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지 않은 정자입니다만
앞 문을 모두 들어올려 걸고
옆문도 뒤쪽 판문도 열어젖혀서
어둑한 오후인데도 정자 안이 환합니다.
청마루와 난간 너머
연밭과 은행나무가 한눈에 듭니다.
옛 선비들이 여기 앉으면 시 한 수쯤은 저절로 나왔겠습니다.^^*
연꽃은 아직 일러 봉오리만 밀어 올렸을 때입니다.
이른 여름휴가 첫날 7월 8일 일요일 오후
경북 영양군 제일 남쪽에 있는 석보면 두들마을을 걷고
군청이 있는 읍 쪽으로 올라오면서
국보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을 구경하고
담양 소쇄원, 보길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정원에 꼽히는 서석지에 들렀습니다.
입암면 서석지1길 10
입암면 연당리 394-2
소쇄원과 세연정이 주변 자연과 동화돼 구분이 모호한 것과 달리
서석지는 담을 둘러쳐 자연과 정원의 경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퇴계학파 학맥을 이은 은둔 학자 석문 정영방(1577~1650)은
그 안에 못을 파고 정자와 서재를 지어 일일이 유교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연못 북쪽에 바짝 붙여 동남향으로 지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반 정자 역시
이름에 유교의 이상을 담고 있지요.
정자는 주인이 손님을 맞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 공간인데요,
이름이 한 글자, 공경할 경(敬)입니다.
경(敬)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습니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경(敬)이지요.
서석지 주인 정영방은 서른두 살부터 정원에 은거하며
평생 경(敬)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정면에서 경정으로 들어서려면
앞쪽 난간 양쪽 끝으로 올라서야 하는데 조금 옹색합니다.
그래서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 안을 구경합니다.
여느 정자와 누각들이 그렇듯 뒤쪽엔 판문을 달았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소꼬리처럼 휜 대들보, 우미량(牛尾梁)부터 눈에 듭니다.
도리와 도리 사이를 받치면서
비스듬한 천장 구조를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리면서도
하중을 잘 버티고
곡선미까지 겸해서 고택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요.
근데 나무 빛깔이 밝고 깨끗한 걸 보니 교체한 지 얼마 안 된 듯합니다.
대들보 위에 짤막한 동자주를 세우고 그 위에 짧은 종보를 얹어
대들보 위를 가로지르는 장혀, 도리와 만나게 천장 구조를 갖췄습니다.
정자와 같은 이름, 작은 편액이 방문 위에 붙어 있습니다.
난간을 둘러친 앞쪽 누마루에서 내다봅니다.
서석지와 사우단에 얽힌 내력은 앞 포스트에서 설명드렸고요,
누마루가 연못과 연밭 위에 뜬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난간과 연못 사이 공간을 최대한 가깝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으론 서석지 들어서는 사주문이 나 있고요.
???
난간에 낸 구멍을 통해 촌스럽게(?) 찍어본 연못 사진입니다.^^;;
우리 전통 난간은 동자(기둥) 사이 아래쪽에 널판을 대 막은 궁창에
안상(眼象)을 뚫거나 음각해 장식하는데요,
여기는 구멍을 뚫었거든요.
닭(鷄)다리 모양 동자를 세운 계자(鷄子) 난간인데요,
대개 동자 위쪽에 가로로 길게 대는 돌란대와 동자 사이에
장식을 겸한 연꽃 모양 연결 부위, 하엽(荷葉)을 목각해 올리지만,
하엽도 생략하고 그냥 쇠붙이로 돌란대를 묶어
아주 소박합니다.
그런데 앞쪽으로 기운 난간과 연못 사이에 최소한의 공간만 둬서
난간 앞으로는 지나다닐 수가 없게 해놓은 것도 독특합니다.
경정은 연못을 바라보고 감상하기만 할 뿐
다른 동선이나 행위를 일절 배제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한 겁니다.
처마 아래 공포는 기둥과 결합되는 세로부재 보머리를 날개 모양 익공(翼工)으로 처리했는데요,
아래 초(初)익공은 연꽃, 위쪽 이(二)익공은 봉황으로 목각했습니다.
가로 세로 부재가 교차하는 귀공포에선
튀어나온 가로부재 창방과 평방 뺄목을 밋밋한 마구리로 두지 않고
거기도 익공처럼 깎아 장식했습니다.
기둥 안쪽 보와 교차하는 부분을 보강하는
짧은 부재 보아지도 연꽃 모양으로 깎았고요,
실내 높은 기둥, 고주(高柱)와 보 사이에도
연꽃 모양 보아지를 받쳤습니다.
실내 천장의 가로부재 도리와 도리 사이엔
화반(花盤)을 짜 받쳤는데요,
이름 그대로 연꽃 화분 같습니다.
역시 근래에 새로 깎아 바꿔 넣은 듯하네요.
누각 안 양쪽 끝엔 한 칸짜리 온돌방을 들였고
나머지 앞쪽 누마루와 두 칸 대청까지 모두 마루를 깔았습니다.
대청 위쪽 벽엔 시문 편액 다섯 개가 걸려 있습니다.
먼저 '경정 잡영(雜詠)'엔
주인 장영영이 서석지 안 경정, 서재, 사우단, 연못뿐 아니라
근처 산과 강, 명승들을 짤막하게 찬미한 시 14편을 모아놓았습니다.
'정경보에게 줌(증 정경보)'이라는 편액에서
경보(慶輔)는 정영방의 자(字)
정영방의 스승이자 이름난 유학자였던 우복 정경세가 '정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성극당 김홍미, 창석 이준이라는 분이
각기 정영방에게 준 글을 담았고요,
이 편액 이름은 정영방의 호와 자를 모두 써서
'증 정석문경보'인데요,
약봉 서성, 하음 신즙, 호우 이환, 계암 김령이
정영방에게 바친 글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제목의 편액엔
청풍자 정윤목, 도헌 류우잠, 학호 김봉조,
그리고 석계 이시명이 건넨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시명은 앞서 다녀온 두들마을에 처음 자리잡은 재령 이씨 입향조.
그 석계 이시명(1590~1674)이어서 반갑습니다.^^*
글을 남긴 이들은 정영방의 스승이거나 동시대를 살며 교유하던 선비, 학자들인 듯합니다.
석계 이시명의 글이 하나 더 별도로 담겨 있습니다
정영방의 연못과 집, 서석지에 삼가 바치는 글 '봉기석문지당'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시문 편액 중에 정영방이 서석지 안팎 열네 곳을 읊은 시가 있었는데요,
그는 서석지뿐 아니라 마을과 인근 명승지 선바위, 남이포까지 모두 자신의 정원으로 삼고
서석지는 안 정원, 내원(內園), 바깥 풍광은 바깥 정원, 외원(外園)이라고 불렀지요.
서석지 자체는 작고 소박하게 지었지만
마음의 스케일만은 그렇게 컸던 겁니다.
정영방이 모두 자기 정원이라고 했던 내원, 외원 풍경을
모두 모아 사진으로 붙여놓았습니다.
1979년 서석지를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한 증서도
고이 모셔놓았습니다.
석문 정영방을 파(派)시조로 모시는
동래 정씨 석문공파 집안 문서 석 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있는 모양이네요.
그중 왼쪽이 정영방의 문집 다섯 권입니다.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경정 왼쪽, 연못 동쪽 사우단 뒤로 세 칸짜리 작은 집이 보입니다.
워낙 작고 단촐해서 정자에 딸린 관리인 집 같습니다만,
주인 정영방이 서석지에 머물 때 글을 읽고 쓰던 서재입니다.
툇마루 달린 문 위에 주일재라는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한 가지 뜻, 학문을 받들어 정진한다는 의미이겠지요.
왼쪽 한 칸엔 청마루를 들이고
서하헌이라는 당호를 붙였는데요,
서향 집이어서 노을(霞)이 깃든(棲) 집(軒)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입니다.
뒤쪽과 옆에 판문을 달았습니다.
경정 뒤 담 너머엔 자양재라는 집이 있습니다.
하인이나 권속이 머물며 서석지를 관리하고 주인을 수발하던 수직사(守直舍)를 두 채 뒀습니다.
뒤쪽엔 정영방을 비롯한 집안 문집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도 있네요.
정원은 아담하지만 주변에 갖출 건 다 갖췄습니다.
왼쪽 뒤론 곧 쓰러질 듯 황토를 바른 집이 높이 서 있는데요,
서석지와는 상관없는 담뱃잎 건조장이랍니다.
그렇게 뒤쪽 집들을 이리저리 내다보다
경정 귀처마 서까래 마구리에 맵시 없게(?) 붙여놓은 기왓장이 눈에 띕니다.
마곡사 응진전 귀처마에서도 봤었는데요,
비가 들이치기 쉬운 귀처마를 빗물로부터 보호하려는 겁니다.
잘 구경하고 사주문을 나섭니다.
서석지 담 따라 북쪽으로 난 길이 푸르러 사진에 담아봅니다.
커다란 자귀나무가 분홍빛 꽃을 매달았습니다.
서석지 이웃사람이 담배 농사를 짓거나 지었던 모양이네요.
요즘엔 건조기에 담배잎을 담아 말리지만
예전엔 이렇게 높다란 흙집에서 불을 지펴 말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안 쓰는 건조장일 수도 있고요.
주차장 북쪽엔 석문유물관도 번듯하게 지어
정영방의 흔적을 모아놓았습니다.
처음엔 너무 작아서 실망했다가
오밀조밀한 정원과 정자에 깃든 옛주인의 깊은 생각과 겸손한 삶을 들여다보면서
서석지가 왜 크고 멋진 소쇄원이나 세연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삼대 정원을 다 뗐고요.^^*
아까 두들마을에서 봤던 모감주나무 황금빛 꽃이
여기에도 피어 있습니다.
[출처] 영양 서석지, 작지만 소쇄원 세연정과 3대 정원에 꼽히는 이유|작성자 비니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