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바람’이란 이름을 가진 탐사선이 프리스터 국경에 접근한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우주 항행용 소형 마력석과 그것을 제어하는 단 한 사람의 마학자가 동력의 전부인 이 코아리노아 탐사선은, 비의 달의 아홉번째 날 오후까지는 행성 엔더리아로 귀환하게 되어 있었다. 예정에 맞추려면 국경지대에서 어슬렁대기보다는 뱃머리를 돌리는 쪽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간에 걸친 외곽지역 탐색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마력석을 함유한 소행성 집단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장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비록 ‘별 바람’이 있는 성역은 중립 지대였지만 코아리노아 국경을 넘기 위해 많은 지출이 필요했다. 게다가 중립 성역에서는 군사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민간 탐사선이 발견한 마력석은 절반 가까이 왕실에 빼앗긴다. 애국심이나 충성심이 아닌 사익을 위해서라도 선장은 오늘 안으로 풍부한 마력석들을 찾아내리라 결심했고 그 결과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프리스터 국경 부근까지 전진했다.
마력석 채취를 위해 모인 20여명의 선원들은 지루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끊임없이 닦달하는 선장을 향해 마학자는 항행용 마력석을 제어하기도 힘들다는 둥 계속 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이 당황으로 가득찬 중얼거림으로 변질된 시점은 귀환을 얼마 앞둔 오후였다.
“마, 마력장 발견.”
선장이 며칠간 애타게 원했던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량이었다. 프리스터 방면에서 발견된 마력장은 급격하게 수와 범위를 넓혀 성역을 압도해 나갔던 것이다.
“5천개 이상?!”
5천개의 마력석이 잠들어 있는 소행성 집단을 발견했다면 선장은 탐사업계의 영원한 행운아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행운과 불운을 구분할 정도의 이성은 가진 남자였다.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프리스터 국경을 넘어 코아리노아 방면으로 쇄도해 오는 수천개의 마력장은, 백번 천번 양보해도 소행성의 이동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엔더리아를 향해 반전한다! 급속 이탈!”
선장의 닦달을 듣고도 투덜거리지 않는 마학자를 보고 선원들은 크게 당황했다. 여태까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최선’이란 표현이 어울릴만한 태도로, 마학자는 마력석의 힘을 최대로 개방해 ‘별 바람’을 성역에서 탈출시켰다. 선장의 이윤 포기와 마학자의 뒤늦은 성실함이 모두의 생명을 구했다. 상대는 자신을 감싼 거대한 마력장의 파도 때문에 탐사선의 극히 미약한 마력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둠을 찢으며 수천척의 스트러겐터 전함들이 나타난 것은 ‘별 바람’이 도망친 직후였다.
코아리노아와 커스터리에의 전쟁은 반세기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질대로 길어진 지금, 간혹 들려오는 교전 소식은 별다른 감흥없는 연례 행사로 전락했다. 전역은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다만 현상을 유지시키기 위한 전함 교체와 신병 투입이 있을 뿐이었다. 극히 드문 전투마저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어서, 공격하는 쪽도 수비하는 쪽도 의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전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긴 했지만 단순한 주장에 그쳤다. 두 나라 모두 이대로 그만 둘 계획따윈 없었다. 지휘부는 병사들의 손실엔 지나치게 둔감했고 왕실의 권위엔 과도하게 민감했다. 국경 성역을 사이에 두고 코아리노아 군과 커스터리에 군은 대치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10여년 전, 격전이 벌어졌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시기에 비정상적인 규모로 벌어진 전투였다. 평소처럼 형식적인 수색을 벌이던 코아리노아 전함 몇척이 마력장 이상으로 인해 커스터리에 세력 범위로 표류해 온 것이다. 태만했던 커스터리에 정찰정들은 이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결국 코아리노아 전함들은 커스터리에 본진까지 흘러들었고, 갑자기 나타난 적 함대에 놀라 발포하고 말았다. 불운이 겹쳤는지 좌표 지시도 없었던 이 엉터리 포격에 분함대의 기함이 직격당했다. 어이없게 분대장을 잃은 커스터리에 군은 격분하여 표류 전함들을 참살한 뒤 맹진격, 국경 근처에 있던 다른 코아리노아 함대까지 괴멸시켰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사고였지만 깊이 침체되어 있던 커스터리에 군의 전의를 고취시키기엔 충분했다. 병적인 살의를 보이며 전략도 전술도 없이 강습해 오는 커스터리에 함대에게, 무방비였던 코아리노아 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본진이 대파되고 수십년 동안 고착됐던 전역마저 뒤바뀔 순간에 다다랐다.
연패 앞에서 자포자기 심정이었던 코아리노아 지휘부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함대 사령관을 교체했다. 고대 병법 연구라는 특이한 취미를 가진 중년 귀족이 수도성으로부터 파견됐다. 실전 경험없는 새 함대 사령관을 보고 아군에서는 불만을, 적군에서는 환호성을 터뜨렸다. 최종 전역 방어전을 앞두고 커스터리에 함대 사령관은 공언했다.
“전사(戰死)도 과분한 놈이다. 책상에 처박혀서 죽지 못한 걸 후회하게 해 주지, 탁상공론자 자식.”
코아리노아 장병들도 그들의 사령관을 그렇게 불렀다. ‘아렌츠 발렌트’라는 약간 투박한 이름보다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도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결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무사안일로 가득찬 시간 낭비를 실전 경험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커스터리에 군은, 책상 위에서 완성된 아렌츠의 작전 앞에서 완전 분쇄되었다. 형식적인 대치와 접전으로 일관했던 선배들의 유산과 전통은 아렌츠 발렌트에 의해 처참히 박살났다. 체계없이 달려들뿐인 상대를 지극히 기초적인 함대운용으로 무력화시킨 아렌츠는 적의 절반 병력으로 두배 이상의 시간을 단축시키며 전역을 수복했다.
커스터리에는 절대적인 승기를 잡은 코아리노아가 그대로 침공해 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렌츠는 갑작스레 수도성으로 소환되고 전국(戰局)은 다시 정체되었다. 전쟁이 본격화될 경우 징병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의 움직임 때문이라는 둥, 아렌츠의 공적을 시기한 자의 소행이라는 둥 여러 추측이 난무했지만 곧 모두 잊혀졌다. 코아리노아 군과 커스터리에 군은 과거처럼 대치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대회전 이후, 아렌츠 발렌트는 다시는 군을 지휘하지 못했다. 수도성으로 소환된 뒤 함대 사령관에서 해임된 그는 왕궁 근처에 있는 자택에 칩거한채 사교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침실에만 머물게 되었다. 발렌트 저택 밖에서 아렌츠는 명실공히 코아리노아 제 1의 전술가로 불리며 각종 행사에 이름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은 행사 주최자 자신을 뽐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발렌트 저택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막대한 병력을 잃은 뒤 커스터리에는 불필요한 도발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아렌츠 발렌트를 찾지 않았고, 찾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제먼드 발렌트는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병석에 누운 부친 대신 발렌트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이 된 청년을 탁자 주위의 사나이들이 바라보았다. 저택 지하실의 두터운 어둠을 상대로 촛불은 지극히 미약했다. 입보다 눈이 오랜 이야기에 지쳐 버렸다. 제먼드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역시, 밖에서의 공격은 무의미하다는 말이군.”
“그렇다.”
피로에 젖은 제먼드의 목소리에 사나이 중의 한명인 크렘린이 대답했다. 크렘린의 입가에 촛불마저 데우지 못한 냉소가 걸렸다. 그가 웃을 때마다 소름을 느낀 사나이들은 되묻곤 했다. 우리들이 하려는 것은 정말 정의가 맞는가, 라고.
“항상 그런 식이다. 고귀하다는 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안전이 보장 받도록 꾸며놓지. 자네도 귀족이시니 알텐데.”
크렘린의 말에 제먼드는 표정을 굳혔다.
“우리들끼리 소모적인 계급 논쟁을 벌일 이유는 없어. 모순을 없애기 위해 이곳에 모였음을 잊지마.”
코아리노아 최고 전술가의 아들답게, 제먼드는 잊지 않고 덧붙였다.
“부정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자네들이 귀족의 돈을 쓰고 있다는 걸.”
크렘린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냉소어린 시선을 탁자 위의 단면도로 옮길 뿐이었다.
“붕괴는 안에서도 얼마든지 시작된다. 밖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그 자를 말하나?”
“충성심으로 가득한 종만 있는 건 아니니까.”
크렘린의 곁에 있던 남자가 제먼드를 향해 몸을 숙이며 말했다.
“연락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호응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답하는 제먼드의 목소리는 약했다. 크렘린이 다시 입가를 일그러 뜨렸다. 복잡한 심경을 크렘린에게 들키는 것 같아 제먼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이 음침하고 냉소적인 평민이 거슬렸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인식조차 청년의 정신을 피로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아버님께 가봐야 한다.”
제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의논하지. 조심해서 나가도록.”
촛불이 꺼지자 그들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 히아스를 압도한 건 세르비안 우주항의 번잡함이었다. 엔더리아와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무언가를 지시하는 목소리가 쉴새없이 터져 정신이 없었다. 우주항 관계자와 승객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아수라 장의 한복판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페날과 히아스 뿐인 듯 했다.
놀란 히아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페날이 말했다.
“정신차려. 수도성인데 이 정도는 돼야지.”
“대단하네요….”
“저쪽으로 가자.”
셔틀에서 내린 사람들은 검문대 앞에서 가져온 짐을 내보였다. 페날과 히아스의 가방을 투박한 손길로 살피던 경비병이 힐끔 그들을 보았다.
“어디서 왔소?”
가벼운 존칭을 쓰고 있었지만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히아스가 머뭇거리자 페날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엔더리아.”
“촌놈들이 여긴 왜 왔어.”
뒤에 있던 또 다른 경비병이 중얼거렸다. 페날과 히아스에게도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의도적으로 크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히아스의 귓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경비병은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거칠게 휘저었다. 화려한 경비복과 엔더리아에서 가져온 히아스의 옷은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보내. 시골에서 뭘 숨겨온다고.”
“그렇군.”
동료의 말에 가방을 뒤지던 경비병이 히죽 웃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시오. 문제가 생기면 당신네들이나 우리나 골치 아파지니까. …통과.”
경비병이 귀찮다는 얼굴로 다음 사람을 불렀다.
“뭐죠? 기분나쁘게.”
히아스가 멀어진 우주항쪽을 보며 투덜거렸다. 마부와 몇마디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페날은 피식 웃었다.
“경비병들은 평민 중에서 서드클래스와 가장 가깝거든. 우월감을 보이려 나름대로 안달하지. 곧 익숙해 질거야.”
“그래도….”
“부정하지마. 이것도 분명 세르비안의 모습이니까. 좋고 나쁘고는 모든 것을 본 다음에 결정해야지.”
태연하게 말하는 페날에게서 고개를 돌린 히아스는 턱을 괴고 창밖을 보았다. 페날이 구한 조그만 마차의 승차감은 나쁘지 않았다. 엔더리아에서도 몇번 마차를 타본적이 있었다. 수도성과는 달리 포장되지 않은 길에서 달리는 엔더리아의 마차는 심하게 덜컹거렸기 때문에 안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주항에서의 인상은 나빴지만, 저녁 노을이 엷게 깔린 세르비안 풍경은 히아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엔더리아의 망망함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푸른 들판과 기계소리를 내는 공장 대신, 깨끗하고 호화롭게 치장된 건물들이 하늘로 뻗었다. 히아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높은 집들은 보지 못했다. 세련된 의상의 세르비안 사람들은 오색으로 꾸며진 거리를 걸었다.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는 도로 옆으로 멋드러지게 뻗은 가로수 사이를 달려 나갔다. 모든 게 엔더리아와 달랐다. 새로운 별천지 속에서 히아스는 황홀함을 느꼈다.
그리고 페날은 씁쓸해졌다. 여기는 물론 세르비안이다. 그러나 세르비안의 전부는 아니다. 히아스는 귀족들의 거리를 보고 있었다. 그 저편에 있는 평민들의 삶은 지금 소년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잔해와 판잣집은 귀족의 저택에 가로막혀 존재감마저 사라졌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에게 자신은 무엇을 가르쳐 줘야만 할까. 아니, 가르친다고 되는 문제일까.
“아저씨! 저 마차 봤어요?”
소년의 탄성에 페날은 몸을 일으켰다. 호사스러운 사륜 마차가 눈앞을 지나갔다.
“역시 수도성은 굉장해요. 저렇게 멋진 건 처음본다구요!”
“귀족의 마차야. 귀족치곤 오히려 소박하지.”
페날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번드러진 건 중요치 않아.”
“예?”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는가가 중요하지. 단지 부유하다는 이유만으로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존경할 필요도 없고.”
진지해진 페날의 얼굴에 히아스는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페날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코아리노아엔 왕족과 귀족, 서드클래스, 그리고 평민이라는 네 계층이 사는 건 알지?”
“보일 할아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페날은 히아스가 막연한 개념으로만 알던 사실을 하나씩 집어주듯 말을 이었다.
“마학자나 행정관의 경우엔 서드클래스에 속한다. 귀족은 아니지만 관청에서 일하니까. 하지만 너와 나 그리고 엔더리아 사람들은 평민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히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페날은 이런 이야기따윈 닥치고 화려한 세르비안만 보여주고 싶었다. 소년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이상, 히아스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른인 페날은 현실을 말해줄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평민은 운과 실력만 좋다면, 서드클래스까지는 될 수 있다. 하지만 귀족이 될 순 없어. 아까 봤던 사륜 마차는 평민으로선 환상일 뿐이야. 그리고 귀족들은 노력없이도 부를 상속받지. 권력은 계층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그들 내부에서만 맴돌고 있으니까. 실력과는 무관하게.”
“…….”
“빈부 격차는 어디에서나 생기기 마련이야. 인류의 역사가 그래왔어. 빈부를 없애기 위한 많은 사상들이 탄생했고 동시에 실패했다. 완전한 평등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격차가 정해졌을 때 발생한다. 세르비안도 마찬가지야. 과연, 그게 옳을까?”
“…….”
소년의 얼굴은 곤혹스러움으로 어두워졌다.
이런 바보같이. 제흥에 겨워 막나갔구만. 페날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히아스에게 요구했음을 깨달았다.
“…라는 건 일단 잊고, 지금부터 세르비안 시내 관광이다. 놀아 보자!”
페날이 소리 높여 쾌활하게 외치자, 굳어 있던 히아스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페날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 질 수 있었다.
페날의 이층집은 시내 중심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 위치했다. 화려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편안한 느낌을 주는 벽돌집이었다. 페날과 히아스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고 그만큼 두 사람은 몹시 피곤했다. 페날이 거실의 불을 밝히고 우주항에서 집으로 보내둔 여행 가방을 살피는 동안 히아스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여독에 지친 몸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배에서부터 시작된 찌르르함이 가슴을 거쳐 어깨, 팔로 퍼져나갈 때, 문득 연갈색 단발머리의 소녀가 떠올랐다.
‘미네는… 지금쯤 아이들을 재우겠지.’
아침까지만 해도 눈 앞에 있던 소녀를 잠시나마 망각했다는 사실에 히아스는 놀랐다. 그 정도로 수도성 도착과 시내 구경은 정신없었다. 하지만 히아스는 스스로의 무신경에 화가 났다. 미네에게 다다랐던 생각이 가지를 뻗었다. 한껏 기지개를 켠 소년의 몸은 쭉 뻗은 그 상태에서 경직되었다. 다음 순간 히아스는 튕기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장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펴, 편지!”
어깨를 주무르던 페날은 고개를 돌려,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그러고보니 전 여, 여기 놀러온 게 아니라구요!”
“호오?”
“아레사 아주머니께서 부탁하신 편지 말이예요. 어서 전해야 하는데…!”
“아, 그거.”
페날은 가볍게 대답하며 품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혈색을 되찾으며 히아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전해야겠어요.”
“뭘 내일까지 기다려? 받아라.”
페날은 태연하게 편지를 내밀었다.
“아니, 저… 수취인은 아저씨가 아신다고….”
히아스가 멍한 표정으로 편지를 보며 말하자, 페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줬잖아.”
“…….”
편지엔 아레사의 글씨가 당당히 존재를 외치고 있었다.
『 수도성 구경 잘 하고 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굳어버린 히아스의 입에서 통한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둘이 짰죠?”
“옹고집에겐 효과 만점이지.”
“아저씨!”
“뭐, 후회해도 늦었어.”
소년으로서는 두명의 노련한 인생 선배를 당해낼 수 없었다. 페날은 가볍게 웃었다.
“널 위해서였지.”
히아스는 귓볼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가득 아레사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고개 숙인 소년의 등을 페날이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감동할 틈도 없어. 내일부터 다시 강행군이다.”
“에? 오늘만 해도 힘들….”
“약해! 세르비안을 만만히 보지 마라!”
그리하여 히아스는 대도시 여행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함을 좀더 오랫동안 경험해야 했다.
자정을 훨씬 지났지만 아침이 밝아오기엔 많은 시간이 남았을 무렵, 발렌트 저택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수면욕을 방해받은 하인들은 투덜거리며 신원을 확인했다. 검은 망토로 몸을 감싼 방문자를 보는 순간, 잠도 불만도 모두 사라졌다. 고귀한 증표를 확인시킨 방문자는 아렌츠 발렌트와의 대면을 요구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잔뜩 굳은 방문자의 얼굴이 그가 가져 온 소식의 중대함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저택 주인의 침실에 조그만 촛불이 켜졌다. 그리고 현세의 흐름과 단절된 듯이 보였던 그 방엔 참으로 오래간만에 외부인이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제먼드 발렌트는 부친의 방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러나 발렌트 가의 젊은 도련님은 이런 사태를 예측하고 도청 방법을 강구해 놓은지 오래였다. 아렌츠가 병석에 있었던 세월 동안, 그를 모르는 자는 없었지만 그가 모든 코아리노아 인이 알고 있는 존재가 된 계기를 실감하는 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먼드는 잊지 않았다. 왕궁에서 온 전령의 말을 되새길수록 제먼드의 인식은 더욱 명확해 졌다. 그의 아버지는 코아리노아 최고의 전술가인 것이다. 전령과 아렌츠의 이야기 소리는 낮디 낮았지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곧 코아리노아 전체가 그 충격에 춤을 추리라. 그리고 청년은 하나의 실마리를 보았다. 하늘의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게 등장한 실마리가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계획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했다. 제먼드는 재빨리 집사를 불러 몇가지를 지시했다. 얼마 후 발렌트 저택으로 온 전령이 떠나기 전에, 또 다른 자가 발렌트 저택에서 나와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항성 코아리노아를 공전하는 두 행성 중, 엔더리아는 몇십년전만 해도 단순한 농경지대였다. 그렇기에 왕국 백여년 역사의 산물은 모두 세르비안에 집결되어 있었다. 수도성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이 밝으면서부터 시작된 히아스의 관광은 페날의 적극적인 안내 아래 가속도가 붙어 점심시간 무렵에는 대부분의 시내를 돌았다. 덕분에 소년은 완전히 지쳤지만 마음은 어느때보다 풍족했다.
시내의 소박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페날이 히아스를 데리고 온 곳은 사람들로 혼잡한 거리였다. 뻐근해진 무릎을 두드리며 히아스는 돌다리 난간 근처에 걸터 앉았다. 다리 밑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왔다.
“다들 바쁘네요….”
정신없이 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히아스가 무심코 말했다. 페날은 관광 지도를 접었다.
“당연하잖아. 여기는 상점가야. 하나라도 더 팔려면 남보다 많이 뛰어다녀야 하니까. 싸게 사고 싶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왜 여기에….”
“이 둔탱아, 기억 안나? 미네한테 목걸이 사줄 거라며. 수도성 최고의 상점가라면 당연히 여기지.”
“아저씨….”
“난 먼저 간다. 쇼핑은 천성이 아니라서 말야. 어두워지기 전엔 돌아올테니 걱정말고 구경해. 저녁은 페날식 특제 요리를 먹여주지. 참, 혹시 모르니 연락처를 줄게.”
“정말 감사합니다. 배려해 주셔서.”
페날이 쓴 웃음을 지으며 히아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신경 쓰지마. 대리 만족이니까. 난 선물을 사줄만한 사람이 없거든.”
“미, 미네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난 여동생이 없다구. 뭘 잘못 말했냐?”
“…이제 아저씨하곤 얘기 안해요.”
“방금 했잖아.”
“이익!”
끝까지 농락당한 히아스는 세차게 발을 구르며 퉁명스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소년은 알고 있었다. 페날이 얼마나 자기를 신경써 주는지. 그래서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할 수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히아스는 다리 아래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 사라졌다. 분명 소년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연스레 옮겨왔던 그 미소는 페날의 마음 속에서 점차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히아스에게 보여준 것은 화려한 수도성으로서의 세르비안에 불과했다. 반쪽의 여행…. 이 거리의 저편에는 또 다른 세르비안이 있다. 페날이 본, 그리고 경악했던 세르비안의 진정한 모습이. 페날은 ‘선’에 다다랐다.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게 된다. 처음엔 솔직하게 보여주자고 생각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선 망설임이 남았다.
녀석에겐 아직 꿈이 필요하지 아닐까.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걸 깰 자격이 내게 있을까.
그래, 히아스에게 맡기자. 결정은 그 애의 몫이잖아.
페날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순간,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젖은 땀을 휘감아 섬찟했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히아스는 양 옆에 늘어선 상점들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길이 복잡했지만 페날과 만나기로 약속한 다리는 멀리서도 잘 띄었다.
잠시 상점가를 헤맨 끝에 발이 멎은 곳은 조그마한 선물 가게였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했는지 진열장 유리가 뿌옇게 되어 있었고, 간판의 칠도 색이 바랜 상태였다. 더 그럴싸한 상점도 있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거나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아서 가까이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을 열자 함께 달린 동종(銅鐘)이 소리를 냈다. 하지만 종소리보다는 문이 낡아 삐걱이는 소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가게 구석에 서 있던 여자아이 하나가 힐끔 쳐다봤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히아스와 동갑으로 보이는 그 여자아이 외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비록 허름한 가게였지만 수도성에서 처음으로 물건을 산다는 긴장감에 히아스는 잔뜩 굳은 채였다.
“아까는 웬 여자애가 뛰어 들더니…. 요새 녀석들은 예절이 없구만.”
허연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가게 주인은, 히아스가 미처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계산대를 지나치자 안경을 바로 잡으며 투덜거렸다. 겉은 볼품없는 가게였지만 의외로 예쁜 장신구들을 팔고 있었다. 적어도 히아스가 보기엔 그랬다. 미네를 상상하며 적당한 가격의 목걸이를 살피던 히아스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가게를 들어올 때 보았던 구석의 여자아이가 계속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소녀의 하얀 안색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입은 옷에 흙먼지가 묻어서 전체적으로 초라해 보였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지만 여자아이의 시선은 점점 히아스를 따라다녔다. 안절부절 못하며 진열장 사이를 옮겨다녔고, 시야에서 사라졌다가도 어느 순간엔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마음에 드는 목걸이를 골랐을 때까지도 응시는 계속 되었다. 그래서 여자아이가 말을 걸어왔을 때, 히아스는 오히려 후련함을 느꼈다.
“부탁이 있다.”
딱딱한 말투가 거슬렸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표정은 절박했다.
“수상한 자들이 밖에 있는지 봐 주겠나?”
“수상?”
“그래. 검은 로브를 입었다.”
말을 걸기 전까지 힐끔거리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부탁도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아이의 긴장한 모습이 우스웠다. 가벼운 심정으로 한숨을 쉰 히아스는 진열장 유리를 통해 밖을 살폈다.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지만 검은 로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없어.”
간단하게 답하는 히아스를 보며 여자아이는 눈썹을 찡그렸다. 과민반응한 게 바보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아무튼 히아스와는 관계없었다. 생각에 잠긴 소녀를 내버려 두고, 히아스는 목걸이 값을 치뤘다. 공장을 다니며 틈틈히 모았던 돈을 내는 순간 뿌듯하기도,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야 미네에게 목걸이다운 목걸이를 선물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늙은 주인은 돈을 세지도 않고 받더니, 목걸이를 작은 종이 상자에 포장해 줬다.
가게를 나온 히아스는 곧장 다리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만의 힘으로 산 목걸이를 다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성취감을 깊이 새겨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히아스가 선물 상자를 꺼낸 순간, 낡은 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충돌한 히아스는 들고 있던 목걸이 상자를 놓쳐 버렸다.
“아야야….”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자, 방금 전 가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던 여자아이가 두손으로 이마를 움켜쥔채 아파하고 있었다.
“미, 미안.”
히아스는 무심결에 사과했지만 잘못이라면 앞도 살피지 않고 멋대로 부딪친 여자아이 쪽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너무 당황한 눈치여서 미처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 실례했다.”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히아스를 지나치려 했던 여자아이는, 그러나 발을 옮기자 마자 땅에 떨어졌던 선물 상자를 밟고 말았다.
“헉!”
여자아이 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 히아스보다 더 놀랐다. 움찔하며 발을 뗀 소녀는 무참히 찌그러진 종이 상자를 황급히 주웠다.
“시, 실수였다.”
그 순간, 여자아이의 얼굴이 히아스보다도 더 심하게 얼어붙었다. 보는 이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경직되었기 때문에 히아스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쫓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거리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갖가지의 옷들 중에 어느샌가 검은색이 섞여 들었다.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린 남자 몇 명이 사람들을 헤치며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후드에 덮혀 보이지 않았지만 히아스와 여자아이를 향한 것은 확실했다.
여자아이는 망설임없이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그러자 검은 로브의 남자들도 인파를 거칠게 밀치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서 있던 히아스가 선물 상자를 돌려받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여자아이는 벌써 몇발자국이나 떨어진 채였다.
“뭐야, 저 애는!”
선물할 목걸이를 도둑맞다시피 빼앗긴 히아스는 급히 여자아이를 쫓아갔다. 난데없는 달리기를 보며 사람들이 의혹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모두 사라지자, 이내 상점가는 사고 파는 열기에 빠져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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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희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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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리 짜고 연기하면서 들고 튄게 분명... 할 리가 없겠죠?
으음. 그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진지)
항성간엔 우주왕복선을 타고 도시와 도시를 갈땐 마차를 이용한다...ㅎㅎㅎ 미래속에 과거풍경...괜찮네요
그, 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