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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44-53
위에서 온 능력
(눅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개역)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개역)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개역)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개역)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9, 개역)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50,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개역)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2, 개역)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개역)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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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들은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인간들의 의견을 무시하게 됩니다.
선지자의 말씀이 아닌 생각과 뜻은
예수님의 일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위의 세상’을 건설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즉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연구한다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의 세계로 들어온 능력으로
간주해주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방안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시도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아야 한다”
이 ‘위에서 오는 능력’은
우리 개인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어지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
부각될 내용 뿐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용당할
그런 능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위에서 온 능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들 자체적인 세계는
어디까지나 ‘아래 동네’라는 점을
분명히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랫 동네’의 삶은
어떠합니까?
땅의 세계에서의 인간들은
땅이라는 외부 환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땅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를 위하여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대비되는 땅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 내리신 벌이라는 것이
철장에 가두어둔다든지,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네’에 가서
살게 하시는 징벌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안목으로 봐서는
참으로 기이한 징벌입니다.
한국에서 범죄한 사람을
미국가서 살게 하는 것이
어떻게 징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서 사기치다가
미국가서 사기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징벌에 대한
가인의 반응이 또한
기이합니다.
너무 혹독한 징벌을 주셨다는 겁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라는 겁니다.
이러한 대화에서
오늘날 우리가 놓친 게 뭘까요?
그것은 위치입니다.
땅에서는 “내가 누구냐?”에 대한 질문은
“내가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느냐?”로 정리됩니다.
사람을 위하여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새롯새롯 돋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느냐?”는 것은
사람은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남. 곧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마치 경주 토함산에 땅굴을 파고
거기에는 부처상을 모시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를 넉넉하게 모셔줄
타인을 찾게 됩니다.
찾게 되면 그 사람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담아둘
토굴을 팝니다.
그리고 행복스러워하면서
그 속에 자신을 안치시킵니다.
토함산이란 배경을 담보로 해서
그 속에 숨어들어가는 식으로
인간은 자신을 신봉하게 됩니다.
땅의 세계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공간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땅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다가오십니다.
위에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땅은 어디까지나
땅에 불과한 것임을 말해주십니다.
그 땅에서 각자 자신의 땅굴을 장만하고
자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행복과 축복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14:26-27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자기 미움’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미워할 줄 모릅니다.
긍정의 힘이
죄된 자기로부터 나온 것임을 부인합니다.
아예 미워할 능력도 없습니다.
땅에서 평생 살아오고 훈련한 것이
온 몸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권력 공간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거기에 자신을 곱게 안치 하려는
본성으로 살아왔기에
자신이 이용한 그 환경이
자기 마음에 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 미움’이 아닙니다.
교회 와서 예수 믿어서
자신의 토굴을 만들려는 시도는
결코 ‘자기 미움’이 아니라
‘자기 애착’에 불과합니다.
예부터 시행되어온
기도원 신앙이나, 수도원 생활이나,
은둔수도생활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땅의 생리라고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라면
그 세계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
아무도 자기를 미워하면서 나올
위인은 없습니다.
하박국 3:17-18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뭐가 축복이고 뭐가 저주이겠습니까?
자기가 미워지는 환경이
축복된 환경이요,
자기가 사랑하게 되는 환경이
저주의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저주란 그냥 살던 그대로의 땅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녀가면서
곱게 천사처럼
이 세상 형편을 카메라로 담아
증거물로 삼는 것으로
다녀가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까?
그것은 땅에서 생각하는 하늘 나라가
실제로 하늘 나라하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37에 보면,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21-24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온 능력이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곧 ‘회개’입니다.
회개란 그동안의 세계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자기답게 만든 그 땅의 세계를
미워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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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강-눅24장 44-53(위에서 온 능력)120923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5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4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4:44-53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예수님께서 44절에 보면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고 이야기하신다면 여기서 뭐가 빠져야 되는가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뭐가 빠져야 되느냐, 우리의 경제, 우리의 과학, 우리의 철학, 우리의 생활체험,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 와서 축복 얻겠다, 하는 이 모든 축복은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사적인, 개인적인 과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 생활이 어렵습니다, 가정에 우환이 있습니다, 애가 아픕니다, 성적이 안 오릅니다, 이사를 언제 가야 되는지, 이런 모든 것은 사실은 예수님과 관련이 없는데 그들은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관련을 짓고자 하는 거예요.
교회가 부흥되어야 하겠습니다, 선교사를 보내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은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융통성이 없습니다. 하여튼 골치 아파요. 융통성이 전혀 없어요. 오직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것만 연결을 시키니 사실은 예수님은 우리하고 따로 노시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따로 놀면 따로 노시고 우리는 우리대로 놀면 그만이지, 라고 이렇게 마음정리를 하고 싶어도 문제는 천국이라는 것이 우리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가 되니 이것이 골치 아픈 거예요.
죽어서 평안히 살고 싶은데 예수님의 같은 노선에 끼어들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이라고 위장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천국이라고 위장된. 그 안에 예수님의 사랑은 없으면서 그냥 우리 좋아라하는, 이슬람에서 말하는 그 극락, 불교에서 말하는 그 극락, 그 극락을 우리는 조작해냈고 상상해냈고 거기에 내가 들어간다고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해왔던 겁니다. 평소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나 사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느냐 하면 예수님은 너무 일방적이라서 사랑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 생각만 하니까 뭔가 공통점을 얻어서 같이 가야 되는데 주님은 전혀 내 생각을 안 해주니 우리쪽에서 예수님이 싫은 거예요.
주님이 내 생각해 주고 날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한테 마음을 열어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닙니다. 우리가 전과 25범인 탈옥 범이 아닙니다. 저도 사람들 배려 다 하고 좋은데 문제는 그쪽에서 내 생각 안 해주면 나도 그쪽 생각할 의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 내가 잘 되는 곳이라면 우리가 갈 용의가 되어 있는데 천국이 일방적으로 예수님한테 면류관 다 바치고 예수님만 일방적으로 받들어 높이고 또 높이고 예수님만 찬양한다면 바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수를 높일 의사는 우리한테는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 높이는데 에너지 소비하기도 바쁜데 나 말고 누구를 따로 높인다는 것이 영 안 맞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게 있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안본 것으로, 안들은 것으로 합니다, 하고 성경을 덮어버리죠. 그런데 주의 능력이 임하면 이 덮었던 성경을 다시 억지로라도 펴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생각한 예수하고 예수님에 의한 예수하고 전혀 다르다는 것이 듣기 싫지만 실제로는 전혀 하늘과 땅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제시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 본문 49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게 또 우리를 아주 모독하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이 온다는 것, 이 한마디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냥 땅 아래에서 동네 주민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만 여기서 발각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아랫동네에 사는 너희들끼리 모여서 진리가 어떠니,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래쪽의 이야기라는 거지요. 아랫동네사람들끼리 머리 맞대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교회 만들고 백날 해 봐야 위에서 온 능력 없이는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모독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식 낳고 살려고 애 쓰고 있는데, 그 노력이 얼마나 가상하고 대견스럽고 눈물겹게 온 뼈마디가 다 아파가면서 그저 자식새끼 살리려고 애쓰면서 사는데 주께서는 너무나 냉정하게 ‘네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았어?’ ‘안 받았는데요. 그냥 살려고 했는데요.’ ‘그러면 엉터리야.’ 이렇게 나오니 너무 비정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위에서 온 능력이라는 언급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그냥 구경삼이 이 땅에 왔다 간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구경할 것이면 위에서 그냥 쳐다보면 되지 위에서 온 능력이라 해서 예수님께서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땅에 왔을 때에 그냥 사진이나 몇 장 찍어서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남겨서 심판의 근거나 삼으려고 할 그 정도 같았으면 천사가 와도 되거든요. 그런데 심판 주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다녀 간 것은 그냥 다녀가신 것이 아니라 죽고서, 죽음을 통해서 다녀가신 거예요. 우리를 지적하려고 한다면 꼭 안 죽어도 괜찮아요. ‘너 이리와. 잘못했잖아. 내가 하늘나라 가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리고 다음 사람! 음, 너도 이 짓 했잖아. 너도 안 돼. 다음 사람? 음, 너는 착하네. 넌 구원해 줄게.’ 이렇게 해서 내 할 일 다 했으니 구름타고 간다, 하고 구름타고 가면 되는데 죽기는 왜 죽었어요?
예수님 당시에 많은 교리들 보면 하늘에 계신 위대한 분이 땅에 내려왔다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천사도 그렇고 많이 왔는데 그들 중에 어떤 인간도 죽은 자가 없어요. 하나님이 미쳤다고 죽어요? 하나님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하나님인데. 안 죽어야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을 제시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뭔가 인간들이, 땅에 사는 아랫동네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것이 오해고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왔다가 그냥 올라가면 되는데 왜 죽음이라는 것을 남기시고,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올라가신 그 진짜 이유가 뭐냐,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먼저 되어야 그 다음 47절의 ‘죄 사함을 얻는 회개’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늘이 없는 상태잖아요, 하나님 없는 상태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땅은 그냥 있는 것이고 난 그저 살것만 챙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합시다. 그런데 하늘에서 올 때 ‘예수님, 하늘에서 왔지요. 저 어때요?’ 이러면 주께서 ‘비켜라, 넌 나하고 이야기할 상대가 안 돼. 난 너하고 이야기 안할 거야. 저리 비켜.’ ‘그러면 주님은 저하고 이야기 안하고 누구하고 이야기 할 건데요?’ ‘나는 땅과 이야기할 거야.’ 다른 말로 하면 ‘세상과 이야기할 거야.’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너희 개별 부분 말고 전체와 이야기할 것이다.’ 그 말이죠.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 챙기고 자기만 밥 먹고 살면 그 만인 줄 알았는데 주님 보시기에, 그리고 말씀에 비춰보면 인간은 어디에 소속되어서 살아가요. 주님은 우리가 소속된 그것을 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품고자 하는 그것. 토함산에 가면 석굴암이 있지요. 동굴을 파서 돌부처를 만들어서 모셔놓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땅에 사는 우리 인간의 아주 정확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요, 자기 자신만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품에 동굴을 파서 그 타인에 자기 이미지를 담아놓고 담겨진 그 모습을 다시 되찾아서 자기라고 여깁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를 반겨주지 아니하면 자기도 없어요. 사람이 자기가 살아가는 것은 나를 받아줄 사람 누구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발견되면 무대포로 그 사람 품으로 진격해서 그 사람 품에 자기를 안겨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를 되받아서 그것을 나라고 여기는 겁니다. 물론 자기를 들이밀고 자기가 몸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물론 자기보다 훌륭하고 많이 가졌고 많이 배웠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고 여유가 있고 사랑이 넘치고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납할 그런 사람에게 자기 몸을 던져서 동굴 파서 자기를 석가모니불처럼 해놓고 저게 자기 모습이라고 찾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뭐냐, 자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불쌍해요. 자살할 가능성이 많아요. 우울증이 생기는 이유는 자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한 불상을 만들고 싶은데 그놈의 토함산이, 듬직한 토함산이 없네요. 막 손톱으로 긁어서 파내고 싶어요. 자기 안에 나 있고 싶어요. 전에 초콜릿 CF가 있었어요. 이 미연이 한 것인데 남자 얼굴은 안 나아오고 버버리를 입은 덩치만 나와요. 그 버버리를 살짝 열고 몸을 숨겼다가 초콜릿 물고 싹 튀어나오는 장면이 있었어요. ‘맛있다, 이 남자처럼.’ 그런 뜻이거든요.
모두가 나를 받아줄 때 왜 사람은 자기 외부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왜 자기의 환경과 외부, 즉 타인이 없으면 왜 나도 없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람은 땅을 의지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능력이 어디에서 온다? 능력은 하늘에서 오잖아요. 능력은 하늘에서 오는데 지금 그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못살고 주변에 있는 바깥세상을 의지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맡길 때 절대로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을 잠시잠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자기 자신을 그 사람에게 넘겨주는 척을 하고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삐져서 나가는 거지요. 그 탈주범도 도둑질을 하는 이유는 자기는 놀고 자기 대신 돈 벌어서 자기한테 밥해주고 라면 끓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요. 전과 25범 그 탈주범을 생각하면서 저 사람이 만약에 삼성그룹 3세라면 저렇게 도둑질을 하겠는가 싶었어요. 자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누구 날 사랑해 줄 사람 없어요?’ 그거예요. 내가 날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 내가 나를 사랑한 것만큼이나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거기 누가 없소, 하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다가올 때 뭐라고 했느냐,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그렇게 물었어요. 사람은 내가 누구냐, 우선 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어디 있지?’ 이것이 오히려 인간의 정체를 밝히는 출발점입니다. ‘지금 내가 어디 있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지금 누구 품에 있지? 내가 안심 놓고 기거할 수 있는 이 권력 체, 이것은 얼마나 든든하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한국이 좀 위험하다, 그러면 미국으로 가는 거예요. 미국이라는 토함산에 동굴 파서 그 다음부터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 되는 겁니다.
미국이라는 그 든든한 백 그라운드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모실 수 있는 거예요. 성경에 비춰볼 때에 그게 바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 ‘아, 우리는 어떤 지정된 장소가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것이 거기에 정립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너무 오버해서 설명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또 나와요.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보시고 아벨의 죽고 난 뒤에 가인에게 벌을 줄 때 무슨 벌을 주느냐하면, ‘네가 여기서 못산다. 다른데 가서 살아라.’ 이렇게 하니까 가인이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해 못할 반응을 해요.
가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 그 벌은 저한테는 너무 심한 벌입니다.’ 그 대목을 신학교 때 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 될 문제인데. 아니면 철장에 집어넣을까요? 여기에 살다가 저기에 살라고 명령한 것이 무슨 심한 벌이 됩니까? 전라도에 살다가 동생 죽이니까 ‘당신은 전라도에서 살지 말고 인천에 가서 사세요.’ 신나지요. 그것이 어떻게 신적 징벌이 될 수 있습니까? 고민 좀 했어요, 제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도서관에 가서 주석이나 다른 책들을 봅니다. 지금 생각하니 다 구라인 것을.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것이 혹독한 징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 같으면 신나잖아요. 자기가 죄지은 장소에서 벗어나서 또 마음대로 사기 쳐도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될 것인데 ‘하나님이여, 이 벌은 나에게 너무 혹독하고 중한 벌입니다.’ 대체 이것이 안 풀리면 그 뒤가 안 풀리는 거예요. 창세기 4장이 막히는데 5장이 풀리고 5장이 막히는데 6장이 풀릴 리가 있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은 현대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그 지방에 있는 이미 구축되어 있는, 아까 이야기한 토함산 같은 거기, 그 전체 속에서 정신적으로 안정하고 안심하는 자기 자리를 이미 기존의 영토에서 일부를 떼어내서 내 자리를 만드는 식으로 사람들이 사는 것인데 그것이 창세기 3장에 보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숨길 수 없는 본색이 된 겁니다.
누가 나 받아줄 사람 없습니까, 누가 날 받아줄 사람 없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 시집가고 싶어.’ 혹은 ‘나 결혼하고 싶어.’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나 취직하고 싶어.’ 남자들이 군대 가는 것을 싫어하고 군대 다녀와서 꿈에서도 악몽이 되는 이유가 군에 가보니까 그게 나의 맞는 토함산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군대가 좋은 사람이 있어요. 한 집사님 같은 경우지요. 자진해서 군대 갔잖아요. 그 경우는 군대가 토함산이라. 군대에 오니 이렇게 좋은 것을 가지고, 말뚝 박아도 되겠다, 왜 이렇게 군대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저는 군대 가보니까 저는 군대체질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군에서 고문관 소리를 들었는데. 군대는 저의 토함산이 아니라, 여기서 빨리 나가서 취직하고 싶어요. 취직해도 중소기업은 싫어요. 그것이 또 나의 토함산이 아니라. 그러면, 대기업. 사람이 산다는 것이 남을 등쳐먹고 사는 거예요. 인간이 산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 남을 등쳐먹을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것을 찾는 거예요. 그래서 강자는 약자를 이용하게 되고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등쳐먹게 되어 있고 사기 치는 사람은 순진한 노인네 호려서 되도 않는 약이나 팔아먹고.
세상사는 것이 결국 위에서 온 능력이 없는 이상은 그냥 토함산 땅굴이나 파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백 그라운드 자랑하면서, 나는 이렇게 땅 팠다, 이러면서. 여기에 내 동굴 팠다, 나는 괜찮은 남편 만나서 내 남편 가슴 확 후벼서 거기에 나를 안치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동굴 파듯이 이렇게 살아가는 이것이 땅의 세계입니다. 제가 아까 던진 질문이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와서 돌아가셨는가, 하는 겁니다. 같이 동굴이나 파지, 더 크게 파면되는데. 교회라는 것도 동굴파기 아닙니까? 네 교회보다 내 교회가 더 크다, 이런 것.
그런데 위에서 온 능력이 임한 그것이 이 땅에서, 여기서 46절에 보면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이유는 땅의 모든 생리, 모든 속성이 천국하고는 안 맞더라는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인데 그러면 어느 정도로 안 맞는가, 나 같은 것은 이 땅에서 없어져도 그만이라는 사상이 퍼져 있을 정도로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늘나라와 전혀 맞지 않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이 하늘나라와 맞지 않다는 것은 이 땅이 무엇으로 채워졌는가? 보니까 각자 각자 자기 동굴 마련해 놓고 헤헤거리면서 거기서 행복한 스위트홈을 건설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즐거운 우리 집’ 노래하면서. 추석 되면 손자들 재롱에 할아버지들 난리 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행복한 거야, 그런데 위에서 보니까 그 전부가 천국하고는 안 맞더라는 말이지요. 천국하고는 안 맞으면서 죽어서 어느 나라를 가, 천국, 네 맘대로 가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가 누가복음 14장에 26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를 미워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즐거운 우리 집, 스위트 홈, 행복이 넝쿨 체로 굴러왔다는 둥, 드라마를 봐도 온통 행복한데 거기에다가 자기를 미워하라고 하면서 내빼면 ‘누구야! 이 행복을 시기하는 놈이, 그 놈 잡아 와.’ 죽여 버리지요.
그 죽은 분이 예수님이라면,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통보입니까? 네가 잠시 잠간 살 때는 그것이 행복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막상 죽어서는, 하늘나라는 땅굴 파서 석가모니 모시고 자기 이름으로 동상 만들어서 자기 모시는 식의 나라는 아니었더라, 그 말이거든요. 하지만 그런 소리를 이야기해도 그 말에 동의할 의사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땅의 생리에 푹 젖었어요. 과일즙에 스펀지 담갔다가 짜보세요. 줄줄이 구멍마다 새 나오는 것이 뭡니까? 줄줄 떨어지는 것이 행복, 행복, 축복, 축복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축복받은 나, 행복한 나를 가지고 그 ‘나를 미워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축복을 미워하고 그 행복을 미워하라, 그 말이거든요. ‘하나님, 저 미워할 테니 축복 좀 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위인은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뭐라 하느냐하면, 네가 축복 아닌 저주를 사랑했고 축복은 발로 차버렸다는 말이지요. ‘너희가 나를 배척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축복은 저주거리가 되고 너희들이 배척한 것, 축복 아니라고 배척한 그 쓰레기 같은 저주가 오히려 축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그 방법을 택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모세로부터, 다윗으로부터, 선지자로부터 이미 예고 된 바에요.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해도 이미 한 번 푹 젖고, 이미 그런 식으로 우리 온 몸이 땅에서 동굴 파는 것에 대해서 훈련되어 있고 적응되어 있고, 초중고 거쳐 대학과 대학원까지 모든 공부하는 것이 땅굴 파서 나를 금 신상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안치하는 기술과 노하우만 배우는데 전념을 다 한 거예요. 목사가 교회 세우고 신학교 가서 교회 하겠다는 것도 교회라는 거기에 땅굴을 파서 자신과 자기가족들을 거기에 생계유지용으로 안치하려는 그 짓이 아닙니까?
그 교회 몇 명 모이는지, 헌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그게 무슨 이야기에요, 그게? 몇 명이 모이고 헌금이 얼마나 모이는지가 이사야에, 예레미야에, 어디에 나옵니까? 그것이 성경에 안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모세 이야기나, 다윗 이야기나, 선지자 이야기에 그 이야기가 안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 이야기가 안 나온다는 말은 주의 위에서 온 능력, 하늘에서 온 능력 속에는 인간의 요소가 거기에 섞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와서 목사님 대접했더니 축복받았습니다.’ 혹은 ‘십일조 했더니 복 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목사가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일조 해서 얻겠다는 그 복이 사실은 저주거리에 불과한 거예요. 사람이 복을 받게 되면 복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주께서는 수시로 천국을 이야기했어요. 두 번, 혹은 세 번씩이나 천국이 왔다 갔습니다. 무안지역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 뭐냐 하면, 성경에 보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잖아요. 태풍이 확 불어 닥치니 무화과열매가 다 떨어져버리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얼마나 축복이 곧 저주이고 저주가 곧 축복인 것을, 그게 바로 하박국 선지자……, 그 무안지역 사람들이 시래기 국이나 알았지 하박국 선지자를 알 리가 있습니까, 하박국 3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를 주님께서 안타깝게 태풍 보내셔서 싹쓸이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주여, 어찌 이렇게 저주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시다보니까 땅의 세계와 공통점이 없어요. 요한복음에 그것이 나옵니다. 성경을 안 들춰야 돼, 안 들춰야 행복한데 괜히 들쳐가지고……. 요한복음 3장 27절에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천국 가는 능력은 위에서 오지 땅에서 교회가 제자훈련해서 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31절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그리고 점점 더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과격한 발언을 해요. 유대인들이 가만 두지를 않지요. 요한복음 8장 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하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야, 말씀을 해도 주님께서 참 얄밉게 해요. 나는 위에 있고 너는 아래 있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아, 이게 얼마나 얄미운 겁니까? ‘너 혈액형이 뭐야? O형?’ ‘O형 아니므니다.’ ‘그럼 A형이야?’ ‘A형 아니므니다.’ ‘혈액형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이 갸루상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얄미워요? 나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이건! 지금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니까 예수님 거기에다가도 땅 굴 파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토함산으로 삼아서.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예수님 보고 야, 저 분 같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이 땅에서 내 소원 들어줄까 싶어서 예수님한테 가서 땅굴 파서 예수님 저 어때요, 헌금 잘하고 기도 잘하는데 어때요, 하고 예수님 품에 안기고 싶어서 난리가 났어!
그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백 그라운드로 삼아서 전에는 부처 안에다 모시던 그 자기불상을 예수 안에서 집어넣고 그 불상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소급해서 자기 자신의 불상을 섬기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토함산입니다. 그런데 굴착기 소리가 막 나더니 하는 소리가 ‘나는 예수 안에 있어요.’ 하면서 들을 소리가 있고 배운 것이 있다고 그런 소리 하더니 안에 불상을 딱 심어놓았습니다. 그래서 토함산 흙더미가 앞에 있는 부처상을 보고 말합니다. ‘어이?’ ‘음?’ ‘넌 자기를 미워할 수 있나?’ ‘미쳤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그걸 미워해요. 이게 축복인데.’ ‘그러면 네가 그 축복을 축복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 ‘턱도 없는 소리!’ ‘너는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어?’ ‘내가 예수님을 이용했지 언제 내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소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따위 사고방식으로 자기를 이용한 것을 오히려 주님이 이용한 거예요. 왜냐하면요, 사람이 자기의 본색을 본색대로 다 드러낼 때 그 자리가 바로 사람이 비로소 구원받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땅에서 자기가 한 행세를 예수 믿는 종교의 이름으로 다 해보라는 말이지요. 십일조도 해보시고 다 해보세요. 금식도 하고 다 해보라고. 우리교회는 안 해서 문제인데, 다 해보라는 거지요. 그것 다 해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다 해보라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아무것도 안하는데 그러지 말고 다 해보시고 그게,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아무짝도.
착한 일 하는 것, 그것도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예수라는 토함산에 자기 불상하나 세우는 그 짓밖에 안돼요. 혹시 목사한테 칭찬받고 교인들한테 사랑받고, 그저 자기자랑밖에 모르는. 자기를 미워하는 그런 것은 안들은 척 하면서 성경 빨리 읽는다고 휙휙 바람이 일어나면서 그냥 다 지나가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이런 구절만 찾고 있고 말이지요.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땅에서 못 벗어나는 너를 내가 죽으심의 피로서 건져낸다면 우리가 성급한 논리로 들어오지 말고 순서를 밟아야 돼요. ‘그래, 나는 땅에 속했어. 그리고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거기서 못 벗어나.’ 그것을 자기에게 하는 자기의 소리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이면 오직 구원하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제가 U-튜브로 방송을 하고 있는데 아마 다음 U-튜브 방송은 이거 나올 거예요. 예수 믿는 것이 죄라고. 갈 때까지 가 봅시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 이것은 또 하나의 내 불상 이마에 다이아몬드 박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 예수 믿는다는 자기자랑하려고. 우리가 토함산 잘못 뚫었어요. 엉뚱하게 예수님을 토함산으로 삼아서 거기를 뚫어놓았으니. 예수 믿는 나를 가만두지 않아요.
46절에 보면 위에서 온 능력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남을 근거로 해서 회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시작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온 능력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능력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능력, 어디에 비추어서?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겁니다. 능력을 안 받은 사람은요, 날 미워하면 세상에 날 받아줄 사람은 없잖아, 그러면 난 살기 싫어서 죽는다, 이렇게 나오겠지만 진짜 하늘의 능력을 받아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워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얽매이지 않는다는 자유 함, 그 편안함, 그 존재의 가벼움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최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이 뭐냐 하면, 태풍불어서 무화과 심어놓은 것 다 날려버리는 것, 포도나무에 소출도 떨어지고, 대출 10억 받아서 외양간 짓고 사료 사다 소 먹이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외양간의 소가 다 죽어서 외양간에 소가 없다 이 말이에요. 바람만 휑하니 불고 사료만 축내 버렸어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나를 그런 식으로 몰아넣는 그것은 ‘내가 말씀에서 땅이라는 것이 살 곳이 못된다고 미리 이야기해 줬잖아. 태풍이 부니까 이제서 믿나, 땅에서는 네가 살 곳이 못된다고 했잖아.’ 든든한 사람, 날 사랑해 줄 사람, 아내 같으면 남편, 남편 같으면 아내, 저 사람 같으면 내 행복이 보장된다는 든든한 사람, 나중에 그 사람이 바람피워서 이혼하자고 나올 때 그것이 축복인 것을……,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다.
그것이 축복인 것을! 잘 살던 사람이 이것을 빌미로 해서 또 이혼하자고 덤벼들지 말고요. 그게 축복인 것을! 왜 나는 그동안 스스로 천국을 안가겠다는 발악을 했느냐 이 말입니다. ‘주께서 날 지켜주시겠지. 주의 피가 어쩌고저쩌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이 세상에서 들었던 더러운 버릇을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보려는 무리수를 두고 무리수를 시도한 거예요. 우리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신자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사세요. 그렇게 살아가야,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고 그저 이혼당할 사람만 찾아다니는 식으로 사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구나. 내가 예수 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의 피로 나의 본색을 드러내는 그것도 능력’이에요.
‘아, 나는 예수 이용하고 부처 이용하고, 이용할 대로 이용하면서 나밖에 모르고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구나.’ 이것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나, 그런데 그런 나인데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의도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니 이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막산다고 이야기하니까 막 살라고 했다고 시비 거는 사람도 있고. 그냥 하던 행세대로 하세요. 괜히 되도 않는 주의 종 된다고 나서지 마시고 그냥 하던 행세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고.
그런데 사람이 남한테 피해 안주고는 못살게 되어 있거든요. 하여튼 길에서 우연히 ‘야, 너, 반갑다!’ ‘어, 너는 초등학교?’ ‘동창 맞아.’ 하는 순간부터 서로 손톱 세워서 동굴 팝니다. ‘너 요새 뭐하니?’ 이것부터 시작해서 정수기 한 대 팔아먹을까 싶어서. 회개라는 것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자기가 깨달아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선지자와 다윗의 말씀에 근거해서 회개를 하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는 다 주셨는데 내가 그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깜빡 잊고 내가 하는 그 행세의 가속도를 내가 도저히 감당을 못해서 또 내가 이렇게 나만의 행복과 나만의 축복을 또 추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용했습니다.’ 하는 그 고백, 그 고백을 할 때 그것이 바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그렇게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것과 성경에 나오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의 정도가 있어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그 사도바울,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사도가 되는데 그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었어.’ 그렇게 이야기해요. ‘저분은 메시아입니다.’ 상당히 긍정적인 표현을 써요.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었어!’ 이 부정적 표현이 앞에 있는 메시아 표현보다 더 강렬해요.
‘나 예수 알거든, 나 삼위일체도 알아.’ 이것보다도 ‘내가 엉터리였어. 나는 모든 것이 엉터리였어.’가 주님의 사랑과 깊이에 빠져들면……, 숨이 턱에까지 차서 헉헉대면서 동네사람에게 ‘여러분, 그게 아니었습니다.’하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외치는 것처럼, 막 중력의 가속이 붙어서 더욱 더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실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죽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는 하나님으로 봤는데 실제로는 죽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분이 다녀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절규하듯이 외치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는 그 말을. 이것은 하나의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이것은 우리가 예상 밖의 기쁨이요, 예상 밖의 구원의 능력이요, 우리가 꼼수를 썼던 그 꼼수의 범위를 벗어나서, 이것은 자유 이상의 자유고 가벼움 이상의 가벼움입니다. 우리가 무슨 짓 한다는 것을 미리 아신다는 점에서 우리가 스스로 무슨 짓을 해도 자기를 탓하지 마세요. 자기를 심판하거나 저주하거나 채찍 들고 자기를 때리지 마세요. 우리는 원래 그 짓 하는 코스를 통해서 천국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아세요. 이 짓이 나만 하는 짓이 아니고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가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이 다 그런 짓 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서울에 가면서 KTX를 타잖아요. 타서 보니 사람들이 전부 다 병 같아 보여요. 그 병에 화장터에서 태운 뼈 가루가 담겨 있는 겁니다. 차가 움직일 때마다 뼈 가루 하얀 병이 50개 60개가 같이 흔들립니다. 나중에 나 죽고 난 뒤에 내 자녀가 나를 가루로 만들어서 병에 담는다면 내가 바로 그 병에 든 가루의 상입니다. 그게 내 모습인데! 이 근호라고 적혀 있지만 흔들어 보면 소리도 안 나는 뼈 가루, 그게 나거든요.
그 나를 하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십자가에 죽은 능력이, 위에서 온 능력이 땅에 있는 우리를 기어이 약속대로 만들고야 마는 겁니다. ‘걱정하지 말라. 택한 자는 반드시 내가 살리는 이것이니 이것을 네가 믿어라.’ 우리는 능력 입어서 ‘믿습니다.’ 그렇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