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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705M) 산행기
서울 건축사 등산동호회 정기 산행에 참석하기 위해 교대역으로 나갔다. 4월은 겨울의 앙상한 풍경에서 깨어나 신록의 생명력을 대 할 수 있는 특별한 달이다. 또 4월은 토머스 엘리어트(1888~1965)의 시가 먼 기억으로 스쳐가는 때이기도 하다.
황무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슈타른버거호 너머로 와서
소나기를 뿌리고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덴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예기했다...
7시 서울을 촐발해 남해로 향했다. 달리는 차 내에서 정병협 회장의 인사말을 들은 다음 나눠준 김밥을 먹고 쉬며 갔다. 8시 50분 탄천 휴게소에 들러 전주 남원간 고속도로를 지나 하동 여수로 나가 11시 30분 남해대교에 들어섰다. 그 우측이 임진왜란 때 노령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긴 전쟁의 막을 내리는 전투에서 승리하며 순국한 장소이다.
노량해전은 순천 왜성에 고립되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출전한 왜적을 무찌르는 전투였다. 그 이전, 명나라 유정의 군대와 권율장군의 연합군이 감행한 사로병진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1598년 8월 18일 한양에서 출발한 사로병은 8월말 전주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도원수 권율, 우의정 이덕형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합류하였다. 그 곳에서 사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있어서는 항명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한편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의 수군은 1598년 9월 15일 고금도에서 출항하여 9월 20일 순천 왜교성 앞바다의 유도에 도착하여 합세하였다. 그러나 유정의 적장(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유인 전술 등이 실패로 돌아가고 유정의 소극적인 공격으로 결국 왜성 함락에 실패하고 말았다. 수군은 적을 몰아쳤으나 유정은 소극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의 퇴각 정보를 접한 명으로선 더 이상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여긴 듯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로를 열어달라고 진린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리고 진린의 묵인하에 한 척의 연락선이 빠져나가 교신하였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에 연락하여 조·명 연합수군을 협동공격하면서 퇴각하려는 것을 알아채고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과연 11월 18일 500여척의 왜적함대가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조명 연합군의 함대는 200여척으로 적선이 배가 넘었다.
마침내 노량 앞바다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출전하면서 조선을 도륙한 왜군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고 독려했다. 스스로 선봉에 서서 퇴로를 막고 섬멸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18일 하루 종일 전투가 치러지고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200여 척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면서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왼쪽 가슴에 유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한창 다급하니 부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前方急 愼勿言我死)”유언하고 숨을 거뒀다.
남해 바다는 자연 경관이 수려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날의 바다는 생사를 다투는 전쟁의 공간이었다. 함성, 포격소리, 총소리, 활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 그리고 피 땀이 뒤엉키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유탄이 장군을 절명케 했다. 마지막 전투에서의 절명, 그것은 너무도 극적인 운명이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고뇌의 순간들을 떠올리니 안타까움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7년간의 긴 전쟁 기간 동안 겪었던 갖가지 인간적 고뇌를 이겨내고 분골쇄신하여 나라를 지킨 거룩한 생애였다.
전쟁이 끝났다.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났다. 전장에 임해 분골쇄신, 기력을 다 해 싸웠다. 인간적인 고통을 감내하면서 충의로 싸워 이겼다. 이제 편히 쉬어야 했다.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쟁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편히 쉴 수 있었다. 모든 고투를 견디고 이제 더 이상 생과 사가 교차하는 전선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제 한숨 돌리고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고달픔을 달래고 함께 위로하고 공을 치하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모두에게 깊은 슬픔을 남기고 떠났다. 공이 크기에 슬픔도 크고, 역사의 존망의 순간을 넘겼기에 긴 역사의 시간을 넘어 추모 하게 되었다. 나는 몇 해 전 첨망대에서 관음포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비장의 마음을 생각했었다.
남해 시내를 거쳐 금산으로 가는 도중 작년에 설계한 지은 남해 생태체험관 사진을 찍은 후 택시를 타고 금산 주차장에 도착해 일행을 뒤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택시 기사가 다른 곳으로 가서 돌아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보리암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오래 전 건축문화대상을 받은 해송원의 비평을 위해 현지답사를 왔다가 이튿날 아침 일출을 보려고 새벽에 보리암에 올랐었다. 그 때 정상부의 바위산과 여기저기 우뚝 선 기암괴석이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금산(金山)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 아름다운 해안과 어우러진 남해 다도해 풍경과 마치 불교에 등장하는 극락처럼 아름다운 별천지 모습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시원한 바다 언저리에 둥근 호안을 이루고 해안선과 먼 수평선을 배경으로 여기 저기 흩어져 떠 있는 섬들이 마치 꼬막조개들처럼 점점이 놓여있다.
12시 35분 금산 탐방 지원센터를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했다. 그 사이 일행과 거리가 떨어졌을 것 같았다. 길옆 여기저기에 핀 꽃과 막 피어난 신록이 어우러져 화사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뿐만 아니라 공기에서도 봄 내음이 느껴졌다.
한동안 부지런히 올랐으나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산행은 원점 회귀 산행이고 길이 단조로워서 엇갈릴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한참 오르다 보니 좌측으로 빼어난 풍광을 보이는 사성암이 우뚝 서 있고 앞에는 동굴이 보였다. 보리암과 정상을 오르는 길이 그 동굴 안을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동굴은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 소리가 난다 하여 음성굴로 불리고 있었다.
잠시 후 보리암에 도착했다. 석가탄신일이 가까워지는 때여서인지 경내에는 등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구름이 끼고 현란한 등 때문인지 전에 느꼈던 인상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여기저기 경내와 관음보살상 등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기암괴석 사이에 끼어 맞추듯 건물들이 여기저기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다쪽은 평평하게 터를 닦으며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아스라이 걸려 보였다. 이 곳 남해 보리암(菩提庵)은 동해안의 낙산사, 강화도의 보문사(普門寺)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 도량(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로 꼽힌다. 관음신앙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타력(他力)적인 불교신앙의 한 형태이다. 인도에서 관세음보살 신앙이 형성된 시기는 1세기말 무렵이다. 현세 이익을 주는 보살로서 영향력이 대단하여 인도는 물론 중국과 한국ㆍ일본ㆍ티베트에서 널리 신봉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관세음보살의 거주지는 곳곳에 등장한다. 인도에서는 남쪽 끝의 마라야산 동쪽 구릉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락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다. 중국의 승려인 현장도 인도에 다녀와서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이 산이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은 범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인데, 이곳의 입지가 그 보타낙가산과 비슷하여 관음보살이 상주처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관음도량을 상징하여 절 앞쪽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커다란 관음보살 입상이 서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보살의 성지로 꼽히는 곳들이 여럿 있다. 강원도 오대산은 문수보살, 구화산은 지장보살, 아미산은 보현보살, 보타산은 관음보살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은 본신인 성관음(聖觀音)과 세상에 두루 나타나는 변화신인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 여섯이 있다. 중국에서는 255년 〈법화삼매경 法華三昧經〉이 최초로 한역된 이후 관세음보살과 관계된 많은 불교경전이 번역되었다. 이들 경전들이 세간에 널리 유포됨과 함께 관음신앙이 널리 퍼져갔다. 그중에서 관음신앙의 근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이다. 거기서는 물·불의 재난이나 귀신·도적 등의 육체적인 어려움에서부터 탐·진·치 삼독(三毒)의 의지적 어려움 그리고 생남생녀(生男生女) 등 인간이 부딪히는 온갖 현실적인 고뇌에서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칭명(稱名)하면 관음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해탈을 얻도록 한다는 현세적 신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음신앙이 유행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로서 중생과 가장 가까운 신앙형태로 남아 있다. 그래서 관음기도도량마다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곳은 바다에 면해 인도의 관음성지인 보타낙가산과 비슷한 장소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내려다보이는 남해 다도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 보이고 여기 저기 솟은 기암괴석의 바위들도 신앙 성지로서의 특별한 장소성을 북돋아 준다. 이곳은 관음도량답게 중심 불전에 관음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마당에서 바다를 향해 앉은 건물은 기도처로 쓰이고 있다.
거기서 좌측으로 내려가는 게단 입구에 ‘璿恩殿(태조 이성계 기도하신 곳)’ 이라는 표지가 보여 그 곳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 다시 올라 건물 앞에 당도했다. 옆 안내판에 “조선 태조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중 산신의 영험에 의 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전설이 긋든 곳이다. 1903년 지역민의 상소에 따라 고종황제의 명을 받은 의정부 찬정 윤정구가 비문을 짓고 세웠다. 태조가 이곳에서 산신의 호응을 받아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던 데 대한 보은으로 보광산을 금산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으며 1859년에 내려진 태조의 전폐를 사찰 등에 모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 쓰여 있었다.
그곳을 나와 다시 보리암 마당을 지나 금산 정상에 올랐다. 보리암에서 200m 거리여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상에는 남해 금산 봉수대가 서 있었다.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 되었다.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1번 올리지만 적이 출현하면 2번, 적이 접근하면 3번, 바다에서 접전이 일어나면 4번,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5번의 연기 또는 불길을 올렸다. 이 곳 봉수대는 고려 의종(1147~1170)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는데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가운데 하나로 동래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제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 진주 등을 거쳐 한양으로 전달되었다.
그 곳 정상은 남해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 보였다. 그 곳에 오른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번갈아 사진을 찍었다. 외국인들도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보리암에서 정상으로 올라올 때 일행이 내려가고 있어서 서둘러 돌아섰다. 원점 회귀 산행이고 거리가 그리 멀리 느껴지지 않아서 힘들이지 않고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리암과 아까 지났던 동굴을 지나 내려오다 보니 커다란 배낭을 맨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상만 올라갔다 내려가는데 는 그리 많은 짐이 필요치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큰 배낭을 진 것이 궁금해 물어보니 행글라이더를 타기 위해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정상에 올라가서 메고 간 행글라이더에 몸을 실고 아래로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창공을 나는 짜릿한 맛에 그 큰 짐을 메고 산을 오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고 있었다.
경사가 비교적 심하고 군데군데 너덜 바위가 박힌 길이라 내려갈 때 특히 무릎에 부담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어서 조심스레 디디며 올라온 입구로 내려갔다. 올라올 때는 구름이 끼었었는데 점차 맑아져 길가 꽃잎에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그처럼 햇살이 비출 때 자연 사물의 생명력도 생동감 있게 느껴진다.
몇 분이 늦게 도착해 기다리다 미리 예약한 삼천포의 장어탕 식당으로 향했다. 바삐 오가느라 미처 점심을 먹지 못해 시장기가 돌았다. 3km 정도 이동해 5시경 삼천포 읍내 식당에 들어서니 주문한 식사가 테이블마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리에 낮아 보글보글 끓는 장어탕을 메뉴로 뒤풀이 식사를 했다. 일행 모두 음식 맛이 좋다며 맛있게 먹었다. 정병협회장과 홍문유 신협 회장, 연배가 가장 높은 윤원석 고문 등이 번갈아가며 건배 제의를 할 때마다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귀경길에 올랐다. 일행은 거리가 멀어 너무 늦게 될까봐 염려들을 했는데 다행히 10시 조금 넘어 서울에 도착하여 편안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20140412)
첫댓글 같이해서 즐거웠고요, 수고하셨습니다.
현장감 넘치는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사 주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