨 대표로서 그녀는 죽어가는 한나라당을 다시 살려내고 오늘날까지 최고의 여론지지를 받는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문무대왕이 선덕여왕 왕릉 아래에서 '천막 신당'을 세우고 당나라를 무찌르던 바로 그 천막의 신비한 모습이 한강변의 천막당사를 일으켜 세운 박근혜 대표에게서 현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익랑지(翼廊址)란 날개처럼 펼친 회랑을 의미한다.
*한나라당 천막당사.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 '천막당사지'는 훗날 의미깊은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선덕여왕은 직계 자녀가 없었다. 박근혜 또한 여러 정치적인 질곡의 생애에서 결혼하지 않은 싱글로 살아왔다. 선덕여왕은 공주시절 덕만공주로서 당나라와의 국제적 외교적인 일까지 행했다. 박근혜 또한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뒤에 청와대에서 '펄스트 래디'로서 모든 창와대의 외교적인 일을 해냈다.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의 외교적인 압박을 이겨냄으로써 나중에 문무대왕이 그의 선대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여신적인 신령한 힘을 빌어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 그 결과 당나라 수만 명 군사가 탄 배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듯이 과연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과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역대 어떤 인물들보다 박근혜는 중국정부에서도 환영받고 북한의 김정일과도 정치적인 대화의 경험이 있는 특별한 인물이다. 세계 수많은 나라들이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대통령의 초고속 경제 근대화 발전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인물이 박근혜 대표이다.
과연 위의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위치를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에 대입하면 그 상징적인 해석은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대입이 가능해진다.
어떤 면에서 '당나라'는 한나라로 백제군사의 여근곡(경주 인근) 기습은 민주당 또는 참여당의 후보가 경상도 여근곡 인근 출신으로, 신문왕 때의 태종 무열왕의 시호인 '태종' 이슈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대입할 수도 있는 무시못할 일치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아니 노무현 전대통령이 강조한 세종시에 대한 충청도 사람들의 입장과 그 지지도를 박근혜 대표가 되찾아온 것은 어쩌면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중의 두번째 부분이 박근혜가 이어받은 구조라 할 수도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공주시절 병으로 죽기 직전이었을 때에 덕만공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죽음 직전까지 방치했던 '늙은 여우' 법척을 밀본(密本) 법사가 육환장으로 제거하고 공주를 되살려냈을 때의 그 제거당한 '법척법사'는 오늘날 박근혜에 대하여 한나라당 내에서 누구를 상징하고 있을까? 지난 대선 때의 한나라당 경선때를 돌이켜 보라.
선덕여왕 때의 종교 이야기는 신선도와 불교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오늘날 천주교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박근혜의 종교에서 과연 문무대왕이 선덕여왕릉 앞에서 신당(비단으로 가설한 초기의 사천왕사)을 차려놓고 문두루 비법을 행한 명랑(明朗) 거사의 상징은 오늘날 박근혜에게 누구에 해당할까?
과연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 차기 대통령을 뽑는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당면 과제와 신라시대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세 가지 일 및 그녀의 생애가 보여준 전체적인 정치 구도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사람들에 따라 그 반응이 난분분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이와같은 선덕여왕 - 박근혜의 역사적인 비교는 전혀 무시하지 못할 내용이 숨어 있음도 느낄 것이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다가오면 필자의 이론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선덕(善德)여왕이 여왕으로 등극한 뒤에 여왕으로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진덕(眞德)여왕과 진성(眞聖)여왕이 즉위했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 뒤에 어느 시기에 어느 여성 지도자가 여성 대통령으로 다시 등장하게 될까. 선덕여왕의 등장은 천년 신라 정치의 여신숭배와 여성중심의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의 핵심을 보여주었다.
그 무엇보다도 선덕여왕 후에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아들 문무대왕은 오늘날 박근혜 시대에서 어떤 인물이 나타나서 남북을 통일하게 될까.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모셨던 사람이었다. 그런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에 등극하였으며 그의 계보인 문무대왕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그는 당나라 세력을 이겨 바다에 수장시켰다. 그때쯤 문무대왕이 기릴 선덕여왕의 위치에 있을 박근혜의 공을 기리게 될 그 인물은 과연 언제 어떤 인물이 해당될까. 그는 김춘추처럼 박근혜 측근의 후계자에서 나올 것이다.
선덕여왕의 '善德'이란 박정희 대통령 출생지인 善山(선산)의 덕을 이어 살려내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가장 불편하게 느꼈을 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두번이나 찾아와 사과를 한 박근혜에 대하여 "기쁘고 감격했다"고 술회한 것은 호남지역 국민들의 여론에서도 박근혜의 인기가 가장 앞서는 배경이 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004년 8월 박근혜 전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 시절에 여러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한 일을 소개하면서 "뜻밖이었고 참으로 고마웠다"고 썼다. 그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하고 감탄했다고 썼다.
김 전 대통령은 과연 일국의 대통령까지 했으나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마지막 노후까지 그의 정신세계의 고통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감격스러운 소회를 밝혔다. 이러한 김대중 대통령의 감회는 그 어떠한 남아 있는 지역감정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는 박근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호남지역의 박근혜 지지도는 박근혜의 열린 자세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오랜 선덕여왕의 역사만이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묵은 정치의 앙금을 덜어내는 겸허한 포용력을 보여준 것이다.
세대 문제 지역감정 문제 과거 정치의 청산 등 모든 공시적인 문제들과 함께 선덕여왕시대의 통시적인 역사에 이르기까지 박근혜의 신비로운 천막당사의 신화는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1세기 한국 정치의 새로운 장을 펼쳐낼 것인가. (03/21/11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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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유황(幌宮)궁주의 숭배로 본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나는 미실(美室)의 권력...
<역사산책> 신라의 옥모(玉帽) 황후와 고구려 중천왕(中川王)의 '연애대전' 누가 이겼나
첫댓글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에 대한 역사학적 메타포가 빈약한 시점에 오두님 글은 예언가 이상의 해석력을 보여주고 있다. 1년 반 전의 글이지만 어느 때 보아도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다!
자료 감사합니다 ~~~ㅎ
잊었던 역사공부 도움이 많이되였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선덕여왕을 보면서 박근혜님을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