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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首陽山)과 고죽국(孤竹國)에 대한 소고(小考) - (1)
○ 조선사(朝鮮史)에서 ‘수양산(首陽山)’은 ‘황해도(黃海道)’에 있다고 하며, ‘수양산(首陽山)’은 조선인이었던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사(故事)가 깃든 유서(由緖)깊은 곳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생명(生命)이 생생(生生)하게 숨 쉬는 곳이다.
백이숙제(伯夷叔齊)란 어떤 인물(人物)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은【殷 : 조선(朝鮮)국이다.】나라 말(末)로부터 주(周)나라 초기(初期)에 살았던 인물(人物)이다. 백이(伯夷)의 성(姓)은 묵(墨)이고, 이름은 윤(允)이다. 백이(伯夷)은 ‘맏이’이고, 이(夷)는 시호(諡號)이다. 숙제(叔齊)는 그의 아우로서 이름은 지(智)요, 시호(諡號)는 제(齊)이다. 고죽 군【孤竹 君 : 고죽국왕】의 아들이었는데 그 아버지인 고죽국(孤竹國) 왕(王)이 동생인 숙제(叔齊)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려고 하자, 숙제(叔齊)는 그것을 사양(辭讓)하였다. 형(兄)인 백이(伯夷)역시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형제(兄弟)는 나라를 떠나 주【周 : 당시(當時) 은(殷)의 제후국(諸侯國)이었는데, 제후(諸侯)중에서 가장 강(强)하였다고 전한다.】 문왕(文王)에게 갔으나, 문왕(文王)은 죽고, 그의 아들인 “발(發)”이 이어받고, 은(殷)나라를 정벌(征伐)하려 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반대(反對)를 하였지만, 무왕(武王)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제(兄弟)는 주(周)나라에서 지급(支給)한 녹(祿)받은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고는,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 「고죽국(孤竹國)」은 「고려(高驪) 또는 구려(句驪) 또는 고구려(高句驪)의 선대(先代)국가」(國家)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고죽국(孤竹國)”은 어디에 있었으며, “수양산(首陽山)”은 어디에 있었던 산(山)일까? 지금까지 정답(正答)이 없다. 여기다, 저기다 여기다 말만 많다. 우리 카페에서도 여러 번에 걸쳐 논의(論議)된 바 있으나, 정확(正確)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진(未盡)한 실정(實情)이기에 다시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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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조선(近代朝鮮)의 관리(官吏)였으며, 유학자(儒學者)였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고죽 성(孤竹城)”이란 시(詩) 한 편을 보기로 하자.
孤 竹 城 (고 죽 성)
〔白 草 黃 沙 萬 餘 里 : 시든 풀과 누런 모래(사막) 만여 리 (중략) / 盧 龍 塞 上 逢 新 歲 : 노 룡(盧龍)새에서 새해를 맞아 / 孤 竹 城 頭 望 故 鄕 : 고죽 성 꼭대기에서 고향을 바라본다.〕
㊀ 우선 위의 시(詩) 제목(題目)이 “고죽 성(孤竹城)”이다. 그렇다면 「“고죽 성(孤竹城)”은 백초(白草 : 시든 풀)와 황사(黃沙 : 누른 모래)가 있는 노 룡(盧龍)주위에 있었다.」는 말이 되며,
㊁ 노 룡(盧龍)새(塞)는,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현 하 북 성(河北省) 동(東)쪽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는데, 중요(重要)한 것은 “노 룡(盧龍)”이 있는 곳의 특이지형(特異地形)이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위의 설명(說明)은 현재(現在)의 하 북 성(河北省) 동(東)쪽지방과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㊂ 결국(結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허구(虛構)였다”는 것을 증명(證明)하며, “고죽국(孤竹國)”은 사막(沙漠)주위 또는 사막(沙漠)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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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 글 (1)에서 나오는 “노 룡(盧龍)”의 특이지형(特異地形)을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해주는 조선인(朝鮮人)의 글 하나를 보기로 하자.
次 東 皐 永 平 府 韻 (상촌 집 : 象村 集)
〔鄕 原 別 後 歲 年 遙 : 고향 땅을 떠난 뒤로 까마아득한 세월 / 倦 役 支 離 幾 暮 朝 : 힘든 노역 지루하게 몇날 며칠 넘겼던가. / 遲 日 郊 坰 團 野 馬 : 더딘 해 들녘에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 暖 風 烟 靄 冪 春 條 : 온화한 바람에 안개는 봄 초목을 덮었구나. / 厭 看 遼 塞 聯 寒 磧 : 요동 변방 끝이 없는 차가운 사막 실컷 보고 / 又 向 灤 河 渡 斷 橋 : 또 다시 난 하 향해 끊긴 다리 건너가네. / 從 古 盧 龍 稱 絶 漠 : 예로부터 노 룡 사막 험난하다 불렸나니 / 覉 膓 懸 斾 正 搖 (搖) : 나부끼는 깃발인가 나그네 마음 흔들려〕
• 요동(遼東)지방은 “사막지대(沙漠地帶)”이다. 여기에 더하여 삭막(朔漠)지대 곧 추운 사막지대(沙漠地帶)이며, 이곳을 지나, 요서(遼西)지방(地方)에 “난 하(灤河)”가 있으며, 이곳에 있는 「노 룡(盧龍)」지방(地方)은 사막(沙漠)중에서도 험 난(險難)하기로 유명(有名)했다는 말은, 「현 하 북 성(河北省)지방(地方)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딴 세상(世上)이란 사실이다.」
• 그렇다면 「난 하(灤河) 변(邊)에 있었다는 고죽 성(孤竹城)이나 고죽국(孤竹國)은 현 하 북 성(河北省)지방과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는 사실이며, 『황토(黃土)사막(沙漠)지대(地帶)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위 글에서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事實)을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準備)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문제(問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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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자 연행 잡지(庚 子 燕 行 雜 識) [잡지(雜 識)] / 상 : 〔난 하(灤 河)에 이르렀다. 수양산(首 陽 山) 아래에서 난 하(灤河)의 남쪽에 이르기까지 조그만 성(城)이 하나 있다. 성문(城門)에는 돌로 ‘고 죽 성(孤 竹 城)’ 석 자를 새겼고, (중략), 난 하(灤 河)의 뛰어난 경치(景致)는 유주(幽 州), 연경(燕 京) 수천(數千)리 사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하였다.
• 수양산(首陽山)아래에, 난 하(灤河)가 흐르며,
난 하(灤河)의 남(南)쪽에 “고죽 성(孤竹城)”이 있고,
유주(幽州)와 연경(燕京)사이는 수천(數千)이 이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주(幽州)는 연경(燕京)을 포함(包含)한다. 지리적(地理的)으로 연경(燕京)이 옛 ‘북 평(北平)’이라고 한다면, 유주(幽州)는 북 평(北平)을 안을 수 있으나, 북 평(北平)은 유주(幽州)를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자.〕
• 이러면 「수양산(首陽山)」은 현(現) 「산서 성(山西省)이나 하남(河南)성이나 하 북 성(河北省)이나 섬서 성(陝西省)등지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더하여 湛 軒 書 外 集 卷 九 / 燕 記 / 夷 齊 廟 : 〔“이제” 묘(墓)는 난 하(灤 河) 남쪽 고죽국(孤竹國) 옛터에 있다.〕고 하였으며,
• 燕 轅 直 指 제2권/ 出 疆 錄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 14일 / 난하기(灤 河 記) : 〔영 평성(永 平 城)에서 서쪽으로 5, 6리를 가면 난 하가 있다. 그 근원은 장성(長城) 북쪽 개평(開平)에서 나오는데, 동남(東南)쪽으로 흘러, 천 안 현(遷 安 縣)을 경유, 노 룡 새(盧 龍 塞)에 이르러 칠 하(漆 河)와 합친다. 난 하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이 제묘(夷 齊 廟)가 있다.〕고 하였으며,
• 기 유 록(奇 遊 錄) (김 정중) 신해 년(1791, 정조 15) 12월 / 17일 : 〔돌계단으로 올라가 보니, 성 밑을 가로지르는 난 하(灤 河)가 있는데 곧 열하(熱 河)의 하류(下流)이다. 대(臺)의 서쪽에 이르러 두 줄기로 나뉘어 가운데가 작은 섬이 되고, 섬 안에 고죽 묘(孤 竹 廟)가 있다. 영 평부(永 平 府)로부터 여기까지는 다 “고죽국(孤 竹 國)”의 옛터이다. 〕라 하였고,
• 열하일기 (박 지원) 관내정사(關 內 程 史) : 〔난 하(灤 河) 기슭에 자그마한 언덕을 ‘수양산(首 陽 山)’이라 하고, 그 산 북쪽에 조그만 성(城)이 있으니 ‘고 죽 성(孤 竹 城)’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 현(現) 「산서 성(山西省)이나 하남(河南)성이나 하 북 성(河北省)이나 섬서 성(陝西省)등지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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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열하일기 (박 지원) 관내정사(關 內 程 史) : 〔오운(吳 澐)이 말하기를, “《수서(隋 書)》 배구 전(裵 矩 傳)에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 竹 國)이다.’ 하였고, 상고하건대 고죽국이 뒤에 요서(遼 西)의 땅에 이르렀으니, 그 강역(疆域)이 멀리 뻗어 지금의 요 심(遼 瀋) 지대가 된다. 고구려가 요동(遼 東)을 차지하였으니 배구의 말도 믿을 만하다.〕
(5) 성호사설 제2권/ 천지 문(天地 門) / 고죽 안시(孤 竹 安 市) : 〔《수서》배구 전(裴 矩 傳)에 보면,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 竹 國)이다.” 하였다.〕
(6) 연려 실 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 기자조선(箕子朝鮮) : 〔《당서(唐書)》에서 배구(裵 矩)가 말하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 竹 國)인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 되었다.”고 하였다.〕
(7) 燕 轅 直 指 제1권 / 出 疆 錄.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4일 : 〔 《당서(唐書)》 배구 전(裵 矩 傳)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 竹 國)인데, 주(周) 나라는 기자(箕 子)를 봉하고 한(漢) 나라에서는 4군(郡)으로 나누었다.” 하였는데, 이른바 ‘고죽국의 땅’은 지금의 영 평부(永 平 府)에 있다.〕
(8) 渡江錄 (박 지원) 6월 24일 : 《당서》 배구 전(裴 矩 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 竹 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 평 부(永 平 府)에 있으며, (중략).〕
(9) 海東繹史. 續集 제2권. 地理 考 2 조선(朝鮮) : 〔《수서(隋 書)》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구(裴 矩)가 서장(書狀)을 올려 상주(上奏)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 竹 國) 땅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에게 봉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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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고죽국(孤竹國), 고죽 성(孤竹城), 백이숙제(伯夷叔齊), 수양산(首陽山), 난 하(灤河), 노 룡 새(盧龍塞)』등에 관한 것들을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대륙 사(大陸史)인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남경도(南京道)』편을 보면서 생각해 보자.
〔南 京 析 津 府 : 本古冀州之地.高陽氏謂之幽陵,陶唐曰幽都,有虞析為幽州.商並幽於冀.周分並為幽.《職 方》,東 北 幽 州, 山 鎮 醫 巫 閭.(中略),武王封太保奭於燕.泰以其地為漁陽,上谷,石北平,遼西,遼東正郡.漢為燕國. (中略) : 남경석진부 : 이곳은 본시 옛 기주의 땅이다. 고양(高陽)씨의 “유릉(幽陵)”이며, 도당(陶唐)의 유도(幽都)이다. 우(禹)시절에 유주(幽州)를 나누었고, 주(周)나라 때에 유주(幽州)로 나누었다. 《직방(職方)》에 의하면 동북(東北)은 유주(幽州)였고, 진(鎭)은 <의무려(醫無閭)>이다. (중략). 무왕(武王)이 태보(太保)였던 소공석(召公奭)을 연(燕)에 봉(封)했고, 진(秦)나라 때에는 이 땅에 어양(漁陽), 상곡(上谷), 우 북 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군을 두었으며, 한(漢)나라 때에는 연 국(燕 國)에 속했다.〕
• 위의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남경도(南京道)편을 보면, 「유주(幽州)는 옛 유릉(幽陵)이며, 유도(幽都)였으며, 이곳은 바로 “어양(漁陽), 상곡(上谷), 우 북 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군”지역이며, 주(周)초 “연(燕)”나라에 속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본래(本來) “유주(幽州)”땅이 얼마나 광활(廣闊)한 면적(面積)이었는지 짐작(斟酌)키도 어려울 정도(程度)다.
• 현재(現在)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로 보면, 『길림성(吉林省)일부. 요녕성(遼寧省), 하북성(河北省). 요녕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 북방(北方)의 내몽고(內蒙古) 땅과 산서 성(山西省), 섬서 성(陝西省)일부, 산서 성(山西省)과 섬서 성(陝西省), 영하 성(寧夏省) 북방(北方)의 내몽고(內蒙古) 땅과 그 북방(北方)의 외몽고(外蒙古) 땅 일부(一部)까지를 포함(包含)하는 엄청난 면적(面積)이 ”유주(幽州)의 관할(管轄)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상곡 군(上谷郡)의 속현(屬縣)이었던 「“조양(造陽)”이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 서북방(西北方) 900 리에 있었다.」는 사서(史書 : 통전 및 자치통감등)의 기록이, 이를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해 준다.】
〔灤 州 : 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鬼,即此。: 본시 옛 황락 성(黃洛城)이다. 란 하 (灤 河)가 띠(고리)를 두르는 듯 하며, 노룡(盧龍)산 남쪽에 있으며, 齊(제) 환공(桓公)이 산융(山戎)을 벌할 때, 산신(山神) ‘유괴’를 보았다는, 곧 이곳이다, 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名海陽縣,漢水為公孫度所有.晉以後屈遼西.石晉割地,在平川之境. : 진(秦)나라 때 우북평(右北平)이요, 한(漢) 나라 때는 석성(石城)현이며, 뒤의 이름은 해양(海陽)현이다. 한수(漢水)를 “공손도(公孫度)”가 소유했었다. 진(晉)나라 이후에는 요서(遼西)에 속했으며, 석진(石 晉)이 이곳을 나눴는데 평 천 지경이다. 太祖以俘戶置.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 : 태조(요나라 태조)가 항복한 민호들을 모아 설치한 곳이며, 이곳 “란 주(灤 州)”는 등 뒤에 산을 짊어지고 하(灤 河)가 띠를 두른 듯하며, 한(漢)나라 북쪽의 형승지지였다. 이곳에 부소 천(扶蘇泉)이 있는데, 물맛이 감미롭다. 진(秦)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북쪽의 장성(長城)을 쌓는데 이곳에 상주(嘗駐)했었다. : 림유산(臨楡山)이 불쑥 솟아 산봉우리가 천여(千餘)인(刃)에 이르고, 그 아래에 림유하(臨渝河)가 있다.〕
➀ 黃 洛 城(황락 성) - 殷(은)나라 때 고죽국(孤竹國)의 都城(도성)의 성(城) 이름이다.
➁ 海 陽 縣(해양 현) - 사기(史記)에 의하면, 「한서지리지(漢書 地理志)에 “해양(海陽)은 요서(遼西)에 속했다.」고 하였으며, 「소 진 설 초에는 “동쪽에 하주(夏州), 해양(海陽)이 있다.(東 有 夏 州, 海 陽)」하였다. 하주(夏州)는 현(現) 섬서 성(陝西省) 북방(北方)지역과 서북방(西北方)의 상군(上郡)의 땅이 하주(夏州)였으며, 수(隋)나라 때 이곳에 하주(夏州)를 두었다.
➂ 부소(扶 蘇) - 시황제(始皇帝)때 태자(太子)로, 「부소(扶蘇)와 대장군 몽념(蒙恬), 그리고 3십만 장병(將兵)들과 쌓은 장성(長城)은, 현(現) 섬서 성(陝西省) 서북방(西北方)으로, 하(河)주변(周邊)을 벗어날 수 없다. 이다.秦 始 皇帝시 皇太子이다. <부소>와 대장군 <蒙 恬>이 이민족들의 침략과 약탈에 장성을 축조한곳은 陝서성 북방지역의 황하주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곳은 “하남(河南), 하북(河北)지방”이며, 즉 내몽고(內蒙古) 하투(河套)지방과 그 북쪽지방을 말한다.
➃ 림유산(臨楡山)과 림유하(臨渝河) : 현(現) 하북성(河北省) 그 어느 곳에도 천여(千餘)인(刃)의 높이를 가진 림유산(臨楡山)이란 이름을 가진 산(山)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➄ 한(漢)나라 북(朔)쪽의 형승지지(形勝之地) : 한(漢)나라가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고 있었다고 가정(假定)했을 때, 그 북쪽의 지세(地勢)나 경치(景致)가 뛰어난 땅은 당연(當然)히 장안(長安)의 북쪽이다.
➅ 한수(漢水)와 공손도(公孫度 : ‘탁’이라고도 함) : 반도(半島)의 한강(漢江)과 대륙(大陸)의 한수(漢水)를 제외(除外)하고, “한수(漢水)라고 이름을 가진 대천(大川)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것은 위 원전(原典) 기록(記錄)에서 보듯, 진(秦)의 장성(長城) 지역(地域)과 무관(無關)할 수 없으며, 현(現) 황하(黃河)와 관련(關聯)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지리적(地理的)인 위치(位置)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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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남경도(南京道) 영주(營州)
〔營州,本商孤竹國.秦屬遼西郡.漢為昌黎郡前燕慕容醊徙都於此.元魏立營州,領昌黎、建德,遼東,樂浪,冀陽,營丘六部.後周為高寶寧所據. : 영주(營州)는, 본시 상(商)나라 때 고죽국(孤竹國)의 땅이며, 진나라 때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해 있었다. 원위 때 영주를 설치했고, 창려, 요동, 낙랑, 기양, 영구, 건덕 등 6 부를 다스렸고, 후주(後周)때는 고 보 녕(高 寶 寧)이 이곳에 거하였다. 隋開皇置州,大業改遼西郡.唐武德元年改營州,萬歲通天元年始入契丹。聖歷二年僑治漁陽.開元五年還治柳城.天寶元年改曰柳城郡。後唐復為營州.太祖以居定州俘戶.廣寧縣.漢柳城縣屬遼西郡。: 수(隋) 개황(開皇)시 주(州)를 두었는데, 대업(大業)간에 요서군(遼西郡)으로 고쳤고, 당(唐) 무덕(武德) 원년(元年)에 영주(營州)로 고쳤다. 만세(萬歲)통천 원년(元年)에 처음 글란(契丹)이 들어왔다. 성력 2 년에 임시로 어양(漁陽)에서 다스렸다.【글란(契丹)이 이곳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개원(開元) 5년에는 복귀시켜 유성(柳城)에서 다스렸고, 천보(天寶)원년(元年)에는 유성군(柳城郡)으로 바꿨다. 후당(後唐)때 다시 영주(營州)를 두었다. 요(遼) 태조(太祖)가 사로잡은 민호(民戶)들을 마을에 정착시켰다. 광녕(廣寧)현은, 한(漢)나라의 유성(柳城)현인데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 영 원 위(寧 遠 衛) : 금주(錦 州)에 속하는데 역시 고죽국(孤 竹 國)의 땅이다. 한(漢) 나라 때는 해양(海 陽)이라 하였고, 연(燕)나라에서는 집녕(集 寧)이라 하였고, 당(唐) 나라 때는 서주(瑞 州)라 하였고, 요(遼) 나라에서는 습 주 평해군(隰 州 平 海 軍)이라 하였고, 금(金) 나라에서는 해양 해빈(海 陽 海 濱)이라고 하였고, 원(元) 나라 때에는 태녕(太寧)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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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조선사(朝鮮史)와 대륙 사(大陸史)”에서 “고죽국(孤竹國)과 그와 연계(連繫)되는 것들”을 알아보았는데, 현재(現在)의 “하 북 성(河北省)”지방과는 전혀 다른 땅을 말하고 있으며, 지세(地勢)나 특이지형(特異地形), 방향(方向)등으로 볼 때 전혀 다른 곳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이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주장(主張)은 “허구(虛構)였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죽국(孤竹國)”을 넓고 넓은 땅 중에서 하필 “하 북 성(河北省)에 있었다.”고 하면서 “거짓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조선(朝鮮)을 반도(半島)에 몰아넣기 위해 만들어진 각본(脚本)이다.
●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죽었다는 고사(故事)를 생각하면서,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있었던 곳을 찾아보자.
【고사리 : 양치류로 이루어진 속. 고사리(Pteridium aquilinum) 1종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온대와 열대지역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이 속의 양치류를 영어로는 'bracken' 또는 'brake'라고 한다. 12변종(變種)이 있고 이중 4변종은 북아메리카와 영국에서 자란다. 변종 푸베스켄스는 알래스카에서 멕시코까지, 동쪽으로 와이오밍과 콜로라도, 텍사스까지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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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시문집 제9권 / 책문(策問) :〔백이(伯 夷)ㆍ숙제(叔 齊)의 나라는 북해(北海)가에 있었는데, 고죽국(孤 竹 國)이라 이름 한 것은 (중략).〕
○ 동사강목(東史綱目) 부록 상권 하 / 잡설(雜說) : 백이가 일찍이 주(紂)를 피하여 북해 빈(北海 濱)에 살았는데, 지금 중국(中國)에는 북해(北海)가 없고 요해(遼 海)가 중국(中國)의 동북(東北)쪽에 위치하였다.
○ 열하일기(熱河日記 : 박 지원) 관내정사(關 內 程 史) : 《맹자(孟子)》에는, “백이가 주왕(紂 王)을 피하여 북해(北海)가에 살았다.” 고 하였다.
○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주(周)를 피해 • 북해(北海)에서 살았다.>는 기록(記錄)을 보자.
상촌(象村) 집 / 북해(北海)의 깊은 가을: 〔북해 땅에 가을 깊어 기러기도 적은 데다 / 北 海 高 秋 鴻 鴈 少 / 누런 모래 지는 해에 시든 풀은 차갑다네. / 黃 沙 落 日 寒 白 草 / 초나라의 노래 가사 지은 송옥 슬퍼했고 / 楚 國 歌 辭 宋 玉 悲 / 한나라의 사신 깃발 든 소경은 늙었어라 / 漢 使 節 旄 蘇 卿 老 / 매일 아침 공연스레 옥문관을 바라보며 / 朝 朝 空 望 玉 門 關 / 매 밤마다 장안 가는 길만 길이 생각하네. / 夜 夜 只 思 長 安 道 / 장안 길과 옥문관은 삼천리나 되거니와 / 長 安 玉 關 三 千 里. (중략).〕
위 상촌(象村)이 노래한 것을 보면 : 북해(北海)란 중국(中國) 땅의 서북(西北)쪽에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런 모래는 황토(黃土)사막지대(沙漠地帶)를 말하는 것이고, 백초(白草)는 황사(黃沙)와 함께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표현(表現)하는 말이다. 더하여 옥문관(玉門關)은 중국(中國)과 서역(西域) 땅의 관문(關門)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당시 “북해(北海)”는 현 중원(中原) 대륙(大陸) 땅을 벗어난 곳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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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죽국(孤竹國)은
➀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성(姓)이 ‘묵 태(墨 胎)’로 고죽 군(孤 竹 君)의 아들이다. 은 탕(殷 湯) 18년 3월, 병인 일에 하 후 씨(夏 后 氏)의 후손(後孫)을 고죽국(孤竹國)에 봉(封)했다.
➁《통감(通 鑑)》 전편(前篇)에, “을미년 상왕(商 王) 성탕(成湯) 18년 3월에 왕(王)이 동교(東郊)에 도착하여 제후(諸侯)들의 공(功)과 죄(罪)를 논(論)하고, 우왕(禹 王)의 후손(後孫) 및 성현(聖賢)과 옛적에 공을 세운 사람의 후손(後孫)을 고죽국(孤竹國) 등의 나라에 제후(諸侯)로 봉(封)하였는데, 각각(各各) 차등(差等)이 있었다.”라 하였다.
➂ 위의 말대로 「"은(殷)의 성탕 18년"이면 기원전(B. C) 1,747 년이다.」고구려(高句驪)는 고죽국(孤竹國)의 연대(年代)까지를 합하면 (1,747 + 668 = 2,415년) 무려 2,415년이 된다.
➃ 중요(重要)한 점은 “하 후(夏后)씨”의 후손(後孫)을 고죽국(孤竹國)에 봉(封)하였다 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고죽君(왕)이었으리라. 그렇다면 “하 후 씨”의 후손은 바로 고죽 군(孤竹君)이며, 고구려(高句驪)의 왕(王)이라는 의미(意味)기도 하다. <하 후 씨>는 우(夏 后 氏 禹)로써 성(性)이 사(姒)이고 이름은 문명(文 命)이며, 곤(鯤)의 아들이고 전 욱(顓 頊)의 손자(孫子)였다. 또 하【夏 ( b. c 2207 - b. c 1766, 計 442 年)】나라의 우(禹)임금이다.
➄ 현재(現在) 중국(中國)은 “夏(하)”를 정통(正統)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高句驪) 선대(先代)인 고죽국(孤竹國)의 주인(主人)인 “고죽 군(묵 태 氏)” 이 “하우(夏禹)”의 후손(後孫)이라는 얘기다. 또 전 욱((顓 頊)은 제곡(帝嚳)과 함께 “고구려(高句驪)”이며 제곡(帝嚳)의 “고신(高辛)”의 고(高)씨라 했다. 그렇다면 현 대륙(大陸)의 역사는 곧 고구려(高句驪)의 역사(歷史)이며, 이는 곧 조선사(朝鮮史)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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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를 찾아보자. 우리들의 상식(常識)을 초월(超越)하는 상상(想像)이상(以上)의 “왕조(王朝)”가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편에서는 수양산(首陽山)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월요일(月曜日) 치료(治療) 차 병원(病院)에 가면 담당 의사(醫師)가 팔을 아예 못쓰고 싶으신가요? 할 것 같습니다.>
2014년 01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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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글은, "최남석"님의 "수양산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게재 글에 대한 추가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면서, 다 함께 조선사의 수양산과 고죽국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뜻에서 전회의 것들과 함께 보충하여 게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인데 그렇게 팔이 안좋으시다니 안타깝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대륙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이고 곧 조선사이다.’
공감합니다. 조선사와, 이른바 중국사란것이 혼재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고구려사나 조선사의 주 무대는 현 중원지방이 아닐런지요...서북방의 사막을 따라 역사의 주 무대가 옮겨간다면........
아무튼 연행록에 나오는 이른바 검은모래사막에 대한 이해가 저와는 좀 다르군요...
"맑은영혼"님과의 세세한 부분에서 생각이 조금 다를 수 있는 것이 있으나, 대략적인 조선사의 줄거리는 차이가 없는 줄 압니다. 일만년 전이나 수천년 전, 수백년 전의 역사이야기가 개개인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이것은 설계한 회로도를 정착한 로봇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개개인 모두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고에서 공통분모를 찾아 합의 도출하는 것이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점이 아닐까요. 특히 옛 선구자들이 기록해 놓은 기록물 역시 개개인들의 생각하는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더구나 고죽국이니 고구려의 초기 상황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 중반시기 국력이 강성해지자 중원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천하를 호령했다고 보아지는데, 고구려의 초기 상황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먼 곳에 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유목종족이나 이목종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농경민족으로 정착하지만, 그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고려장이라는 장례풍속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맑은영혼"님과의 세세한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지장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원감사드리며, 통증의학과에서 치료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배우고 있읍니다. 이어지는 다음글도 기대됩니다. 건강하세요.....
문무님 팔이 걱정 됩니다 팔 부터 적극 치료하시기 바랍니다 / 수양산은 강동 팔십리를 커버 한다고 속담에 있으므로 남북으로 흐르는 강을 찾아 강건너 동쪽으로 80리 벋은 산을 구글에서 찾아보면 됩니다 그리고 수양이라는 말은 제일 먼저 동쪽 해 빛이 비치는 곳 이라는 말 도 될 수 있으므로 가장 높은 산 입니다 그리고 백이숙제 가 숨어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쉽습니다
고죽국이 고구려가 있던 곳이라는 사서의 말만 믿고 고구려 가 하우씨 후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오가 제도 가 있었고 오가제도는 한단고기를 따르면 위에서 삼위태백의 옥야만리를 내려보며 누구를 내려보내 경영할까를 고민하던 외계인(신) 무리들 부터 가지고 있던 제도 입니다 고구려는 천손이고 천손은 초센이고 한문으로 음을 쓰면 조선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이씨조선이 아니라 단제조선입니다
"최남석"님! 성원 감사드리며, 아픈 팔은 의사의 말을 따르며 치료 받고 있습니다. 몇 가지 이견에 대해 이해를 구합니다.< (1) 하은주는 모두 조선의 왕조이다 (2) 따라서 고구려 역시 조선의 나라이며, (3) 고구려의 오가제도는 이목, 유목종족에게서 보여주는 형태를 보인다 (4) 고려장이란 고구려 장례풍속 역시 "이목, 유목종족"등ㅇ에게 어울리는 장례풍속이며, (5 )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는 중국의 북지에서 시원한다"고 하였으며, 이는 이목, 유목종족에서 농경민족으로 변환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6) 천손이란 의미 역시 여러 다른 이견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역사서 기록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견도 있을 수 있지요
여러 각도의 다양한 주장과 이견은 존중합니다. 조선사의 광범위한 줄거리는 몇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한단고기 역시 그 내용을 존중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과 저자에 대한 많은 의문점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시간이 된다면 한단고기 원문과 씨름을 해 보고 싶군요. 그러나 그 저자에 대한 의문은 풀기 어려운 난제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역사 퍼즐 맞추기에서 조각 이 모자랄 때 한단고기를 참고하면 퍼즐조각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편저자 계연수가 무슨 의심을 받는지 최남석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단고기]에는 이씨조선의 세조를 비롯해 이씨 왕조의 왕들이 없애버린 고문서에서 발췌 인용한 내용들이 다수 있습니다 [한단고기]에서 불교의 관음진신 에 관한 언급을 본 적 있는데 지금의 관세음보살 신앙에서 보는 관음의 지리적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최남석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고죽국이 고구려인 것도 사실이며, 황해도 해주에 수양산이 있다는 것도, 사실 입니다. 수양산은 천여인에 달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며, 수천리를 뻗어 있다는 기록도 맞는 말입니다. 고구려내의 고죽국과,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을 제외하고, 대륙의 중원에 있는 수양산과 고죽묘들은, 가묘이며 모칭된 것들 입니다. 후대에 이를 흠모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임의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수양산에 대하여 확실하게 단언하는 이유는,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에 대한 고대의 유적을, 역사의 기록을 따라서 오래전에 찾았기 때문입니다. 문무 선생님의 병원 치료에 차도가 있으시기를, 마음 깊이 기원 드립니다.
통증의학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차츰 좋아지리라 생각됩니다. 무리하지 않으려고 아주, 아주 조심하고 있습니다. 콤프터도 눈 높이에 맞춰 높이고 자세도 똑바로 하다보니 자판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하군요. 아주 조심하고 있습니다. 성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고죽국이 고구리이고 황해도 해주에 수양산이 있으면 비로 이곳 근방에 연행록에서 말하는 "연경"이 있어야 합니다. "미수기언" 을 찾아보면 연경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록한것이 있는데 바로 위에서 언급한곳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문무님이 윗 글에서 "장안 길과 옥문관은 삼천리"란 표현이 이를 뒷받침해주고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루속히 나아지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