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명(馬鳴, Asvaghosa, AD 80?~150?) 보살
마명(馬鳴)의 원명은 아슈바고샤(Asvaghosa)이다.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다. AD80~150설과 AD100~160설이 있는 걸 보면
대체로 AD 2세기경 사람으로 중인도 사위국(舍衛國, 코살라국)
바기다(婆枳多) 지방에서 출생했다.
쿠샨 왕조 제3대 카니슈카(Kaniska)왕과 같은 시대 사람임은 확실하다.
카니슈카왕 후원으로 중앙아시아에 가서 포교활동을 했기에
그의 작품이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마명(馬鳴)은 심원한 사상을 가진 불교 사상가인 동시에,
재기가 빛나는 천재적 학승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정통바라문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바라문 교육을 받았고, 4베다(Veda) 등에 통달했으며,
지혜는 깊고 식견은 높았으며, 말재주가 교묘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본거지 캐시미르에서 온 학승
제10조 협존자(脇尊者), 혹은 제11조 부나야사(富那夜奢)와의
대론에서 패배하고, 약속에 의해 그의 제자가 돼
불문에 귀의해 대승의 논사(論師)가 됐다는 것이다.
일단 불문에 귀의하자 열심히 수행정진해서 훗날 ‘보살’의 칭호를 얻고,
법맥 제12대 조사(祖師)가 됐을 만큼 뛰어난 승려가 됐다.
실존인물로 보살 칭호로 불리는 사람은 마명(馬鳴), 용수(龍樹), 무착(無着), 세친(世親) 정도이다.
그는 인도 고전인 산스크리트어문학 최초 불교시인으로서,
그가 지은 <불소행찬(佛所行讚, Buddha carita)>은
붓다 생애와 교의를 격조 높게 서사시로 읊은 최초의 완전한 불타전이며,
불교문학 걸작이자 인도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그리하여 인도 고전문학 융성의 선구자로서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불소행찬>의 정식 이름은 Buddha-carita-kāvya-sūtra로서
산스크리트어로 '부처의 행적에 대한 시적인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마명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승불교가 막 태동하던 시기이자
부파불교가 대중으로부터 괴리돼 변혁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당시 부파불교 수행자들은 아소카왕 이래 축적된 사원의
경제적 자립기반을 배경으로 재가자의 출입이 금지된 승원에 머물며,
수행(좌선)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논지와 다른
부파의 견해를 비교 비판하며, 자파의 우수성을 알릴 지엽적이고 번쇄한 교학
(아비달마)에만 몰두함으로써 수행승이 아닌 안이한 불교학자(학승)가 됐던 것이다.
이들은 수행한다 해도 자신의 해탈에만 급급할 뿐,
중생의 해탈이나 전법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러니 대중들은 부파불교를 멀리하고 대승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명은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는 유아사상(有我思想)을 주장해
불교를 반대하고, 대승불교를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후에 불교에 귀의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로 봤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 근본 뜻을 해설한 명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승기신론> ‘귀경서(歸敬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생들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믿음)을 버리게 해,
대승의 바른 믿음(正信)을 일으켜, 부처의 종자(佛種)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함이다.」라고 밝혀,
중생의 입장에서 저술됐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대승기신론> ‘인연분(因緣分)’에서는 저술하게 된 인연을
여덟 가지로 밝혔다. 그 중의 첫째가 바로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苦)에서 벗어나(離)
구경(究竟)의 즐거움(樂)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결코 세간의 명리(名利)나 공경을 구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헌데 <불소행찬>의 저자와 <대승기신론>의 저자 마명 두 사람이
동일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불교계에 일찍부터 제기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해명이 잘 되지 않고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대체적으로 <불소행찬>의 저자 마명과
<대승기신론>의 저자 마명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불소행찬>의 저자인 마명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어떻든 마명은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 때 이루어진
북방불교 제4차 결집에 참여해서 공헌해 대승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은 마명 대사에 대한 일화 한토막이다.
카니슈카왕이 중부의 파탈리프트라를 정복했을 때,
점령한 국가에 대해 전쟁 배상금을 받으려 했으나,
점령한 파탈리프트라가 너무 가난해서 가져갈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마명 대사가 하도 위대하다 하니까,
배상금 대신 부처님이 쓰셨다고 전하는
유물인 발우와 마명 대사를 인도하는 것으로 대체했고 한다.
마명 대사를 데려다 놓으니까, 쿠산왕국의 대신과 백성들은
애쓰고 전쟁에서 이겼는데 하필이면 스님만 하나 데리고 왔나 하고
불만이 많았다.
카니슈카왕은 마명 대사를 믿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기적적인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망아지 10마리를
마당에 끌고 와서 말이 제일 좋아하는 먹이를 주었다.
그와 동시에 마명 스님 보고 당신이 위대한 도사라고 하니까,
저 말에게 부처님 설법을 해보라고 했다.
그러니까 마명 대사가 부처님 법문을 아주 간곡하게 설법을 하니까,
말들이 그 좋은 말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고 마명 대사의 설법에 감복해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마(馬)자 울 명(鳴)자, 말이 울었다 해서
마명(馬鳴)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온 국민이 존숭했다고 한다.
마명은 제11대 부나야사(富那夜奢;Punyayasas) 조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아 제12대 조사가 된 뒤 널리 전법 교화를 하던 가운데에
화씨성(華氏城;파탈리푸트라)에서 설법하는데, 홀연히 어떤 노인이
자리 앞에 엎어졌다.
마명이 대중에게 말했다.
“이는 예사 무리가 아니다. 반드시 특이한 상서가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더니, 잠깐 뒤에 땅에서 금빛이 나는 사람 하나가 솟았다가
다시 여자로 변하여 오른손으로 마명을 가리키면서 게송을 말했다.
거룩하신 어른께 경례합니다.
여래의 수기를 받으시고
지금 이 땅에 왕림하시어
제일의 뜻을 선전하시네.
게송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지니, 마명이 다시 대중에게 말했다.
“곧 마가 와서 나와 힘을 겨루리라.”
조금 있으니 풍우가 갑자기 닥쳐와 천지가 아득해졌다. 마명이 말했다.
“마가 온 것이 사실이다. 내가 제어하리라.”
그러고는 곧 공중을 가리키니 하나의 큰 금룡(金龍)이 나타나서 위력을 발휘하자,
산천이 진동했으나 마명이 태연히 앉았으니, 마의 장난이 곧 소멸됐다.
7일이 지나서 메뚜기만한 작은 벌레가 자리 밑으로 숨어들었다.
대사가 손으로 잡아내어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은 마가 변화한 것인데, 나의 법을 몰래 들으러 왔다.”
그러고는 곧 놓아 주어 가게 했으나, 마가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대사가 그에게 일러 주었다.
“네가 삼보에 귀의하기만 하면 신통을 얻게 되리라.”
마는 드디어 제 형태를 회복해서 절을 하면서 참배하니, 대사가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며, 권속은 얼마나 되느냐?”
“제 이름은 가비마라(迦毘摩羅)요, 권속은 3천입니다.”
“네가 신통력을 다하면 어떤 변화를 일으키겠느냐?”
“저는 아주 큰 바다를 변해서 작은 물로 만듭니다.”
“너는 성품의 바다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무엇을 성품의 바다라 합니까? 저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대사가 그에게 성품의 바다를 말해 주었다.
“산하대지가 그에 의해 건립되고,
삼매와 육신통(六神通)이 이로 말미암아 난다.”
가비마라가 이 말을 듣고, 신심을 내어 그의 권속 3천을 데리고
출가하기를 원했다. 대사는 500명의 아라한을 불러 구족계를 주게 하고,
이어 그에게 분부했다.
“여래의 거룩한 정법안장을 그대에게 전하니, 그대는 나의 게송을 들으라.”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게송과 함께 여래의 정법안장을 전했다.
숨거나 드러남이 본래의 법이요[隱顯卽本法],
밝음과 어두움이 둘이 아니다[明暗元不二].
깨달은 법을 오늘에 전하니[今付悟了法],
취함도 아니요 여윔도 아니다[非取亦非離].
법을 전한 뒤에 바로 용분신삼매(龍奮訊三昧 ; 용맹한 위력을 나타낸 삼매)에 들어
마치 햇빛 같이 몸을 공중에 솟구쳤다가 열반에 들었다.
이러한 마명 대사는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위대한 분인데,
그 분이 염불을 강조하셨다고 한다.
저서로는 <불소행찬(佛所行讚)> 외에 <손타라난타시(孫陀羅難陀詩)>가 있으며,
다소 이론(異論)의 여지는 있으나,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금강침론(金剛針論)> 등도
그의 저서라고 전한다. 그리고 최근 중앙아시아에서 마명의 작품이라고
추정되는 희곡 <사리불극(舍利弗劇)> 외에 두 작품이 발견됐는데,
인도의 희곡 및 언어 발달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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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소행찬(佛所行讚, 붓다짜리따/Buddhacarita)>에 대해---
<불소행찬>은 부처님의 생애를 찬탄한 28편의 운문으로 구성된
궁정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며, 또한 초인적인 존재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를
설화나 비유을 광범위하게 사용해 표현한 불교 문학을 확립하고 집대성한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문학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서사시의 미문체 문학
(카비야/kāvya -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된 정형시)으로 그 명성이 높다.
그 밖에 전설집이나 희곡 등도 지었으며,
기품 있는 예술품에 의해서 문학가로서의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동시에 가요형식을 빌린 그의 종교선전도 대단히 유효했다.
원래 초기불교에서는 가무와 음곡이 금지돼있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이 포교의 수단으로 채용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카필라바스투로 돌아오기까지의 전반 14편만 현존하고 후반은 소실됐다.
석가모니 부처 입멸 뒤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기억을 온전하게 갖추어
전하기 위한 전기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마침내 불교 성전(聖典)에 전해지는 전설에 자신의 상상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불타관(佛陀觀)을 보탠 전기가 성립됐는데, 현존하는 <본생담(本生譚;Jataka)> 등의
많은 불전문학(佛傳文學)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부처님 전기에 대한 작품은 대개 무미건조하고 기술이 산만했다.
그러나 <불소행찬>에 이르러 비로소 불전문학사적으로
여러 인도 순수문학 작품들에 견줄 수 있는 걸작을 가지게 됐다.
특이 <불소행찬>은 불전문학 중에서도 기존의 자료에 충실하면서도
사실적 내용을 적절히 가미한 아름다운 서사시로서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와 그 교의와 인격을 찬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격적 감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하여 체계 없이 단편적이고 부분적이었던 기존의 불전이
<불소행찬)에 이르러 어느 정도 정확한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숭고한 석가모니 부처의 인격과 언행, 심원한 불교사상과
인도 사상이 인도 문학의 수려한 수사로 장렬하고 생생하게 표현돼있다.
실로 <불소행찬>은 인도 문화의 다른 순수문학 작품과 반짝이는 불교의 마니보주 중에서도
특히 그 광명이 찬연한 주옥과 같은 작품이라 할 것이다.
<불소행찬>은 석가 왕족의 계보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입멸에 이르는
장중한 내용을 기술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계통적으로 너무 과장되거나
조잡하게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상세하게 기술했다.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속에 불교의 교의가 교묘하게 녹아 있고,
생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실제로 만난 듯한 생생한 묘사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걸었던 고뇌의 길과 '스스로 깨달은 자'로서의 일깨움이
다른 불전문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ㆍ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의 수도관(修道觀)으로 정리돼있고,
법신(法身)의 상주(常住)를 중심으로 한 불신관(佛身觀) 등이 총망라돼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마치 불교요설(佛敎要說)이라 할 정도로
불교의 이해를 돕는 지침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