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향기 수목원 기행
2011, 3, 17, 맑음
이웃나라에서 지진 해일이 발생하고 원전이 폭발하여 방사능 유출로 온 세계가 떠들썩한데도,
세월이라는 시계는 쉬지도 않고 잘도 돌아가서 지난 주 청계천을 걸으며 친구들과 약속했던 날이
되었다. 오늘은 물 향기 수목원을 가기위해 오산 행 지하철을 타야한다.
이른 아침부터 아침상을 차리며 원두커피를 끓이고 등산 배낭을 챙기느라 바삐 움직이니 어머님
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아기처럼 칭얼거리신다. 언제든지 아침에 외출할 기미만 보이면 벌써 불
안 증세를 보이시며 '어디 가느냐?, 언제 오느냐?, 누굴 만나느냐?' 등 잘 듣지도 못하시면서 질문
이 끝이 없다. 더구나 오늘 아침은 시골에 홀로 계시는 친정 엄마 생신이라 수화기 한 번 붙들면
놓지 않으려 하시는, 역시 잘 듣지 못하시는 엄마에게 생신 축하한다는 전화까지 하느라고 수화
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데, 어머님의 불안 섞인 질문은 계속된다. 아침 내내 듣지 못하시는 두
분의 어머님과 한 바탕 진을 빼고 집을 빠져나와 세상으로 탈출했다. 하루도 집에 붙어있지 않고
해 먹을 줄 아는 게 없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라면 하나는 끓일 줄 아니 오늘만큼은 자기 엄마 점
심정도는 챙겨 드리겠지 하며 믿는 마음이 있으니, 나의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1호선 오산대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10시 30분, 지하철에 자리를 잡자마자 책을 꺼내
들었다. 외출 할 때는 언제나 책을 한 권씩 넣어 다니는데 오늘은 지하철 타는 시간이 길 것 같아
서 두 권을 챙겨왔다. 중간에 갈아타는 시간이 오래 걸려 5분 늦게 오산대 역에 도착했다. 벌써 와
있는 친구들도 있고 바로 뒤에 도착한 친구들도 있다. 지난 주 우리의 청계천행을 들은 친구들이
5명이나 추가되어 오늘 같이 움직이는 인원은 10명이다. 가까운 곳에 사는 옥자가 자동차를 가지
고 온다고 하였기에 주차장에 내려가 옥자를 만나는데 조금의 시간이 지체되어 10시 50분 수목원
을 향해 출발했다. 수목원은 오산대 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앞에 커다란 입간판이 서있다. 길
을 따라 들어가니 입구에서 1인당 입장료 1,000원씩을 받는다. 자동차 주차비는 하루 3,000원. 차
종에 따라 다르다. 정확한 명칭은 오산시 수정동에 위치한 '경기 도립 물 향기 수목원'이다.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하여 19개의 주재원 이외에 삼림 전시관, 숲속쉼터, 잔디광장,
전망대 등의 부대시설도 있다. 곤충류, 조류 등을 관찰 할 수 있는 전시공간도 있고, 습지 생태
원, 수생 식물원, 호습 성 식물원 등, 맑은 물이 나오는 곳이라는 것에 맞춰 물을 좋아하는 식물들
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수목원 이름도 물 향기 수목원이다.
입구에서 들어가니 여기 저기 나무를 옮겨 심고,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
다. 아직은 겨울이 묻어있어 곳곳에 녹지 않은 눈도 보이고 응달에는 두꺼운 얼음도 남아있다. 푸
른빛도 많지 않고 꽃도 보이지 않아 전체적으로 본 첫 인상은 삭막하다. 넓은 잔디밭을 지나 숲 쪽
으로 올라가니 사무실 건물이 나오고 사무실 바로 옆에 하우스형태로 지어진 두 동의 난대, 양치
식물원이 나오는데, 난대 식물원을 거쳐 양치식물원으로 이어져있다. 식물원을 나와 산등성이쪽
으로 조금 오르니 연못과 정자가 나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자에 앉자 간식 보따리들이 풀
어져 나온다. 10명이 1인당 2 -3가지씩만 가져왔어도 수 십 가지 간식이 쏟아진다. 맛있는 점심 좀
사먹게 간식 싸오지 말라고 연통까지 돌렸건만 말들을 듣지 않는다. 다 열거 할 수 없는데 특이할
만한 간식은 피부에 좋은 콜라겐이 많이 들어있다는 돼지껍데기를 태희가 싸 왔다는 것, 우리는
원두커피에 안주로 돼지껍데기를 먹었다. 겨우 40분 걷고 배가 빵빵하게 먹었다.
다시 걷는다. 산등성이를 넘으니 산 아래 간단한 공연을 할 수 있는 운동장과 돌계단 관중석이
나온다. 관람 길을 따라 내려가다 설치된 목재다리위로 오르니 습지 주변에 버들강아지가 군락을
이루고 활짝 피어있다. 물 향기 수목원에는 군데군데 작은 연못과 습지가 많고 습지 생태원이라
는 팻말이 많았다. 습지를 빠져 나오니 곧은 아스팔트길에 메타세콰이어길이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다. 메타세콰이어길은 전남 담양에 있는 유명한 길인데 이곳도 길 양쪽으로 하늘로 솟은 나무를
심어 놓고 이름을 붙여준 듯하다. 눈앞에 두개의 커다란 원형 유리온실이 나타난다. 물방울 온실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바로 입구에 유카리툽스 나무가 내 눈을 잡는다. 호주의 블루 마운틴에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었던 아름드리나무가 이곳에선 손가락 굵기로 여린 잎을 떨고 있다. 이곳
은 세계의 식물들을 전시해 두고 있었는데, 산 설고 물 설은 이곳까지 원정을 와서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느라 애쓰고 있었다. 한 쪽에 관람객들의 쉼을 위한 원탁 두 개와 의자 10개가 준비
되어 있었는데 우리 10명이 앉아서 쉬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그곳에 앉아 또 간식을 먹으며 수경이
낭랑한 목소리로 지난주 다녀왔던 청계천기행문을 읽었다. 이 친구들은 나의 허접한 글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박수를 보내주는 훌륭한 독자들이다.
물방울 온실을 나오니 바로 앞에 수목원 출입구가 있었지만 우리는 다시 산등성이 쪽으로 올라
갔다. 여러 종류의 소나무를 모아놓은 한국의 소나무원. 단풍 나무원, 대나무원, 무궁화원, 등 한
가지 식물을 종 별로 무리지어 모아놓은 야외 주재원이 있었고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수 있
는 많은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다. 등성이 가장 높은 곳에 2층으로 된 팔각정 전망대가 있어서 우
리 모두 그곳으로 올라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를 하며 10살짜리
소녀들처럼 빙빙 돌았다. 나는 열 명이나 되는 만만치 않은 몸무게들이 이렇게 뛰어서 기둥이 부
러지지 않을까 자못 걱정스러웠다. 술이 없어도, 유행가를 몰라도 밝고 맑게 살며 작은 것을 가지
고도 즐길 줄 아는 이 친구들이 나에게 있어 참 좋다. 그리고 감사하다.
물 향기 수목원은 첫 인상과 달리 산자락 하나를 다 차지한 듯 공간이 꽤 넓고 한가로이 쉬었다
갈 수 있도록 경기도에서 많은 배려를 하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꽃이 피고 녹음이 짙을 때
손녀 들을 데리고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려오는 길에 곤충, 조류원 옆 정자에 앉아 남
아있는 간식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점심을 먹지 못했다. 소요시간 총 3시간 30분, 걷
는 시간 2시간, 간식 먹고 쉬는 시간 1시간 30분이 걸렸다. 밖으로 나와 가까운 곳에 사는 옥자네
집으로 몰려가 점심 겸 저녁으로 즉석 수제비를 끓여 먹고 돌아오는 지하철을 탔다. 누군가 다음
주 목요일엔 우리 춘천 갈까? 한다.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친구들과 가는 산행을 그리 좋아하
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배도 부르고 피곤하여 졸음이 왔지만 나에겐 숙제가 남아있다. 아침에 가지고 나온 책 두 권 중
한권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한권가지고 오산까지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낑낑 거리고 있었다. 내려
야 할 역에 도착했지만 책에 코를 박고 종점까지 가기로 맘을 먹고 앉아 있었다. 종점까지 앉아있
다 다시 돌아오는 것은 내가 가끔 지하철에서 책을 마저 읽고 싶을 때마다 써먹는 방법이다. 종점
에 도착하여 모두 내리고 나니 문이 닫히고 전동차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시동이 꺼지고
뒤편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 두 분이 지나가며 힐끔 쳐다본다. 조금 있으니 앞쪽에서 기관사 아
저씨가 가방 하나를 들고 뒤쪽으로 옮겨가며 또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 이내 다시 시동이 걸린다.
이제 기관차는 꼴찌 칸이 첫 번째 칸이 되어 인간들이 아우성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으로
어둠을 뚫고 떠나간다.
첫댓글 습지에 피어 난 버들강아지는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귀엽지요
봄날 수목원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추억이
너무 정겹고 아름답네요
긴 글에 귀한 걸음 놓아 주시어 감사를 드립니다.ㅎㅎ
자신의 세계는 -어디일까요 ?
홀로의 시간을 향해 걸어보는 고독이 보입니다
채울수 없는 삶의 여정은 남-여가 없나 봅니다
그렇지요.
특히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고독이란....선생님도 잘 아실듯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