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부인과 닭 울음소리
요한복음 18:15-27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는 말씀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 누가는 예수님이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고 도망함으로 베드로가 부인하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현실감이 부족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고 베드로가 부인하는 그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현실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천부장의 지휘하에 군인들이 마치 죄인을 취급하듯 예수님을 체포하고 결박해서 안나스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은 원래 한 사람인데 ‘안나스’와 ‘가야바’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13절에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라고 한 것은 대제사장은 1년 직이기 때문에 그해에 대제사장은 가야바라는 말입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서(13) 대제사장을 은퇴한 원로지만 막강한 실세를 가진 대부로서 예수를 체포하고 죽게 한 실세 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예수를 결박해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한 밤중이기 때문에 가야바가 의장으로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공회가 소집될 때까지 안나스가 먼저 심문한 것입니다. 요한은 가야바 법정의 규모를 알고 있었습니다. 법정 맞은편에 은퇴한 안나스의 집이 있었고 숯불을 피운 뜰을 중심으로 건너편에 산헤드린의회 공관으로 가야바의 집이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한 자’(14)입니다. 사실 요11:49,50에 가야바가 공회에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할 줄을 생각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장인 안나스와 사위 가야바가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데는 마음이 맞았습니다.
15절에 ‘두 제자는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랐는데 한 사람은 대제사장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안나스 대제사장을 아는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데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쓴 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사랑하시는 자’(13:23)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이 대제사장과 어떻게 해서 잘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품꾼들이 잡은 생선을 예루살렘에 공급하였고 요한은 안나스의 집에 생선을 배달하는 관계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안나스의 집네 면식이 있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더 이상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문 밖에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를 본 요한은 문지키는 여자에게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말했고 그래서 베드로는 뜰에까지 들어 올 수가 있었습니다(16).
그런데 문제는 문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종의 말에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들었던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응급결에 ‘나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17절에 여종이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요한이 기록하므로 베드로가 부인을 하게 된 동기를 말했습니다. 군인들에게 잡혀 결박되어 한 밤중에 끌려오는 예수님을 여종은 흉악범 중에 한 사람으로 여기고 ‘이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종이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경멸히 말하므로 베드로를 부인하도록 만들었다고 요한은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종이 말하는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여종이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고 했더라면 베드로는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는 맹세는 간 곳 없고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여종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인 신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숯불을 중심으로 모여선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서 불을 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19-24). 공관복음에는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한 내용은 없지만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에게 어떤 비밀스럽고 사악한 것을 가르치지나 않았느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어떤 비밀이나 사악한 것을 가르치지 않고 공개적으로 세상이 다 알도록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니까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22). 빰을 치는 행위는 치욕적인 모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바른 말을 하였음에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말했습니다(23). 예수님은 한 시간쯤(눅22:59) 지나는 심문을 받았으며, 가야바는 산헤드린공의회를 소집하였고 안나스는 예수를 가야바에게 넘기므로 공식적인 산헤드린공회가 열린 것입니다(24).
베드로가 매우 초조한 모습으로 불을 쬐면서 앉았다가 섯다가 하면서 안나스에게서 심문을 받고 가야바에게로 끌려 다니는 예수님을 곁눈질로 보는 것을 한 사람이 보고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고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또 부인을 하였습니다(25).
그때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인 한 사람이 베드로가 부인하는 것을 보고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결정적인 증거로 말했을 때 베드로는 당황하여 더 이상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예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는 것처럼 ‘저주하며 맹세’를(마26:74; 막14:71)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였을 그때 곧 바로 닭이 울었습니다(눅22:60). 이때 닭은 두 번째 울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닭 울음 소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닭이 울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부인하는 베드로를 돌이켜 보시는 주님의 눈은 실망과 저주하는 무서운 눈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모르냐’는 책망하는 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찬 자비로운 눈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스러운 연민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주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나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눅22:61,62).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엄청난 충격과 동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주 짧은 눈의 대화였습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말씀하셨고 베드로 역시 눈으로 잘못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칼을 빼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던 베드로였습니다(11).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라고 장담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도 했습니다. 잡았던 많은 고기와 배를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눅5:11). 그러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까지 되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베드로는 교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서서 ‘내가’, ‘나는’ 이라는 말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22: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다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고 조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결정적인 잘못은 예수님이 잡혀 끌려가는 것을 멀찍이 따라간 것입니다(눅22:54). ‘멀찍이’란 불리하면 도망할 것이고 유리하면 따르겠다는 적극적이지 못한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왔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가 그 결과를 보려고 하인들과 함께 앉았 있었지만(마26:58),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이처럼 쉽게 부인하고 무너졌다면 저와 여러분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도 할 수가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수 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아니라고 장담하는 그 사람이 더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믿음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협력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 출마를 하고 유세를 하면서 불교 행사에 참석하고 불상 앞에 참배하는 것을 보고 크게 염려를 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모두가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제일 유력한 분 역시 크리스챤입니다. 믿음도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행사에 참석하여 합장도 불상에 참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교 종단으로부터 불만의 말을 듣고 공개적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것을 보고 자신이 예수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오늘의 베드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교회에 다닌 것을 숨기고 몰래 다닌다든지, 불신 친구들과 어울릴 때 성도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불신자처럼 함께 한다면 오늘의 작은 베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하던 중에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네가 닭이 두 번 울기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물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닭 울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오늘의 닭 울음소리는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해서는 안되는 잘못에 빠졌을 때 예배시간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울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베드로는 훌륭한 사도 베드로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닭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는 용서 받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구원도 얻지 못하고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구속사적인 십자가의 오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한 것을 깨달아 알고 용서를 빌고 회개하면 어떠한 잘못도 다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구속사적인 구원관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들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므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다시 맡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부인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주가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지금은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고 영광중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잘못을 깨닫고 통곡하고 회개합시다. 그래서 잘못을 용서 받고 맡겨주신 사명 끝까지 잘 감당하고 섬기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서 베드로와 함께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생 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