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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1. 대중문화의 전성시대
현대인의 모든 일상은 대중문화와의 마주침을 통해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이나 TV를 통해 소식을 접하는 어른들이나 아침식사를 마치자 말자 아침드라마에 빠져드는 ‘아줌마’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일반 가정의 모습이다. 학교에 등교할 때 MP3폰을 끼고 다운로드 받은 유명가수의 노래를 듣는 아이들에서부터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다움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 기사거리나 소식을 접하는 직장인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유명가수의 공연을 보기위해 몰려드는 광적인 팬들이나 주말저녁에 연인과 함께 인기 있는 영화를 보러가는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모든 것이 대중문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일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생계를 위한 노동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 독립된 여가시간이며 나머지는 잠자는 시간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노동과 여가로 일상을 구분할 수 있는데, 학생들의 경우 이는 학습시간과 노는 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간들 중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시간은 여가시간이다. 말하자면 노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노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는 시간, 즉 여가 시간을 장악한 주체가 바로 대중문화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여가활용 방법은 저녁에 퇴근하여 TV를 보며 소일하는 것이다. 거실 중앙 공간을 차지한 TV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위치에서 대량생산되는 문화적 생산물들을 안방으로 전달하고 있다. 가족들은 TV를 매개로 한 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가정의 실질적인 주체는 TV인 것이다. 물론 현대는 TV만의 독주시대는 지나갔다. 인터넷이나 DMB, MP3 등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여 TV가 갖고 있던 매체로서의 권위를 상당부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매체이든지 간에 매체 없는 생활을 상상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대중문화의 바운더리를 통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영향력 증가는 그것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다. 문화 생산이 대량으로 이뤄짐으로써 다양한 계층에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옹호론이 존재하는가 하면, 동일한 문화 상품이 다수의 대중에게 획일적으로 전달됨으로써 대중의 생각이나 행위가 표준화되고 주체적 삶은 파괴된다고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또한 대중문화가 대중들로 하여금 유희를 즐기고 문화적 생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생산적인 장을 제공해 준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문화 생산과 소비를 분절시키고 대중을 수동적인 문화소비자로 전락시킨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대중문화는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기능도 담당하지만, 대중의 능동적 참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저항의 공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답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대중문화는 그 만큼 다층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목적은 대중문화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성격을 정리함으로써,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잠정적인 입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이 이윤극대화를 위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문화라는 관점을 취하겠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대중문화의 생산체제와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다.
2.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대중문화를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든지 간에, 대중문화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대중적(popular)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대중적이라는 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쓰고 있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 하도록 만든 것’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것’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가 좋아하거나 누리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대중문화라는 말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좋아하는 문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몇몇의 엘리트만이 알고 있거나 특정한 가치를 지닌 소수 집단의 하위문화를 대중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중적인 인기’나 ‘대중적인 유행’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대중문화가 다수의 문화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다수의 문화라고 해서 그것을 대중문화라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농민들의 의복양식은 삼베옷이나 마를 짜서 입었다. 이런 의복은 분명 당시로서는 다수가 입고 선호하는 대중적인 의복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농민들이 입던 옷을 대중문화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반면에 오늘날 누구나 입고 있는 청바지는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여러 사람들이 즐겨 입고, 값도 비교적 싸고,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의복양식이다. 조선시대의 삼배 옷과 오늘날의 청바지를 구별해주는 가장 큰 특징은 대량생산이다. 청바지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다. 청바지에도 여러 브랜드가 있지만 그것은 모두 스타일이 대동소이한 대량생산의 결과물이다.
이렇듯 대중문화는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문화이다. 공장에서 일반 상품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듯이, 오늘날 문화도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된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어떤 배우의 연극이나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직접 공연장소를 찾아야 했다. 대량으로 복제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음악을 듣기 위해 굳이 연주회나 공연에 갈 필요가 없다. 가수나 연주자의 음악을 녹음한 CD나 DVD를 사면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단 한번 촬영하고 난 후 여러 벌의 필름을 복제하여, 전국적으로 아니 전세계적으로 유통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세계인들이 보는 똑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문화산업은 유사한 문화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저가로 시장에 공급하며, 사람들은 부담 없이 이를 소비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다수가 좋아하고 누리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문화상품을 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복제기술이 놀랍도록 발전했기 때문이다. 복제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문화상품의 생산 단가가 하락하면서, 대중들이 쉽게 문화 상품을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초의 복제기술은 인쇄술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대중적인 문화상품은 대중소설이었다. 산업화가 가장 먼저 이뤄진 영국은 대중문화도 가장 먼저 발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교양 있는 대중들은 소설을 읽는 것을 기본적인 소양으로 여겼다. 소설이 대중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세기 중반 사진술의 발전은 대중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에 사진이 접목되면서, 신문의 사실성을 한층 높였다. 사진은 필름만 있으면 무한정으로 복제될 수 있었기 때문에 문화의 대량적 보급을 위한 첨단적인 매체가 된 것이다. 사진 기술의 발전은 곧바로 영화의 창작으로 이어졌다. 영화는, 사진술과 소리를 재현하는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실제 행위를 스크린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사실성과 감각성을 극대화시켰다. 20세기에 이르러 영화는 대량복제되어 소비되는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는다. 영화는 대중문화의 혁명을 이끈 것이다.
복제기술의 발달만으로 대중문화의 대량생산과 대량공급은 불가능하다. 대량으로 복제된 문화상품이 보급되기 위해서는 대중매체가 존재해야 한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던 CD, DVD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보급된 대중매체이다. 가장 대표적인 대중매체는 공중파의 보급과 이를 시청할 수 있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이다. 특히 텔레비전의 보급은 대중문화의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이 가정에 앉아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는 문화적 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중들이 일상에서 문화소비를 가능하게 한 대표적인 산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드라마나 코메디, 가요, 영화 등 온갖 종류의 문화적 생산물을 아무런 비용 없이 소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여가생활의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 보급된 인터넷은 텔레비전에 버금가는 매체혁명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상품이 디지털코드로 전환되면서, 대중들은 인터넷을 통해 영화, 음악, 뉴스 등 거의 모든 문화상품을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이든, 인터넷이든 대중매체는 대중문화를 보급하는 대표적인 산물인 것이다.
이렇듯 대중문화란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생산되고, 대중매체를 통해 대량으로 보급되며, 대중에 의해 대량으로 소비되는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는 문화산업이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측면에서 전근대 사회에서의 민속문화와 비교된다. 전근대사회의 민속문화 또한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누리는 문화이지만, 전근대사회의 문화는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창작자 또한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 집단적 창작물이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대중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들이 동시에 문화적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었다. 또한 문화적 전승의 방식이 매체를 통한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경험에서 경험으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전되는 문화적 요소는 반복과 창작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문화의 소비자들이 곧 창작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현대의 대중문화는 전문적인 학습을 거친 문화적 창작자들이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하는 문화라 할 수 있다. 대중들은 문화의 소비의 주체일 뿐 생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라고 볼 수는 없다. 대중문화 속에서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또한 대중문화는 대량으로 복제되고 대량으로 소비되는 측면에서 고급문화인 예술과도 구별된다. 예술은 창작자의 창조성과 예술성을 중시하며, 작품의 진품성을 따져 그 가치를 평가한다. 예술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비교적 엄격하다는 말이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도 남다른 감각이 필요하다. 예술가가 그 나름의 창의성을 통해 생산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심미안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들이 대중화되면서 다들 작품을 보는 눈이 높아졌지만 현대 예술은 여전히 그 난해함으로 악명이 높다. 뿐만 아니라 예술적 창작물들은 단지 기교적 우수성만이 아니라 무엇인 아름다움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진지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심층적인 문제와 비극을 다루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그렇지 않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에게 대량으로 소비되기 위해 누구나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다보니 대중의 일상적인 정서에 부응하여 만들어지며, 대중문화를 감상하기 위한 특별한 심미적 훈련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미적 취향에 접목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쉽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문화라 할 수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진지함보다는 재미와 희극을 추구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일반적 속성이다. 그렇다고 대중문화를 저질문화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누린다고 해서 꼭 저질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술과 비교되는 가벼운 ‘문화’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3. 대중문화의 생산체제 : 문화산업과 스타시스템
대중문화의 생산주체는 문화산업이다. 문화산업은 문화적 생산물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산업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미디어그룹을 비롯하여, 패션, 영화, 음반, 공연, TV드라마, 라디오방송 등 매우 다양하다. 문화산업의 규모 또한 엄청나다. 문화소비의 형태가 TV시청 단계를 넘어서 다양화되면서, 문화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음반, 게임시장의 성장규모는 가히 폭발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문화산업은 컨텐츠를 개발하는 과정에 위험률이 매우 높은 특징을 지니지만, 제대로 완성되기만 하면 복제비용(생산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엄청난 이윤을 남긴다. 초기 산업사회에서 문화산업은 여가를 위한 단지 보조적인 산업에 불과했다면, 탈산업화된 오늘날 문화산업은 미래의 성장산업으로 가장 주목을 받는 분야가 되었다. 문화산업이 단지 보조적인 주변적인 위치에서 핵심적인 사업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산업은, 그것이 산업인 이상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윤극대화를 위해서는 대중들이 대량으로 소비해야 한다.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보아야만 이윤이 되고, 음반은 음원이 많이 방송되거나 CD판매량이 높아야 돈이 된다. TV와 같은 공중파 매체의 경우, 시청률이 높아야 광고수익이 올라간다. 산업사회의 생산물처럼 문화생산물도 경쟁력을 갖추고 대중의 선호도가 높아야 ‘산업적 생산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윤을 낼 수 없는 문화적 생산물은 취급받지 못하거나 매니아 문화나 하위문화의 전유물로서 특정한 인구집단에서만 소통된다. 반면 아무리 속된 것일지라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호되는 것이 문화산업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문화상품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유행을 추종하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들이 좋아하는 문화상품을 생산해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에서는 독창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사 상품이 더 잘 팔린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재의 음반시장이 발라드가 열풍이면 발라드 풍의 노래를 생산해내어야 하며, 반대로 댄스와 랩이 압도하고 있으면, 댄스나 랩 풍의 노래를 생산해야 한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사를 다루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으면 각 방송사들은 앞 다투어 고구려사의 내용을 이리저리 요리하여 방영한다. 드라마 [주몽]이 인기를 끌자 다른 방송국에서는 대조영을, 또 다른 방송국에서는 연개소문을 방영한다. 영화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조폭 영화가 인기를 끌면 다양한 형태의 조폭영화 베끼기가 진행된다. 한 때 [친구]라는 조폭영화가 인기를 끌자, 극장가에서는 [달마야 놀자], [약속], [조폭마누라], [가문의 영광]등 다양한 장르의 조폭영화들이 만들어 졌다. 말 그대로 조폭이 한 때 영화관을 장악하는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문화산업에서 생산되는 문화상품들은 그 자체로 복제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사 복제물’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문화상품은 디지털 복제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복제의 수준은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한 작품을 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가 경쟁 작가들을 복제하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다. 예컨대 드라마 ‘주몽’과 ‘대조영’은 분명 다른 작가가 쓰고, 다른 주인공이 있으며, 시대적 배경도 다르다. 그러나 사실 플롯의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둘 다 ‘고구려는 우리역사’라는 대중적 여론을 반영한 작품이다. 여기서 설정된 주적은 한족이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인 설정은 한족이 우리 민족을 핍박하려들자 이를 구원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과 배경이 약간 다를 뿐 근본적으로 비슷한 주제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대동소이함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음반시장도 마찬가지다. 댄스가 유행하면 비슷한 류의 댄스곡이 대량으로 공급되고 발라드가 인기면 가사와 멜로디 몇 구절 다른 발라드가 너도 나도 부르는 것이 음반산업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문화상품이 대부분 ‘유사 복제물’인 이유는 대중의 취향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대중의 취향이 무엇인가를 단박에 보여주는 것은 현재 무엇이 인기를 끌고 있는가이다. 대중적으로 대량으로 소비되는 문화가 현재의 대중의 취향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생산자들이 아무리 독착성과 실험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자신의 실험정신을 함부로 펼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했을 경우 대중들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취향과 상관없이 자신의 미적 취향을 앞세웠다가는 쫄딱 망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특정한 조류의 문화생산물이 인기를 끌면, 그것의 형식과 내용을 살짝 바꿔 자신의 문화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중들의 취향에 적절히 부응함로써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이다. 이렇게 하면 위험부담이 훨씬 줄어든다.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아니라 이윤가능성이 최고의 잣대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상품이 동일화되고 표준화되며 창조성이 결여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취향을 추종하는 ‘유사 복제물’이라고 해서 모두 인기를 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발라드가 동시에 대량으로 공급되어도 소비자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가수의 작품에는 열광하는 반면 다른 가수의 작품은 인터넷이나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는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고구려사를 다룬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주몽]과 같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유사 복제물’ 내에서도 우열이 있으며, 소비자들의 선호도의 차이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중의 취향이 표준화되고 유사 상품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사 상품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유사 복제물’ 내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공존하는 것이다. 문화산업은 그만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영화든 음반이든 생산된 문화상품이 팔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문화산업의 불확실성을 약화시키고 이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스타시스템이다. 스타시스템이란 대중들이 열광하는 스타를 문화상품의 판매에 연결시킴으로써, 문화상품이 내포한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이다. 특정한 스타가 출현하거나 발매하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흥행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대중들 또한 새로 판매되는 문화상품의 질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이 경우 대중들은 스타가 등장하는 작품이나 스타가 발매한 음반을 구매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줄이려 한다. 그 스타가 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질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들이 작품의 질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적 스타들이 출현하는 작품들은 그 스타의 면목에 맞게 어느 정도의 질을 담보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송광호]가 출현하는 영화는 다른 연기자의 그것보다 신뢰할만하며 [비]가 만들어 내는 공연무대는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그들이 스타로 되는 과정에서 검증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타야말로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흥행보증 수표인 것이다.
대중들이 소비하는 스타이미지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조작된 것이다. 스타가 제작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스타는 우선 외모에 있어서 완벽함을 지녀야 한다. 신체의 매력은 스타가 되기 위한 첫째 관문이다. 스타가 출현하는 극중인물은 스타의 이미지를 생성함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중들은 드라마에 출현한 주인공과 그 역을 담당한 연기자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이영애]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상관없이, 대중들은 ‘대장금’을 [이영애]라는 배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영애]를 따뜻하고 희생적이면서도 지혜롭고 정의로운 여성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생활도 철저히 관리된다. 스타의 공개된 사생활은 말 그대로 조작된 것이며, 대중들이 스타에 대해 갖는 이미지를 사생활의 공개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연결시켜 관리한다. 뿐만 아니라 스타를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만든다. 대중과의 친밀도가 생명인 스타의 세계에서 미디어와의 접촉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스타에 대한 대중의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팬클럽의 유지는 필수적이다. 팬클럽은 스타의 ‘스타성’을 확대재생산 하기 위해 동원된 개미부대라고 할 수 있다.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탁월한 스타를 보유한다는 것은 이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타의 스타성은 말 그대로 대중적 영향력이 존재할 때 한한다. 스타의 스타성이 사라지거나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할 경우에 스타는 말 그대로 소모품에 불과하다. 이윤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윤가능성이 없어지면 그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급속하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산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취향은 변동이 매우 심하고, 그에 준하여 스타에 대한 열광도 천차만별이다. 어느 날 특정한 스타에 열광하다가도 그 다음 달에는 잊어버리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스타성이 사라진 ‘스타’는 기획사로부터 버려지고, 미디어에서 사라지며, 그의 상품가치는 폭락한다. 그만큼 대중문화 시장은 변동이 심하고, 안정성이 취약한 곳이다. 스타가 존재하더라도 대중문화 시장의 불안정성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중문화 시장의 불안정이 높으면 높을수록 스타의 필요성이 증대한다는 사실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4.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①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교과서에서 이데올로기란 이념, 세계관 등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렇게만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면, 이데올로기의 실천적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조금 어렵더라도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데올로기란 개인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주는 관념의 체계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세상을 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이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속에 나는 무엇을 하길 바라는가를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총체를 말한다. 세계란 어떤 곳이고, 나는 무엇이며,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각의 틀이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살아간다. 이데올로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관이라고도 하며, 자신의 가치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이념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규정하는 생각의 틀이지만, 그것은 내 개인이 고안한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그의 이데올로기지만, 그런 생각은 각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각자의 세계관, 이념을 모두 개인들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라면 세상에는 수 만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이다. 개인들의 이데올로기는 모두 상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데올로기란 개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특정한 사회가 구성되는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적 관계에 조응하는 권력의 메카니즘에 따라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현존하는 사회를 자본주의체제라고 생각해보자. 자본주의하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는 부르주아와 임금노동자이다. 그 외에 중간계급이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내에서 권력의 메카니즘은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중간계급인 중산층이 중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임근노동자는 피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중간계급 이데올로기, 임금 노동자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 팽배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예컨대 대표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이념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누구에게나 자유를 보장하고, 이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있고, 경제체제는 전체적으로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인류가 이륙한 최고의 질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는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영원히 지속되면 부르주아의 지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대중들, 일반적인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나 교회, 다양한 대중문화를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학교에서는 자유주의를 최고의 이념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신분제를 철폐함으로써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이성적인 원리에 따라 세상이 작동하도록 한 이념인 것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최고의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자기화 하는 것이다. 그의 계급적 위치가 부르주아이든, 중간계급이든, 노동자와 하층민이든 상관없이 그들 대부분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자유주의적 이념에 기초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개인들은 누구나, 자신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고,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자유주의’ 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피지배자들도 지배자인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세상과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문화산업이 이익을 남기려면 대중의 취향에 잘 맞춰야 하고, 대중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생산물들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이념을 그 속에 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대중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애국과 애족을 최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부르주아 사회를 매우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의 생산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주 좋은 곳이라고 묘사한다. 비록 악이 있지만 정의는 늘 승리하고, 실패도 있지만 끝은 늘 해피엔딩이며, 신분적인 차이는 있지만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식이다. 대중문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참 따뜻한 곳이라는 점을 늘 상기시킨다. 역으로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작품들은 현존하는 사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이 참 좋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드라마를 시청하고, 쇼프로를 보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무의식적으로 세계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갖게 된다. 세상을 긍정하면 할수록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우호적인 관점은 대중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가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도록 보장하는 사회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체제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갖게 함으로써 부르주아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다.
②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 소시민적 영웅주의 :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영웅주의를 묘사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의롭고, 신체적 매력이 뛰어나며, 정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다. [주몽]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이나, [슈퍼맨]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는 주인공인 ‘영웅 신화’로 가득 차 있다. 각본은 대체로 이렇다. 평화롭던 세상이 어느 날 위기에 처한다. 악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이 출현하면,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영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스파이더맨]에서는 머리는 좋지만 별 볼일 없는 물리학 전공 대학원생이 나온다. [슈퍼맨]은 일상에서는 선하지만 약간 멍청한 기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어떤 계기를 통해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고 위험에 처한 세계를 구원한다. 궁극적으로 악은 패배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드라마의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영화의 진행과정에서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건의 전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기가 곧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구원하는 주체가 된 듯 착각에 빠져든다. 그 와중에 자기 스스로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약과도 같은 황홀함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대부분이 대중들은 초라하고 별 볼일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쉬한 외모와 왕자의 복근이 없다. 거기다가 학생들은 생각대로 점수가 안 나오고, 직장인들은 언제 해고될 몰라 쩔쩔맨다.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고 나면 초라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과정에서 이런 고민을 싹 날라 간다. 어느덧 영화의 주인공이되어, 세상에 구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가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면 더 열광한다. 왜냐하면 나 같이 초라한 인간도 언젠가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초라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세상을 구원할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은 한편으로 나 자신에게 자긍심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자기를 긍정하게 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세속화된 낭만주의 : 낭만주의를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주 간략하게 정의할 수 있다. ‘사랑 아니면 죽음을 달라’ 뭐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기본적 테마이다. 젊은 베르테르를 생각해보거나 아니라면 바이런의 애정행각을 기억하면 된다. 돈이나 명예, 신분 상승, 이성과 질서가 아니라 감정이 이끌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질풍노도처럼 달려가는 것이 낭만주의의 주요 구성요소다. 낭만주의는 한편으로 체계에 대한 저항의 요소를 지닌다. 질서나 규칙이 아니라 용기, 불굴의 의지, 원시성에 대한 동경, 불타오르는 욕망, 질풍노도와 같은 사랑에 이끌리는 것이 낭만주의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나 바라고, 사랑을 하면서도 배우자의 능력이나 따지고, 힘 있는 놈한테 아부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삶의 모습은 낭만주의와 거리가 멀다. 낭만주의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처럼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를 교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의 낭만주의는 죠지 바이런이나 랭보와 같은 삶을 말한다.
그러나 세속화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실제의 낭만주의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세속화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사랑만으로 모든 것은 극복가능하다.’는 관념이다. 세속화된 낭만주의적 관념은 사랑이라면 모든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멜로물이거나 여고생들에게 철없는 환상만 심어주는 하이틴 로맨스와 같은 글이다. 드라마를 예로 들어 보자. [파리의 연인]에서 남자주인공은 재벌의 후계자, 그러니까 신의 아들쯤 된다. 돈이 힘인 사회에서 재벌은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다. 그 후계자는 신의 아들인 것이다. 반면 여자 주인공은 하층계급 중에서도 가장 하층인 파출부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고, 결국 맺어진다. 사랑만으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신분적 차이를 극복한 것이다. 사랑만 있으면 안 될 것이 없다는 내용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초월하여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낭만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와 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여성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 열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상의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초라하다. 원하는 만큼 외모는 빼어나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직장에다가 월급도 그렇게 많지 않다. 좋게 말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별 볼일 없이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별 볼일 없이 고만고만하게 살아야만 한다면 얼마나 삶이 고통스럽겠는가? 비록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을지라도’ 꿈은 꿀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재벌의 아들과 사랑을 나누는 꿈,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사는 꿈, 섹쉬한 몸매의 여성이 되는 꿈 등등 이런 것들을 꿈 꿀 수 있어야 ‘별 볼일 없는’ 인생에도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바로 그와 같은 꿈을 꾸게 하는 효과가 있다. 대중문화는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열망, 능력 있고 잘 생긴 남성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을 간접적으로 실현해 준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이나마 ‘나도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 애국주의와 휴머니즘 : 선량한 대중들이라면 누구나 ‘나라를 사랑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정의는 승리하며,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국민들 누구나 국가에 대해 우리는 충성할 필요가 없으며, 한국 사회는 정의보다 불의가 더 지배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면, 한국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국민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사람들이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애국은 좋은 것이고, 정의는 승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여겨야 한다. 대중들이 ‘애국과 정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된다는 인상을 지녀야만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하고 소속감을 느끼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대중들 스스로 자신의 국가가 정의를 실천하는 국가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애국이 곧 정의이다. 자기 국가가 정의를 대표하면 국가를 위하는 것은 정의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라고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매체는 국사교과서이고 그 다음이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 생산물들, 그러니까 TV드라마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모습은 늘 정의로운 존재거나 약자이다. [주몽]이나 [대조영]에서는 한족에게 핍박을 받는 존재로 고구려가 그려진다. 반면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드라마는 일본의 핍박을 받는 한민족을 그린다. 여기서 중국이나 일본은 악이고 한민족은 정의이다. 한민족이 약자이고, 한민족을 위하는 것은 정의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중문화는 이를 조장한다.
이런 구도를 보다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곳은 헐리우드 영화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미국은 늘 정의를 대변한다. 외계인이 침공하면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과 선량한 미국 시민이 영웅이 되어 지구를 구한다.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맞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는 존재로 주인공이 부각된다. 여기서 미국은 정의를 대변하고, 미국을 공격하는 테러리스트는 악이며,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은 미국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다. 부시의 말대로 미국은 선의 축이고 반미는 악의축을 대변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선악의 축을 전제로 전개되며, 이것이 정의를 사랑하는 헐리우드식 휴머니즘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분법이 대중문화에서는 매우 잘 먹혀든다. 미국인들은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신의 국가에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 한국의 대중들은 [주몽]과 [대조영]을 보면서 정의를 사랑한 민족으로서 한민족을 생각한다. 대중문화는 이렇듯 애국주의로 대중을 물들이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때 휴머니즘이란 다소 값싼 휴머니즘이다. 즉 ‘애국과 애족’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이다. 이런 휴머니즘은 평화주의라든과 사해동포주의, 진정한 정의와는 무관하다. 그저 자기 나라는 정의를 대변한다는 착각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휴머니즘이다. 즉 자기 나라가 정의를 수호하는 휴머니즘의 입장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진 휴머니즘인 것이다. 그것이 착각인 이유는 현실에서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가장 전쟁을 많이 일으켰고, 다른 나라를 가장 많이 침공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침략과 전쟁을 달고 사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 무슨 휴머니즘이 있겠는가? 그래도 헐리우드 영화는 미국을 정의 즉 휴머니즘으로 묘사한다. 대중들은 착각해서 미국이 진짜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애국적 휴머니즘의 진정한 실체이고, [주몽]과 [대조영]에 열광하는 한국 대중들의 내재된 폭력적 휴머니즘인 것이다. 그것은 휴머니즘으로 가장된 호전적 애국주의이며, 이런 호전적 애국주의를 선동하는 매체가 대중문화인 것이다.
5. 대중문화에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이 글에서 우리는 대중문화의 생산체제와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중심으로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만 분석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반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비판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 대중문화로 인해 다수의 대중들이 문화를 쉽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문화 민주주의적 관점이다. 이 주장은 옳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문화상품이 대량복제 됨으로써 누구나 쉽게 문화상품을 소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과학과 산업발전의 결과이다.
둘째, 대중문화라고 해서 모두 동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예컨대 대중문화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고, 어떤 대중문화상품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째즈가 그 예가 된다. 이 말도 맞다. 대중문화에는 분명 질적인 차이가 있고,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별로 대중적이지 않다. 예술적 경지에 이른 작품들은 대부분 독립레이블에서 제작된 것이라든가, 독립 영화라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문화산업의 지배적 효과에서 벗어나서 생산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대중문화지만 예술적 효과가 있다. 그래서 대중문화와 구별해서 대중예술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잇다. 그러나 다수의 대중문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셋째 대중문화가 지배 이데올로기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의 공간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도 부분적으로 맞다. 대중문화의 생산물 중에는 분명 반체제적인 것이 있다. 70년대 락으로 대변되는 저항문화, 40~50년대 고다르의 영화, 90년대 얼터너티브나 랩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가 저항적 의식을 표출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음악이다. 빅토르 하라를 위시하여 라틴권의 음유시인들은 거의 대부분 반체제적인 정서를 대변했다. 이들이 생산해낸 사회적 효과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대중문화 일반이 지배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대중문화가 부분적으로 균열되어 있고, 저항적인 것이 존재하지만, 지배적인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대중문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문화적 실천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문화라는 주장이 있다. 이 말도 부분적으로 옳다. 대중문화를 통해 사람들은 쉽게 문화를 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다양한 장르에서 문화적 생산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비디오 카메라, 디지털 녹음기,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와 기기를 대중들이 보유함으로써 대중들이 문화적 생산에 쉽게 참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화산업만이 일방적으로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들이 문화 생산물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과 대부분의 대중문화 상품이 문화산업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대부분의 문화상품은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참여하는 것은 문화산업의 하위부분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대중들 스스로 보고 즐기기 위한 ‘제작물’이지 문화 상품인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문화생산물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문화산업의 효과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문화산업의 압도적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창남, [대중문화의 이해], 한울아카데미.
존 스토리,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테리 이글턴, [이데올로기 개론], 한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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