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몸부림치는 자유 / 갈라디아서 5:13-26
우리 평화목교회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일예배 외에 다른 예배나 모임이 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목교회의 정신 중 하나인 <흩어지는 교회>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끼리 모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흩어져서 이웃들과의 삶 속에서 어떤 결실을 맺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자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교회를 두고, 혹자는 취지는 좋은데 ‘너무 자유로운 것 아니냐’, ‘방종으로 이어지도록 방치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우리의 이 자유함이 너무 나간 것일까요? 방종을 방치하는 것일까요?
제게 물으신다면, 저의 대답은 ‘각자 하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제멋대로 사는데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방종을 방치하는 것일 수 있고, 이 자유를 일상에서 하나님과 가족,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방치인지는 각자 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교우들이 방종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방종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하나하나 스케줄이나 지킬 것을 정해주고는 그것을 따라오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예배나 모임이 많이 없는 것에는 ‘흩어지는 교회’ 외에 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신앙’은 ‘공동의 것’이기도 하지만 ‘각자 개인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정해준 대로 따르는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장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방종으로 치닫을 위험이 있다고 능동적인 신앙을 빼앗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진정 신앙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그 행동 자체가 신앙의 내용을 담지 못하고, 오히려 위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능동성, 이 자유를 제대로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방종이 아닌 진정한 자유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갈 5:13) 곧 그 자유를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데에 사용하는 것입니다.(5:16)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까닭은, 이제는 낡은 문자와 규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를 수 있게 하시려고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그 자유를 규정과 형식을 얽매이지 않는다며 욕망을 채우고 방종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목적대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데에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매우 원론적인 답변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원론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때도 많습니다. 놓치고 있었던 초심이나 기본을 다잡아주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바탕은 ‘몸부림’입니다. 이제껏 잘못 살아왔던 삶의 방식, 인생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벗어나고자 애쓰는 몸부림, 회개의 몸부림 말이지요. 만약 교회가 이것을 잃거나 포기한다면, 교회 됨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몸부림은 지금까지의 잘못된 내 방식과 가치관, 습관이 아닌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따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따른다는 말은 원론적인 말임과 동시에 주님의 길을 걷고자 애쓰고 몸부림친다는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함축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에 문자와 규정과 형식 자체에는 자유롭지만, 반드시 그 내용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 인내, 친절, 선함, 믿음 혹신 신실, 온유와 절제를 동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성령을 따르도록 몸부림치는 우리 평화목교회와 교우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024년 6월 2일 김소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