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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으면 그만 올리겠습니다.
51편
철민은 졸업식을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 왔다. 그리고 포철 소속 정식 직원이 되
었다.
"축하 해. 다음 달부터는 월급을 받을거야. 우리는 운동 선수지만 일반 직원들
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거야."
철민은 지윤이가 사준 옷을 옷장 깊숙히 고이 걸어 놓았다. 그 밑에 구두도 숨
겨 놓았다.
실업팀은 정식 경기를 갖는 대회가 대학 야구보다 훨씬 늦었다. 삼월이 시작되
어도 철민은 개인적인 훈련만 받았다. 오월 달까지 정식 경기가 없었다. 하지만
곧 연습 경기를 가질 것이다. 상대는 프로 팀이었다.
"이번 주 수요일 날 쌍방울 떼거지들과 콩국대 구장에서 연습 경기를 갖는다.
저 쪽은 이군들과 올해 새로 입단한 신출내기들로 구성이 될 것이다. 아직 날씨
가 쌀쌀하니까 무리는 하지 마라. 그래도 이기게 되면 내가 저녁을 푸짐하게 사
겠다."
감독은 한 주가 새로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에 이 같은 통보를 했다.
"저 투수는 누가 맡습니까?"
김현철이라는 작자가 물었다.
"연습 경긴데 돌아가면서 맡아야지. 모두들 몸을 풀어 놔."
철민은 투구 연습을 하다가 거의 전력 투구를 하는 김현철을 쳐다 보았다. 아무
래도 실업팀은 코치진이 부실했다. 많은 선수들이 개인적으로 훈련하는 시간이
많았다. 김현철의 모습은 분명 무리하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훈련하면 정작 시합
에서는 힘을 못 쓸 것 같았다.
"선배님, 연습 투군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철민이가 먼저 말을 걸어 보았다.
"신출내기가 뭘 안다고 감히 말을 지껄이는거야. 너 내가 지켜 보고 있어. 감독
에게 제법 인정을 받고 있나 본데. 훈련만 게을리 해 봐. 그때부터는 내가 혹독
하게 못살게 굴테니까."
선배의 말투는 칼칼하며 날카로웠다. 등번호 10번이 철민이 눈에 들어 왔다.
'진짜 10쉐이네.'
시합 전날 철민이는 지윤이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철민은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실력이 점점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기량을 회복한 뒤 삼개월 가
량의 훈련에서 철민이는 예전 같은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내일은 비록 이군과
의 시합이었지만 난생 처음 프로팀과의 경기였다. 철민이는 자랑하고 싶었다.
"난데."
"응, 어쩐 일이야?"
"나 내일 시합 있다."
"내일? 무슨 시합? 너네 시합 가질려면 아직 멀었잖아. 대회는 오월 초던데?"
"제법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좋은 자세다. 내일은 연습 경기야. 그래도 상대
가 프로팀이다."
"너도 출전하니?"
"아마도."
"어디서 하는데?"
"콩국대 야구장. 내일 두시야."
"두시? 한 번 가볼까?"
"시간 되냐?"
"응. 나 공부를 좀 잘했기 때문에 이번 학기에 수강 신청한 학점이 적어. 내일
은 아예 수업이 없어."
"놀지 말고 열심히 해."
"오월달 부턴 미 문화원에 나갈거야. 예전에 현주 덕으로 인맥을 좀 알아 놨
지. 아르바이트지만 나 월급도 받을 거다?"
현주 얘기가 나왔다. 철민은 그래도 태연한 척 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동요되
지 않았다.
"학기 중에 무슨 아르바이트냐?"
"학교는 한 주에 삼일 만 나가. 이학기 때 부터는 직장 잡은 애들은 거의 학교
를 안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뭘."
"신기하네. 근데 현주는 어디로 간거냐?"
철민은 별 관심이 없는 듯 현주의 소식을 물어 보았다.
"몰랐니?"
"응."
"미국."
"장난치나. 미국 어디냐니까?"
"택사스 쪽이지 아마. 더 이상은 나도 잘 몰라."
"친구 맞냐?"
"걔 나에게 연락도 없이 떠났어."
"그렇냐?"
"내일 가 볼까?"
"오던지 말던지 상관은 하지 않겠지만, 오면 유명 선수들 사인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오라는 소리지?"
"응."
"알았어."
시합 당일 아침 철민은 현주가 사 준 시디를 들었다.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곡이다. 비록 오디오가 아닌 그냥 휴대 시디 플레이어에 연결 된 싸구려 스피커
에서 울려 나와 예전 자기 오디오로 들을 때 보다는 못했지만 기분을 완화 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야, 무슨 그런 잠 오는 곡을 듣냐. 요즘 유행하는 룰라 곡 없냐?"
"룰라라는 곡도 있어요?"
"너 서태지는 아냐?"
"당연히 알지요."
"그런데 룰라를 몰라? 지은씨만 보면 머리가 쭈삣 쭈삣 서거만."
"지은씨가 부르는 곡이 룰라에요?"
"가요계도 관심을 가져라 좀."
시합 시간이 가까워 왔다. 철민이는 선수들과 함께 시합 장소로 갔다. 쌍방울
팀 전용 버스가 구장 앞에 주차 되어 있었다. 구단 버스에서는 포철도 별로 꿀리
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하위권에서 맴도는 쌍방울 구단이지만 선수들의 모습은
확실히 달랐다. 눈에 익은 선수들도 여럿이 보였고 야구 장비도 포철 구단의 그
것과 달랐다.
일회 초 공격은 포철이었다. 상대 팀은 수비에서는 그렇게 포철 팀과 다른 모습
을 보여 주지 않았지만 투수력에서 프로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상대팀 투수는
이군에서 일군으로 승격 되는 투수였다. 비록 프로 8개구단 중에서 가장 투수력
이 약한 팀의 그것도 이군 생활을 했던 투수였지만 포철의 에이스 급 투수들보
다 못한 인상이 아니었다.
포철은 네 명이 타석에 들어 섰지만 실책으로 한 명이 진루를 했을 뿐 나머지
는 모두 범타로 물러 나야 했다.
연습 경기 였지만 프로 팀은 관중을 몰고 왔다. 바깥은 구단 버스 때문이었을
까. 근처 동네 주민 여럿이가 경기장 옆에 심어 놓은 나무 아래에서 경기 관람
을 했다. 운동장을 빼앗긴 콩국대 선수들도 여럿이가 관람을 했다. 철민이는 그
들 틈에서 지윤이를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포철의 선발 투수는 김현철이었다. 철민이가 본 김현철의 투구는 상당히 기교
가 섞인 모습이었다. 재능에서 따라주지 못한 것들을 노력으로 일궈낸 기교로서
메꿔 나간 모습이었다.
김현철은 일회를 잘 막아 냈다.
철민이는 점퍼를 입은 채 운동장 구석에서 연습 투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
는 진환이도 있었다.
"저 녀석, 체력하고 어깨가 조금만 강했어도 뭔가 했을 녀석인데..."
진환이가 현철이가 던지는 모습을 보고 철민이에게 말을 던져 보았다.
"잘 던지는데요."
"한계가 곧 올거야. 작년에도 그랬어. 대학 팀들과의 경기에서는 제법 잘 통
해. 하지만 프로팀들에겐 통하지 않았어. 한 타석 돌고 나면 얻어 맞기 시작할
거야. 저 녀석 무슨 프로 팀과의 연습 경기를 자기가 프로에 진출 할 수 있는 기
회로 생각하나 봐. 무리하게 연습한 탓에 금방 지쳐버리더라구.. 하던대로만 해
도 오회까지 근근히 버텨 낼텐데."
철민이는 투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숨을 몰아 쉬는 현철이를 쳐다 보았다. 자
신이 강한 어깨를 타고 난 것이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느껴진다.
이회에도 양 팀은 점수를 뽑아 내지 못했다. 포철은 삼회초도 마찬가지였다. 삼
회말이 시작 되기에 앞서 포철 감독은 투수를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김현철이
가 고집을 부렸다.
"이제 이회를 던졌습니다. 더 던지고 싶습니다."
"어짜피 연습 경기야 무리하지 마."
"더 던질 수 있습니다. 연습 경기이기 때문에 고집을 부려도 된다고 생각합니
다."
"그래?"
진환이가 감독에게 불려 갔다가 도로 철민이 곁으로 돌아 왔다.
"봐 바. 이번 회부터 얻어 맞을거야."
진환이는 돌아 오자 마자 철민에게 한 소리 내 뱉었다.
현철이는 9번 타자를 첫 타자로 상대했다. 첫 타자는 잘 막아 냈다. 그러나 일,
이번에게 연속으로 진루타를 맞았다. 감독은 고개를 잘래 잘래 흔들었으나 김현
철은 마운드를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대 팀에서 대타를 기용했다.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고 포철 선수들은 의아해
했다. 대타는 쌍방울의 간판 타자 김기대였다. 김기대는 자기 팀 선수들의 기대
를 한 몸에 받으며 타석으로 들어 섰다.
"왠일이지? 간판 선수가 연습경기에 다 출전을 하고."
"저 선수 작년에 부상을 당했지 않습니까. 아마 전력 테스트 겠지요."
"그런가 보군."
확실히 프로의 간판과 실업의 투수는 차이가 많이 났다. 김현철은 초구를 바로
강타 당했다. 안 그래도 좁은 야구장에서 공은 참으로 멀리 날아 갔다. 홈런 경
계선을 훌쩍 넘어 바운드 된 공은 사람이 다니는 길까지 날아 가 버렸다. 걸어
오던 어떤 아가씨가 그 공을 보자 쫓아 갔다. 그리고 공을 주워 폴짝 폴짝 뛰며
공을 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귀여운 아가씨네. 제법 예쁘겠어."
"그렇네요. 제가 아는 애와 분위기가 좀 비슷하네요."
평정심을 잃은 김현철은 그 후 한 명을 더 진루 시켜 주고 진환이로 교체 되어
졌다. 얼굴을 불그락 거리며 선수들에게 다가온 김현철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못
했다. 김현철은 자기 분에 못 이겨 글러브를 내팽개 치고 저기 사람들이 뜸한 울
타리 밑으로 가 앉아 버렸다. 철민이도 아무말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
다. 그때였다. 김현철이가 앉아 있는 울타리 밖에서 누군가 철민이를 불렀다. 철
민이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지윤이가 와 있었다.
"철민아."
철민이는 지윤이가 반가웠으나 하필이면 김현철이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근처라 얼른 답을 해 주지 못했다.
"어디로 들어 가야 돼?"
철민은 조심스럽게 지윤이에게 다가가며 손짓을 해 주었다. 지윤이가 철민이 손
짓에 맞추어 그냥 걸어 왔으면 되었을 텐데 함박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손
에는 야구공이 쥐어져 있었다. 철민이의 표정이 갑자기 난처해 졌다. 철민이는
지윤이가 뭔가 말을 할 것 같아 손가락으로 입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춰를
보내 주었으나 지윤이는 그걸 알지 못했다.
"누가 홈런을 맞았나 봐. 공이 날아 오길래 내가 얼른 가서 주었어. 잘했지?"
그 소리를 듣고 김현철이가 고개를 돌려 지윤이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철민이
에게도 눈짓을 준다. 지윤이는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손에 쥔 공을 흔들어 보이
며 자랑하고 있다.
"너 나중에 봐."
철민이는 아무말 못하고 지윤이에게로 갔다.
"저 사람 선배니? 별로 표정이 밝지 못하네."
"너 저기 사람들 있는 곳에서 조용히 구경 해. 나중에 찾아 갈게."
"너 등판했니?"
"아직은."
"야구공이 참 예쁘다."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웃고 있는 지윤이를 철민이는 나무랄 수 없었다. 연습 경
기인데도 자기를 찾아온 지윤이가 고마웠다.
철민이는 7회에 등판을 했다. 아직 울타리 밑에서 기가 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
는 김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철민이는 그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습 경기
에다가 상대 팀에게 이기기 힘든 상황의 점수. 철민은 공을 힘껏 던지지 않았
다. 자기의 변화구를 테스트 해 볼 요량으로 직구 아닌 다른 구질의 공만을 던졌
다. 그래도 상대 타자들은 연신 헛방망이질이다.
"어라, 아직 역회전 공이나, 체인지 업은 던지지도 않았는데."
철민이 자신도 자기가 던지는 공을 못 때려 내는 타자들에게 의아함을 표시했
다. 철민이는 유인구를 던져 맞춰 잡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타자들은 공을 맞추
지 못했다.
경기는 끝이 났다. 철민이는 안타를 하나도 맞지 않았다. 사구도 내 주지 않았
다. 철민이가 맡은 이닝 동안 철민이의 투구는 퍼펙트였다. 철민은 김 선배 보기
가 더 어려워 졌다. 전력 투구를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철민이의 투구는 김
현철을 압도했다.
상대 팀 선수들과 작별 인사를 고하고 선수들은 각기 자기 팀으로 돌아 왔다.
"김 현철. 자기 조절을 잘해라. 오늘 네 공은 평소 때보다 많이 형편 없었다.
김 철민, 왜 직구를 던지지 않았나? 변화구를 테스트 하고 싶었나? 오늘 네 슬라
이더는 일품이었다. 좋은 무기가 될 것 같다. 네가 던진 슬라이더는 모두 제각각
이었다. 속도에서부터 변하는 각도까지. 선동얄의 슬라이더를 보는 듯 했다. 타
자들은 프로 선수들의 변화구에 힘을 못 쓴 것 같다. 상대 투수의 변화구는 우
리 팀의 김현철이 보다 못했다. 프로팀이라 지레 겁을 먹지 마라. 자신감을 가지
란 말이다."
철민이는 훈련을 쌓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슬라이더를 완성시켜 놓았다. 최소
한 실업팀 수준에서는 완성된 수준이었다.
시합을 마치고 철민은 지윤과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미안해, 내가 실업 선수라 퇴근시간을 지켜야 돼. 오늘은 이만 가봐야 겠다."
"그래. 오늘 네가 공 던지는 것 잘 봤어. 그리고 야구공도 하나 줏었잖아. 다음
에 봐."
철민이 근처의 김현철이가 지윤이를 꼬아 본다. 철민이는 그걸 의식했는지 지윤
에게 공을 숨기라는 제스쳐를 보내 주었지만 지윤이는 계속 공을 들어 자랑하고
있다. 철민이는 나중에 김선배에게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았다.
"지윤아."
"왜?"
"나 이제 버스로 돌아 간다. 다음에 시간나면 찾아 갈게."
"그래."
"아니다. 내 월급날 한 번 보자. 동엽이도 같이 볼래?"
"동엽이도? 뭐 그래 같이 보자."
"연락할게."
"잘 가."
철민이는 그 날 합숙소에서 자기 방에서 홀로 있었다. 진환이 선배는 오늘 합숙
소 방을 쓰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철민이는 대학팀 선수들과 잘 알지 못하는 실
업팀 타자들의 데이터를 뽑아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이
론 공부 중이었다.
"똑, 똑."
누군가 자기 방을 노크를 했다.
"네. 들어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김현철이었다. 철민이는 지레 겁을 먹고 어색해 했
다.
"선배님이 여긴 어떻게..."
"너 나 좀 보자."
"어디서요?"
"연습장으로 나와."
"이 시간에 왜?"
"나오라면 나와 새꺄."
철민이는 조금 두려웠다. 진환이 선배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로부터 요주의 대
상 1호로 지목 된 녀석에게 혼자 끌려 나가려니 겁이 났다. 오늘 지윤이가 했던
짓도 생각이 났다. 여자 친구를 시합 중에 구경 오라고 불렀던 것도 녀석이라면
충분히 트집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지윤이는 녀석이 비참하게 홈런
맞은 공을 줏어 들고 와 놀리 듯 자랑했다. 철민이는 자기 덩치와 김현철의 덩치
를 삺틤맘年?
"두들겨 패지는 못해도 안 맞을 자신은 있겠다."
김선배는 어두운 연습장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다.
"이리 와서 앉아 봐."
분위기가 생각한 것 하고는 좀 달랐다.
"네."
철민이는 김선배가 앉아 있는 곳에서 다리를 뻗어도 안 맞을 정도의 거리를 두
고 앉았다.
"아직 못찾고 있지만 언젠가는 걸릴 것이다."
"네?"
"트집 잡을 거 말이다."
철민이는 말없이 김선배를 쳐다 보았다. 유니폼을 입고 입지 않아 등번호가 보
이지 않는다.
"오늘 제 친구는 모르고 자랑 한 겁니다."
"나 그런 것으로 트집 잡고 하는 쫀쫀한 놈은 아니다. 여자 친구가 예쁘더군."
"아, 네."
"내가 이 팀에서 좋은 인상의 소유자가 아닌 건 알아."
"예."
"뭐가 예야."
"다른 선배님들이 선배님만 조심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돼 임마."
"죄송합니다."
"나 실업 5년차다. 내 나이 이제 스물 여덟이야. 아직 한창 때지만 실업 팀에
선 앞으로 이년을 더 버티기가 힘들어. 내가 처음 실업팀에 들어 올 때 왜 내가
프로로 가지 못했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했었다."
"무명이었습니까?"
"그래 무명이었지. 나보다 우리 팀이 무명이라 나도 덩달아 무명이었다고 생각
을 했어. 하지만 내 실력은 결코 실업팀에 머물 수준이 아니라 확신했었다. 훈련
도 대충받고 시합도 대충 했어. 난 프로팀에 조금이라도 알려지기만 하면 바로
프로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년을 남들 하는 만큼만 야구에 투자를 했
다. 그리고 깨달았지. 내 실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상무에 있던 프로 출
신 선수들에게서 그걸 느꼈어."
"사람들이 내게 왜 이런 말들을 하지? 어려운 말들 말이야."
철민이는 근성으로 듣고 있다. 팀 선배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친하고 싶지
도 않았던 사람이다.
"2년 동안 실업에서 발전 없이 아까운 시간만 보냈다. 그 뒤부터는 내 나름대
로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 팀의 에이스가 되었지. 하지만 난 여전히 여기 머물
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럼 프로에 입단 테스트를 받아 보시지 그랬어요?"
"입단 테스트는 2군에서 관할한다. 나는 아직 정식으로 지명을 받고 싶은 미련
이 남아 있어. 그것 때문에 입단 테스트는 받고 싶지가 않다."
"절 부르신 이유가..."
"실업에 새로 입단하는 녀석들을 보면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은 녀석들이 많
다. 실력은 안돼면서 바람만 들어 있는 놈들이 많지. 자기는 곧 프로에 갈거이
라 생각하면서 훈련을 게을리 하는 녀석들이 많아. 내가 그랬기 때문에 그 꼴을
못 봐. 그리고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데, 훈련을 게을리 하는 녀석들을 보면 안
타갑기도 해. 나도 성격이 못됐어. 그런 녀석들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지 못하고
트집만 부렸던 것 같다."
철민이는 하품까지 했다. 그러다 김선배를 흘낏 쳐다 보았다. 표정이 자뭇 진지
하다. 알 수 없는 깊이가 있는 표정에는 야구에 대한 미련이 많은 사람 같아 보
였다. 어두운 불빛이 그 모습을 더 부각 시켜 주었다. 철민이는 입을 막고 자세
를 고쳤다.
"저에게는 못 찾았단 말은 무슨 뜻입니까?"
"훗, 내가 보기에 넌 지금 당장이라도 프로에서 뛸 수 있는 놈이다. 어떻게 해
서 실업팀에 들어 왔는지 의문이 들어. 그 동안 지켜 봤는데 노력도 아끼지 않
고 있다. 거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바람이 들어 있지도 않았다. 신기해. 트집
잡을 게 없었어."
"에?"
"잘해 보자. 앞으로 나보다 노력을 게을리 하면 바로 트집을 잡겠다. 네가 부족
한 것이 있다면 야구에 대한 애착인 것 같다. 바람이 들지 않은 것은 좋은 것지
만 너무 없어도 야망이 없어 보일 수 있다. 너 대학 와서 야구 했다고 했지?"
"네."
"야구에 대해 큰 꿈을 가져라. 늦게 시작했다고 꿈까지 늦을 필요는 없다. 현재
에 만족하지 마란 말이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렇다. 이 생활에 대해 불만을 가져보란 말이다. 야구 내에서도 인생은 천차
만별이다."
철민이는 예전에 코치가 한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김선배에게도 지금 비
슷한 말을 듣고 있다.
"잘 코치 좀 해주십시오."
"그래 보지. 내가 타고난 실력이 없어서 그렇지 기술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자부
심을 가지고 있는 놈이다. 오늘도 난 한계를 보았다. 니 어깨가 진짜 부럽다."
"흠."
"다른 것은 몰라도 변화구에 대해서는 코치해 줄 수 있다. 변화구는 체력 소비
는 덜 하지만 어깨에 무리를 많이 준다. 변화구 투수는 선수 생명이 길지 못해.
네 덕에 올해 나도 빛 좀 보자."
"에?"
"난 변화구 투수다. 난 알지 선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올해 우리
팀이 성적이 좋으면 나도 제법 알려 질 수 있다. 그 덕에 나도 프로리그에서 한
번 뛰어 보잔 말이다. 한 타자만을 상대하더라도 난 프로에서 뛰고 싶어. 그리
고 프로 선수들과 어울리고 싶단 말이다."
김현철은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철민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 왔다. 철민이는 야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
았다. 집에 떳떳하게 알리지도 못한 채, 무엇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은 야구를 하고 있다. 오늘 김선배를 보고 자기는 구체적인 꿈이 없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현주와 결혼 하는 꿈? 현주 자체가 막연한 꿈
이었다. 철민이는 아직도 막연하게 꿈을 꾸고 있는 듯 하다. 자기 주위에 구체적
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보세요."
"나다 임마."
"바쁘신 대기업 사원께서 왠일이십니까?"
"나 내일 월급 받으니까 술한잔 하자."
"난 여자 없으면 안 마셔."
"이 새끼 군대 갔다 와서 진짜 배려 놨네."
"이제 나 제대한지 육개월도 넘은 완전한 민간인이여. 재수 없는 군대 얘기 하
지 마."
"지윤이도 나올테니까 내일 오후에 시간 비워 놔라."
"지윤이도 나오냐? 하하 알았다. 그리고 좋은 소식."
"뭔데?"
"나도 그렇게 인기 없는 놈이 아니란 걸 알았다."
"무슨 소리야?"
"미팅 나갔는데 내가 찍은 여학생이 날 찍었었어."
"그 나이에 미팅했었냐?"
"내 나이가 어때서? 95학번 새내기랑 했지. 군발이 특유의 상관 뛰워 주기식으
로 한 여학생만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아부해 주었더니 날 찍어 주더라. 하하."
"불쌍한 놈."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주말에 데이트 약속도 잡아 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꼬셔서 놀면 좋냐?"
"20살인데 뭐가 어리냐."
"하여간 내일 6시에 강남역으로 나와라."
"왜 하필은 거기여. 요즘은 홍대 앞이 좋다더라. 똥코 치마들 다 그리로 갔대."
"이 새끼 진짜 밝히네. 너 예전엔 안그랬잖아."
"인생은 즐겁게 살아야지."
"홍대 가면 진짜 많냐?"
"응."
"그럼 홍대 전철역에서 보자."
"그래 거기가 좋지. 지윤이도 훨신 오기가 편할거구."
"그렇구나. 내일 보자."
"알았다. 월급 받아서 한 턱 내는 것은 좋은데 첫 월급은 집에 보내 드리는 거
잊지 마라."
"응."
철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월급이란 것을 받아 보았다. 이것 저것 다 합해도 100
만원이 안되는 돈이었지만 철민이의 감회는 남달랐다.
"적은 돈이지? 그래도 소중하게 생각해라. 그것 때문에 야구하는 사람도 있으니
까."
철민이에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자기 통장에는 거의 천만원 가까이 되는 돈
이 저금 되어 있었지만 그건 자기 돈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자기 돈이다. 철민이는 처음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받은 돈 모두를
바로 송금해 버렸다.
철민이는 동엽이와 잡아 놓은 약속 장소로 갔다. 확실히 행당동이나 화양리하고
는 비교가 되는 모습이다. 고급 집들이 커피숖이냐テ衙?둔갑해 있었다. 예쁜
여자들도 많이 보였다. 동엽이는 철민이가 왔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멀리 아가씨
들만 쳐다 보고 있다.
"나 왔다. 아는 척 좀 해라."
"왔냐? 지윤이는?"
"오겠지 뭐. 똥꼬 치마들 여기로 다 왔다더니 별로 없네."
"똥꼬 치마가 유행이 가고 있잖아. 그래도 잘 찾아 보면 있을거야."
"오늘 월급 받은 거 집에 다 보냈다."
"뭐? 그럼 오늘 한 턱 낸다는 말은 뭐야?"
"내가 월급 말고는 돈이 없냐?"
"나는 차비 뿐인 걸 명심해라."
"오늘은 네 자취방에서 잘까 생각하고 있다."
"그럼 차비도 니가 내라."
동엽이는 담배를 꼬아 물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쳐다 보고 있었고 철민이는 그
냥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너 담배 피냐?"
"응, 넌 배우지 마라. 몸에 나쁜 거다."
"담배 물고 불쌍한 표정으로 치마 입은 여자만 지나가면 넋이 나간 채 바라보
는 너하고 같이 있기 진짜 쪽팔린다. 지윤이도 치마 입혀 놓으면 다리가 참 예쁘
거든, 혹시 지윤이에게도 그런 표정 짓고 바라 보면 가만 안 있는다?"
"지윤이에게는 안 그러지. 아무리 밝히는 남자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간직하는
소녀가 한 명쯤은 있는 법이야. 너도 현주에게 이상한 감정 안 품잖아. 머리 치
워라, 안 보인다."
'이 새끼가 현주 얘기는 왜 꺼내는거야.'
철민이는 다시 두리번 거렸다. 오래지 않아 지윤이가 나타났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니다. 다행이다 치마 입고 오지 않아서."
"응?"
철민이는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동엽이를 꼬아 보았다. 동엽이는 씩 웃을 뿐이
다.
"그럴일이 있지. 동엽아, 똥꼬 치마다!"
"어디?"
동엽이를 보자 지윤이도 뭔가 알았다는 듯 씩 웃는다.
"첫 월급 받은 거 축하 해. 자, 선물. 동엽이는 다음에 선물 해 줄게."
"나야 뭐."
"내가 월급 받았는데 니가 선물을 하면 안돼지. 근데 뭐냐 이거? 여기서 뜯어
봐도 돼냐?"
"응."
지윤이가 건넨 작은 상자에는 금장식이 멋있는 지포 라이터가 있었다.
"야, 나 담배 피지 않는데 라이터를 선물하냐?"
"그냥 가지고 있어."
동엽이가 부러운 눈빛으로 철민이 손에 쥐어진 라이터를 보고 있다.
철민이는 동엽이와 지윤이 둘에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했다. 철민이의 야구 생활
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지윤이와 동엽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
다. 하늘이 어둠으로 완전히 물들고 기분은 조명등처럼 밝아 졌을 때 그들은 술
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싼 곳으로 가자. 아니면 좀 한적한 곳으로 가던지."
철민이는 사람들이 북적되는 곳이 싫었나 보다.
"우리 학교 뒷편으로 가자. 조용하고 괜찮은 곳이 많아. 그리고 우리집과도 가
깝잖아. 너네들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가라."
"이제는 너네 동생도 있고 빈 방이 없잖아."
"내 방에서 자. 내가 혜지나 지혜 방으로 가지 뭐."
"그럴까? 동엽아 너도 괜찮냐?"
"나야 뭐."
"새꺄. 자기 주관을 가져라. 어떡할래?"
"내 주관을 살려서 니 하는대로 할게."
"그래 주관을 살려서 말하니까 좋잖아. 지윤이 너네 학교 뒤에 가서 마시자."
학교 뒷편은 학교 앞과는 다르게 조용했다. 테이블이 네 개 뿐이 어느 작은 술
집에서 그들은 오랜만에 같이 모여 양주랑 맥주랑 거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
다. 철민이는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시는 편이
었다. 그리고 말도 많이 하고 본심을 숨기지 않고 말해 버리는 편이었다.
철민이는 처음에는 동엽이 옆에 앉았다가 화장실 한 번 갔다 오더니 언젠가부
터 지윤이 곁에 앉아 있었다.
"으, 기분 좋다."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냐? 12시 다되어 가는데 이제 일어 서자."
"이제 시작인데. 2차 가려면 일어 설게."
동엽이도 많이 마신 것 같다. 조금 전 까지 말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가만히 앉
아서 앞만 뚜러지게 바라보며 굳어 있다. 눈은 풀려서 초점이 어딘지 알 수 없
다. 지윤이가 제일 정상인이었다. 지윤이는 술에 약했기 때문에 거의 마시질 않
고 옆에서 흥만 돋구었을 뿐이었다. 눈이 풀려서 굳어 있던 동엽이가 결국 소파
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어 버렸다. 철민이는 그래도 일어 날 생각을 하지 않았
다. 술집도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지윤아."
"응?"
"그거 아냐?"
"뭘?"
"뽀뽀를 하면 좋아하는 사이가 되고, 좋아하는 사이가 뽀뽀를 하면 사랑하는 사
이가 되고, 사랑하는 사이가 뽀뽀를 하면 애가 생긴다는 거."
지윤이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 졌다. 지윤이는 오래전에 철민이와 오늘과 같은
비슷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충 다음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왜 안 하는거여?"
"일어서자. 동엽이도 자잖아."
"오늘따라 니가 참 예뻐 보이는구나. 우리 거하게 뽀뽀 한 번 하자."
"너 예전 일은 기억 못하지?"
"뭐?"
"고삼 때 백일 주 마시던 날."
"당연히 기억 하지. 너랑 나랑 너네 집 앞에서 술 마셨잖아."
"그때도 나에게 이랬던 거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혹시 내가 그때 너랑 뽀뽀 했었냐?"
"그래."
"그렇냐? 기억에 없는데, 그럼 한 번 더해도 되겠네."
"그래서 싫어. 이제 일어 서자."
지윤이는 철민이를 무시하고 동엽이를 깨웠다. 철민이는 동엽이가 깨고 나서도
계속 졸랐다.
"에이 뽀뽀 한번 하자니까. 빼는 모습 약한 모습."
"엉? 내가 왜 니하고 뽀뽀를 해 임마."
"너 말고 새꺄. 지윤이 말이다."
"하면 안돼지. 그러면 안돼지. 정말 안돼지. 너네 둘이서 뽀뽀를 하면 내가 초
라하잖아. 나도 해 주면 안될까?"
"이 새끼 완전 취했군."
"너도 취했잖아 임마. 친구라면서 맘대로 뽀뽀하냐? 여기가 미국이냐? 할려면
나 없는데서 해이 씨.."
"너 집에 가 새꺄."
"이것들이 정말."
지윤이는 자기를 앞에 두고 둘이가 하는 짓에 기가 찼다.
분명 철민이가 술 값을 계산하고 동엽이를 부축하고 나왔는데 밖으로 나오자 동
엽이는 멀쩡해지고 지윤이가 철민이를 부축하는 지경이 되었다.
"얘가 술만 마시면 좀 이상해 지더라. 니가 이해 해라."
"나도 알아."
"내가 뭐가 이상해 임마. 저기 똥꼬 치마다."
철민이는 지윤이에게 부축을 받은 채 멀리 지나가는 어떤 긴 치마를 입고 가는
아줌마를 보고 힐끗 웃는다.
"쯧쯧, 완전히 맛이 갔군."
동엽이가 혀까지 찬다.
"이차 가자."
아무도 철민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냥 걸었다. 지윤이가 사는 아파트가 보
일 때 쯤 동엽이가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나는 여기서 택시 타고 집에 갈께."
"왜?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가는게 나을 것 같다. 철민이야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이지만 내가 여자들만 있
는 집에서 신세 지기란 좀 그렇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군대 갔다 오니까 많이 쑥
스럽다야."
"그래도."
"철민이나 잘 보살펴 줘라. 아침에 해장 잘 시켜 주고. 걔가 지 마음을 몰라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널 참 좋아하고 있는 거 너도 알지? 덩치만 컸지 아직 애
야."
"후후, 군대 갔다 오더니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나야, 원래부터 어른스러웠지."
"그럼 철민이는 우리집에서 재울께. 혜지가 태도는 쌀쌀해도 지 오빠 생각을 끔
직히 하니까 많이 보고 싶을거야."
"그래 오붓한 시간 가져라. 나는 갈게."
동엽이는 여백이 있는 미소를 남기고 자기 자취방이 있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야, 김철민."
"왜?"
"동엽이 갔어. 혼자서 걸을 수 있어?"
"저기 벤취에 잠시만 앉았다 가자."
"술을 왜 그리 많이 마셨니?"
"내가 많이 마셨냐?"
"응."
철민이는 약간 불안해 보이는 걸음으로 벤취로 가 앉았다. 지윤이는 철민이 곁
으로 가 앉았다. 서로 가까운 사이는 맞나 보다. 어색하지 않게 서로 붙어 앉아
있다.
"내가 혹시 술 먹고 실수 한 거 있냐?"
"왜? 기억 안나?"
"기억나지. 뽀뽀 함 하자."
"뭐야 너?"
"농담이야. 아까 너하고 했던 말이나, 동엽이하고 했던 말이 가물가물하다."
"술먹고 필름 끊기는 사람들 이상해."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도 내일 아침이면 못 기억할 수도 있어."
"잘났어 정말. 기억도 못할 거 뽀뽀를 하면 뭐하나?"
"그 당시는 좋을 거 아냐."
"말하는 거 보니까 걸을 수 있겠다? 들어 가자. 애들 다 자겠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가자."
주황색 나트륨등이 싹을 돋는 은행잎 사이로 보름달처럼 떠 있다.
"지윤아."
"왜."
"내 언젠가 홈런 쳐 줄게."
"투수라서 못 친다며?"
"투수라고 타석에 들어 서지 못하란 법 있냐?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오늘은 니
가 제일 좋다. 내 곁에 있으니까."
철민이가 자기 감정에 빠져 있다. 나트륨등 불빛을 받은 철민이의 눈동자가 유
난히 맑아 보인다.
"치."
"들어 가 봐. 나 동엽이에게 가 봐야 겠다. 너 내일 학교 가야 되잖아. 나도 내
일 오전 중으로 팀에 복귀해야 돼."
"왜?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냥 갈래."
"삐쳤니?"
"뭘?"
"흠!"
침묵의 시간이 조금 흘렀다. 철민이는 지윤이와 오년만의 키스를 나누고 동엽
이 집으로 갔다.
"야이, 디런 새끼야. 문 열어라."
"뭐야 임마. 왜 여길 와."
"배신자. 나를 두고 지 혼자 가 버리다니."
"널 위해 자릴 피해 준 거야."
"고맙다 새꺄."
"무슨 일 있었냐?"
"몰라도 돼 임마. 자자."
"너 혹시 진짜 지윤이랑 뽀뽀한 거 아냐?"
"이 새끼 술먹고 맛이 간 척 있더니 다 기억하고 있네."
"했냐?"
"자자."
철민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동엽이와 해장국 한 그릇을 사먹고 바로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떠 났다. 철민이는 전 날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보다 더 노력하려 했다. 기
량면에서는 이미 김선배를 훨씬 앞서 있었지만 노력하는 모습에서는 뒤져 있다
고 생각한 철민이는 그를 앞서기 위해 노력했고 승부근성을 키워 갔다. 팀내에
서 가장 노력하는 선수들이 철민이와 김현철이였다. 김선배와 같이 훈련하면서
철민이는 그의 변화구들을 하나씩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다. 노력의 결과는 바
로 나타났다.
"나는 철민이 네가 실업 수준에서는 이미 최고라고 감히 단정한다. 이 번 대회
부터 내 이름을 세상에 알려라. 첫 상대가 대학 최고 수준의 팀이지만 우리 타자
들이 일, 이점은 뽑을 수 있다. 네가 잘만 던져 준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윤 감독은 한 해의 첫 대회가 열리는 바로 전 날 철민이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철민이는 첫 경기의 선발 투수로 내정 되었다.
"니가 잘 던져야 나에게도 기회가 온다. 넌 정말 부러운 녀석이다."
김 선배도 철민이에게 격려성 말을 건네 주었다.
"저 사람이 유독 너에게는 다정한 것 같다?"
같은 방을 쓰는 진환이 선배가 철민이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며 말을 건넸다. 철
민이는 현철이 선배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같이 생활에 오면서 알
았다. 진환이 선배에게 그냥 무언의 미소로만 답을 해 주었다.
실업 야구가 조금만 더 인기가 있는 종목이었다면 철민이가 야구한다는 사실을
대회 첫날 가족들에게 들킬 뻔 했다. 철민이는 첫 날 경기에서 국가 대표 타자
가 세명이나 포진한 년쎄대를 9회 동안 단 2안타만 맞으며 완봉승을 챙겼다. 대
회 첫 이변이었고, 철민이가 다시 야구인들의 관심의 전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
다. 그 날 경기 직 후, 경기에 패한 상대팀 선수들 보다 포철 소속 선수들이 더
놀라움을 표시했다. 비공식이었지만 그 날 철민이가 던진 최고 구속은 158km/h
였다. 99마일, 미 메이저리그에서도 십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구속 100마일
에 단 1마일이 모자라는 속도였다.
철민이는 다음 날 실업 야구였지만 그의 놀라운 구속 덕분에 신문 기사로 제법
크게 이름이 실렸다. 그래도 집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감독은 흐뭇했다.
"처음부터 네 기량을 다 내 보이지 마라. 상대가 너무 기가 죽잖아."
포철은 두번 째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머 쥐었다. 김현철이도 같이 뛰어 주는 사
람이 있었기에 노력한 보람이 왔다. 그의 기량도 향상 되어 있었다. 두 투수의
도움으로 포철은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4강까지 올랐다. 철민이는 한 번 더 등
판을 하여 그의 기량은 실업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 주고 내려 갔다. 4
강전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상대팀과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공격은 상대팀
이 주도 했지만 점수는 결국 이점차였다. 야구에 문외한 사람들이 보면 포철의
투수 김현철이 던지는 공에 짜증을 내겠지만 그는 자기의 기량을 잘 알았고 그
한정된 기량 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구질 구질한 변화구의 공. 타자의 타이
밍을 뺏기 위한 시간 끌기. 김현철은 경기에 패했지만 벤취에서 웃을 수 있었
다. 자기가 가진 기량으로 껄끄러운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들을 터득했
기 때문이리라. 경기가 끝난 후 포철 소속 선수들은 아쉬움 보다는 만족을 하는
편이었다.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명 분함을 토로하는 선
수가 있었다.
"하필이면 저 팀이야? 결승전에는 조승민이가 나가겠지..."
"우린 잘 한거야. 너무 분해 하지마라. 고래대는 올해 사상 최강의 전력이다.
앞선 춘계 대학리그 대회때도 고대가 쉽게 우승을 차지했다. 당분간 대학 리그에
서는 독주 체제가 될 것 같다. 아마추어 팀에서 고래대를 견제할 수 있는 팀이라
고는 새로 창단한 현대 팀이나 상무 정도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하, 철민이가 이
젠 승부욕이 생기나 보지?"
벤취에서 자기 팀이 패하는 것을 지켜 보던 철민이가 분함을 표시하자 감독이
넌지시 대답을 해 주었다.
철민이는 여러 신문에 난 자신의 작지만 소중한 기사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처음으로 신문지면 상에 올려 졌을 때, 그것을 찾아 주던
그리운 사람이 생각 났다.
'어디 있을까?'
대회가 끝이 나고 몇일 간의 휴가를 얻은 철민이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찾
았다. 동생은 퉁명스러움이 있었으나 가족의 정이 있었고, 오랜 친구인 동엽이
는 편안함이 있었다. 지윤이는 조금씩 친구 이상으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러나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는 것은 짝사랑의 대상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민이가 지윤이네 아파트에 놀러 갔을 때, 우연히 단 둘이만 있게 되었다. 그
때 지윤이가 철민이에게 사진첩 하나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철민이의 어릴
적 초등학생일 때의 독사진 한 장과 어디서 구했는지 철민이가 처음 신문에 이름
이 실렸을 때의 기사 내용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철민이의 이름이 들어 간 작은 기
사들이 스크랩 되어 있었다. 아직 내용물은 한 장을 채우지 못했다.
"나중엔 네 사진도 크게 실리고 하겠지? 내가 예쁘게 꾸며서 완성 되면 선물해
줄게."
"하하."
철민이는 그냥 웃었다. 바로 며칠 전에 철민이는 자신의 기사를 보며 현주를 생
각했다.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철민이가 늦게 야구를 시작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자만심에 빠져 들지 않
게 했다는 것이다. 철민이는 계속 노력했다. 김선배도 철민이가 계속 점진적으
로 노력할 것을 독려했다. 대학까지 참가한 대회에서 4강까지 오른 덕에 동료 선
수들도 의욕을 보였다. 실업 팀만 참가하는 대회에서 포철은 다시 4강에 입성했
다. 그 때도 철민이는 위력적인 투구를 했다. 그때부터 철민이는 프로 구단의 스
카웃 제의를 받기 시작했다. 감독의 조취가 없었더라면 철민이는 스카우터들에
의해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야구를 한다는 것을 들켰을 것이다.
"이제 집에 말해도 되지 않냐?"
"조금 더 제 자신을 내세울 수 있을 때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래라. 그리고 네가 프로로 가더라도 올해는 포철 소속이다. 마음 흔들리지
말고 야구에만 전념해라."
"알겠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유월달이다. 상반기를 결산하는 대회가 곧 열릴 것이다.
실업, 대학 모두 참가하는 대회다. 이 번 대회는 철민이에게 큰 이정표를 마련
해 줄 것 같았다. 이 번 대회에서도 철민이가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올 가을에
열릴 아틀란타 올림픽 예선 및 아시아 선수권 야구대회 대표팀으로 뽑힐 가능성
이 크기 때문이다.
철민이는 시간을 내어 동엽이와 지윤이를 만났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지윤이
학교 근처의 찻집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여유를 느꼈다.
"나 잘하면 국가 대표 된다."
"국가대표? 좀 생소한 단어다."
지윤이가 예쁜 미소를 띠며 좋아한다. 동엽이도 밝은 모습이다.
"그러면 태극 마크 달고 KOREA라고 쓰여진 유니폼 입고 그런거냐? 태극마크 달
면 이상한 긍지를 느끼고 그런다던데?"
"몰라. 내가 뭘 그런 걸 아냐. 그것 보다 국가 대표 되면 짤없이 집에 야구 하
는 거 들킬텐데."
"그걸 뭘 걱정하냐? 야 국가대표 되면 성공한 건데 싫어 하시겠냐?"
동엽이는 별 생각없이 말을 내 뱉었지만 철민이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지윤
이는 조금 이해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부모님을 속였던 게 가슴 아프지?"
"그래, 언젠가는 들키겠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들키려니까 두렵다. 햇수로 오년
이다. 오년동안 속여왔던 게 얼마나 큰 죄냐. 부모님이 실망하시는 모습을 차마
볼 자신이 없다. 배신감 느끼 실 것 같아."
"그래도 잘 난 모습으로 되었으니까 덜 하실 것 아냐."
"그런 문제가 아냐. 배신감이라니까 배신감."
"모르겠다 난."
동엽이는 자기 생각으로는 별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나 보다. 별로 심각한 표정
이 아니다.
"들키게 되면 내가 도와 줄게."
지윤이가 가만히 철민이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건 잘 모르겠다."
커피숖에느봉뵉?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다.
"동엽아 이 곡 제목을 아냐?"
"모른다 새꺄. 들어는 본 것 같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다. 이건 그냥 연주곡이군."
"너 이 곡 좋아하니?"
"그럼. 연주곡 뿐만 아니라 실제 아리아 곡도 있지."
"후후, 새로운 면이네."
이었다. 포철은 철민이와 김현철을 아낄 수 있었다. 8강전에서 철민이는 4회만
던지고 투수 교체를 당했다. 못 던져서가 아니었다. 동료 타자들이 많은 점수를
뽑아 준 덕에 다음 경기를 위한 포석이었다.
포철은 4강전에서 실업 최강 현대를 맞이했다. 당연히 철민이가 선발을 맡을 요
량이었다. 근데 김현철이가 고집을 부렸다.
"이 번 경기는 제가 선발을 맡고 싶습니다. 전 이 경기에 몸상태를 맞추었습니
다."
김현철은 경기 전 날 감독을 찾아가 이런 말을 올렸다. 감독 옆에는 내일 출전
을 명 받고 있는 철민이도 있었다.
"내일 우리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기기 힘든 상대야."
"현대가 강한 팀이지만 아직 완전한 팀은 아닙니다. 내년 92학번들이 대거 입단
하면 현대는 프로팀 이상이 됩니다. 그러면 당분간 현대 독주 시대가 되겠지요.
제가 실업팀에 있는 동안 우승할 수 있는 기회는 올해 뿐입니다."
"그래서 내일 총력을 다한 다는 것 아닌가."
"내일은 4강전입니다. 내일 철민이가 등판을 하면 결승전은 누가 맡습니까? 제
가 맡습니까? 현재는 고래대가 현대보다 강합니다. 전 현대전은 자신이 있지만
고래대는 자신이 없습니다. 고래대는 힘있는 타자들이 즐비합니다. 전 통하지 않
을 겁니다."
"그래도 내일 경기를 패하게 되면 결승전 자체가 없는 것 아닌가?"
"믿어 주십시오."
김현철의 각오가 비장해 보였다. 철민이는 입가에 알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런 게 야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선배님을 한 번 믿어 주시지요. 선배님의 경기 운영 능력은 저보다 몇 수 위
입니다."
"그렇지만..."
감독은 김현철의 모습을 뚜러지게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모험을 한 번 해 본다. 그래 결승행에 만족 할 수는 없지. 내일 선발은
김현철이다."
현대는 국가 대표급 91학번을 여럿 입단 시켰지만 아직은 예비 강자였다. 김현
철은 특유의 만만디 투구법으로 현대 타자들을 요리했다. 김현철은 8회때도 마운
드에 있었다. 8회가 끝이 났을 때 포철은 현대에 두점이나 앞서 있었다. 3대1 스
코어.
벤취에 들어 온 김현철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가픈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뚜러지게 운동장을 바라 보고 있었다. 뭔가 해냈다,는 표정으로 아무말
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동료 선수들이 잘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 다가 왔지만 표정이 무서워 왔다가 되돌아 가곤 했다.
9회는 철민이가 잘 막았다. 철민이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자 벤취에 있던
김현철이가 함성을 질렀다.
"아자아!"
철민이는 다시 감복했다.
'저게 야구하는 사람의 태도구나.'
대회 결승전이다. 철민이는 대학 때 이미 결승전 마운드에 서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우승의 경험은 없다. 상대는 예상대로 고래대였다. 고래대 투수가 조승민
이다.
간단한 의례의식이 거행되고 선수단 악수가 이어졌다.
"니가 조승민이냐? 나 알아 보겠지?"
"네."
"어쭈, 이제 존댓말이네. 잘해 보자."
"그러지요."
'키가 나보다 훨씬 커서 그렇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철민이는 일회에 간단하게 세타자를 범타 처리했다. 하지만 이회때는 조금 움찔
했다. 공에 맞은 기억 때문이다. 바로 자기에게 부상을 안겨 준 녀석이 타석에
들어 섰다. 철민의 제구가 조금 흔들렸다. 결국 포볼로 진루를 시켜 주었다. 하
지만 다른 선수들을 모두 삼진 처리했다.
조승민이도 절정의 기량에 올라 있었다. 조승민이는 현재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
츠에게 12억원에 입단 계약이 되어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는 초대형 거물이었
다.
8회까지 점수는 0대0이었다. 안타는 철민이가 적게 맞았다. 꼴랑 하나 맞았으니
까, 하지만 철민이는 상대의 사번타자를 계속 포볼로 진루 시켰다.
9회초였다. 조승민이는 지쳐 있었다. 조승민이는 철민이에 비해 등판이 잦았
다. 포철 팀에서 장타가 터졌다. 그리고 번트 작전으로 원아웃에 주자가 삼루에
가게 되었다.
벤취에 멀뚱히 앉아 있던 철민이는 깜짝 놀랐다. 타석에 이상한 놈이 들어 섰
기 때문이다.
"현철이 선배는 투수잖습니까."
포철에서는 대타를 기용했다. 그것이 어이없게도 투수인 김현철이었다.
"저 녀석이 대학 때는 에이스 겸 사번타자였어. 워낙 약체팀이어서 이름이 알려
지지 않았지만 타격에 오히려 더 소질이 있는 놈이야."
김현철은 초구를 강타했다. 공은 좌측 외야로 멀리 뻗어 갔다. 파울이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관중석으로 가지는 않고 분명하게 그라운드에 떨어질 공이었다.
외야 플라이만 되어도 한 점이 들어 올 수 있는 상황이다. 좌익수가 파울 선상까
지 뛰어가 공을 잡을 찰나였다.
"잡지마 임마!"
고래대 덕 아웃에서 질러 되는 고함 소리가 포철 덕아웃까지 들려 왔다. 공을
다 따라 갔던 좌익수는 그냥 공을 놓쳐 버렸다. 아슬한 파울이었다.
"하핫!"
윤감독이 껄껄 웃었다. 철민이는 갸웃 거렸다.
"철민이 네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네?"
"저거 왠만하면 일점을 주더라도 잡을 공이야. 이런 팽팽한 경기가 아니면 말이
지. 너에게 일점을 뽑을 자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안 잡은 거야.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강팀에게 맛보는 이런 통쾌함 정말 좋군."
철민이가 감독의 말을 듣고 씩 웃었다.
조승민은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공을 뿌렸다. 헛스윙. 볼 카운트가 전적으로 투
수에게 유리한 투스트라이크 노 볼이다.
조승민이는 타자를 얕 본 모양이다. 똑 같은 코스의 공을 또 던졌다. 타자가
또 이상한 폼을 지었다. 번트 자세. 수비수들은 투스트라이크 이후였기에 번트
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배트에 맞은 공은 힘없이 삼루쪽으로 흘렀다. 파울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삼루 주자는 그 공이 구르는 것을 지나칠 수 있었다. 당연
히 홈으로 들어 왔다는 말이다. 일루에서도 세잎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 흉
한 폼으로 괴성을 질러 되는 김현철을 보았다.
"호호, 후후."
철민이도 참지 못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야구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비록 추가 점수는 없었지만 포철은 귀중한 일점을 얻었다. 이제 남은 건 철민
이 몫이었다.
철민이는 구회에 들어 서 조승민이와 마찬가지로 위기를 맞았다.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은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타자의 번트. 일사 이루다.
철민이는 다음 타자에게 평범한 이루 앞 땅볼을 맞았으나 포철 팀에서 큰 경기
경험이 없다는 약점을 드러 내었다. 이루 실책이었다. 원 아웃에 주자가 일, 삼
루에 있다.
다음 타자가 들어 섰을 때 포철 덕아웃에서 감독과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 왔
다.
"아무래도 부담이 좀 있지?"
"모르겠어요. 이상하게 계속 얘한테는 포볼이네요."
"긴장 풀어. 일점을 주면 연장으로 가면 된다. 저쪽 투수가 소진된 건 마찬가지
야. 일점은 줄 각오로 정면 승부를 펼쳐라."
"네."
상대 타자는 철민이를 영광의 순간에서 병실로 옮겨 버린 바로 그 선수였다.
철민이는 주자들을 둘러 보다 덕 아웃에서 어제 승리 투수가 되었을 때의 그 이
상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선배를 보았다. 김현철이가 철민이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처럼 씩 웃었다. 입단해서 처음 보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철민이
도 씩 웃었다.
'김선배에게서 배운 걸 써먹어 볼까?'
철민이는 초구로 아주 빠른 공을 바깥 쪽으로 뿌렸다. 아깝게 볼이었다. 타자
는 타구를 끝까지 보라는 지시를 받고 나온 듯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철민이는 타자를 보며 씩 웃었다. 심판이 째려 본다. 같이 째려 보았다. 괜히
삼루 쪽에 공을 던져 보았다. 그리고 또 일루 쪽으로 공도 던져 보았다. 심판이
안 보는 틈을 타 타자에게 혓 바닥을 내 보이며 놀리기도 했다. 던질 폼을 잡더
니 다시 투구판에서 발을 떼어 버렸다.
철민이는 눈을 껌벅 거리면서 타자를 멀뚱히 쳐다 보았다. 그리고 공을 던졌
다. 공은 비교적 느리게 바깥쪽으로 흘렀다. 오른 쪽 투수들의 변화구는, 특히
슬라이더는 위, 아래로 변화지 않는 경우라면 대체적으로 오른쪽 타석에서 왼쪽
타석으로 흐른다. 타자는 왼쪽 타자였다. 공은 느린 슬라이더였다.
타자는 당연히 안쪽으로 휠 것으로 생각하고 배트를 휘둘렀다. 그러나 공은 바
깥으로 흘렀다. 역회전 슬라이더. 보통 투수들이 던지는 역회전 공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처음부터 괘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홈플레이트에서 조금 변화는
슬라이더가 반대 방향으로 회전이 걸린 것이다. 김현철은 자신이 타고난 부족한
재능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새로운 구질의 공을 만들어 냈던 것이고, 그것
을 투수 출신인 감독과 김현철이가 철민이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워낙 컨트롤
되기가 힘든 공이라 김현철 자신도 실전에서는 거의 던지지 않던 공이었는데, 철
민이가 던져 버린 것이다. 철민이는 아직도 초보기질이 있기 때문에 그 공을 던
질 수 있었다. 주자가 삼루에 있는 상황에서 컨트롤 되지 않으면 포수 뒤로 빠질
지도 모르는 그 공을 별 생각없이 던졌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은 상대 타자
의 배트 끝자락에 힘없이 맞아 투수 앞으로 때구르르 굴러 갔다.
'이런 공은 내가 초등학생일때도 잘 잡던 공이다.'
철민이는 공을 잡아 냅다 2루로 던졌고 그 공을 잡은 유격수는 다시 일루에 송
구. 더블 아웃 시켰다.
'왜 뛰어 나와요?'
포수가 뛰어 나와 철민이 자기를 안아 하늘에 띄웠고 덕아웃에 있는 선수들 모
두가 함성을 지르며 운동장으로 미친놈처럼 뛰쳐 나왔다. 포철의 우승이다.
과 임원들이 한바탕 기쁨의 몸부림을 친 다음 철민은 누군가들에게 불려 갔다.
비록 아마추어 경기의 결과였지만 결승전이었기에 제법 많은 기자들의 관심을 끌
었다.
철민이는 자기를 불러 인터뷰를 요청한 모 방송사의 기자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대회 우승을 이끈 소감은?"
"에?"
"이번 대회 MVP로 뽑혔는데?"
"정말요?"
철민이는 아직 그 내용을 몰랐다.
"150키로대 강속구가 위력적이었는데 아직 무명인것을 보면 뭔가 사연이 있음
직 한데요?"
철민이는 인터뷰는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으나 자기 앞에 서 있는 카메라멘이 부
담스러웠다. 불빛이 깜박거리는 것이 자신을 찍고 있는 듯 했다.
"이거 티비에 나가나요?"
"편집해서 스포츠 뉴스 시간에 잠시 나갈 겁니다."
"안되는데요."
"예?"
"모자이크 처리해 주시던지, 옆 면만 찍으면 안될까요?"
"에? 자랑스럽게 나가는데, 무슨 이유라도?"
철민은 묵답으로 옆 모습의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자주 낯을 긁 듯 손으로 얼굴
을 가렸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잘해서 프로로 진출해야 겠지요."
"이번 대회서 보여 준 기량이라면 많은 팀들이 군침을 흘리겠네요. 마지막으로
우승 소감 한 말씀?"
"기분 좋습니다. 감독님과 동료 선수들 모두가 잘해 준 덕이라 생각합니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고 이상한 표정으로 철민이를 떠났다. 철민이는 플레시가
터질 때 마다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우승 한 기분은 정말 달랐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대회 때 우승을 해 본 경험이
있지만 그때 보다 훨씬 들뜰 수 있었다. 패전의 아픔도 없었고 어깨가 처진 채
돌아서는 감독의 모습도 없었다. 모두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단 한 명만 쑥스러
운 듯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철민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 갔다.
"김선배님, 우리 우승 했습니다."
"하하, 그래 나 우승은 처음인데..."
김현철은 히죽 웃고는 자기 기분따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시상식이 있고 철민이는 대회 MVP 수상을 했다. 이번 대회 철민이의 방어율은 0
이였다. 철민이는 대회 관계자들과 야구 관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
다. 150키로 후반 대의 강속구는 앞으로 철민이를 계속 유명해지게 할 것이다.
철민이는 우수 투수상을 받은 조승민이를 쳐다 보았다.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있
었으나 괜히 한마디 던져 주었다.
"그것도 좋은 상이야 임마. 열심히 해."
감독상은 당연히 팀을 우승으로 이끈 윤석호씨 몫이었고, 김현철도 감투상을 받
았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결과다.
철민이는 포철 입단 이후 처음으로 팀의 단장을 만나 볼 수 있었으며 격려도 받
았다. 그리고 호텔 뷔페식도 경험해 보았다.
"철민아."
"네."
회식 자리에서 감독이 철민이와 면담을 했다.
"이제 내 실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가 되었다. 우리 팀에 계속 있어 주면 고
맙겠지만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실업팀은 선수와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고
용한 것이기에 네게 팀을 고를 자유가 있다. 앞으로 네 진로는 네 의사에 달렸
다. 하지만 철민아."
"네."
"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초보다. 뭘 잘 모를거야. 내가 니 진로에 대해서 개입
을 해도 되겠냐?"
"그렇지 않아도 그 점에 대해서 상의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은 아직 제가
야구하는 것 조차도 모르십니다. 프로에 접촉하게 되면 감독님 조언이 많이 필요
할 겁니다."
"고맙다."
철민은 우승 뒤의 혼란함으로 지윤이가 경기장을 찾은 것 조차 몰랐다. 밤 늦게
끝난 우승 파티때문에 철민이는 미처 지윤이를 찾지 못했다.
우승 행사가 끝나고 철민이는 호텔 뷔페식에서 갖은 음식들을 한 아름 훔쳐냈
다.
그리고 동엽이를 찾았다.
"문 열어 임마."
"누구야?"
"나다 임마."
"지금 몇시야?"
"12시 되었냐?"
"넘었다 새꺄."
"빨리 열어 임마."
철민이는 선수 복장 그대로 동엽이의 자취방을 찾았다. 자신의 짐이 많은 부분
그대로 있는 그 방에 철민이는 야구 용품이 든 가방과 함께 찾아 들었다.
"바로 온거냐?"
"응."
"너 인터뷰 하는 거 봤다."
"경기장에 왔었냐?"
"그럼. 너 인터뷰 내용이 티비에 나왔어."
"정말?"
"하하, 내 태어나 그런 포즈로 우승 소감 밝히는 놈은 처음이다."
"얼굴 알아 보겠대?"
"못 알아 보겠더라. 무슨 범죄자냐?"
"다행이다."
"이제 말해도 되잖아."
"조금만 더 있다가. 경기장에 너 혼자 왔었냐?"
"지윤이랑 같이 갔었지."
"경기 끝나고 하도 어수선한 분위기라서 미처 너희들을 찾지 못했다. 미안하다."
"괜찮다. 지윤이가 참 기뻐하더라. 꼭 자기 일 처럼..."
"흠, 참 너 배고프냐?"
"좀 고프다."
"먹어라."
철민이는 호텔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꺼내어 놓았다. 그리고 둘은 히죽 거리며 맛
있게 먹었다. 철민은 먹다가 갑자기 가방을 열고 무언가 꺼내었다.
"이게 바로 MVP 상패여."
"관심없다."
동엽은 철민의 말에 아랑곳 없이 먹는 데만 신경을 썼다. 철민은 그런 동엽이를
또 아랑곳 하지 않고 상패를 보며 흐뭇해 했다. 그리고 그 방의 못이 난 곳을 찾
아 걸었다.
"앞으로 저걸 보며 나를 존경하는 마음을 키우도록."
"여기다 걸어 놓을 거냐?"
"내 방이라 생각하라며?"
"그래 예쁘게 걸어 놓아라. 내 고이 모셔 놓았다가 나중에 돌려주마."
"저런 걸 걸어 놓으니까 좋잖아? 방이 산다 살어."
"좋냐?"
"응."
"참, 지윤이에게는 연락해 줬냐?"
"아니."
"해 줘라."
"시간이 늦었는데?"
"기다리고 있을거야."
"니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해 줘라."
"알았다."
철민이는 지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1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지만 전
화 벨음은 두 번을 채 울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지윤이의 음성이었다.
"아직 안 잤냐?"
"철민이구나."
"응, 오늘 경기장 왔었다며?"
"그래 갔었어. 관중도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안 주더라
너."
"결승전이라 좀 떨었지. 날 부르지 그랬어."
"그냥 지켜만 봤어. 어디야?"
"여기? 동엽이 방. 회식 끝나고 바로 여기로 왔지."
"우리 집으로 오지."
"나 옷도 못 갈아 입었어. 혜지에게 바로 들키잖아."
"너 야구 하는 거 혜지가 알아 차렸어."
"뭐?"
철민이는 깜짝 놀랐다.
"너 티비에 나온거 알지? 혜지가 바로 너란 거 알아 차리던데? 이름이 나왔었
어."
"진짜? 그럼 집에서도 아는 거 아냐?"
"그건 아냐. 혜지가 집에 전화를 해 봤는데 별 일 없더라."
"고것이 집에다 말하지 않았냐?"
"안했어. 내가 잘 말해 주었거든."
"큰일이네."
"어제 네 모습 자랑스럽더라. 부모님도 자랑스러워 하실거야. 이제 말씀드려."
"조금만 더 있다가."
"아직 마음에 걸리니?"
"응."
"그래 니가 각오가 설때 직접 말씀드려."
"그나저나 혜지 걔 입막음을 어떻게 하냐?"
"한턱 내."
"그래, 너에게도 한 턱 내야지. 내일은 내가 피곤해서 안되겠고 모레 다 같이
한 번 볼래?"
"우리 집으로 와."
"너네 집으로? 거기서 뭐하게?"
"조촐하게 파티를 하자."
"무슨 파티?"
"너 축하해 줘야지."
"하하, 혜지는 자냐?"
"안 자."
"그럼 좀 바꿔 줄래?"
"안 그래도 내 옆에서 눈을 흘기며 앉아 있어."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날카로운 음성이 수화기에서 들렸다.
"어허, 오빠에게 말하는 꼴 봐라."
"감쪽같이 속였어 너."
"집에다 말하면 죽어."
철민이는 오랜만에 오전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잤다. 코를 고는 동엽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피곤했던 탓에 깊은 잠에 빠졌다. 철민이 입가에는 미소가
있었다.
"우쒸, 너 때문에 수업 못 들어 갔잖아."
"왜 나 때문이여."
"니가 일어 날 생각은 안하니까 나도 일어 나기 싫었잖여."
"핑계좋다. 너 공부 열심히 하는 거 맞어?"
"곧 시험이다. 결과가 말해 주겠지. 참고로 복학하고 바로 그 학기 성적이 과내
3등이었다."
동엽이는 표정이 바뀌면서 사뭇 비장한 모습으로 자기 성적에 대한 자랑을 했
다.
"잘난 체 하는 건 좋은데, 그 점은 항상 기억하고 있어라. 내가 고등학교 때까
지 너보다 좀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을..."
창밖의 태양은 지금까지 잤냐,라고 묻는 듯 혀를 차며 하늘 높이 떠 있다.
다음 날 철민이는 지윤이네를 찾았다. 지윤이와 지혜 자매는 철민이를 위해 맛
에 자신이 없는 수줍은 음식들을 만들고 있었다. 동엽이도 철민이와 동행을 했
다. 철민이는 이틀 동안 계속 동엽이 자취방 신세를 졌다. 혜지는 철민이를 보
자 바로 손을 벌렸다.
"뭐?"
"내 입 막는데는 돈이 좀 필요해."
"나중에 나 잘되면 그때 후회하게 될 걸. 지금 돈을 받을래 나중에 후하게 대접
받을래?"
"근데 정말 잘하고 있는거야?"
"티비에 나온 거 보면 알잖아."
"실업팀이잖아. 잘하면 프로에 갔어야지."
"내가 무명이었잖아."
"어떻게 야구 할 생각을 한거야. 도대체 몇 년을 속인거야."
"미안하다."
"나는 생각이 구식이 아니야. 뭐든 한가지 남들 보다 잘하면 된다고 봐."
"의외네."
"이왕 시작한 야구, 난 오빠가 그 박찬오처럼 잘 됐으면 좋겠어."
"나 찬오하고 잘 아는 사이다. 그리고 걔 별로 잘 돼 있지 않잖아."
"메이저리그 갔는데?"
"아직 복귀하지 못했어."
"하여간 오빠가 잘 되서 미국 갔으면 좋겠어. 그 덕에 나도 미국 구경 좀 해 보
게. 그리고 지윤이 언니도 덜 외로울 거 아냐."
"지윤이가 덜 외롭다니?"
"지윤이 언니 졸업하면 아마 외국 나갈 걸. 몰랐니?"
철민은 음식을 만드느라 부산한 지윤이를 쳐다 보았다. 동엽이도 마찬가지였다.
철민이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착 가라 앉아 버렸다.
"야, 박지윤!"
"응, 왜?"
"너도 떠나는 거야?"
"무슨 말이야?"
"너도 조만간에 멀리 떠나 버릴거냐구?"
"도대체 무슨 말이야?"
"너 졸업 하고 외국 간다며?"
지윤이는 물끄러미 그렇게 묻는 철민이를 쳐다 보았다.
"아직 결정 된 거 아니야. 집에서 그렇게 의견을 물어 보고 있는거지."
철민이는 갑자기 현주 생각이 났다. 지윤이도 현주처럼 그냥 자기가 모르는 곳으
로 떠난다면 기분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슬플 것 같았다. 요리하
는 지윤이의 뒷모습이 한순간 멀리 있는 현주의 모습과도 같이 서글픈 그리움 같
이 느껴졌다.
"한국도 좋아 임마. 외국 나가서 학위 받는 사람 이해가 안돼."
"왜, 나 떠나면 슬플 것 같니?"
"모르겠다."
작은 식탁에 제법 그럴싸한 음식들이 놓여 졌다. 조금 밝은 색의 잡채, 삶은 것
같은 새우 튀김, 어디서 배웠는지 갈비찜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거 다 요리할 줄 알았던 거야?"
철민이는 상을 차리는 지윤이에게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윤이는 쑥스러운
듯 지혜를 쳐다 보며 답을 했다.
"얘가, 식영과잖아."
"아, 참 지혜가 요리에 관계된 과에 다니지?"
"꼭 요리에 관계된 과는 아니에요."
음식은 지윤이와 지혜만 밝은 표정으로 먹을 수 있었다.
"나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동엽이가 음식을 먹고 잠시 자리를 떴다. 철민이도 같이 일어 났다.
"맛있디?"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며 하늘을 쳐다보는 동엽이에게 철민이가 넌지시 말
을 붙였다. 철민이의 질문에 동엽이는 허무하게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날려 보내
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폭식증에 걸린 공주가 살았어."
"갑지기 무슨 말이냐."
"들어 봐. 폭식증에 걸린 공주는 계속 음식을 먹었고 결국 먹은 음식 때문에 배
가 터져 죽었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오늘 음식을 먹으며 지윤이가 갑자기 싫어지더라."
"내가 하고 싶은 말도 그거야. 그 공주가 오늘 지윤이 자매가 만든 음식을 먹었
더라면 폭식증을 치료할 수 있었을텐데..."
철민이는 그래도 지윤이가 좋았다. 속이 거북한 음식을 먹었지만 그녀를 보고 밝
게 웃을 수 있었다.
"축하해."
"하하. MVP 그거 전에 보여준 우수투수상 보다 좋은거다."
"그래, 네가 잘 되는 거 보니까 나도 기뻐."
"잊혀지지 말자."
"왜 잊혀져?"
"하여간."
는 대회가 열릴 것이다.
철민이는 다가오는 대회를 내심 기대했다. 국가 대표,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다.
자기는 아직 무엇을 대표해 본 적이 없다. 초, 중등학교 시절 부반장, 반장 한 번 해
본 것이 그의 대표 경력 전부다. 중학교 때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
지만 별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야구를 시작한 후로 국가 대표를 꿈 꾼적이 없다.
동료들 중 국가 대표로 착출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부러움은 가졌지만 자기도 국가
대표가 될 것이라 각오를 한 적도 없다. 철민이는 야구를 다소 막연하게 시작한 만큼
꿈도 막연하게 꾸었던 것이다. 국가 대표, 꿈 같은 일이다. 그것이 실현 가시권 내에
들어 오자 철민이는 자기도 모르는 감흥에 젖었다. 계절도 가을이라 철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가슴 떨림이라는 것이 자주 왔다.
현재가 어려우면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이 그립고, 현재가 밝으면 예전의 어려웠던 시
절을 상기하며 미소 짓는다. 철민이는 현재가 즐겁다. 과거의 일들이 미소처럼 철민이
의 마음을 스쳐갔다.
9월 어느날, 철민이에게 가슴 떨리는 편지가 한 통 왔다. 조금만 소개해 보겠다.
"작은 도시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낯설고, 그리운 것들이 너무도 많이 떠오르지만 곁에
없다. 언제 쯤 한국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외로움에 적응이 되어 살아 온 줄 알았는
데, 난 그동안 외롭지 않았었나봐.
혼자 길을 걸어 간다는 것, 그것은 참 외로운 일이다는 것을 알았어. 넌 큰일을 했던
것 같다. 그 동안 많이 외로웠을 것 같기도 해.
철민아, 잘하고 있지?
나도 조금 외롭긴 하지만 견뎌내고 있어. 그냥 내 기분따라 쓴 편지라 내 얘기가 많
지?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지난 추억의 회상으로 잠시 위안을 받고 있다.
언젠가 만날 날 있겠지. 네가 위대한 야구 선수가 되어 있기를 바래.
잊혀지지 않는 친구에게 현주가."
짝사랑은 이어질 것 같다. 짝사랑 상대에게 자기가 잊혀지지 않는데, 감히 자기가 그
를 잊어 버릴 수가 있겠는가. 꿈 속에 잠시 스친 한 번의 만남으로 한 달을 그리워
할 수 있는데, 철민은 현주에게 다시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보낸 이의 주소가 없었
다. 우표에 찍힌 소인만으로 마음만 먹으면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철민은 그것을 몰랐다.
'왜 주소를 적지 않은 것일까.'
철민이는 편지를 받고 지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윤이냐?"
"응."
"너 혹시 현주하고 연락하고 지내냐?"
"아니. 거의 연락이 끊어 졌어. 근데 현주 소식은 왜?"
"아, 현주에게 편지가 왔는데, 너도 받지 않았나 해서."
"받지 못했어. 걔가 왜 너에게만 편지를 보낸거야?"
"별 내용은 없어. 낯선 곳이라 좀 외로운가 봐. 현주가 어디 있는 줄은 아니? 보낸 주
소가 없어."
"오빠하고 미국으로 간 것 밖에는 아는게 없는데."
"집에 연락하면 알 수 있을려나?"
"왜? 알아 봐 줄까?"
"됐다."
"너 현주하고 친했니?"
"조금 어색했던 느낌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현주가 어디 있는 지 알아봐 줄까?"
"됐다니까."
"후후."
"왜 웃냐?"
"열심히 하라고."
"알았다."
철민이는 자기가 변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철민이는 현주의 소식을 지윤에
게 숨기지 못했다. 철민이가 느낀 것은 현주가 자기에게만 편지를 보냈다는 것, 그 느
낌은 짝사랑에 대한 위로였다. 지윤이에게 가리워지던 현주가 철민이 마음속에 가을
편지와 함께 가슴떨림으로 다가 왔다.
"이번 대회 목표는 결승 진출이다. 우리는 우승이라는 것을 해 본 사람들이다. 결승
진출을 하면 우리는 우승을 할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해
라."
대회가 시작 되었다.
"감독님은 언제 결혼 하실거에요?"
"몰라."
첫 경기는 포철이 여유있게 앞서 가고 있었다. 철민이는 등판도 하지 않은 경기였다.
덕 아웃 벤취에서 경기가 여유있게 풀리자 철민이가 감독에게 말을 걸었다. 감독이
젊은 이유로 포철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분위기다.
"저번에 선 본 여자분은 잘 안됐어요?"
"마음에 드는 데, 왠지 어색해."
"감독님이 그렇게 굳어 계셨는데, 어색했던 것은 당연하잖아요."
"나이가 먹으면 느낌이라는 것이 와."
"아니던가요? 제 친구 말로는 여자분도 감독님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 같다고 하던데
요."
"호감을 가진다고 결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 분은 포기하신 거에요?"
"친해져 봐야지. 여유가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편한 상대가 좋아. 조금
만나 보다 편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포기해야지 뭐."
"올해는 장가 가시기 힘들겠네요."
"그래 임마. 네 여자친구하고 너는 참 편해 보이더라."
덕 아웃에서 이런 얘기를 주고 받을 정도로 포철은 첫 경기 여유로운 대승을 거두었
다.
두 번째 경기에서 철민이가 선발을 맡았다. 실업 강자의 하나인 상무였다. 하지만 상
무는 특급 투수를 보유하지 못했다.
마운드에 올라 선 철민이는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자신감이 표출 된
것이다. 마운드에 우뚝 서 있는 철민이는 그야말로 위대한 존재였다. 포철에서 뽑아내
는 점수는 그것이 바로 결승점이었다.
싱싱한 어깨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는 상대 타자들에게 공포감마저 들
게 했다. 철민이는 다시 한번 대회 관계자들과 야구 인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
었다.
4강전 상대팀은 오히려 약팀이었다. 완숙기에 접어 든 김현철이가 상대 타자들을 잘
요리했다. 철민이 덕에 계투 요원으로 밀려 난 진환이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기대대로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 보다 큰 대회에서도 우승한 우리가 실업만
참가한 이 대회에서 우승을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본다. 철민이
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은 좋지 못하지만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2점 이상만 뽑아주
고 수비만 하던대로 해 주면 된다. 또 한 번 우승을 해서 올해 만이라도 우리가 실업
최강이라는 소리를 들어 보자."
"내일 결승전인데 와 볼거지?"
"그래 가 볼게. 근데 동엽이는 연락이 되지 않아."
"동엽이는 예비군 훈련 간대."
"그럼 나혼자 가야 돼?"
"혜지하고 지혜도 데리고 와라."
"자신감이 있나 보네."
"자만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는데, 자신 있어."
"자만심 아니야. 참, 현주는 텍사스 오스틴에 있다더라."
"응? 거기가 어디야?"
"그런 곳이 있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보자."
철민이는 전화를 끊고 그냥 피식 웃었다.
결승전 상대는 프로팀과 거의 맞먹는 실력을 가진 현대였다. 상대는 국가 대표팀 에
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문똥환이였다.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철민이는 문똥환이를 째려 봤다. 문똥환이는 예전부터 별로 높
아 보이던 녀석이 아니다. 맞상대를 펼쳐 벌써 이겨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말도 걸지
않았다. 철민이는 인사를 마치고 뒤 돌아 서는 문똥환이의 등에다 대고 함성을 질렀
다.
"아자!"
철민이는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관중석에는 지윤이 자매와 자기의 동생인 혜지가 있
었다. 철민이는 몸을 풀다 말고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오라고 했다고 다 왔구만."
"오빠 결승전 투수는 대단한 거지?"
관중석에 쳐진 그물망에 숙녀 셋이 나란히 붙어 서서 불펜에 있는 철민과 말을 주고
받는 모습에서 철민이는 인기인 처럼 보였다.
"그럼."
"오빠, 집에는 언제 말할거야?"
"나 야구 하는 거?"
"응."
"곧."
"나 아방떼 사주는 거 잊지마. 그리고 나 오토매틱."
"알았어. 지혜도 갖고 싶은 거 있니?"
"저야 뭐. 오빠, 야구복 입으니까 멋있네요."
"얘는 뭘 입어도 자기는 멋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애야."
"지윤이 네 손가락에 끼어 진 반지가 참 빛이 난다."
"그래, 잃어 버리지 않으려고 잘 때도 빼지 않는다. 됐지?"
"좋은 자세다."
"잘 해."
"알았어."
"오빠, 나중에 오빠가 프로선수가 되면 야구 공짜로 볼 수 있는거야?"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표는 구해 줄 수 있겠지."
"야구 좋아하는 남자를 꼬셔야 겠네."
"그것도 좋은 자세다."
철민이가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자 감독이 소리쳤다.
"김 철민, 몸 풀지 않고 뭐해 임마. 벌써 건방져 진거야?"
"아닙니다."
철민이는 일회말 불안하게 경기를 시작했다. 안타와 볼넷을 허용해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주자를 일,이루에 두게 했었다. 하지만 실점하지는 않았다. 관중석에 자
기의 펜이 있었고, 마운드에서 만큼은 자신감이 넘치는 철민이는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분명 팀 구성원으로 보면 포철은 현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의 무명에 가
까운 선수들 뿐인 포철은 대부분이 국가 대표 경력이 있는 현대 선수들에게 비교가
되어도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렇지만 경기 내용은 팽팽했다.
철민은 참 오랜만에 실점을 해 보게 되었다. 기분 나쁜 실점은 아니었다. 상대팀에서
철민이의 능력을 인정하고 철저한 작전에 의한 득점을 했기 때문이다. 철민이가 마운
드에 있는 한 현대는 포철을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점은 크게 느껴졌다.
포철은 경기가 종반으로 가는 시점에서 아직 득점을 올리지 못했을 뿐더러 변변한 득
점 기회도 잡지 못했다.
철민이는 표정이 다소 굳은 채 덕 아웃에서 자기 팀의 공격을 지켜 보았다.
"이제 선수가 다 됐구나."
감독이 넌지시 철민이에게 말을 던졌다.
"그 한 점을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요."
"이제 넌 곧 나를 떠날 것 같다. 오늘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되던 넌 잘한거야. 니가 잘
하겠다는 마음과 경기를 이끌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니가 팀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말
아라. 완벽한 선수는 없는거야. 캐치 볼 포수도 팀에 필요하니까 있는거다. 너도 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타자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 봐라. 너무 혼자만 잘 하려고 해
서도 꺾이기 쉬운거야. 경기에 지면 모든 팀원들에게 책임이 있고, 경기에 이겨도 모
든 팀원들의 덕분이다. 알았나."
"네."
"방금 소식을 들었다. 이 번 아시아 선수권 국가 대표팀에 후훗, 너는 몰랐는데 김현
철이도 포함이 될 줄이야. 우리 팀에서 두 명이나 국가 대표로 발탁이 되었다. 이 번
팀은 투수력 강화에 중점을 둔 모양이다."
"제가 국가 대표에 포함이 되었습니까?"
"그래 임마."
철민이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철민이는 뒤 돌아 김선배를 쳐다 보았다. 김현철
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아무말도 못하고 눈은 한곳에 고정 되어 진채 눈물을 글
썽거렸다.
"정말 감독님 말씀이 맞네요."
"그렇지? 우리 타자들도 한다면 해."
감독은 자리에 일어서서 사인을 내기 시작했다. 득점 찬스를 맞이 했기 때문이다. 그
리고 이내 점수를 뽑아 냈다. 한 점을 뒤진 채 덕 아웃으로 들어 갔던 철민이는 두점
을 이긴 상황에서 다시 마운드로 올랐다. 철민이는 운동장을 돌아 보며 선수들에게
환한 미소를 던졌다.
철민은 마운드를 내려 오면서 관중석에 사이 좋게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는
세 여자들을 보며 또한 미소를 지었다. 구회초 포철의 공격은 별 의미를 부여하지 못
했다. 현대의 투수는 세명이 교체를 당하고 마운드를 내려간 상태였다. 철민이는 덕아
웃에서 감독에게 조용히 건의를 드렸다.
"감독님, 제가 타석에 한 번 들어 서면 안되겠습니까?"
"뭐어?"
"투 아웃이 되고, 누상에 주자가 없는 의미없는 상황이 되면 저도 타석에 한 번 들어
서 보고 싶습니다."
"너 혹시 외국 나갈 생각하는거냐?"
"그건 아닙니다. 누구에게 홈런 쳐 준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어서요."
"너 타격 연습한 적 없지?"
"네."
"안돼. 손목 다쳐. 정 타석에 들어 서고 싶다면 연습을 한 뒤에 많은 조언을 받고 올
라가라. 네 공이 얼마큼 위력적인지 모르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 팀 투수가 던
지는 공을 한 번 받아 쳐봐. 공을 받아 칠 때 손목과 허리에 가해지는 충격이 생각보
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안돼. 다치게 되면 책임 못지는 일이 발
생한다. 딴 생각 하지 말고 투수 역할에만 충실해라. 9회말도 네가 책임 질 수 있겠
냐?"
"그건 뭐. 저 이제 백개 정도 밖에 던지지 않았는데요 뭘."
"대충 세고 있었냐? 넌 투수로서 거의 완벽한 조건을 타고 났어. 아직 네 투구수의 한
계가 몇 개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많이 던질 기회도 없었지만. 보통 선발 투수들은
100-120개 가량을 한계 투구수로 보지. 물론 무리를 한다면 200까지도 던질 수 있어.
그래도 한계 투구수를 넘기면 급격히 구속이 떨어지지. 넌 우리 팀의 여건상 나왔다
하면 거의 완투인데, 별 무리를 느끼는 것을 못 봤어. 내가 투수였지만 정말 혀를 내
두를 만큼 부러운 놈이다."
철민이는 타석에 들어 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승이 확정되는 그 순간 마운드에 있
었다.
"또 우승이다!"
이번 대회는 다소 비중이 작은 경기라 티비에서 직접 인터뷰를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신문 기자들은 철민이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철민이는 집
에 자기가 야구를 한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철민이 자신도 이제는 말하리라 생각했
지만 그것보다 집에서 먼저 알게 된다.
철민은 대회 우승을 한 다음 날, 아주 바빴다. 서서히 프로야구단 삼성측에서는 철민
이를 일차 지명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신인 최고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곧 있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표에 선발 된 철민이는
당장 선수단 소집이 있는 곳으로 가 앞으로의 일정을 통보 받아야 했다.
대회가 끝이 난 이틀 째였다. 선수단 소집이 있는 모대학의 운동장에 모인 국가 대표
선수들은 철민이에게 낯이 익은 유명한 대학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선배님이 제일 늙었네요."
"그런가? 하하."
"무명 선수는 우리 뿐이네요."
"니가 왜 무명이냐?"
"저 무명 아닌가요? 현대를 제외한 실업에서 온 선수들은 우리 말고 딱 한명 뿐이네
요."
"그렇네."
"선배님이 팀의 주장을 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런 것은 상관없어. 난 지금 꿈을 꾸는 것 같다."
선수단 소집의 제일 목적은 선수단 상견례였다.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이 소개되었고,
선수들간의 인사도 있었다. 철민이와 김현철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다 잘 알고 있
는 사이 같았다.
"선배님이 없었더라면 상당히 소외감 느꼈겠어요."
"나도 그래. 니가 없었으면 여기 말 붙일 사람 한 명도 없다."
"김철민 선배님이시죠?"
"응?"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전..."
"알아 임마. 똥국대 전석이지? 너도 외국 나간다며?"
"아, 네. 선배님은 올해 아마추어 최대어라고 말씀들이 많더군요."
"내가?"
"그래 임마, 넌 무명이 아니라니까."
선수단은 본격적으로는 일주일 뒤 팀을 구성해서 훈련에 돌입할 것이다. 합숙소 생활
을 하고 대회가 열리는 대만에는 20일 후에 떠난 다는 통보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유니폼들을 나눠 주었다. 철민이는 별 생각없이 유니폼을 받았으나 김현철은 손
을 떨며 자신의 유니폼을 받았다. 팀으로 돌아 오는 버스 안에서 김현철은 내내 유니
폼에 새겨진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매만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많이 감동되세요?"
"그럼 임마. 프로도 진출하지 못해서 실업에서 5년을 보냈다. 언제나 무명이었고, 무명
인 채로 내 야구 인생이 끝이 날 것이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
대표가 되었어. 너 같으면 눈물이 나지 않겠냐."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초보티는 여기서도 나나 봐요."
"유니폼의 태극기를 봐라. 한 분야에서 국가의 대표라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을 주지."
"흠, 전 아직 제가 국가 대표라는 게 실감도 안 나는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잘해 보자. 너한테 참 고맙다."
"저두요."
철민이는 김현철과 헤어지고 난 뒤 바로 지윤이를 불렀다.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자
랑하고 싶었기에.
하늘 높은 어느 계절에 실내 조명등이 고운 어느 찻집에서 철민이는 지윤이와 마주
보며 앉았다.
"나 국가 대표 된 건 알지?"
"응, 지금 내가 국가 대표 야구 선수인 유명인과 마주하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해."
"헤헤, 그건 딴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거구. 넌 외국을 나가 봤기 때문에 그 자랑은
못하겠고..."
"다 들어 줄테니까,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후후, 너무 유명해져서 만나기
어려우면 어떡하지?"
"유명해져도 내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느끼고 대하는 태도가 바뀔거라 생각은 안해."
"그래. 뭐 자랑할건데?"
"이게 뭔 줄 아나?"
철민이는 국가 대표 야구 유니폼을 꺼내 놓았다.
"야구복? 이게 대표선수들이 입는 야구복이야? 티비에도 나오던?"
"응, 앞면에는 KOREA라고 적혀 있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뒷면이지. C.M.KIM 이라
고 적혀 있는 게 뭘 의미하는 줄 아냐?"
"호호, 너 이름이라구?"
"음, 그렇지. 바로 철민 킴의 영어 이니셜이지. 등번호도 내가 줄곧 쓰던 28번이야."
"자랑스럽니?"
"당연하쥐. 가슴팍에 턱 붙어 있는 태극기를 봐라. 자랑스럽지 않겠냐."
"축하해."
"20일 뒤에 나도 드디어 비행기를 타 본다."
"대회가 대만에서 열린다고 했지?"
"알고 있군. 대만은 섬이여. 버스를 타고 갈 수는 없지. 그렇다고 국가 대표를 배 태워
보내겠냐."
"비행기 타 본 적 없어?"
"응. 혜지도 못 타봤거든. 걔한테는 이것도 자랑해야지. 동엽이 새끼도 못 타봤을 거
같애. 하하."
철민이는 바로 합숙소로 돌아 가려 했으나 지윤의 권유로 지윤이네 아파트로 가게 되
었다. 기분 좋게 동생인 혜지에게 자랑을 할 것이란 기대는 바로 심각한 걱정으로 바
뀌고 말았다.
"어, 오빠 마침 잘 왔다."
혜지는 철민이가 들어서자 마자 근심어린 얼굴로 말을 건넸다.
"왜?"
"조금 있다가 아빠가 여기로 오실거야."
"아버지가 왜?"
"오빠 야구하는 거 들켰어."
"엉?"
"아까부터 오빠를 찾았는데 연락이 안되더라. 알만한 곳은 다 연락해 봤어. 동엽이 오
빠도 곧 올거야."
철민이 얼굴은 사색이 될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유니폼이 들어 있던 가방도 한쪽에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내 버려 두고 거실에서 두렵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아버지가
오시기만 기다렸다.
"너무 걱정하지마."
"별 걱정은 안해. 그렇지만 마음이 아프다."
"설마 야구 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을거야."
지윤이가 철민이를 계속 위안 시키려 해 보지만 철민이의 표정은 어둡다.
"이제 그런 단계는 지났어. 아버지가 야구 하지 말란다고 야구 그만 둘 나도 아니고,
아버지도 차마 그런 말씀은 못 하실거야. 그렇지만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들켰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자식에게 많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시면 내
가 상처 받을 만한 말씀을 하실것도 같고."
"니가 잘 되어 있는데 화를 내실려구."
"울 아버지는 내가 운동이나 연예계 쪽으로 꿈을 꾸는 것 자체를 인정하시지 않았을
거야. 튀지 말랬거든."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니가?"
잠시 후 철민의 아버지가 지윤이 아파트에 도착을 했다. 모두들 아버지의 표정을 살
피며 어색한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는 철민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윤아, 네 방에 잠시 들어 가도 되겠냐?"
"네."
지윤이는 자기 방 문을 열어 주었다.
"철민이는 잠시 나 좀 보자."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하고 지윤이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철민이는 아무말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 갔다. 지윤이 자매와 혜지는 조용하게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지는 지 방문 앞에 모여 앉았다. 방안에서는 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세요?"
"나, 동엽이."
동엽이가 숨을 헐떡이며 지윤이네를 찾았다.
"너 마침 잘 왔어."
"철민이 아버님 오셨니?"
"응, 철민이도 왔어.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이거? 철민이가 MVP 되고 난 뒤 받은 상패. 아버님 어디 계시냐?"
"내 방에서 지금 철민이와 얘기 중이야."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던?"
"아니야, 그래도 표정이 많이 어두우시더라."
이제 지윤이 방문 앞에는 동엽이를 포함한 네 명이 모여 앉아 안의 상황에 대해 관심
을 보이고 있다.
지윤이 방은 담배 연기로 너구리 굴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뭔가 답답한 것이 많았
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기분 탓으로 이 방이 숙녀가 쓰는 타인의 방이라는 것을 잊
고 계속 담배만 피워 대셨다. 철민이는 꿇어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뒤돌아 앉아 계셨
다. 철민이를 부른 지 삼십분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한 마디도 없으셨다.
아버지가 종이컵에 두둑히 쌓인 담배 꽁초에 마지막 담배를 끄고 난 뒤 드디어 입을
여셨다.
"니 맘대로 하니까 좋던?"
철민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끝까지 반대만 할 것 같던?"
철민이는 그때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튀니까 좋대?"
아버지의 음성이 점점 고조를 띄기 시작했다.
"왜 대답이 없어 임마."
"먼저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니 맘대로 했다가 만약 어긋났으면 어떡할래? 아무리 니 인생은 니 것이라고 이렇게
깡그리 부모를 제외 시켜 버리면 마음이 편하디?"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허락하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말씀 드리지 못했지, 부모
님 생각을 안 한 건 아닙니다."
"우리 생각 하지 않고 니 맘대로 했잖아."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서운해 하실거란 생각은 했습니다."
"서운해? 하늘이 무너진다, 하늘이. 니가 내 자식 맞냐? 내가 니 아버지 맞냐구? 내가
솔직히 너한테 다른 부모 이상으로 잘해 준 것은 없다. 무관심 했던 거 인정한다. 그
래도 내가 너들 잘 키울려고 노력한 탓에 무관심해 보였던 것이지, 내 마음도 무관심
했다는 생각은 말아라. 언제부터 야구했어?"
"대학 일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했습니다."
"그럼 오년을 속였냐? 그 동안 마음 참 편했겠다?"
아버지는 등을 돌린 채 철민이를 나무라기 보다는 자기의 서운함을 표시하는 것 같았
다.
"아닙니다. 부모님께 늘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제가 노력할 수 있었던
것에 그 죄송함을 만외하려는 마음이 많이 포함 됐을 겁니다."
"죄송할 것 없다. 앞으로도 니 맘대로 하고 살아."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척 거린다. 답답하신가 보다.
"밖에 혜지 있냐?"
"네? 네."
"가서 담배 한 갑 사 오너라."
"네."
아버지는 다시 말씀을 하지 않으신 채 뒤 돌아 앉아 있다.
잠시 뒤 방문이 열렸다. 혜지가 담배 사가지고 들어 온 것이라 생각한 아버지는
"담배 거기 놔두고 나가 봐라."
라고만 말씀 하시고 계속 뒤 돌아 앉아 있었다. 철민이도 들어 온 이에게 시선을 주
지 않고 꿇어 앉아 있었다.
"저, 아버님."
들어 온 사람은 지윤이었다. 지윤이는 철민이와 조금 떨어져 꿇어 앉아 철민이 아버
지를 불렀다. 아버지도 지윤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지윤이는 들고 왔던 것을 아버지 쪽으로 밀어 드리며 한 말씀 드렸다.
"철민이는 집에 속이고 있던 자신의 처지를 늘 죄송스러워 했습니다. 제가 다른 말씀
드리기는 경우가 없겠습니다만 이것을 보시고 그 동안 철민이가 노력했던 점을 인정
해 주세요."
오마샤리프 담배 아래는 철민이의 국가 대표 유니폼과 상패가 놓여져 있었다. 지윤이
가 나가고 나자 아버지는 담배를 집는 척 유니폼과 상패도 함께 자기 앞으로 가져 갔
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고 선 한참을 상패와 유니폼을 들여 다 보았다.
"니가 야구를 하면서 이룩한 것이냐?"
"네."
아버지는 십분 정도 말이 없으시다가 뒤 돌아 앉았다. 철민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꿇어 앉아 있었다.
"이제는 속이지 말아라."
그리고 살펴 보느라 흥클어 졌던 유니폼을 고이 개어 놓고는 상패를 들고 일어 섰다.
시계는 열시가 가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철민이를 그냥 지나쳐 방문을 열고 나가셨다.
거실에 나온 아버지는 지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윤이는 언제 봐도 예쁘구나. 나 이제 가볼게."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가 봐야지. 니 방에서 담배를 펴 미안하다."
"아니에요."
"혜지는 열심히 공부해라."
"네."
"동엽이도 제법 어른스러워 졌다."
"예? 하하. 철민이가 야구를 시작한 것에는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가 볼게."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께 지윤이는 인사를 하고선 바로 방으로 들어 갔다. 철민이는
그때까지 꿇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이 개어 놓은 유니폼을 보며 눈물을 떨어 뜨리
고 있다.
"아버님 가셔. 얼른 가서 모셔다 드려."
철민이는 말이 없다.
"빨리 일어 나, 차 타시는 데 까지라도 배웅해 드려."
철민이는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
지 곁에 말없이 섰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철민이도 마찬가지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도 침묵만 흘렀다.
부자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으면서도 말이 없었다. 철민이 눈에 보여진 아
버지의 자가용은 조금 초라해 보였다.
아버지는 차 앞문을 열고서 철민이를 쳐다 보았다. 철민이는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해. 그리고 엄마에게는 니가 다시 잘 말해라. 나보다 엄마가 충격이 컸을거
다."
그러고는 아버지는 차에 타 버렸다. 투박한 시동음과 함께 아버지가 타고 온 차는 떠
났다. 철민이는 아버지의 자가용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고정된 채 서 바
라 보았다.
철민이는 발걸음을 떼다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개이는 기분
을 느꼈다. 이러면 될 걸 왜 진작 말씀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오늘 아버
지와 있던 그 몇 시간을 이겨 내지 못해 자기가 야구 한다는 것을 알리지 못한 용기
로 어떻게 지금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지윤이가 고마웠다.
철민이는 지윤이네를 찾았다. 비좁은 지하철에서 내내 서서 온 철민이는 자기에
게 곧 몇 억이 생긴다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 했다.
"지윤아, 혜지야."
"왜?"
철민이는 지윤이네 거실에서 둘을 앉혀 놓고 히죽거렸다.
"너네들 운전 면허증 있냐?"
"지윤이 언니는 있어."
혜지가 실룩거리며 답을 했다.
"혜지 너도 빨리 면허증을 따도록."
"그렇지 않아도 이번 방학 때 운전을 배울 생각이야."
"그래, 내가 하나뿐인 여동생을 위해 졸업 선물로 자가용을 한 대 사주마."
"푸후후!"
지윤이가 푸후,하고 웃었다. 옆에서 혜지도 지윤이처럼 웃었다.
"왜 웃어 임마."
"나도 사주게?"
지윤이가 멀뚱하게 철민이를 쳐다 보며 묻는다.
"잘 보이면 사 줄수도 있지."
"오빠가 무슨 돈이 있는데?"
"어제 말이다. 그리고 내가 말이다. LG라는 프로팀에게 말이다. 입단 조건으로
말이다. 놀라지 말란 말이다."
"왜 자꾸 말이다라는 말을 쓰는거야? 입단 조건으로 뭐?"
혜지가 철민이를 위, 아래로 꼬아 본다.
"2억5천만원을 제시 받았다. 들어나 봤나? 2억 5천만원."
"정말?"
꼬아 보던 혜지는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지윤이도 놀라기는 마찬
가지였다.
"그래서 계약 했어?"
지윤이가 물었다.
"더 놀라지 말아라. 우리 감독님께서 철민이는 5억은 받아야 돼, 하시면서 거
절 하셨지. 하하, 나 대단한 놈인 거 같어."
"휴우!"
혜지는 뭔가 다행인 듯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왜 한 숨을 짓고 그래?"
"아니야."
한 동안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혜지는 철민이 가까이로 아주 귀여운 표정으로 다
가와 앉았다.
"오빠, 나 이번에 새로 나온 아방떼, 그거 사주라."
"그거? 그거 못 사주겠냐. 아버지 차도 계약금 받으면 바꿔 드리지 뭐. 교장이
니까 구렌져 타고 다니셔도 되겠지?"
"응, 지윤이 언니네 차 타 봤는데 확실히 좋더라. 차 두대 값 합해도 오빠 계약
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치?"
"하하! 그럼."
지윤이는 철민이 남매의 즐거운 모습을 보며 웃는다. 그러다 한 마디 넌지시
내 뱉었다.
"미국으로 가면 더 나은 대우 받지 않을까?"
철민이는 감독의 말처럼 더 나은 대우를 꿈꾸며 열심히 훈련을 했다. 더운 여
름 철민이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도 우승을 했던 자신감으로
열심히 훈련에 동참했다.
"나도 내년엔 프로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투구 연습을 하며 땀을 흘리던 김현철이가 철민이에게 작은 미소로 넌지
시 말을 건넸다.
"정말요?"
"내게도 프로팀에서 제의가 들어 왔어. 꽤 괜찮은 조건이었어."
"선배님도 조금 더 기다려 봐요. 한번 더 우승 합시다. 조건이 더 좋아지겠지
요?"
"하하."
"너무 무리하시지 마시구요. 우리 자연스럽게 우승 합시다."
"그러지."
철민이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거만하지 못했기에 누군가 자기를 칭찬해 주
면 그것이 힘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배님 변화구는 진짜 절묘하네요. 나도 선배님만큼만 변화구를 던지면 초일류
가 될텐데..."
철민이는 김현철의 투구를 보면서 틈나는데로 칭찬을 했다. 가식적이지 않고 자
연스러웠다.
"이건 노력하면 할 수 있는거야. 네 어깨처럼 되는 것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뜻이 아닌데..."
"알아. 내 뒤틀린 성격도 네 덕에 많이 좋아졌어."
"그래요. 선배님은 노력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거에요."
철민이는 간혹 현주 생각이 났다. 하지만 현주의 모습은 이내 지윤이에게 가려
지곤 했다. 안 보면 잊혀진다. 짝사랑의 대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주는 지윤이 때문에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간혹 생각이나도 잊지 않
고 산다는 것. 현주는 철민이에게 결코 잊혀진 존재는 아니었다. 철민이는 현주
생각에 지윤의 생일을 기억해 냈다.
지윤의 생일이 있기 며칠 전 철민은 지윤을 만났다. 지윤이 생일을 모르고 지나
친 적이 한 두해가 아니다. 어머니나 지윤이가 아니었다면 자기 생일도 지나칠
뻔한 적이 많았기에 변명을 해 보지만 지윤이에게 미안했다.
"지윤씨."
"엉? 뭔씨?"
"심심해서 그렇게 함 불러 봤다. 뭐 갖고 싶은 거 있냐?"
"돈 생긴다고 자꾸 그런 말 하지마."
"내가 지금 당장 돈이 생긴 게 아니잖아. 나 월급쟁이여. 당장 내게 뭐 받고 싶
은 거 없냐구."
"왜?"
"그냥 받고 싶은 거 말하면 되잖아."
"갑자기 그렇게 물으니까 생각나는 게 없잖아."
지윤이는 철민이의 표정을 살피며 수줍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철민이가 자기
생일 선물을 사주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뭘 받고 싶은 지 고민하는
듯 손가락을 만지작 거린다.
"너 주고 싶은 거 주면 그냥 고맙게 받을게."
"왜 그렇게 주체성이 없냐.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주장을 잘 밝힌다고 하더만."
"그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지윤이는 더 쑥스러운 듯 손가락질이다. 철민이가 갑자기 지윤이의 손을 덥썩
잡았다. 오른 손, 왼 손 돌려가며 잡고선 손가락을 살폈다.
"넌 손가락에 아무것도 끼지 않았네."
"너, 내 손 잡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거지?"
"허, 내가 니 손 잡는 걸 어색해 할 것 같냐? 한 두번 잡아 본 것도 아니고 말
이야. 그나저나 손가락에 아무것도 없다."
"왜? 반지라도 사주게."
"알았다. 너 내가 아무 반지나 사와도 불만 없기다. 내 마음에 드는 것 산다?"
"알았어."
철민이는 많이 고급스러운 보석점에 들어 갔다가 그냥 나오지 못했다. 맘에 드
는 반지를 하나 골랐다가 점원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멀뚱했었다. 그러다 쓸데
없는 곳에서 자기가 위대한 존재라고 자각을 했다.
"애인분에게 그 만큼 좋은 선물도 없죠."
"애인한테 줄 것 아닌데요."
"그럼 사모님에게 주실 건가 보네요. 결혼 반지하고는 조금 분위기가 틀리죠?
좋은 선물이 될거에요. 결혼 기념일 선물?"
"저 총각인데요."
"그럼 결혼 반지? 그것도 괜찮아요. 예물용으로도 그 형태가 무난할겁니다. 다
이아몬드는 변치 않거든요. 그리고 링이 그냥 18k가 아니라 백금으로 장식된 것
이어서 또 보기가 좋죠. 젊은 세련미와 조화된 성숙미가 느껴지잖아요. 오래 보
관하셔도 좋을 겁니다."
"얼만데요?"
"저희 업소는 정찰제입니다."
"안사면 안샀지 전 깎고 그러지는 않아요."
"186만 5천원입니다."
"5천원만 깎아줘요."
"안되는데요."
"186만원이면 진짜 삽니다. 저 조금 있으면 유명해 질 거거든요."
"그러면 안되는데... 좋습니다. 깎아 줄게요. 받으실 분 손가락 굵기는 어느 정
도에요?"
"잘 모르는데요. 저기 아가씨 좀 불러 주실수 있어요?"
"왜요?"
"손가락을 보면 대충 알 것 같아서요."
여자 점원 하나가 철민이에게로 왔다.
"이 분 검지가 걔 약지와 비슷한 굵기 같아요."
철민이는 과감하게 카드를 긁었다. 자기 통장에 제법 몫 돈이 모아져 있었고,
곧 많은 계약금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친구의 생일 선물로는 과한
것 같았다. 나오면서 이걸 왜 샀을까? 지윤이가 내게 뭔데? 하는 생각들로 배도
좀 아팠다. 오천원 깎은 것도 별로 기분을 좋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
시 뿐이었다. 지윤이가 이 걸 받고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별로 아깝지 않았다.
'졸업 선물은 없다. 씨.'
철민이는 지윤이 생일 날 아침 일찍 전화를 했다.
"나 철민인데..."
"왜?"
"오늘 누구 초대할거냐?"
"무슨?"
"니 생일이잖아."
"아, 맞다. 내 생일이구나. 그냥 미역국만 끓여 먹지 뭐. 지혜도 집에 내려갔
고, 혜지도 엊그제 집에 내려 갔어."
"고것이 내게 얘기도 없이 내려갔어."
"언제는 얘기하고 내려 갔니?"
"너는 니 생일인데 남의 생일처럼 얘기하냐?"
"후후, 그냥 니가 자주 지나쳐 버리고 나도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집에
만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넘기는 수가 많아서 그렇다."
"내가 모르고 지나쳐 버린게 무슨 큰 의미가 되냐?"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근데 올해는 어떻게 내 생일을 다 기억해 주네."
"그럼 임마. 축하해."
"고마워. 감격까지 할려고 그런다."
"오늘 생일 파티 해 주려고 했는데 내가 좀 바쁘다 야."
"괜찮아. 이렇게 내 생일인 걸 기억해 준 것만도 많이 발전한 건데 뭘."
"오늘 낮에 잠시만 보자."
"오늘 낮에? 어디서?"
"오늘 내가 서울에 가 봐야 돼. 본사에서 무슨 상을 준다네. 그것 때문에 너하
고 있을려고 했던게 물거품이 되었어."
"무슨 상 받는데?"
"회사에서 상반기 결산 우수 사원 시상식 겸 피로연을 연대. 나도 우수 사원인
가봐."
"축하 해."
"그래. 삼성동 쪽으로 나올래?"
"그럴까."
"그럼 한 시에 인터컨티넨탈 호텔 앞으로 나와라. 거기서 점심으로 칼질이나
한 번 하자."
"호텔? 얘가 점점..."
"오늘 거기서 시상식이 있어. 내가 호텔을 자주 가봤냐. 저번에 우승 피로연때
나 가 봤지."
"후후."
철민이는 샤워도 하고 머리를 매만졌으며 여름 정장으로 멋을 부렸다. 그리고
곱게 포장 된 선물을
쟈켓 안 주머니에 넣고 합숙소를 나왔다.
"감독님도 일찍 나가시네요. 정장이 잘 어울려요."
철민이는 나오다 감독을 만났다.
"너도 잘 어울린다."
"어디 가세요?"
"선보러 간다."
"에이, 가리늦가 무슨 장가에요. 그냥 혼자 사세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나 진짜 선보러 가 임마."
"진짜에요?"
"그래. 오늘 한 시에 시상식이 있는 그 호텔에서 본다."
"에?"
"왜?"
"차만 드실거에요. 식사도 하실거에요?"
"선 보는데 식사도 대접해야지."
"부모님도 오실 거에요?"
"흠, 그래. 나이가 40이 다 되어 가도 결혼 문제라..."
"부모님도 오시면 한식이겠다."
"아니, 양식 먹을건데..."
"하필은 왜 오늘이에요?"
"오늘이 시간 내기 좋잖아. 어짜피 시상식 때문에 나가 봐야 하니까."
상경하면서 철민이는 감독과 내내 같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나란히 앉았다.
"이왕이면 차 한대 사시지요."
"집 살려고 돈 모았어 임마."
"좋은 집 사려구요?"
"좋은 집은 무슨 좋은 집이냐. 프로 연고권이 있는 도시에 그냥 자그만 아파트
하나 사려고 모았지."
"몇 평이나요?"
"가족 이루고 살려면 25평 이상은 되어야 겠지?"
"몇 년이나 모았는데요?"
"10년."
"오래 모으셨네요. 얼마나 모았는데요?"
"그걸 왜 물어 임마."
"아파트 살 돈은 모았어요?"
"바로 살 수 있는 돈에는 좀 부족할 것 같은데 분양 받을 수 있는 돈은 돼."
"그래요?"
"그래 임마. 너 나중에 많은 계약금 받게 되도 적은 돈 귀한 줄 알고 낭비하지
마라. 내가 십년 동안 합숙소 생활하며 집에다 생활비 보내 드린 거 빼고는 내
월급 대부분을 저축하며 꾸준히 모은 돈이래야 일 억 조금 더 되는 돈이야. 흠,
세상은 참 불공평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철민이는 가슴팍에 있는 선물 꾸러미가 양심에 찔렸다.
"나중에 프로야구 감독이 되시면..."
"그래, 나중에 프로 야구 감독 되는게 내 꿈이지. 결혼을 하게 되고 내 생활이
안정이 되면 일년 정도 야구 유학을 갈거야. 그리고 돌아 와 프로야구단 코치로
들어 가 볼 생각이지. 그 돈은 내가 따로 모아놨어."
"무슨 장가를 가고 나서 유학을 가요."
"한국에 뭔가 남겨 놓고 가야 하지 않겠냐."
"사모님은 독수공방 하게요?"
"데리고 가지 뭐."
"그럼 뭘 남겨 놓고 가는데요?"
"내 꿈 많았던 총각시절."
윤석호씨와 철민이가 호텔앞에 도착했을 때, 지윤이도 나와 있었다.
"인사 해. 우리 감독님이야."
"아,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감독은 지윤이를 보자 웃었다.
"하하, 몇 번 봤지요? 철민이가 참 예쁜 애인을 두었네요."
"에?"
지윤이는 수줍게 웃었고, 철민이는 아무말 없었다.
"넌 왜 이리 들어 와."
"저도 호텔에서 점심식사 한 번 해볼려고 그럽니다."
"한식 먹어라."
"싫은데요."
"너 내가 선 볼 사람이 네 애인보다 못 생겼으면 나중에 놀릴려고 그러지?"
"안 놀려요. 그냥 웃지요."
'근데 쟤가 내 애인 맞나?'
철민이는 감독이 선 보는 자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지윤이와 앉았다.
"너 정장 입으니까 멋있네."
지윤이는 감독 때문에 말이 없다가 자리에 앉자 마자 철민이에게 말을 붙였다.
"당연하지. 내가 뭘 입은 들 멋있지 않겠냐. 너도 호텔 온다고 격식 있는 옷을
입고 왔군. 제법 숙녀 같다."
"치, 그럼 내가 숙녀가 아니니?"
"뭐 먹을래?"
"뭐 사줄건데?"
"내가 사 줘야 되냐?"
"그럼 내 생일인데. 영화에 보니까 바올린도 켜주고 샴페인도 터뜨려 주더라."
"그런 영화들 때문에 여자들이 헛바람이 드는거야."
"그래, 식사 대접에 만족할게."
"네 생일이기 때문에 까스가 아닌 스테이크로 사 준다. 골라 봐."
"감독님은 꼭 선보러 온 분위기다?"
지윤이가 메뉴판을 살피다 감독이 앉은 자리를 잠시 쳐다 보았다.
"선 보러 온 거 맞아."
"아직 결혼 안하셨어?"
"응. 우리 감독님 39살 노총각."
"그럼 맞은 편에 있는 여자분은 맞선 상대?"
"예뻐 보이냐?"
"응."
"너보다 못한 거 같다."
"왠일이니 내 칭찬을 다해 주고."
"너도 제법 예쁜 얼굴이니까 자부심을 가져."
"호호, 나 예쁘다고 생각해."
"겸손하게 받아 들이는 자세를 좀 길러라."
"예쁜게 사실이라서 겸손하게 받아 들인거야."
철민이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선물을 꺼내 놓지 않았다. 커피가 테이블에 놓였
고 둘은 히죽이 웃었다.
"언제까지 시간 돼?"
지윤이가 커피잔을 들며 물었다.
"아직은 괜찮아. 감독님도 일어 설 생각을 않잖아."
"부모님들은 가셨네?"
"저렇게 얼어 가지고 좋은 점수를 받긴 걸렀다."
감독의 모습은 정말 그랬다. 굳은 자세로 70년대 맞선 분위기 같았다.
"둘이 수줍어 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정겹게 느껴지지 않니?"
"뭐가 정겹냐? 졸라 어색하지."
"여자분 모습이 그렇게 싫어하는 표정이 아니야."
"그렇냐?"
"응."
"우리 감독님 좋은 분인데."
철민이는 지윤이가 감독을 쳐다 보는 동안 슬쩍 선물을 꺼내 놓았다. 지윤이가
고개를 돌리며 그것을 보았다.
"어! 이거 내 생일 선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거 반지지?"
"아네?"
"내가 바보냐. 그때 네 태도 보고 이 번 생일은 좀 기대를 했었는데, 기대한 보
람이 있었네. 어떤 반진지 한 번 볼까?"
지윤이는 포장을 뜯었다. 작은 쪽지가 동봉 되어 있었다. 철민이는 잔을 들고
커피 마시는 척 하고 있다.
"별 내용 없으니까 그건 안 읽어도 돼."
"그래도. (생일 축하 한다. 헤...) 이게 뭐야."
"별 내용 없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이 정도 일 줄이야."
지윤이는 밝은 표정으로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더 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
다. 만족한다는 뜻이 겠지.
철민이는 밝게 미소짓는 지윤이의 표정이 좋았다. 잔을 놓고 어깨를 떡 벌리며
과시를 하는 모양이다.
"내가 무리를 좀 했지."
"야, 예쁘다. 큐빅? 크리스탈? 꼭 다이야몬드 같다."
"응?"
"꽤 주었겠는데? 링도 18케이고..."
"가격이 뭐 중요하냐. 성의가 중요하지."
"그래, 고마워."
"잃어 버리지 말고 오래 가지고 있어라. 잃어 버리면 졸라 배 아플 것 같으니
까."
"그래."
"끼어 봐."
"어느 손가락에 낄까?"
"이거 바보 아냐? 맞는 손가락에 끼어야지."
"내 손가락 굵기는 알고 산거야?"
"대충 맞으면 끼는 거지 뭐."
아직은 이르다. 예전에 현주에게 구두를 사 줄때에는 꼭 맞는 걸 사기 위해 동
생을 불렀던 적이 있다. 그게 뭔 상관이여.
"약지에 꼭 맞는 것 같다. 너, 내 치수에 대해 제법 많이 안다?"
"뭐 그 정도야."
지윤은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반지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거 정말 진짜 같다."
철민은 진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까 감독의 말에서 이 반지의 가격이 자기
나이에는 과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니가 진짜하고 가짜하고 구별할 수 있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반지가 참 예쁘다."
"잃어 버리지 마."
"알았어. 이거 끼고 다녀도 되지?"
"끼고 다니라고 사 준거잖아. 단 잃어 버리지 마라."
"진짜 손가락에 잘 맞네."
지윤이는 계속 반지 낀 손가락을 펼쳐 보며 미소 짓고 있다. 철민이도 기쁘다.
철민이는 지금 지윤이가 신고 있는 구두가 자기가 현주에게 선물하려 했던 그
구두란 걸 모르고 있다.
철민이는 시상식에서 금장식 메달을 받았다. 회사 홍보에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
는 감사패도 받았다.
여름은 기분 좋게 흘러 가고 있었다.
9월 어느날, 철민이에게 가슴 떨리는 편지가 한 통 왔다. 조금만 소개해 보겠
다.
"작은 도시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낯설고, 그리운 것들이 너무도 많이 떠오르지
만 곁에 없다. 언제 쯤 한국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외로움에 적응이 되어 살
아 온 줄 알았는데, 난 그동안 외롭지 않았었나봐.
혼자 길을 걸어 간다는 것, 그것은 참 외로운 일이다는 것을 알았어. 넌 큰일
을 했던 것 같다. 그 동안 많이 외로웠을 것 같기도 해.
철민아, 잘하고 있지?
나도 조금 외롭긴 하지만 견뎌내고 있어. 그냥 내 기분따라 쓴 편지라 내 얘기
가 많지?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지난 추억의 회상으로 잠시 위안을 받
고 있다.
언젠가 만날 날 있겠지. 네가 위대한 야구 선수가 되어 있기를 바래.
잊혀지지 않는 친구에게 현주가."
짝사랑은 이어질 것 같다. 짝사랑 상대에게 자기가 잊혀지지 않는데, 감히 자기
가 그를 잊어 버릴 수가 있겠는가. 꿈 속에 잠시 스친 한 번의 만남으로 한 달
을 그리워 할 수 있는데, 철민은 현주에게 다시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보낸
이의 주소가 없었다. 우표에 찍힌 소인만으로 마음만 먹으면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철민은 그것을 몰랐다.
'왜 주소를 적지 않은 것일까.'
철민이는 편지를 받고 지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윤이냐?"
"응."
"너 혹시 현주하고 연락하고 지내냐?"
"아니. 거의 연락이 끊어 졌어. 근데 현주 소식은 왜?"
"아, 현주에게 편지가 왔는데, 너도 받지 않았나 해서."
"받지 못했어. 걔가 왜 너에게만 편지를 보낸거야?"
"별 내용은 없어. 낯선 곳이라 좀 외로운가 봐. 현주가 어디 있는 줄은 아니?
보낸 주소가 없어."
"오빠하고 미국으로 간 것 밖에는 아는게 없는데."
"집에 연락하면 알 수 있을려나?"
"왜? 알아 봐 줄까?"
"됐다."
"너 현주하고 친했니?"
"조금 어색했던 느낌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현주가 어디 있는 지 알아봐 줄까?"
"됐다니까."
"후후."
"왜 웃냐?"
"열심히 하라고."
"알았다."
철민이는 자기가 변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철민이는 현주의 소식을
지윤에게 숨기지 못했다. 철민이가 느낀 것은 현주가 자기에게만 편지를 보냈다
는 것, 그 느낌은 짝사랑에 대한 위로였다. 지윤이에게 가리워지던 현주가 철민
이 마음속에 가을 편지와 함께 가슴떨림으로 다가 왔다.
"이번 대회 목표는 결승 진출이다. 우리는 우승이라는 것을 해 본 사람들이다.
결승 진출을 하면 우리는 우승을 할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위대하다
고 생각해라."
대회가 시작 되었다.
"감독님은 언제 결혼 하실거에요?"
"몰라."
첫 경기는 포철이 여유있게 앞서 가고 있었다. 철민이는 등판도 하지 않은 경기
였다. 덕 아웃 벤취에서 경기가 여유있게 풀리자 철민이가 감독에게 말을 걸었
다. 감독이 젊은 이유로 포철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분위기다.
"저번에 선 본 여자분은 잘 안됐어요?"
"마음에 드는 데, 왠지 어색해."
"감독님이 그렇게 굳어 계셨는데, 어색했던 것은 당연하잖아요."
"나이가 먹으면 느낌이라는 것이 와."
"아니던가요? 제 친구 말로는 여자분도 감독님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 같다고 하
던데요."
"호감을 가진다고 결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 분은 포기하신 거에요?"
"친해져 봐야지. 여유가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편한 상대가 좋아.
조금 만나 보다 편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포기해야지 뭐."
"올해는 장가 가시기 힘들겠네요."
"그래 임마. 네 여자친구하고 너는 참 편해 보이더라."
덕 아웃에서 이런 얘기를 주고 받을 정도로 포철은 첫 경기 여유로운 대승을 거
두었다.
두 번째 경기에서 철민이가 선발을 맡았다. 실업 강자의 하나인 상무였다. 하지
만 상무는 특급 투수를 보유하지 못했다.
마운드에 올라 선 철민이는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자신감이 표
출 된 것이다. 마운드에 우뚝 서 있는 철민이는 그야말로 위대한 존재였다. 포철
에서 뽑아내는 점수는 그것이 바로 결승점이었다.
싱싱한 어깨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는 상대 타자들에게 공포감마
저 들게 했다. 철민이는 다시 한번 대회 관계자들과 야구 인사들에게 강한 인상
을 심어 주었다.
4강전 상대팀은 오히려 약팀이었다. 완숙기에 접어 든 김현철이가 상대 타자들
을 잘 요리했다. 철민이 덕에 계투 요원으로 밀려 난 진환이도 좋은 모습을 보
여 주었다.
"우리는 기대대로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 보다 큰 대회에서도 우승한 우리가
실업만 참가한 이 대회에서 우승을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본
다. 철민이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은 좋지 못하지만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2점
이상만 뽑아주고 수비만 하던대로 해 주면 된다. 또 한 번 우승을 해서 올해 만
이라도 우리가 실업 최강이라는 소리를 들어 보자."
"내일 결승전인데 와 볼거지?"
"그래 가 볼게. 근데 동엽이는 연락이 되지 않아."
"동엽이는 예비군 훈련 간대."
"그럼 나혼자 가야 돼?"
"혜지하고 지혜도 데리고 와라."
"자신감이 있나 보네."
"자만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는데, 자신 있어."
"자만심 아니야. 참, 현주는 텍사스 오스틴에 있다더라."
"응? 거기가 어디야?"
"그런 곳이 있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보자."
철민이는 전화를 끊고 그냥 피식 웃었다.
결승전 상대는 프로팀과 거의 맞먹는 실력을 가진 현대였다. 상대는 국가 대표
팀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문똥환이였다.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철민이는 문똥환이를 째려 봤다. 문똥환이는 예전부터 별
로 높아 보이던 녀석이 아니다. 맞상대를 펼쳐 벌써 이겨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말도 걸지 않았다. 철민이는 인사를 마치고 뒤 돌아 서는 문똥환이의 등에다 대
고 함성을 질렀다.
"아자!"
철민이는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관중석에는 지윤이 자매와 자기의 동생인 혜지
가 있었다. 철민이는 몸을 풀다 말고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오라고 했다고 다 왔구만."
"오빠 결승전 투수는 대단한 거지?"
관중석에 쳐진 그물망에 숙녀 셋이 나란히 붙어 서서 불펜에 있는 철민과 말을
주고 받는 모습에서 철민이는 인기인 처럼 보였다.
"그럼."
"오빠, 집에는 언제 말할거야?"
"나 야구 하는 거?"
"응."
"곧."
"나 아방떼 사주는 거 잊지마. 그리고 나 오토매틱."
"알았어. 지혜도 갖고 싶은 거 있니?"
"저야 뭐. 오빠, 야구복 입으니까 멋있네요."
"얘는 뭘 입어도 자기는 멋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애야."
"지윤이 네 손가락에 끼어 진 반지가 참 빛이 난다."
"그래, 잃어 버리지 않으려고 잘 때도 빼지 않는다. 됐지?"
"좋은 자세다."
"잘 해."
"알았어."
"오빠, 나중에 오빠가 프로선수가 되면 야구 공짜로 볼 수 있는거야?"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표는 구해 줄 수 있겠지."
"야구 좋아하는 남자를 꼬셔야 겠네."
"그것도 좋은 자세다."
철민이가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자 감독이 소리쳤다.
"김 철민, 몸 풀지 않고 뭐해 임마. 벌써 건방져 진거야?"
"아닙니다."
철민이는 일회말 불안하게 경기를 시작했다. 안타와 볼넷을 허용해 아웃 카운
트 하나 잡지 못하고 주자를 일,이루에 두게 했었다. 하지만 실점하지는 않았
다. 관중석에 자기의 펜이 있었고, 마운드에서 만큼은 자신감이 넘치는 철민이
는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분명 팀 구성원으로 보면 포철은 현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선수들 뿐인 포철은 대부분이 국가 대표 경력
이 있는 현대 선수들에게 비교가 되어도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렇지만 경기 내
용은 팽팽했다.
철민은 참 오랜만에 실점을 해 보게 되었다. 기분 나쁜 실점은 아니었다. 상대
팀에서 철민이의 능력을 인정하고 철저한 작전에 의한 득점을 했기 때문이다. 철
민이가 마운드에 있는 한 현대는 포철을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점
은 크게 느껴졌다. 포철은 경기가 종반으로 가는 시점에서 아직 득점을 올리지
못했을 뿐더러 변변한 득점 기회도 잡지 못했다.
철민이는 표정이 다소 굳은 채 덕 아웃에서 자기 팀의 공격을 지켜 보았다.
"이제 선수가 다 됐구나."
감독이 넌지시 철민이에게 말을 던졌다.
"그 한 점을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요."
"이제 넌 곧 나를 떠날 것 같다. 오늘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되던 넌 잘한거야.
니가 잘하겠다는 마음과 경기를 이끌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니가 팀의 전부라고
는 생각지 말아라. 완벽한 선수는 없는거야. 캐치 볼 포수도 팀에 필요하니까 있
는거다. 너도 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타자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 봐라. 너
무 혼자만 잘 하려고 해서도 꺾이기 쉬운거야. 경기에 지면 모든 팀원들에게 책
임이 있고, 경기에 이겨도 모든 팀원들의 덕분이다. 알았나."
"네."
"방금 소식을 들었다. 이 번 아시아 선수권 국가 대표팀에 후훗, 너는 몰랐는
데 김현철이도 포함이 될 줄이야. 우리 팀에서 두 명이나 국가 대표로 발탁이 되
었다. 이 번 팀은 투수력 강화에 중점을 둔 모양이다."
"제가 국가 대표에 포함이 되었습니까?"
"그래 임마."
철민이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철민이는 뒤 돌아 김선배를 쳐다 보았다.
김현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아무말도 못하고 눈은 한곳에 고정 되어 진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감독님 말씀이 맞네요."
"그렇지? 우리 타자들도 한다면 해."
감독은 자리에 일어서서 사인을 내기 시작했다. 득점 찬스를 맞이 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이내 점수를 뽑아 냈다. 한 점을 뒤진 채 덕 아웃으로 들어 갔던 철
민이는 두점을 이긴 상황에서 다시 마운드로 올랐다. 철민이는 운동장을 돌아 보
며 선수들에게 환한 미소를 던졌다.
철민은 마운드를 내려 오면서 관중석에 사이 좋게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는 세 여자들을 보며 또한 미소를 지었다. 구회초 포철의 공격은 별 의미를 부
여하지 못했다. 현대의 투수는 세명이 교체를 당하고 마운드를 내려간 상태였
다. 철민이는 덕아웃에서 감독에게 조용히 건의를 드렸다.
"감독님, 제가 타석에 한 번 들어 서면 안되겠습니까?"
"뭐어?"
"투 아웃이 되고, 누상에 주자가 없는 의미없는 상황이 되면 저도 타석에 한
번 들어 서 보고 싶습니다."
"너 혹시 외국 나갈 생각하는거냐?"
"그건 아닙니다. 누구에게 홈런 쳐 준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어서요."
"너 타격 연습한 적 없지?"
"네."
"안돼. 손목 다쳐. 정 타석에 들어 서고 싶다면 연습을 한 뒤에 많은 조언을 받
고 올라가라. 네 공이 얼마큼 위력적인지 모르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리 팀
투수가 던지는 공을 한 번 받아 쳐봐. 공을 받아 칠 때 손목과 허리에 가해지는
충격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안돼. 다치게 되면
책임 못지는 일이 발생한다. 딴 생각 하지 말고 투수 역할에만 충실해라. 9회말
도 네가 책임 질 수 있겠냐?"
"그건 뭐. 저 이제 백개 정도 밖에 던지지 않았는데요 뭘."
"대충 세고 있었냐? 넌 투수로서 거의 완벽한 조건을 타고 났어. 아직 네 투구
수의 한계가 몇 개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많이 던질 기회도 없었지만. 보통 선
발 투수들은 100-120개 가량을 한계 투구수로 보지. 물론 무리를 한다면 200까지
도 던질 수 있어. 그래도 한계 투구수를 넘기면 급격히 구속이 떨어지지. 넌 우
리 팀의 여건상 나왔다 하면 거의 완투인데, 별 무리를 느끼는 것을 못 봤어. 내
가 투수였지만 정말 혀를 내 두를 만큼 부러운 놈이다."
철민이는 타석에 들어 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승이 확정되는 그 순간 마운드
에 있었다.
"또 우승이다!"
이번 대회는 다소 비중이 작은 경기라 티비에서 직접 인터뷰를 요청하지는 않았
지만 신문 기자들은 철민이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철
민이는 집에 자기가 야구를 한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철민이 자신도 이제는 말
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집에서 먼저 알게 된다.
철민은 대회 우승을 한 다음 날, 아주 바빴다. 서서히 프로야구단 삼성측에서
는 철민이를 일차 지명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신인 최고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곧 있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표
에 선발 된 철민이는 당장 선수단 소집이 있는 곳으로 가 앞으로의 일정을 통보
받아야 했다.
대회가 끝이 난 이틀 째였다. 선수단 소집이 있는 모대학의 운동장에 모인 국
가 대표 선수들은 철민이에게 낯이 익은 유명한 대학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선배님이 제일 늙었네요."
"그런가? 하하."
"무명 선수는 우리 뿐이네요."
"니가 왜 무명이냐?"
"저 무명 아닌가요? 현대를 제외한 실업에서 온 선수들은 우리 말고 딱 한명 뿐
이네요."
"그렇네."
"선배님이 팀의 주장을 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런 것은 상관없어. 난 지금 꿈을 꾸는 것 같다."
선수단 소집의 제일 목적은 선수단 상견례였다.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이 소개되
었고, 선수들간의 인사도 있었다. 철민이와 김현철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다
잘 알고 있는 사이 같았다.
"선배님이 없었더라면 상당히 소외감 느꼈겠어요."
"나도 그래. 니가 없었으면 여기 말 붙일 사람 한 명도 없다."
"김철민 선배님이시죠?"
"응?"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전..."
"알아 임마. 똥국대 전석이지? 너도 외국 나간다며?"
"아, 네. 선배님은 올해 아마추어 최대어라고 말씀들이 많더군요."
"내가?"
"그래 임마, 넌 무명이 아니라니까."
선수단은 본격적으로는 일주일 뒤 팀을 구성해서 훈련에 돌입할 것이다. 합숙
소 생활을 하고 대회가 열리는 대만에는 20일 후에 떠난 다는 통보가 있었다. 그
리고 마지막으로 유니폼들을 나눠 주었다. 철민이는 별 생각없이 유니폼을 받았
으나 김현철은 손을 떨며 자신의 유니폼을 받았다. 팀으로 돌아 오는 버스 안에
서 김현철은 내내 유니폼에 새겨진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매만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많이 감동되세요?"
"그럼 임마. 프로도 진출하지 못해서 실업에서 5년을 보냈다. 언제나 무명이었
고, 무명인 채로 내 야구 인생이 끝이 날 것이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
데, 이렇게 국가 대표가 되었어. 너 같으면 눈물이 나지 않겠냐."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초보티는 여기서도 나나 봐요."
"유니폼의 태극기를 봐라. 한 분야에서 국가의 대표라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을
주지."
"흠, 전 아직 제가 국가 대표라는 게 실감도 안 나는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잘해 보자. 너한테 참 고맙다."
"저두요."
철민이는 김현철과 헤어지고 난 뒤 바로 지윤이를 불렀다. 실감은 나지 않았지
만 자랑하고 싶었기에.
하늘 높은 어느 계절에 실내 조명등이 고운 어느 찻집에서 철민이는 지윤이와
마주 보며 앉았다.
"나 국가 대표 된 건 알지?"
"응, 지금 내가 국가 대표 야구 선수인 유명인과 마주하고 있다는 게 참 신기
해."
"헤헤, 그건 딴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거구. 넌 외국을 나가 봤기 때문에 그
자랑은 못하겠고..."
"다 들어 줄테니까,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후후, 너무 유명해져서
만나기 어려우면 어떡하지?"
"유명해져도 내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느끼고 대하는 태도가 바뀔거라 생각은 안
해."
"그래. 뭐 자랑할건데?"
"이게 뭔 줄 아나?"
철민이는 국가 대표 야구 유니폼을 꺼내 놓았다.
"야구복? 이게 대표선수들이 입는 야구복이야? 티비에도 나오던?"
"응, 앞면에는 KOREA라고 적혀 있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뒷면이지. C.M.KIM 이
라고 적혀 있는 게 뭘 의미하는 줄 아냐?"
"호호, 너 이름이라구?"
"음, 그렇지. 바로 철민 킴의 영어 이니셜이지. 등번호도 내가 줄곧 쓰던 28번
이야."
"자랑스럽니?"
"당연하쥐. 가슴팍에 턱 붙어 있는 태극기를 봐라. 자랑스럽지 않겠냐."
"축하해."
"20일 뒤에 나도 드디어 비행기를 타 본다."
"대회가 대만에서 열린다고 했지?"
"알고 있군. 대만은 섬이여. 버스를 타고 갈 수는 없지. 그렇다고 국가 대표를
배 태워 보내겠냐."
"비행기 타 본 적 없어?"
"응. 혜지도 못 타봤거든. 걔한테는 이것도 자랑해야지. 동엽이 새끼도 못 타봤
을 거 같애. 하하."
철민이는 바로 합숙소로 돌아 가려 했으나 지윤의 권유로 지윤이네 아파트로 가
게 되었다. 기분 좋게 동생인 혜지에게 자랑을 할 것이란 기대는 바로 심각한 걱
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 오빠 마침 잘 왔다."
혜지는 철민이가 들어서자 마자 근심어린 얼굴로 말을 건넸다.
"왜?"
"조금 있다가 아빠가 여기로 오실거야."
"아버지가 왜?"
"오빠 야구하는 거 들켰어."
"엉?"
"아까부터 오빠를 찾았는데 연락이 안되더라. 알만한 곳은 다 연락해 봤어. 동
엽이 오빠도 곧 올거야."
철민이 얼굴은 사색이 될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유니폼이 들어 있던 가방도 한
쪽에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내 버려 두고 거실에서 두렵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
고 아버지가 오시기만 기다렸다.
"너무 걱정하지마."
"별 걱정은 안해. 그렇지만 마음이 아프다."
"설마 야구 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을거야."
지윤이가 철민이를 계속 위안 시키려 해 보지만 철민이의 표정은 어둡다.
"이제 그런 단계는 지났어. 아버지가 야구 하지 말란다고 야구 그만 둘 나도 아
니고, 아버지도 차마 그런 말씀은 못 하실거야. 그렇지만 내가 먼저 말하기 전
에 들켰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자식에게 많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기도 하
고, 화가 나시면 내가 상처 받을 만한 말씀을 하실것도 같고."
"니가 잘 되어 있는데 화를 내실려구."
"울 아버지는 내가 운동이나 연예계 쪽으로 꿈을 꾸는 것 자체를 인정하시지 않
았을 거야. 튀지 말랬거든."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니가?"
잠시 후 철민의 아버지가 지윤이 아파트에 도착을 했다. 모두들 아버지의 표정
을 살피며 어색한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는 철민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윤아, 네 방에 잠시 들어 가도 되겠냐?"
"네."
지윤이는 자기 방 문을 열어 주었다.
"철민이는 잠시 나 좀 보자."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하고 지윤이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철민이는 아무말 못
하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 갔다. 지윤이 자매와 혜지는 조용하게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지는 지 방문 앞에 모여 앉았다. 방안에서는 한 동안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누구세요?"
"나, 동엽이."
동엽이가 숨을 헐떡이며 지윤이네를 찾았다.
"너 마침 잘 왔어."
"철민이 아버님 오셨니?"
"응, 철민이도 왔어.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이거? 철민이가 MVP 되고 난 뒤 받은 상패. 아버님 어디 계시냐?"
"내 방에서 지금 철민이와 얘기 중이야."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던?"
"아니야, 그래도 표정이 많이 어두우시더라."
이제 지윤이 방문 앞에는 동엽이를 포함한 네 명이 모여 앉아 안의 상황에 대
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윤이 방은 담배 연기로 너구리 굴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뭔가 답답한 것
이 많았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기분 탓으로 이 방이 숙녀가 쓰는 타인의 방이라
는 것을 잊고 계속 담배만 피워 대셨다. 철민이는 꿇어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뒤돌아 앉아 계셨다. 철민이를 부른 지 삼십분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한 마디도
없으셨다.
아버지가 종이컵에 두둑히 쌓인 담배 꽁초에 마지막 담배를 끄고 난 뒤 드디어
입을 여셨다.
"니 맘대로 하니까 좋던?"
철민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끝까지 반대만 할 것 같던?"
철민이는 그때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튀니까 좋대?"
아버지의 음성이 점점 고조를 띄기 시작했다.
"왜 대답이 없어 임마."
"먼저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니 맘대로 했다가 만약 어긋났으면 어떡할래? 아무리 니 인생은 니 것이라고
이렇게 깡그리 부모를 제외 시켜 버리면 마음이 편하디?"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허락하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말씀 드리지 못했
지, 부모님 생각을 안 한 건 아닙니다."
"우리 생각 하지 않고 니 맘대로 했잖아."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서운해 하실거란 생각은 했습니다."
"서운해? 하늘이 무너진다, 하늘이. 니가 내 자식 맞냐? 내가 니 아버지 맞냐
구? 내가 솔직히 너한테 다른 부모 이상으로 잘해 준 것은 없다. 무관심 했던
거 인정한다. 그래도 내가 너들 잘 키울려고 노력한 탓에 무관심해 보였던 것이
지, 내 마음도 무관심 했다는 생각은 말아라. 언제부터 야구했어?"
"대학 일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했습니다."
"그럼 오년을 속였냐? 그 동안 마음 참 편했겠다?"
아버지는 등을 돌린 채 철민이를 나무라기 보다는 자기의 서운함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부모님께 늘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제가 노력할 수
있었던 것에 그 죄송함을 만외하려는 마음이 많이 포함 됐을 겁니다."
"죄송할 것 없다. 앞으로도 니 맘대로 하고 살아."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척 거린다. 답답하신가 보다.
"밖에 혜지 있냐?"
"네? 네."
"가서 담배 한 갑 사 오너라."
"네."
아버지는 다시 말씀을 하지 않으신 채 뒤 돌아 앉아 있다.
잠시 뒤 방문이 열렸다. 혜지가 담배 사가지고 들어 온 것이라 생각한 아버지
는
"담배 거기 놔두고 나가 봐라."
라고만 말씀 하시고 계속 뒤 돌아 앉아 있었다. 철민이도 들어 온 이에게 시선
을 주지 않고 꿇어 앉아 있었다.
"저, 아버님."
들어 온 사람은 지윤이었다. 지윤이는 철민이와 조금 떨어져 꿇어 앉아 철민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도 지윤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지윤이는 들고 왔던 것을 아버지 쪽으로 밀어 드리며 한 말씀 드렸다.
"철민이는 집에 속이고 있던 자신의 처지를 늘 죄송스러워 했습니다. 제가 다
른 말씀 드리기는 경우가 없겠습니다만 이것을 보시고 그 동안 철민이가 노력했
던 점을 인정해 주세요."
오마샤리프 담배 아래는 철민이의 국가 대표 유니폼과 상패가 놓여져 있었다.
지윤이가 나가고 나자 아버지는 담배를 집는 척 유니폼과 상패도 함께 자기 앞으
로 가져 갔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고 선 한참을 상패와 유니폼을 들여 다 보았다.
"니가 야구를 하면서 이룩한 것이냐?"
"네."
아버지는 십분 정도 말이 없으시다가 뒤 돌아 앉았다. 철민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꿇어 앉아 있었다.
"이제는 속이지 말아라."
그리고 살펴 보느라 흥클어 졌던 유니폼을 고이 개어 놓고는 상패를 들고 일어
섰다. 시계는 열시가 가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철민이를 그냥 지나쳐 방문을 열고 나가셨다.
거실에 나온 아버지는 지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윤이는 언제 봐도 예쁘구나. 나 이제 가볼게."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시지요."
"가 봐야지. 니 방에서 담배를 펴 미안하다."
"아니에요."
"혜지는 열심히 공부해라."
"네."
"동엽이도 제법 어른스러워 졌다."
"예? 하하. 철민이가 야구를 시작한 것에는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가 볼게."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께 지윤이는 인사를 하고선 바로 방으로 들어 갔다. 철
민이는 그때까지 꿇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이 개어 놓은 유니폼을 보며 눈물
을 떨어 뜨리고 있다.
"아버님 가셔. 얼른 가서 모셔다 드려."
철민이는 말이 없다.
"빨리 일어 나, 차 타시는 데 까지라도 배웅해 드려."
철민이는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있
는 아버지 곁에 말없이 섰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철민이도 마찬가지다. 엘레베
이터 안에서도 침묵만 흘렀다.
부자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으면서도 말이 없었다. 철민이 눈에 보여
진 아버지의 자가용은 조금 초라해 보였다.
아버지는 차 앞문을 열고서 철민이를 쳐다 보았다. 철민이는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해. 그리고 엄마에게는 니가 다시 잘 말해라. 나보다 엄마가 충격이 컸
을거다."
그러고는 아버지는 차에 타 버렸다. 투박한 시동음과 함께 아버지가 타고 온 차
는 떠났다. 철민이는 아버지의 자가용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고정된
채 서 바라 보았다.
철민이는 발걸음을 떼다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개이
는 기분을 느꼈다. 이러면 될 걸 왜 진작 말씀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컸
다. 오늘 아버지와 있던 그 몇 시간을 이겨 내지 못해 자기가 야구 한다는 것을
알리지 못한 용기로 어떻게 지금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리고 지
윤이가 고마웠다.
철민이는 잠시 양해를 고하고 지윤이 방으로 혼자만 들어 갔다. 그리고 국가 대
표 유니폼을 입고 나왔다.
"어울려 보이냐?"
"응."
지윤이가 환한 웃음으로 답을 했다.
"사진기 없냐? 사진이나 한 번 찍자."
사진기 속 필름이 단 두장 밖에 남지 않았다.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은 철민이
는 그 곳에 있던 모두가 함께 있는, 그리고 지윤이와 단 둘이만 있는 사진을 각
각 한 장씩 찍었다.
철민이는 사일 뒤 팀에서 자기 짐들을 빼 냈다. 그리고 하루를 동엽이 자취방에
서 보낸 뒤 국가 대표 팀에 합류를 했다.
"선배님이 주장이 되셨네요."
"그래, 내가 제일 연장자라서 뽑혔나 봐."
"유니폼이 멋져요."
"너도."
"전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린데요."
"그래."
철민이는 팀의 중심 투수가 되어 본 것이 포철 팀에 들어 간 후였다. 대학 때
는 짧은 시간 한 때를 제외하곤 초보 투수로서 기량만 테스트 받는 그런 수준이
었다. 그러나 현재 국가 대표 팀내에서도 철민은 중심 투수로 대접을 받았다.
첫날 훈련을 받고 합숙을 하는 호텔로 돌아 온 철민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 생
각은 않고, 같은 방을 쓰는 동료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국가 대표는 호텔에서 합숙을 하는구나. 첨 알았네. 야, 조승민."
"왜요?"
"너 진짜 일본 갈 거냐?"
"거의 확실시 되어 가요."
"일본 말 할 줄 아냐?"
"몰라요."
"말을 몰라도 갈 수 있냐?"
"통역이 있잖아요."
"너 유명인 맞지?"
"대충."
"사인하나 해 주라."
"참내, 형과 나는 같은 소속이에요. 형, 찬오와도 같은 방 썼다면서요. 걔한테
도 사인 받았어요?"
"그녀석은 그때 별로 유명하지 않았어. 올해 메이저리그로 복귀가 되면서 다시
좀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나이퀴 광고에도 나오고 유명하잖아요."
"다리를 너무 치켜 들어. 그때는 유명하지 않았다니까."
"저도 지금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요."
"너 참 잘생겼다. 물론 나보다는 못하지만."
"내일 일찍 일어 나려면 지금 자야 돼요."
"너야 이런 생활에 익숙해서 잠이 잘 오겠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다."
"주무세요."
'더런 놈, 좀 더 이야기하다가 자지. 그나저나 좋은 거 하나 또 알았다. 이 놈
은 상당히 변태적으로 코를 곤다. 아아, 크러릉? 예전 찬오는 방이 졸라 지저분
하더니 이 놈은 괴상하게 코를 곤다. 특급 투수들의 모르는 면을 나는 많이 아는
구나. 하하, 근데 잠이 안 온다.'
철민은 한 참을 멀뚱히 천정만 바라 본 채 딴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
윤이 생각이 제일 먼저 났고, 가족 생각, 현주 순으로 생각을 했다. 동엽이는 별
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철민이가 연습 투구를 하는 자리에 감독과 투수 코치가 함께 서 있다. 감독은
고대의 감독이었고, 코치도 제법 유명한 이였다.
"이 녀석 듣던 것 보다 훨씬 대단한데요."
"장코치는 이 녀석이 경기에서 직접 투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지? 한마디로 괴
물이야."
'이렇게 잘 생긴 괴물 봤남?'
"구속은 오히려 찬오를 능가할 수도 있겠는데요."
"윤감독이 제법 잘 조련을 시켰어. 큰 경기에 얼만큼 적응을 하느냐가 문제인
데."
"결승전 경험이 세번이나 있더군요. 예선전 일본 전에 선발을 맡겨 보지요."
"그럴 생각이야. 똥환이나 승민이의 체력을 비축시킬 수 있겠군."
"경험만 있다면 그들보다 오히려 낫겠어요."
"그래."
철민이가 던진 공이 포수 글러브 미트에 굉음을 울리며 계속 꼿히고 있었다.
국가 대표들과 어울리며 철민이는 보름을 보냈다. 철민이는 이 시간 외국의 선
수들에 대해서도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의 시야가 국내에서 외국으로 넓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출국 전날 국가 대표 선수들은 짧은 휴가를 받아 합숙소를 나올 수 있었다. 내
일 출국에 앞서 가족들에게 멀리 떠나는 작별의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한 감독의
배려였다. 그리고 긴장 되는 순간에 친한 주위 사람들에게서 위안을 받게 할 요
량도 있었다.
철민이는 오전에 합숙소를 나오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요?"
"그래, 안 그래도 지금 네 아버지랑 서울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왜요?"
"왜요긴. 내일 니가 외국으로 나가는데 배웅은 해야 하지 않겠냐."
"기분 많이 풀리셨어요?"
"아직 좀 서운하지만 어쩌겠냐. 관계자에게 연락해 보니까 오늘 저녁까지는 니
가 시간을 낼 수 있다면서?"
"네."
"저녁이나 같이 먹게, 지윤이네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이 친구 동엽이도 오라
고 해라."
"알았어요. 엄마는 제가 야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불만 없죠?"
"모르겠다."
"제가 나중에 프로로 갈 때 계약금 받으면 엄마 갖고 싶은 그 모피 코트 사드릴
게요."
"그런거 안 사줘도 되니까 니 할일이나 잘 해. 근데 진짜 프로로 갈 때 일억 이
상 받고 그러냐?"
"일억이 문제겠어요."
"돈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라."
"네."
철민이는 지윤이네를 찾았다. 지윤이와 혜지, 그리고 지혜 모두가 집에 있었
다.
"집에 다 있네."
"그래. 시험도 끝나고 한가한 기간이잖아. 그것보다 내일 니가 출국하는데 오
늘 쯤 여기 올 것 같았어."
"호, 그래? 동엽이에게 연락 해 봤냐?"
"아까, 너네 부모님에게 전화가 왔었어. 오늘 저녁 사 주신다던데? 동엽이에게
도 연락 했어."
"하하, 나는 많이 못 먹는데, 감독님이 너무 많이 먹고 들어 오지 말랬거든."
"오빠 비행기 처음 타보지?"
"넌 한 번도 못 타 봤잖아. 지혜는 비행기 타 봤니?"
"그럼요."
"헤헤, 얘만 촌년이구만."
철민이는 자기 동생인 혜지에게 손가락 질 하며 아주 비웃음을 던져 주었다.
"나도 타 봤네, 이 사람아. 오빠가 내게 얼마나 무관심 했으면 동생이 졸업 여
행 갔다 온 것도 모르냐. 오빠 제주도 가 봤어?"
"그럼 너 비행기 타 본 거야? 제주도도 갔다 오구?"
"그럼, 오빠만 촌놈이야."
"씨, 혜지 너 여권 있어?"
"없다."
"하하, 나는 있어 임마."
"후후."
지윤이는 가소로운 듯 웃음을 지었다.
오후 무렵에 동엽이가 멀미약을 사들고 지윤이네를 찾았고, 조금 뒤 철민이 부
모님이 도착 하셨다.
"어, 엄마도 왔어?"
철민이 부모님과 함께 지윤이의 엄마도 같이 오셨다.
철민이는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자기가 운동 선수
인 것을 속여 왔기에 미안함도 있었다. 철민이 아버지는 철민이에게 아직 별 말
씀이 없으시다.
"철민이가 국가 대표나 되는 유명한 야구 선수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철민
이 참 대단하구나."
지윤이의 엄마는 철민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표정으로 환한 미소와 함께 반가
움을 표시했다. 지윤이가 호호, 웃었다. 지윤이 엄마는 철민이 부모님보다 더 일
찍 지윤이를 통해서 철민이가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른 척 비
밀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지.
"엄마 오늘 여기서 주무시고 갈 거지?"
"응, 내일 철민이가 떠나는 거 보고 가야지."
철민이 부모님은 별 말이 없었으나 지윤이와 그녀의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철민이 아버지는 조용히 앉아 있다가 밥 먹으러 가자는 딱 한마디만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 섰다. 철민이 아버지는 지윤이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갈비집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한 방을 차지하고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대화가 오고 갔다. 철민이 아버지와
철민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말들을 주고 받았다.
"철민이 아버님은 좋으시겠어요. 철민이가 상당히 유명세를 타더군요. 어제 스
포츠 뉴스에서도 철민이 이름이 나왔어요. 뭐든 한 가지만 잘하면 인정 받는 시
대잖아요. 나중에 그 박찬오처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지윤이 엄마는 철민이 아버지가 말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자, 듣기 좋은 말을 건
넸다.
"허허."
철민이 아버지는 그냥 웃음으로 답을 했다.
"너, 너무 많이 먹는다."
"자취생이 언제 갈비 구경을 해 보겠냐. 너도 많이 먹어."
"컨디션 조절 때문에 안돼."
철민이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 그릇에다 고기를 놓아 주자 그것만 받아 먹었다.
그리고 살핏하게 미소도 지었다. 아무말 없이 앉아 계시던 아버지도 고기를 살
짝 자기 그릇에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지윤이는 참 예쁘고 착하지요?"
철민이 아버지가 철민이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은 그 말이 전부
였을 것이다. 철민이는 아버지 때문에 동엽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자
주 하지 못했다.
"저는 오늘 합숙소로 들어 가 봐야 돼요."
식사를 파하고 철민이가 자리에서 일어 서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내일 공항에 몇 시까지 나가 보면 되냐?"
철민이 엄마가 물었다.
"두시에 떠나니까, 한 시 정도에 오시면 될 거에요."
"알았다."
아파트로 돌아 가기 전 철민이는 일행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철민이 인사를 받
고 난 다음, 철민이 부모님도 근처 보이는 여관으로 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왜요, 아파트에서 주무세요. 저야 지윤이, 지혜하고 같이 자면 되고 방 하나
만들 수 있을 거에요."
"아닙니다. 애들이 불편할 거에요. 그냥 편안히 여관에서 잘 게요."
"이야기 좀 하고 그러세요. 철민이 어머니 그러세요."
철민이 엄마는 그냥 지윤이 아파트로 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철민이 아버지는 그
게 아니셨다.
"저기 여관 가까이 있는데요 뭐. 내일 아침에 보지요."
"짐도 지윤이네에 있고, 아파트로 갑시다."
철민이 어머니는 이야기 할 상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럼 당신은 지윤이네 가서 자. 나는 좀 피곤해서."
"그럼 당신 여관방 잡는 것만 보고 나는 지윤이 엄마에게 갑니다."
"그래."
철민이는 그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한 마디 올렸다. 근처에 있는 여관이 아버
지를 생각하고 지윤이 엄마를 보니까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호텔에서 주무세요. 조금만 나가면 있을텐데."
"잠만 자는데 호텔방이나 여관방이 무슨 차이가 있냐. 잠만 잘 자면 되지. 그
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넌 얼른 들어가 봐."
"저도 요즘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넌 호텔방에서 자는데 애비는 여관방에서 자는게 마음에 걸리냐? 그런 걸 생각
하는 놈이 지금까지 날 속이며 살았냐?"
철민이는 할 말이 없어서 머리만 긁었다.
철민이는 떠 났다. 그리고 철민이 아버지는 근처 여관방에 주무셨고, 다른 이들
은 지윤이네 아파트에서 밤을 보냈다. 지윤이 엄마와 철민이 엄마는 서로 자식
자랑으로 밤을 지샜다.
철민이는 부모를 만난 덕에 그 날 편안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간
단한 선수단 미팅을 갖고 난 뒤 오전에 팀은 대한 항공 리무진 버스 두대로 공항
으로 출발을 했다. 호텔까지 제법 많은 스포츠 담당 기자들이 나와 있었다.
감독은 공항에 마련 된 기자 회견실에서 간단한 기자 회견을 했고, 선수들은 따
로 모여 있었다. 기자들은 몇몇 선수들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철민이도 거기
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철민이는 자기가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것을 느끼
면서도 많은 실감은 못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 비밀 병기라고 들었는데요."
"에?"
"일부에서는 이번 대표팀의 실질적 에이스는 본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는데요."
"처음 출전 하는 국제대회에 대한 각오는?"
"잘 해야지요."
철민이에게는 아직 인터뷰가 쑥스럽다.
감독이 기자 회견장을 나왔고, 선수들도 일반 탑승객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기
념촬영과 간단한 송별식이 있었다. 제법 많은 기자들이 있었고, 말쑥한 모습의
대회 관계자들도 많았다. 선수들의 가족들도 많았다. 철민이도 야구 한다는 것
을 들킨 탓에 가족들의 배웅을 받을 수 있었다.
'잘 들켰네.'
출국 행사 분위기는 뭔가 있어 보였다. 선수들도 통일 된 깔끔한 정장을 입고
다들 멋있는 청년들로 보여졌다. 철민이는 가족들과 잠시간의 시간을 가졌다.
"내 새끼가 국가 대표가 되어 외국을 다 나가게 되고..."
어머니는 철민이 옷 매무시를 매만지며 주위 분위기에 젖어 감복해 했다.
"헤."
"멋있어 보인다."
지윤이도 거들어 준다. 철민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지윤이 만큼 예쁜 숙녀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저기 김현철은 출국장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와 얼싸안고 울
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빠, 나도 정장 입으니까 제법 숙녀 같지?"
혜지도 이제는 어엿한 숙녀였다.
"그거 입고 졸업 사진 찍었냐?"
"응."
"나중에 니 옷도 몇 벌 사주마."
"다 적어 놓고 있으니까 꼭 사주어야 돼?"
"알았어."
조금 떨어져 있던 아버지는 말없이 서 계셨다. 철민이 어머님은 뭔가 상자 하나
를 건넸다.
"뭐에요?"
"가서 먹으라구. 보약이야."
"하하. 잘 먹을게요."
"다른 사람들 들어 간다. 이제 들어 가 봐라."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네."
"최선을 다해라."
"네,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도 인정을 하시는 모습이다.
"잘 갔다 와."
"그래, 갔다 와서 보자."
철민이는 지윤이에게도 인사를 했다. 동엽이는 철민이 어깨를 툭 쳤다.
"니가 제일 잘난 놈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허허, 너도 잘난 놈 되면 돼."
"잘 갔다 와."
철민이는 탑승자 대기실로 사라졌다. 야구를 하면서 지금처럼 보람을 느낀 적
이 없는 것 같은 기분으로 출국 수속을 마쳤다.
"덩치가 작으신 감독님과 코치님은 비지니스 석이고 우리는 이 비좁은 삼등석
에 태운단 말입니까. 우리 국가 대표 맞아요?"
철민이는 여섯 자리가 나란히 붙어 있는 중앙에 앉아 옆 좌석의 김현철이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허허."
"선배님은 비행기 타 보셨어요?"
"응."
"나는 처음인데. 뜰 때 무섭다면서요."
"아무렇지도 않던데."
타이페이행 747 점보 비행기는 굉음을 울리며 김포 국제 공항을 이륙했다. 철민
이는 눈을 질끔 감고 있다가 귀가 맹맹해지자 눈을 떴다.
"안무섭다매요."
"무서웠냐?"
"네."
"덩치는 산 만한게 의외네."
기내에서는 국가 대표 야구 선수들을 태워 영광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철민이
는 어깨를 들썩 거렸다.
"야, 이 뱅규."
철민이는 다른 옆자리의 동료에게 말을 붙였다.
"네."
"대만 가 봤냐?"
"처음인데요."
"그럼 넌 별 도움이 안돼는구나. 니 할 일 해."
철민이를 태운 비행기는 두 시간 조금 더 지난 뒤 낯선 땅에 바퀴를 내리며 착
륙을 했다. 철민이의 첫 외국 나들이다. 그 나들이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입장에
서 자부심과 사명감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만 공항에도 제법 많은 기자들이 있었고, 간단한 입국 행사가 있었다. 철민이
는 무명이었다. 철민이에게 프래시를 터뜨려 주는 기자는 없었다. 조승민이나 김
똥주, 박째홍 같은 오랜 국가대표 생활을 한 선수들은 관심을 받았지만 철민이
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철민이는 지금까지 자기가 유명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
했기에 별 다른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째홍아, 아까 너 통역하던 그 숙녀분이 대만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대만 사람일걸요."
"한국 말 잘 하네."
대만은 시차가 거의 없는 곳이기에 기후 적응만 하면 되었다. 아열대 지방이라
한국 보다 조금 더운 가을 날씨만 적응하면 되었다. 국가 대표가 묵고 있는 호텔
에서 음식도 대부분 한국 음식을 먹었으며, 훈련을 제외 하곤 외출할 일이 거의
없었기에 의사 소통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번 아시아 선수권 대회는 비중이 큰 대회였다. 내년 올림픽 출전 자격도 이
대회 성적에 따라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팀은 예선 전에 일본과 필리핀을
상대해야 한다. 필리핀은 한국의 고교 수준보다 못한 야구 실력이라 예선 통과
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한국은 첫 경기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대승을 거둔다. 7회 까지만 경기를 가졌
다. 김현철을 비롯한 국가 대표 신인급들의 투수들이 대거 기량을 점검하듯 등판
을 했다. 철민이는 국가 대표 신인이었으나 등판을 하지 않았다. 철민이는 다음
일본 전에서 결승 리그에 올랐을 때 얼만큼 기량을 발휘해 줄 지 테스트를 받아
야 했다.
"블루 마운틴 투, 플리즈."
"너 영어 잘한다."
"선배님 이게 무슨 영어입니까."
"나는 이렇게 라운지에 나와 커피 마시고 싶어도, 주문 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
지 못했거든."
철민이와 김현철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호텔 라운지에 내려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시내에서 제법 떨어 진 곳이라 바깥 풍경이 잘 정돈 된 공원 같
은 분위기를 던져 주었다.
"조금 더워도 가을은 가을인가 봅니다."
"왜?"
"낯선 곳에 오니까 그리운 것들이 많이 떠 올라요."
"애인 생각 나냐?"
"제가 애인이 어딨어요."
"그럼 그때 찾아 왔던 아가씨랑은 헤어졌냐?"
"누구요? 아, 지윤이요. 걔랑 내가 왜 헤어져요. 걔랑은 안 헤어져요. 걔가 보
고 싶긴 하네요."
"그 아가씨 네 애인 아니냐?"
"아직은 아니에요. 요즘들어 헛갈리네요. 그냥 애인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
이 들어요. 제가 좀 무딘편이지만 걔가 날 좋아는 것은 알아요. 나도 걔가 좋구
요. 근데 또 다른 미련이 있어서요."
"있을 때 잘해라."
"호텔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괜찮네요."
"응, 나도 한국 가면 가을을 타겠다."
"선배님도 장가 갈 나이가 지났어요."
"프로로 진출하면 장가부터 가야겠다. 하하."
"저는 28살 때 장가를 갈 겁니다. 제 등번호가 괜히 28번이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28번을 고집하는 거야?"
"그럼요."
"허허, 같은 프로 팀에서 뛰었으면 좋겠지만 힘들겠지?"
"모르지요 뭐."
"내일 네 기량을 세계에 알려라."
철민이는 투수 코치에게 내일 있을 경기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철민은 조금 긴
장이 되기 시작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상대이기에. 철민이는 자기 방 침대에 앉
아 비장한 각오로 어머니가 주신 보약을 한 봉지 뜯어 마셨다.
"형, 같이 마셔요."
"니가 선발 맡는 날, 그 날은 내 인심을 써 주지."
"지금 한 봉지 줘요."
"꼭 줘야 돼냐?"
"네."
철민이는 약봉지 하나를 승민이에게 던져 주었다.
'조승민이는 먹는 것도 졸라 밝히는구나.'
약을 먹고 난 뒤 긴장은 계속 되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한국과 일본 전은 대만 자국의 경기가 아니었기에 관중들이 적었다. 확실히 더
운 지방이라 10월 말이었지만 오후는 더웠다. 일본 팀은 눈에 띄게 뛰어난 선수
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기량이 평준화 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실업팀에 속하
는 사회인 야구팀들 소속이 대부분인 선수들은 경험면에서 한국 선수들에게 앞
서 있었다. 선수층도 두터웠다. 한국 팀 타자들은 일본 투수들에게 별다른 공격
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철민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운드에 서 있다. 벌써 5회가 지났다. 점
수는 0대0. 일본팀은 당황했다. 거의 모르는 무명 투수에게 눌려도 너무 철저하
게 눌리고 있었다. 제구력이 약간 불안하긴 했으나 변화구도 나무랄 데 없었고,
무엇보다 다른 팀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빠른 공에 일본 타자들은 철민이를 공
략하지 못했다. 철민이에게 뽑아낸 안타는 겨우 2개다. 하지만 철민이는 제 기량
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녁에 있을 자국과 중국과의 경기를 보기 위해 관
중들이 속속 들어 오고 있었고, 낯선 마운드와 선수들도 철민이를 긴장하게 했
다. 어깨의 피로가 빨리 왔다.
철민이는 6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감독은 투수를 바꿔 줄까도 생각을 했지만
철민이가 생각보다 경기를 능숙하게 풀어 나가자 경험을 더 쌓아 줄 목적으로 철
민이를 계속 마운드에 올려 세웠다.
"2nd 히터, 센터 필더 우야꼬 이노무새끼."
철민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노무새끼가 친 공은 평범한 2루 앞 땅볼이었으
나 실책이 나오고 말았다.
"3th 히터, 퍼스트베이서 고로니께 마자따."
철민이는 1루 주자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썼고, 불어난 관중들도 신경이 쓰였
다. 철민이는 낯선 곳에서 낯선 관중들 때문에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 갔다. 그
러다가 마자따에게 큰 걸 맞았다. 2루타, 철민이는 실점을 하고 말았다. 겨우 일
점을 준 상황이지만 벤취에서는 철민이를 계속 마운드에 올려 놓을 생각이 없었
나 보다. 바로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 왔다.
"잘했어, 결승리그에서 충분히 큰 역할을 맡길 수 있겠다. 무리하지 말자."
투수 코치는 철민이를 격려해 주었다. 철민이는 공을 투수 코치에게 건네고 마
운드를 내려 갔다. 참 오랜만에 경험 해 보는 강판이었다. 철민이의 이날 최고
구속은 151km/h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제 기량에 비하면 변변치 못한 그
속도로 인해 철민이는 서서히 매스컴으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철민이는 뒤에 나온 투수가 계속 실점을 했기 때문에 자책점을 기록하고 말았
다. 일본전은 경험이 많은 상대에게는 경험이 많은 투수를 올려 보내는 것이 낫
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경기였다. 마지막으로 나온 김현철이가 생각보다 깔끔하게
상대 타자를 요리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에게 3대1로 패하고 말았다. 철민이
가 패전 투수다. 철민이는 패전을 기록하며 국제 대회 첫 경기를 마쳤다.
철민이는 실망을 했다. 충만했던 자신감도 한 풀 꺽이었다. 철민이는 자기가 일
본 야구 관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는 것과, 일본 매스컴에 보도가
되어 지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른 채 경기가 끝나고 호텔 방에 누워 패전의 분루
를 삼켜야 했다.
호텔방 전화 벨이 울렸다. 철민이는 감독이나 코치가 부르나 하고 무심결에 전
화를 받았다.
"철민이?"
"어! 니가 왠일이니?"
"왜긴, 오늘 경기 졌다고 너무 상심 말라고 전화 했지. 동생이라 그러니까 연결
해 주더라."
"오늘 경기에서 패한 걸 어떻게 벌써 아냐?"
"중계했잖아."
"중계를 했어?"
"응, 해설자분이 니 자랑을 많이 하시던데."
"허허."
"힘 내. 오늘 경기 결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며?"
"응."
"앞으로 또 등판할거지?"
"그래."
"그때 잘하면 되지 뭐. 그리고 조금 있으면 너네 집에서 전화가 올거야."
"집에서?"
"응. 어머님이 내게 거기 연락처 아냐고 물어 보셨거든."
"그런 건 협회에 물어 봐야지, 너에게 왜 물어 보시냐."
"몰라. 네가 집에다 전화 한 통 해드리지 그랬어."
"나도 여기 연락처 잘 몰라. 내가 중국말을 모르잖아."
"훗, 너 혹시 시합 전날 긴장이 되면 우리집에 전화 해. 내가 콜렉터 콜 받아
줄게. 나하고 편안한 얘기 나누고 나면 긴장이 좀 풀어지지 않겠니? 오늘 네 모
습 보니까 긴장한 표정이더라."
"하, 이게 제법 내 배려를 하네."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챙기겠니."
"그래, 챙겨줘서 고맙다."
철민이는 지윤이와 대화를 하고 난 뒤 위축 된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집
에서 온 전화를 받고 새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철민이는 통화를 줄 곧 엄마와 했으나 아버지의 격려를 받으며 전화를 끊었다.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 사내 자식이 대범해야지. 오늘 보니까 긴장을 많
이 하는것 같았다. 다음에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해라. 열심히 해."
오늘 경기는 아버지도 관심을 갖고 끝까지 보신 모양이다.
결승리그는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이 돌아 가면서 한 경기씩 대결을 펼친 다
음 상위 두팀이 결승전을 치룬다.
결승 리그에서 한국은 일본에게 또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대만을 크게 이겼
다. 일본은 전승을 거두긴 했으나 한국과 대만에게 어려운 승리를 거두었다. 김
현철은 자주 등판을 했으나 철민이는 결승리그 들어 한 번도 등판을 하지 못했
다. 결승전을 위한 포석도 아니었다. 대만 전을 생각외로 쉽게 이겼고, 일본전에
서 너무 많은 투수를 소비했다. 철민이를 약체팀인 중국 전에 출전 시키기에는
아까웠다. 철민이 외에 선발을 맡은 똥환이나 승민이는 결승전을 치루기에는 체
력적으로 힘들었다. 철민이는 졸지에 결승전 선발 투수로 내정되고 말았다.
"솔직히 너에게는 부담이 되는 줄 안다. 그렇지만 니가 팀에서 가장 좋은 구위
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이미 올림픽 출전 자격을 따 냈다. 너무
큰 부담은 갖지 말아라. 네 기량만 펼쳐 주면 무난히 우승을 할 수 있다. 후반
들어서는 승민이나 똥환이를 내 보내 뒤를 받쳐 주겠다. 예선전 처럼만 해 줘도
우리는 기대를 할 수 있다. 한 번 해 보자."
"김철민 자네, 국내 매스컴에서 자네 기사로 떠들썩 해 하고 있다는 거 아나?"
철민이가 선발 통보를 받는 자리에는 감독 이외에도 팀 단장을 맡은 야구 협회
인사도 있었다.
"네?"
철민이는 높은 사람이 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일본 프로팀에서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나 봐. 이번에 확실히 자네 기량
을 보여 주게. 자신감을 가지게."
철민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철민이는 방에 돌아 왔다. 그 곳엔 조승민이가 집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조승
민이는 결승리그 일본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철민이는
조승민이 몰래 약 봉지를 뜯어 마시고는 내일 경기에 대한 생각들을 하며 침대
에 누웠다. 옆에서 승민이의 대화 내용이 간혹 들어 왔다. 철민이는 승민이가 전
화를 끊자 넌지시 물었다.
"너 간다는 팀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라고 했지?"
"네."
"얼마 받았냐?"
"그런 걸 왜 물어요."
"됐다 그럼."
"형 내일 좋은 경기 부탁할게요."
"그래. 일본 팀에서 내게도 관심을 보인다는데, 나도 외국 나갈 수 있을까? 외
국 나가는게 좋냐?"
"외국 나가면 힘들거에요. 그래도 프로니까 좋은 대우 해 주는 곳으로 가는 것
은 당연하다고 봐요."
"그런가."
"네. 형도 기회가 되면 좋은 대우 해주는 곳으로 가세요. 형, 약봉지 뜯어 먹
는 거 봤어요. 하나 줘요."
"독한 놈이네."
승민이는 약봉지를 받아 뜯어 먹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있자 철민이는 긴
장이 되기 시작했다.
예의상 집에다 먼저 전화를 했다.
"어머니세요?"
"응. 내일 경기가 있지?"
"어머니도 이제 야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아들 일이니까. 그래도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아버지는요?"
"그게 말이다."
"네?"
"요즘 들어 집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자주 와. 어제는 삼성인가? 거
기 사람들이 아버지 학교까지 찾아 왔었다는구나. 그리고 오늘은 일본의 뭐라더
라? 세이보라던가? 거기에 관계된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와가지고 나가셨어."
"에?"
"이거 웃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뭐가요?"
"오늘 스포츠 신문 기사에 니가 일본으로 진출할거라는 게 나왔어. 우리도 모르
는 사실을 신문에서 보도를 하는구나. 너 혹시 또 우리에게 숨기는 거 있냐?"
"없는데요. 나도 처음 듣는 말이에요. 선수들은 외부인들과 접촉이 안되거든
요."
"그렇지? 아무리 10억을 준대도 니가 일본 가는 것은 좀 못마땅하다."
"10억이요?"
"신문에 그렇게 났어. 니 계약금이 일억엔 이상이 될 거라네. 십억가까이 되나
봐."
"금시초문인데요."
"하여튼 한국 와서 이야기 해 보자꾸나."
"네. 편히 쉬세요. 내일 경기 잘 하겠습니다."
"그래."
철민이는 어이가 없어 헛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기분 나쁜 소식은 아니었
다.
철민이는 곧 지윤이에게도 전화를 해 보았다. 저녁이 가까이 오는 시간이라 집
에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과감히 콜렉터 콜 전화를 때렸다.
"흠, 전화 해 주었구나."
"집에 있었어?"
"응."
"나 내일 결승전 선발 맡았다."
"알고 있어. 신문에 그렇게 났는데 뭘."
"그것도 알겠네 그럼."
"너 일본 간다는 것? 아니지?"
"응. 나도 모르는 사실을 신문에서 보도를 했나 봐."
"나 지금 생각하는 것 있거든, 솔직히 가기 싫어. 혼자 지내는 것이 참 외롭다
는 걸 어학 연수 갔다가 배웠어."
"무슨 말이야?"
"나 연수 갔던 그 학교로 유학을 갈까 생각중이야. 집에서도 그러라 권유하고
있고."
"너 진짜 외국 나가는거야?"
"결정된 것은 아니야. 자신이 없거든, 근데 너라도 가까이 있다면 자신이 생길
것도 같아."
"돌려 말한다 또."
"요즘 들어 기대가 되네."
"뭐가?"
"내 가까이 있어 줄 것 같은 그런 기대."
"너도 외국 나가면 안되는데..."
"너도 내가 멀리 있으면 싫겠지?"
"어, 그건 그래."
"너 메이저리그로 가라."
"뭐? 얘기 예전부터 메이저리그를 무슨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그런 쉬운 곳인
줄 아네."
"넌 갈 수 있을 것 같아."
"에이, 그건 나중 문제고 나에게 빨리 편한 얘기 해 줘."
"긴장 되니?"
"응."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럼 무슨 말을 해 줄까?"
"야, 자스트 모우먼트!"
"응?"
"사랑하는 데 남녀간에 어떻게 친구가 돼. 헛갈리니까 그런 말 하지마."
"치,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응."
"사랑한다고 말 못하는 것은 네 성격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
이야?"
"얘가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그러네."
"우리, 이젠 어린애가 아니야."
"그런 얘긴 그만 하자. 이런 사이 좋잖아."
"가슴 조아리는 심정은 어떡하구? 지금까지 넌 내게 있어 항상 불안한 존재였
어.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내가 짝사랑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
이 든다 말이야."
"너도 가을타냐? 짝사랑은 너하고 나처럼 친한 상대에게 쓰는 말이 아니지. 숨
어서 보고, 골방에서 혼자 청승떨고 하는 그런 게 짝사랑이야 임마. 나 너 좋아
한다니까."
"또 장난으로 받아 들이지?"
"응. 그런 얘기는 한국 가서 편안할 때 하자. 지금 얘기들 별로 편안한 얘기가
못 돼."
"내일 힘내서 경기 잘 치뤄. 내 기도해 줄게."
"그래 고맙다. 그건 편안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