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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윤(李範允) (1856 ~ 1940)】
"국내진공 작전’ 진두지휘,일제 심장을 겨눈 독립군 대장"
만주와 연해주를 호령한 이범윤 장군
간도는 만주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간도의 역사를 들추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이름이 있다. 그는 바로 190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 연해주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주도한 이범윤 장군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이범윤이 지휘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다.
1856년 12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字)는 여옥(汝玉) 또는 국보(國甫)이다. 후일 연해주 의병의 국내진공작전시에 협력하게 되는 러시아 주재공사 이범진(李範晉)과 6촌 관계로 알려져 있다. 성장과정과 관계진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고종에 의해서 간도관리사로 임명된 이후부터이다.
청국이 1881년에 북간도에 대한 적극적인 개간정책을 수립하고 이미 1860년대 이래 이주 · 개척해온 북간도의 한인들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1883년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였고 이로써 청국과 조선 사이에 간도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북간도 한인농민들에 대한 청국의 박해가 심해지자, 조선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1902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파견하였다. 북간도에 부임하여 이주 한인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의 명령을 받아 1천명 규모의 충의대(忠義隊)를 조직하여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아니시모프(Anisimov)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을 도왔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당시의 공로를 인정하여 ‘신성(神聖)안나3등훈장’을 수여하였다. 전쟁이 끝난후 아니시모프는 충의대 부대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였고 1906년 초 청국 역시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충의대의 일부 대원들은 국내로 돌아갔고 나머지 700명은 노령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크(煙秋, Новокчевск)로 이동하였다. 러시아로 이동한 이범윤부대는 실전경험이 있는 의병들로 이루어졌는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의 주축이 되었다.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자인 원호인(原戶人) 최재형(崔在亨, 표트로 세묘노비치 최)이 노령으로 이동한 이범윤과 그 휘하 의병들에 대한 후원에 나섰다. 최재형은 의병들에게 연해주 각 지 한인들의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는 신임장을 제공하였다. 최재형의 후원으로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향후 의병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연해주 거주 한인들은 수만 루블의 자금을 의연하였고 청년들은 의병모집에도 호응하였다. 연해주에 체류하면서 간도관리사의 직함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고종이 하사한 마패(馬牌)를 소지하고 다니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였다. 한인들 역시 관리영감(管理令監)이라고 경칭(敬稱)하였다.
1906년 노령 연해주로 이동한 충의대 출신 대원들을 이끌고 연해주 최초로 항일의병운동에 나섰다. 최재형의 도움을 받아 연추에 의병본부를 설치하였다. 자금과 의병 모집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미 87명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있었던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김기룡(金基龍) 의형제(義兄弟)가 동지들과 함께 연추의 의병본부에 합류하였다.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위종(李瑋鍾)이 아버지 이범진(李範晉)의 명령을 받고 1만 루블의 자금을 휴대하고 연추로 왔다. 이위종의 주도로 의병조직 동의회(同義會)가 조직되었는데, 총장 최재형에 이어 부총장에 선출되었고,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이 선출되었다. 안중근, 김기룡 등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동의회 산하의 의병은 1908년 7월 이후 8월까지 함경도 국경지대로 진출하여 일본군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최초의이 연해주의병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의병의 수적 열세로 인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러시아당국이 의병탄압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1908년 가을 이후 연해주의병은 퇴조기로 접어 들게 되었다. 더욱이 최재형과 분열되고, 최재형과 함께 노령 한인사회의 ‘3대 호걸’로 불리는 최봉준(崔鳳俊), 김학만(金學萬) 등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이 의병운동에 비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힘들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의병운동의 분위기가 새롭게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국내로부터 연해주로 이주해 온 유인석(柳麟錫)이 다시 기의(起義)할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최재형 등 1908년 국내진공작전의 의병지도자들에게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최재형이 의병활동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있던 상황에서 홀로 연추에 의병본부인 시무총무소(施務總務所)와 8개 지역에 분소를 설치하고 자금모집과 총기수집에 나섰다. 국내외에 배포한 통고(通告)에서 한인들에게 의거에 참가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1910년 봄에 추진했던 거사는 실현되지 않았다.
얼마 후 연해주 한인들에게 일본과 러시아 간에 사실상의 공수동맹(共守同盟)에 가까운 제2차 러일협약 체결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미주에서 발간되고 있던 한인신문 『신한민보(新韓民報)』는 1910년 7월 13일자 기사에서 일본이 러시아와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여 제3국의 만주 개입을 차단하고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보장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병합을 승인받고 한인애국자들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범죄인인도조약(犯罪人引渡條約)’이 체결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1910년 6월 21일 일본의 강제병합을 저지하기 위하여 연해주 의병세력들이 최후의 대일무장항쟁을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 맞은 편 즉, 아무르만 서쪽 암밤비(Ambambi) 지역의 자피거우 한인마을에서 13도의군을 창설하였다. 도총재 유인석, 장의총재(壯義總裁) 이남기와 함께 창의총재(倡義總裁)에 선임되어 13도의군의 지도부를 이루었다.
그 외에 13도의군 조직을 주도한 이상설은 외교대원(外交大員)으로, 도총소(都總所) 참모에 우병렬(禹炳烈), 의원에 홍범도(洪範圖), 이진룡(李鎭龍) 등 의병지도자들이 선출되었다. 신민회의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이종호(李鍾浩) 등도 의원으로 참가하였다. 일제의 강제병합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의병파와 계몽파가 연합을 이루었던 것이다.
마침내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신문 『달레카이야 오크라이나』를 통해 일제의 강압적인 한국병합을 알리는 전보내용이 소개되자, 13도의군 지도자 유인석, 이상설 등과 함께 한인 200명이 집결한 한민학교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이어 ‘한국병합’의 불법성을 비판하는 항의서에 대한 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병합을 규탄하는 내용의 「성명회 취지문」을 프랑스어, 영어로 작성하여 8,624명이 서명하고, 을사늑약 체결 이전 외교관계에 있던 국가들에게 발송하였다.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당국은 한인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9월 12일 새벽 러시아 관헌들이 한인촌 개척리를 습격하여 42명의 한인들을 체포하였다. 홍범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당국의 체포를 모면하고 피신하였다. 체포된 인사들 가운데 김좌두(金佐斗), 안한주(安漢周), 이규풍(李奎豊), 이범석(李範奭), 권유상(權有相), 이기(李基), 이치권(李致權) 등 7명이 10월 10일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결국 10월 24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원호인 부호 문창범의 측근들에게서 제보를 입수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어 역시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유배에서 해제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 것은 8개월만인 1911년 7월 5일이었다. 이후 주로 이상설 등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우수리스크 헌병대장 쉐르바코프(Shchervakov)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을 모색하였다.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당국의 공식허가를 얻어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자 도총재(都總裁) 유인석에 이어 최재형, 김학만과 더불어 총재로 선출되었다. 권업회는 ‘실업장려’를 표방하고 한인의 자치적 업무를 담당하였으나 이면적으로는 민족운동을 추진하였다. 권업회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관인 의사부(議事部)의 의장은 이상설, 부의장은 이종호, 교육부장에는 정재관 등 기호(畿湖), 함북(咸北), 서도(西道)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망라되어 단합을 과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가 일본과 같은 연합국 진영에 속하게 되면서 러시아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이 악화되었다. 활동을 다시 재개한 것은 1919년 3 · 1운동 이후부터였다. 1919년 3 · 1운동 이후 만주 지린(吉林)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39인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일제의 첩보자료에는 1919년 4월 말경 이동휘(李東輝), 진학신(秦學新)과 더불어 훈춘현(琿春縣) 탑도구(塔道溝)에 들어와 대한국민의회 훈춘지부를 설치하였다. 4월 24일부터 3일 동안 회의를 열고 국내진공작전 등 독립운동 실행방침을 결정했다고 한다. 국내의 서울에서 ‘국민대회’ 추진세력에 의해서 「국민대회취지서」와 함께 배포된 「선포문」에 임시정부의 평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0년대에 전개된 다양한 독립운동전선에서 여러 단체의 활동 가운데에 꾸준하게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연로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독립운동 전선의 선두에서보다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한 원로로서 해당 단체의 권위와 위상을 높여 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1920년대 활동은 여러 무장단체들을 비롯하여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추대되곤 했다.
우선 북간도와 연해주 추풍일대를 무대로 활동했던 의군부(義軍府)를 들 수 있다. 의군단(義軍團)이라고도 불리던 의군부의 정식명칭은 ‘대한의군부’였다. 그 기원은 일찍이 동의회를 중심으로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던 한말 연해주 의병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군부는 3 · 1운동 이후 과거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것으로 본부는 노령에 두고 허재욱(許在旭, 허근, 許根)이 전위대 격인 제1선대대(前衛隊)를 이끌고 북간도로 나가 활동하였다. 총재로서 의군부를 대표하였다. 1920년 8월 당시 의군부의 군사조직은 전위대와 산포대(山砲隊)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북간도 왕칭현(汪靑縣) 춘명향(春明鄕) 대감자(大坎子)에 근거들 두었던 무장단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단원의 대다수는 공교회(孔敎會) 교도였다. 그런데 일제의 첩보자료에 단장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의 또 다른 첩보자료에는 광복단 단장이 이범윤이고 본부를 러시아령에 두고 있으나, 이름뿐이었고 북간도지역에서는 대변(代辨) 전성륜이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끌고 있다고 하였다.
192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하마탕(哈蟆塘) 상촌(上村)에서 개최된 독립군단체 대표들의 단체통일을 위한 회의에는 대한국민회장 구춘선, 대한독립군의용대장 홍범도 등 4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광복단 단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0년 가을 일본군의 간도침공 이후 북간도를 떠나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러시아령으로 들어가기전 중 · 러 국경지대인 왕칭현 나자구(羅子溝)에 집결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 공의단(公義團), 광복단(光復團), 대한의군부, (나자구)의사부 등의 독립군단들이 연합하여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를 조직하였는데, 이연합조직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실질적인 지휘권을 가진 직책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명의에 불과하였다.
북간도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던 허근이 이끄는 의군부의 주력부대는 이만(Iman)을 거쳐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 Alekseyevsk)로 들어갔다. 나머지 군인들은 추풍 다부허(多富河)로 집결하여 이범윤을 중심으로 최종, 이윤, 연병무 등이 1개 중대(2개 소대)를 편성하였는데 병력은 약 80명이었다.
복벽주의(復辟主義)적 이념을 가진 의군부는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솔밭관 한족공산당 군대와 이념상의 차이로 갈등 · 대립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1921년 11월 의군부 군인들이 솔밭관 한족공산당 선전부장 유진구(柳震九)의 기숙사를 습격하여 구타 · 결박하여 다부허로 끌고 가 위협 국문(鞠問)한 사실이다.
1921년 12월 중순 추풍(秋風) 육성촌(六城村) 주둔 일본군이 자피거우한족공산당 지부를 공격하게 되자 식량공급의 곤란으로 12월 23일 연락원 15명만을 남긴 채 170명을 이끌고 중국령 미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솔밭관 한족공산당의 압박을 받은 결과였다. 마침내 의군부는 1922년 봄에 이르러 해산되었다.
1925년 3월 10일 지린성(吉林省) 닝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가 창립되자 참의원장으로 취임하였고, 신민부에서 설립한 성동무관학교의 고문이 되었다. 1937년경 양아들 억종(億鍾)이 북만주에서 비밀리에 국내로 모셔왔고 1940년 10월 20일 노환으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