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배추꽃 폈다
-조문경
남강 매운탕 집에서다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들고 주차장으로 나왔는데
보슬비가 내렸다
비에 젖은 것들은 다 짙은 색을 낸다
한가롭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울타리도 있고 텃밭도 가지런한데
가만 보니
배추고랑 배추잎 위에
주홍꽃이다
"어머, 저것 봐."
짙은 초록잎 위에
마치 주홍 배추꽃처럼 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울타리 옆 능소화 넝쿨을 봤고
바람에 날려 배추 위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 같이 다시 말했다
"저 배추꽃 참 예쁘지."
'주홍 배추꽃'이라는 말만 들어도 상큼합니다. 언젠가 먼 거리에서 소나무를 타고 올라간 능소화가 마치 소나무의 꽃처럼 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리로 하여 넝쿨이 잘 보이지 않으니 마치 붉은 소나무꽃이 핀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신선한 느낌을 받았는데, 정말 무엇이 신선한 것인가? 내가 알고 있던 소나무의 꽃이나 능소화 모습과 달라서인가? 다르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다만 서로의 어떤 부분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이것을 '배추와 능소화'의 관계로 생각해 보면, 먼 거리여서 보이지 않던 능소화 넝쿨이 "울타리 옆 능소화 넝쿨을 봤고/ 바람에 날려 배추 위로 떨어졌을 것"이라는 거리로 변한 것뿐입니다(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정도의 변화).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저 배추꽃 참 예쁘지."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1) 배추꽃도 아니고, 배추 위에 핀 꽃이니 능소화도 아니다. 배추꽃은 다르고 능소화도 다르다. 아닌 것으로 보면 다 아니다. -매사에서 처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것을 시인은 "가만 보니/ 배추고랑 배추잎 위에/ 주홍꽃이다/ "어머, 저것 봐."// 짙은 초록잎 위에/ 마치 주홍 배추꽃처럼 폈다"고 말합니다.
2) 하지만 배추 위에 폈으니 배추꽃이라고 부를 수 있고, 능소화꽃 모양이니 능소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관계에 주목한 것입니다. 배추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조금 그렇고 능소화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조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울타리 옆 능소화 넝쿨을 봤고/ 바람에 날려 배추 위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관계를 긍정합니다. 그 사태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3) 그때 터져 나오는 소리가 "하나 같이 다시 말했다// 저 배추꽃 참 예쁘지."입니다. 이는 새로운 '우리'('배추-능소화') 차원을 긍정한 것입니다. 배추가 배추를 넘어서고, 능소화가 능소화를 넘어선 그래서 둘을 넘어서는 창발적(創發的)인 요소가 더해진 '주홍 배추꽃'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렇다면 1)의 단계에선 긍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냉소만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2)의 단계를 거치며 새로움에 대한 마음자리가 만들어져 3)의 긍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름이 관계로 묶여 새로운 요소와 더불어 긍정되는 것입니다. 그게 "주홍배추꽃"으로의 '우리' 치원입니다.
-글/ 오철수 시인
첫댓글 논리는 분명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논리는 배워야 합니다. 특히 관계 쪽으로 마인드를 조정하여 큰 차원을 가지고 싶다면(가져야만 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감의 작동은 그런 큰 차원이 보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그런 논리를 공부해야만 합니다. 산을 보고 산이라고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소문자-산). 산을 보고 산이 아니라고 말하는 삶의 경과를 거쳐, 비로소 산은 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대문자-산). 시심은 경과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표현의 재료도 거기에서 만들어집니다...........그래서 읽기만 해도 마음이 좋아지는 시를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각자 다르지만 관계
안에서 <창발적 요소가 더해진 아름다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모르파티님....1월 20일의 기억이 바로 이런 것일 겝니다.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은 이 시를 읽으며 짐작하십시오......이렇게 편하면서도 깊은 미학적 감흥이 배어있는 감응을 할 수 있는 시인들이 여러분들입니다. 좋은 마음 많이 나눠주시길....^^
내 눈과 마음에도 주홍배추꽃이 만발할 수 있기를..... ^^
창발적 질서에서 맛보는 아름다움은 더 매력적인 아름다움일거라 생각해 봅니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 속에서 같음을 찾아내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들 속에서 맞음을 찾아낼 때 삶에 대한 내 자신에 대한 진일보는 이뤄지는 거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 너 + 알파 ----새로운 차원은 알파 때문에 생겨난 것임
서로 서로 '주홍배추꽃'이라 부르고 불리워진다면 상상만으로도 제 마음이 환해집니다....다름이 관계로 묶여 새로운 요소와 더불어 긍정되는 것, 나의 삶이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를 고대합니다.
토요일 제 눈에는 다들 주홍배추꽃이 앉아있었어요^^
저만 그런가요? amorfati 오프모임이 회가 갈수록 기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직업, 성격, 나이, 각자의 환경들이 적어도 이곳에서만은 '주홍배추꽃에 대한 긍정'으로 와 닿았죠 그리고 그날 문경님이 부지런히 여기저기 자리 옮겨가면서 얘기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
그날 주홍 배추들 꽃들 향기가 아직도
문경님의 편하게 가슴에 와 닿는 시, 여전히 정겹군요.
그 강물님이실까?? 궁금해요^^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하는 시, 끝날까지 써주오.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해주어 고맙수 뭉경..핫핫!
누이가 왜 아름다운지 알겠어요. 관계에 대한 긍정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군요. 선시같아요. 깊은 시우물 문경누이 파이팅^^
소나무위의 단풍들이 꼭 꽃 같아서 이런거였구나. 하고 생각 했던 적이 있었어요.늦은감이있지만 댓글을 추가합니다..
<비에 젖은 것들은 다 짙은 색을 낸다> 맞아요. 비 오는 날 차창으로 보던 보도에 지친 꽃들이 생각나요. 저마다의 선명한 색을 찾으며 제 빛으로 웃던 꽃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절한 언어구사. 그동안 꽤 많은 시를 보았어요. 시집 남았으면 제게도 한권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