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06주일설교 기도할 수 있는데(열왕기14:1-31)
본문: 열왕기상14:1-31
제목: 기도할 수 있는데
찬양집 171장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왜 이런 찬양을 만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기 보다는 걱정을 먼저하며 기도하면서도 염려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 보다는 실망을 먼저하며 기도하면서 염려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라면 문제가 있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문제를 말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어리석음 자며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합니까? 기도하면서 감사를 합니까? 아니면 염려를 하십니까? 여러분은 해결하기 어려운 무슨 일이 생기면 기도합니까? 아니면 먼저 실망합니까?
1.아히야를 찾은 여로보암
오늘 본문은 아주 어려운 일이 생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북 왕국의 왕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왕이니 얼마나 많은 의사를 불렀으며 약을 먹였겠습니까?
하지만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옛날에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자신에게 예언을 해 주었던 아히야를 찾았습니다. 그는 아히야가 예언을 한 대로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제까지 왕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아히야의 말이라면 믿음이 갔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었기에 아히야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아히야를 찾기 위해 아내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보내지 않고 아내를 변장을 시켜서 이스라엘의 왕비인 것을 숨겼습니다. 여로보암이 원하는 것은 아이에 대한 궁금함이었습니다. 아이에 대해서 소망을 품어야 할지 아니면 포기를 해야 할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도 예의는 갖추었습니다. 선지자를 찾아가는 여로보암의 부인 왕비는 빈손으로 가지 않고 떡 열 개와 과자 그리고 꿀 한 병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런 상식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의 집을 방문하면서 빈손으로 간다거나 어른을 방문하면서 빈손으로 간다거나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형편이 안되면 할 수 있지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그것은 몰상식한 자가 됩니다.
그렇게 왕비가 아히야를 찾았을 때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웃기는 말로 사람들이 성형을 하도 많이 해서 천국에서 본인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뼈속과 우리의 깊은 내부까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을 하고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발 소리만 듣고도 그가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은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전한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흉한 일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아히야는 그 남편 여로보암에게 전할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백성 중에서 들어 하나님의 백성의 주권자로 삼았습니다.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여로보암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다윗과 같이 전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같이 견고한 집을 세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이 그렇게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이전 사람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다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속한 사내는 종이나 자유자 누구나 사는 집은 다 쓸어 버려 거름더미로 만들고,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으면 개가 먹고, 들에서 죽으면 새들이 먹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표로 여로보암의 아이가 여로보암의 아내가 성읍에 들어갈 때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죽음을 온 이스라엘이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집은 끊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좋은 땅을 주었지만 아세라 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기 때문에 강 너머 곧 앗수르로 흩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자신이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언을 듣고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 문지방을 넘을 때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장사하고 슬퍼하니 아히야 선지자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2,여로보암의 잘못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맞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양면성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어느 한 가지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죄악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냥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습니다.
먼저 유다에서 온 한 선지자를 통해서 그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때가 회개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경고는 돌아서라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그를 세울 때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그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또한 백성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를 왜곡시켜 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예조를 보여 주시면서 그렇게 살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선지자가 사자에게 물려 죽는 모습을 보여 주어 하나님의 경고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전혀 변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게 물어야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는지 하나님께 묻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겨우 한다는 행동이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여 선지자를 찾아 보는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점쟁이입니까? 아들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로보암이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고 그리고 선지자가 죽기도 하고 아들이 병에 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심판 앞에서 전혀 대비를 하지 않습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냥 오는 심판을 그대로 당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죽는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울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면 아들도 살 수도 있었고, 여로보암의 집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해 놓고 다 심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고 해놓고 그들을 다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문제가 생겨도 어려움이 생겨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어리석은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우산을 받고 하다못해 손으로라도 가리는데 말입니다. 조금만 아파도 약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냥 당하려고 합니다. 회개하면 되는데 돌아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는 여로보암은 오는 심판을 그대로 다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그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여로보암처럼 어리석은 인생은 없습니다.
3,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모습은 여로보암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여로보암의 모습과 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어기며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상을 만들며 살지는 않습니까? 여로보암처럼 자신을 위하여 말씀을 왜곡시켜 살지는 않습니까? 나만 잘못된 길로 갈 뿐 아니라 나의 영향력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악한 길로 가게 만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강단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또한 다른 성도를 통해서 주시는 경고에 대해서 전혀 듣지 않고 무시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듣지 않고 엉뚱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단을 통해서 주시는 경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주시는 경고가 무엇입니까? 그 경고를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그 경고를 듣고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들었어도 무시함으로 얻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복을 받은 모습입니까? 아니면 여로보암처럼 그런 모습입니까?
우리가 귀를 연다면 하나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복 받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복 주려고 우리는 불렀습니다. 하늘의 놀라운 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우리의 일생이 여로보암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 집안의 사내들은 다 죽었더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나가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된 길을 주시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저주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바로 살길 주시려고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이 있고 구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복 주시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나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셔서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