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5-27)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아니면, 힘드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인 우리들이 염려하며, 근심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근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언제나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달픈 삶을 살기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29: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29:11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안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기도하며 사셨습니까?
빌립보서 4: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할 시간에,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염려하고 근심할 시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시간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하고, 붙든 채, 몸부림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까?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겠습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도움이 간절하게 요구될 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도란 나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시편 37:5절을 보면,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했습니다.
시편 55:22절을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잠언 16:3절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7절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12:19절을 보면,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ㅣ28)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와 수고의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면, 우리는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즉, 제사장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어떤 축복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지켜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복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야베스는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
야베스는 하나님께 자기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합니다. 넓은 땅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근심이 없게 해 달라”, “어려운 일 당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넓은 땅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땅 때문에, 염려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넓은 땅이 있든 없든, 항상 평안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 대적들이 그를 쫓아오는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도,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궁궐에 있을 때에 “평안하다”라고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군사들이 밤낮으로, 그를 지켜 주고 있을 때, “평안하다”라고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 “평안하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어딘지 모를 들판에서 잠을 청할 때, “평안하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 “평안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누가 못하겠습니까? 재산, 건강 등 모든 조건들을 다 구비했다고 해도, 평안이 없다고 한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도 평안을 원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이 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평안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내 곁에 있기에 평안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안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평안해집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를 둘러싼 환경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는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일을 만나든지,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손님에게 아이스크림을 줄 듯 말 듯 장난치면서 건네는 영상들이 있습니다. 터키식 아이스크림을 파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배달앱을 통해 치킨을 주문을 했는데, 배달하는 분이 주문한 사람에게, 내려오라고 한 다음, 치킨을 줄 듯 말 듯, “안 줘, 안 줘” 하면서, 밀당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글 쓴 사람이 “이게 무슨 경우인지 진짜 밥 먹기 전에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이 이와 같이, 줄 듯 말 듯, 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배달하는 분은 치킨이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인양, 줄 듯 말 듯 했는데, 우리 주님은 전혀 다르십니다. 평안은 주님의 것입니다. 평안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거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평안을 받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야 9:6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에 오실 구원자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한 밤중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2:1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평화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살다 보면,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그럴지라도,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께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니, 제자들은 얼마나 염려가 되었겠습니까? 불안해졌습니다. 근심이 한 가득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둘,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문을 꽁꽁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큰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곤하게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외쳤습니다. 제자들은 큰 풍랑 때문에, 다 죽게 되었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사납던 갈릴리 호수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평온해졌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삶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폭풍과 같은 다급한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평안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5-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는 자가 아닙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영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을 계속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을 주신 이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신 이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안에 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119:165절을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을 즐기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하면서, 살아갑니다. 온갖 것들을 즐기지만,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즐기면 안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즐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즐기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그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즐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결핍으로 인한 슬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와 상황을 보면,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문제 속에 있는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큰 문제에 빠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생명줄은 바로 기도입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도는 수많은 축복의 뿌리요, 근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를 만나,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그런 문제를 만났을 때, “주여,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염려와 두려움을 제거하여 주시고, 참된 평안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들을 손수 제거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왜 이렇게 어지럽고 시끄럽습니까?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지금 우리는 참 평안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은혜 내려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당하게 되더라도, 주님의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에게 평안의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 한마음교회 안에 평안만이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다툼과 분열이 아니라, 일치와 화목이 있게 하셔서, 온 누리에, 평안이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