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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 무의 국서로 본 백제-왜의 관계
송서 왜국전에 등장하는 찬(贊)-진(珍)-제(濟)-흥(興)-무(武), 즉 왜5왕의 실체에 대한 연구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는 모두 아전인수 격인 해석을 하고 있을 뿐 그 본질을 보려는 학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왜왕 무(武)의 국서를 통해 왜왕 제와 무의 실체를 밝히고자 합니다.
****** 송서 왜전의 번역은 길동선생의 블로그(http://blog.naver.com/bujakim) 를 참조하였습니다.******
먼저 왜5왕의 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찬(贊)이 죽자 아우 진(珍)이 임금이 되었다. (贊死弟珍立)
2. 제(濟)가 죽자 세자 흥(興)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濟死世子興遣使貢獻)
3. 흥(興)이 죽자 아우 무(武)가 임금이 됐다. (興死弟武立)
송서 왜국전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 찬과 진은 형제다.
ii) 찬, 진과 제의 관계는 알 수 없다.
iii) 흥과 무는 제의 아들이다.
Fact는 여기까지입니다. 따라서 제, 흥, 무에 대해서는 왜왕 무의 국서를 통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지만 찬과 진에 대해서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제 이들이 왕위에 있던 시기를 사서에 입각하여 파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21년: 왜왕 찬.
438년: 왜왕 진.
443년 ~ 451년: 왜왕 제.
462년: 왜왕 흥.
477년 ~ 502년: 왜왕 무.
이제 그 국서의 내용을 봅시다. 아래는 송서 왜국전에 있는 왜왕 무의 국서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4. 길이 백제(百濟)를 경유하므로 배를 아름답게 치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구려(句驪)가 무도(無道)하여 우리를 삼키려는 뜻을 내 비치며 변두리 땅에 사는 우리 종들을 노략질하였습니다. (道逕(遙)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吞, 掠抄邊隸)
5. 신(臣)의 죽은 아비 제(濟)가 도적들(고구려)이 귀국(貴國)으로 통하는 길을 막는 것에 몹시 화를 내자 백만 군사가 의로운 외침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큰 싸움을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舉)
6. 별안간 아버지와 형이 죽으니 일이 거의 다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더 나르지 못하는 꼴이 됐습니다.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7. 국상(國喪)을 치를 때는 싸움을 일으키지 않는 법이므로 군사들을 쉬게 할 뿐 승리를 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군사들을 훈련시켜 아버지와 형이 품었던 뜻을 펴려고 합니다.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이 국서의 내용은 대단히 중요하니까 지루하더라도 참고 한 문장씩 그 의미를 파악해 봅시다.
사료 4에서 말하는 내용은 제(濟)가 왜왕에 있던 시기에 고구려가 그들의 변예(邊隸)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濟)가 왕위에 있던 시기는 443년~451년 무렵입니다. 이 당시는 고구려 장수왕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와 왜의 전쟁기사는 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서에 있는 개로왕의 걸병서(472년)에 의하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지 30년이 넘었다고 하였으므로 442년 이후, 즉 왜왕 무의 제위 기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전쟁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 나오는 변예(邊隸)가 백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료 5에서 말하는 내용은 고구려가 변예(邊隸)를 공격하고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음으로 인해 왜왕 제(濟)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일본서기에 없는 내용임으로 그 진위를 알 수 없습니다.
사료 6에서 말하는 내용은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왜왕 제와 왜왕 무의 형이 갑자기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갑자기(奄) 죽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둘이 거의 동시에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왜왕 흥의 재위기간에 462년이 들어있고 왜왕 제가 사망한 후 흥이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왜왕 제의 사망시기는 462년 이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국서에는 왜왕 제가 무의 형과 거의 동시에 죽었다고 하였으므로 그 가능성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왜왕 흥 이외의 형이 제와 함께 죽었을 가능성, 둘째 왜왕 제가 죽고 즉위한 흥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을 가능성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이 옳다면 왜왕 제와 왜왕 흥은 모두 460년 초반에 사망하였을 것입니다. 왜왕 무가 국서를 보낸 시점인 477년 또는 478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미스터리이므로 이 정도에서 분석을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료 7이 모든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왜왕 무는 국상 중에 있어 전쟁을 할 수 없었고, 이제 국상이 끝났으므로 부형의 뜻을 잇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학자들이 고려하지 않은 중대한 모순이 숨어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나하나 파헤쳐 보겠습니다.
첫째, 상(喪)의 대상자가 사망한 시점은 언제일까요? 이 국서가 송에 전달된 시기는 478년(昇明 2년)입니다. 따라서 국서를 쓴 시간은 477년 또는 478년입니다. 이 국서를 쓴 시점에 왜왕 무의 국상기간이 끝났다고 하였습니다. 수서 왜국전에 의하면 ‘귀족이 죽은 경우에는 3년 동안 밖에 빈소를 차린다(貴人三年殯於外)’고 합니다. 따라서 왜왕 무가 치른 상은 3년상입니다. 그러면 상이 시작된 시점은 474년 또는 475년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미스터리도 없습니다. Fact일 뿐입니다.
둘째, 왜왕 무는 복수전의 상대로 분명히 고구려를 지목하였습니다. 따라서 왜왕 제와 무의 형은 고구려와의 전쟁과 관련하여 사망한 것입니다. 그럼 이 시기, 고구려와의 분쟁으로 국왕과 왕자가 동시에 사망한 경우가 왜국에 있었을까요? 사서상에 그런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왜와 관계가 있던 국가 중에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던 백제에 그런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과 왕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477년 백제에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와 아들 문주왕이 수개월 사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왜왕 무의 아버지 제와 무의 형이 이 두 사건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에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은 없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셋째, 이 국상은 누구를 추모하는 상(喪)이었을까요? 그 대상은 셋입니다. 첫째 아버지 왜왕 제, 둘째 형인 왜왕 흥, 셋째 왜왕 무의 어머니. 먼저 왜왕 무의 어머니는 ‘갑자기 부형의 상을 당해... 양암(諒闇)에 거하게 되었으므로...’라는 문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국상으로 복수를 늦춘 것이라면 그 이유를 분명히 기술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고구려에 대한 복수전을 위해 송에 도움을 요청하는 국서에 실을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다음, 형인 왜왕 흥의 경우도 배제됩니다. 형제 사이에는 상을 치르지 않는 법이니까요. 따라서 왜왕 무가 양암(諒闇)에 거처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 제의 경우로 왜왕 무가 반드시 양암(諒闇)에 거처해야만 할 상황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복수전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타당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이미 462년 이전에 사망하였습니다. 따라서 왜왕 제도 배제되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분명 왜왕 무는 3년상을 치루었고 그 대상은 아버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왜왕 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이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이제 마지막 미스터리부터 풀어갑시다. 왜왕 무의 아버지는 분명 474~475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왕 무는 자신의 아버지가 왜왕 제(臣亡考濟)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왕 제는 462년 이전에 사망하였습니다. 따라서 왜왕 무가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부친을 제로 위장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차라리 왜왕 흥을 자신의 부친이라고 하지 이미 송나라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제의 아들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국상을 치루었다는 것이 거짓임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왕 무의 아버지는 진짜 제인데 어떤 이유로 제가 사망했던 것으로 오인되었을 경우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왜왕 제가 왕위를 아들에게 넘긴 후 모종의 다른 인물로 탈바꿈했을 가능성 즉, 백제로 귀국해 백제의 왕 또는 지배층이 되었을 가능성 말입니다. 이러한 왕위 계승이 너무 자연스러워 송나라에서는 제의 사망으로 흥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착각하였을 가능성 말입니다. 왜왕 무는 송나라에 의해 478년 안동대장군에 봉해졌다가 479년 새로 건국한 남제로부터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그런데 진동장군 또는 진동대장군은 송나라기간 동안 백제가 받아오던 관작입니다. 왜는 계속 안동장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왜왕 무가 진동대장군에 책봉된 것은 남제가 왜왕 무를 백제의 정통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백제도 480년 동성왕이 진동대장군으로 책봉을 받습니다. 그러나 왜왕 무에 비해 1년이 늦습니다. 남제에서 왜와 백제가 다른 나라임에도 두 나라의 왕 모두에게 진동대장군을 책봉한 이유는 그 뿌리가 동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남은 미스터리를 종합해 봅시다.
1. 왜왕 제와 왜왕 흥은 거의 동시에 사망하였고 그 시기는 460년 초반일까?
2. 왜왕 무의 아버지 제와 무의 형은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에 참전하여 사망한 것일까?
3. 474년 또는 475년에 사망하여 왜왕 무가 3년상을 치룬 왜왕 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미스터리의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스터리 1은 거짓입니다. 왜왕 제와 무의 형은 거의 동시에 사망하였으나 그 시기는 474년에서 475년입니다. 이것이 fact입니다.
미스터리 2는 참입니다. 왜왕 무가 자신의 보복전 상대로 고구려를 지목한 이상 왜왕 제와 무의 형은 고구려와 관련되어 사망한 것이 fact입니다.
미스터리 3의 결론을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와 관련하여 왕과 왕족이 거의 동시에 사망한 경우는 475년의 개로왕과 그 아들, 또 477년의 곤지와 문주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왕 무가 3년상을 마친 해가 477년 또는 478년이므로 477년에 사망한 곤지-문주왕 조합은 배제해야합니다. 그 결과 475년에 사망한 개로왕과 그 아들들만이 남습니다. 따라서 왜왕 무가 3년상을 치룬 대상인 왜왕 제는 개로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아들 중 고구려의 손길을 피해 살아남은 왕자 중에서 문주왕은 백제왕이 되었으므로 왜왕 무에 해당하는 왕자는 무령왕밖에 없습니다.
이 결론을 미스터리들에 적용해 봅시다. 개로왕은 왜왕 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455년 부친 비유왕이 사망하자 백제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릅니다. 자신이 귀국한 후 왜에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지진원의 사건 등)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로왕은 자신의 아우 곤지와 아들 문주왕을 왜로 보냅니다. 문주왕이 왜왕 흥인 것입니다. 곤지가 왜에 간 것이 461년, 왜왕 흥이 사신을 보내 안동장군으로 책봉된 것이 462년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개로왕이 475년 사망하자 곤지는 이제 15세가 된 무령왕을 왜왕 무로 삼고 자신은 문주왕(왜왕 흥)과 함께 귀국하여 새로운 백제를 건국합니다. 그러나 477년 무령왕의 삼촌이자 계부인 곤지와 형인 문주왕마저 의문의 죽임을 당합니다. 이 모든 사건(개로왕-곤지-문주왕의 사망)이 왜왕 무의 국서에 나타난 奄喪父兄의 실체입니다. 무령왕은 475년부터 478년까지 아버지 개로왕의 3년 상과 삼촌이자 계부인 곤지 그리고 자신의 형인 문주왕의 장례를 마치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 때 중국에 보낸 것이 지금 분석하고 있는 이 국서입니다. 그런데 본국에서 자신의 조카인 삼근왕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이에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동생인 동성왕을 백제의 왕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남제는 동성왕에게 무령왕 보다 1년 늦게 진동대장군을 책봉한 것입니다. 그리고 502년 양나라가 건국하자 양은 동성왕이 이미 사망(501년)한 것을 모르고 무령왕인 왜왕 무와 동성왕인 모대에게 동시에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의 칭호를 내립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의 왕에게 동시에 동일한 관작을 내리는 것은 남제와 양 모두 왜국과 백제가 한 나라이면서 두 국가라는 개념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501년 왜왕 무가 백제 무령왕으로 즉위하면서 사서에 왜가 사라지는 것은 이제 두 나라가 온존한 하나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로왕 이후 왜국과 백제는 완전히 같은 나라였습니다. 왜왕 제는 개로왕, 흥은 문주왕 그리고 무는 무령왕입니다. 개로왕과 문주왕은 태자시절 왜왕이 되었고, 무령왕은 왜왕으로써 동성왕을 백제왕을 세웠으며, 자신은 왜왕이면서 백제왕이 되었습니다. 왜왕 무의 국서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475년 개로왕 사후 백제는 없어지고 남부여로 국명을 바꿉니다.
공주로 천도한 후에 남부여의 국력은 상당히 약해져서 그 당시 모한과 가라 신라를 점령한 왜가 남부여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이 왜왕 무가 7개국 사지절 도독이 된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개로왕의 여러왕자중 하나인 무가 왜국의 왕인 흥을 제거하고 왜국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높다고 보여집니다만 개로왕과 문주왕이 왜의 제와 흥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1. 찬(贊)이 죽자 아우 진(珍)이 임금이 되었다. (贊死弟珍立)
2. 제(濟)가 죽자 세자 흥(興)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濟死世子興遣使貢獻)
3. 흥(興)이 죽자 아우 무(武)가 임금이 됐다. (興死弟武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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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은 제대로된 왕위계승을...
1번과 3번은 왕위찬탈이나 제대로된 왕위계승이 아닌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에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475년에 살아남은 왕자는 문주왕과 무령왕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왕 무의 사망한 부형 중에 형이 문주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과 제의 관계가 모호한 점으로 볼 때 1-2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매우 개연성 높은 추론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