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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4 김제만경 탄허대종사 생가 방문
2024년도 반이 넘어가고 세월따라 장마와 더위의 계절 7월은 오고야 말았다.
세월은 덧 없이 흐르며 세월은 무정히 흘러가는구나.
무상한 세월의 여로에서 조동화는 김제 만경들녁을 바람쐴 겸 김동훈아우와 참느릅칼국수로 점심후 동훈아우의 승용차로 드라이브하였다.
만경(萬頃)은 '만(萬)'개의 '이랑(頃)'을 가진 광활한 땅이 바로 김제 만경, 밭 사이의 경계(두둑)가 만 개다.
김제만경들력은 전라도의 곡창지대로, “징게 맹개”는 전라도 사투리로 김제와 만경을 말한다.
만경읍 대동리에 탄허대종사 생가가 있어, 만경읍내 들어가기 전 대동리 이정표가 보이길래 대동리로 이동, 탄허대종사 생가를 방문하였으며, 귀로길에 공덕의 전라북도 기념물 259호로 지정된 650년된 은행나무를 탐사하였다.
탄허대종사 생가를 찾은 것은 당대 최고의 학승이 조동화가 태어나고 김제사람으로 살아오면서 김제에서 출생한 탄허대종사의 흔적을 찾아 보기위함이며,
위대한 신령의 나무 650년된 은행나무를 찾은 것은 나무에서 품어져 나오는 인간에게 탁월한 기를 받기위함이여.
탄허스님 생가는 탄허대종사 업적을 그려 김제시에서 2016년 11월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국비로 2020년에 완공되여 깨끗이 복원되고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상태를 확인할수 있었다.
70-8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성철과 탄허대종사는 이름을 날린 스타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이름을 떨친 탄허대종사가 태어난 곳이 김제 만경이라니 불교계의 거목이 김제 만경에서 나왔구나.
탄허스님은 가족의 중매로 16세 결혼하여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두고 22세 되던해 오대산 상원사에 한암스님을 은사로 입산, 3년간 참선한 후 14년간 두문불출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며 오대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속명 김금택 탄허스님은 아내와 1남1녀를 두고 오대산 한암스님을 찾아 도의 요체를 깨닫고 귀향할 계획이었으나 일생을 속세와 단절하며 살았다.
서우담스님이 15년동안 탄허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시봉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탄허 스님과 숙겁의 인연은 이어져 탄허 스님 속가 딸과 결혼했다.
신동소리 들어가며 어려서 사서삼경을 통달하는등 재주가 남달랐던 탄허스님은 인생의 해답을 얻지못해 세속의 행복을 단절하고, 인간의 근원을 찾기 위해 오대산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 도를 닦던 그도 71세에 1983년6월5일 열반하시었다.
그러고본게 누구나 이세상에 왔다가 떠나가는구나.
2024년 7월 1일 오후 9시 26분경,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제네시스 차량이 반대차선으로 운전하다가 인도로 돌진 9명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씩으로 9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서울시청 공무원 2명, 신한은행 본점 소속 직원 4명, 현대직원 3명으로 파악됐다. 사망자의 연령대는 30대 4명, 40대 1명, 50대 4명이며 전원 남성이여.
시청 공무원들은 상을 받은 날이었고, 신한은행 직원들은 승진 축하 자리였던 사연으로 알려졌구나.
신한은행원 사망자는 4명으로 동료의 승진과 인사발령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 보행 신호를 기다리다 참변을 당하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날벼락이여.
인간의 일이란 새옹지마란 말이 생각이 나는구먼.
한치앞도 모르는 인생길.
그려려니 하늘에 맡기고 사는길이 인생이여
인생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애써 죽음을 외면하면서 살 뿐이다.
결론은 인간이 천년만년 살것 같아도 한줌의 자연으로 돌아가는것이지.
죽음이란 피해갈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아니겠는가요.
있을 때 잘혀 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어떻게 사는삶이 잘사는 삶일까?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그려려니 긍정적으로 살면 되야.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그려려니 즐거운 시간 됩시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하지요.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세월은 흘러갑니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시다.
<탄허스님생가 아래 미즈노씨네트리하우스에서 차를 시켜 동훈아우와 마시고 시원한 에어콘 바람으로 땀을씩히고 왔수다.
동훈아우 한적한 시골마을 대동리 고풍스런 곳에서 차 마시는 맛도 괜찮았을거여.
동훈아우도 세월에 쫓기여 현업을 퇴직하다니 세월은 무정도 하네.
미즈노씨네트리하우스는 일본인 미즈노씨가 만경 대동리 옆마을의 한국인 아내를 만나 자녀 5명과 살면서 홈카페로 개조한 농촌주택인데 아프리카 우림의 나무위의 집을 연상하듯 이색적인 풍경을 보고온 느낌이요.
폐가인 한옥을 손수 고쳐서 살다가 나무 위에서도 쉴수 있는 김제 트리하우스를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심의 구중굴궐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이곳이 탄허스님 생가이다.
생가 당호는 간산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김제 만경에서 훌륭한 탄허스님이 태어난것에 자부심을 느꼈지요.>
☛공덕 은행나무 전북기념물106호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816-1번지
공덕면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650년 정도로 추정되며(1350년경), 높이는 약 15m, 둘레는 4.5m로 8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경로당 옆에 있어서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65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마현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은행나무는, 음력 1월 3일날 나무 밑에 모여 마을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탄허대종사 생가방문 소감
대동리 탄허스님의 생가 '간산재(艮山齋)'를 조동화는 김제가 낳은 큰 인물이기에 꼬불꼬불한 대동리 시골마을을 종종 찾아 탄허대종사의 초인적인 정신세계를 그려보곤 한다.
탄허 대종사는 소년 시절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어려서 사서삼경과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 22세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일찌감치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대 성철스님은 3,000배를 해야 사람들을 만나 친견할수 있었는데 반해, 탄허스님은 해박한 지식을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10여년 연장자였던 양주동과 함석헌이 배울 만큼 유·불·선과 주역·정역·성경까지 통달해 동서고금의 지혜를 꿰뚫었던 인물이며, 당대 대학자였던 양주동 박사는 탄허스님의 장자 강의를 듣고 감동해 넙죽 절을 올렸다는 일화가 있으며, 함석헌 선생도 탄허스님에게 장자를 배웠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탄허스님은 1913년 1월 15일 김제군 만경면 대동리에서 독립운동가 김홍규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까지 소년기에 이어 호남학파의 거두이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17세에는 기호학파인 이극종 선생에게 유교의 진수를 받았고, 노자와 장자의 도교학까지 두루 배웠다.
그후 오대산 상원사에 방한암 선사를 찾아 3년간 참선한 후 14년간 두문불출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였다.
1955년 오대산에 수도원을 개설하고 불교의 엘리트 양성과 불교경전 번역에 힘썼으며, 가장 위대한 것은 '신화엄경합론' 47권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하루 14시간씩 약 10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원고지 분량만도 무려 6만3천여장에 이른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스님은 1983년 6월 5일 열반에 들었다.
김제만경 대동리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승려가 태어났다고 하니 대동리 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군요.
천재 탄허대종사는 아는 불법과 지식을 세상에 널리 알린 그런 스님이셨다.
탄허 대종사(1913~1983)
▶생가위치 : 전북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 300 (대동1길 32)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홍규의 5남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금택, 본관은 경주김씨, 법명은 택성이며 법호가 탄허이며, 어려서부터부터 사서(四書)삼경(三經)을 외울만큼 천재였던 탄허스님은 열다섯이 되던 해에 충남 보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에게서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19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 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22세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인허스님”이 속세의 3살 아래 동생이며 탄허스님이 오대산 입산후 2년되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을 은사로 상원사에서 속세의 형님 탄허스님과 불경을 공부하며 도를 닦았다.
탄허 김금택은 22살, 1934년부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반드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같이 했으며, 한암선사에게 정식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삭발을 하는데, 선사로부터 ‘삼킬 탄(呑)’ ‘빌 허(虛)’라는 법명 ‘탄허’를 하사받았다.
특히 탄허는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미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결혼해 아들과 딸을 뒀던 탄허는 22세에 출가하였는데 승려가 되기 전 인물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스님은 나이 쉰아홉부터 돌을 갈아 죽을 쑤어 먹으며 수행을 했다. 중생들은 힘들게 일을 하며 연명을 하고 그러면서도 시주를 하는데 승려가 시주의 은혜를 무겁게 여기지 않으면 수행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탈이 되었는지 스님은 암에 걸리고 말았다. 제자들의 권유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의사들은 고작해야 석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탄허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놈아, 병이 사람을 잡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일흔하나가 되는 1983년 계해년 음력 4월 24일 유시에 갈 것이니라.”
국내 최고의 의사들이 내린 진단을 무시하고 무려 6년 후에나 입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으니, 이 말을 들은 의사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은 자신의 예언대로 암을 몸에 품은 채 6년여를 살았고 그 사이 능엄경, 금강경 등 사교(四敎)를 완간하는 등 더욱 왕성한 번역 활동을 보여 주었다.
1979년 늦은 봄 대학 여교수가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혼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였고, 스님은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이 지나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전화 통화를 원했고, 12월 12일이 지나서는 자격이 없다며 부탁을 거절하였다.
1982년 대통령 전두환의 아호(雅號)를 일해(日海)라고 지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탄허대종사 속세의 아내이야기
출가를 하기 전 결혼을 한 탄허의 아내는 토정 이지함의 16대 종손으로 학문과 덕망을 고루 갖춘 뼈대있는 선비집안의 규수였다.
어릴 적 남자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니며 탄허 보다 먼저 중국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뗐을 정도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탄허도 출가 전의 자신의 내자(內子)를 일러 부부라기 보다는 훌륭한 수학 도반으로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남편인 탄허의 출가를,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말릴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하루는 주역을 구해 보고 싶어하는 남편(탄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송아지를 팔아 주역 책을 구해 주었다.
주역 책을 본 남편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을 받아 가지고 그대로 글방으로 달려가더라는 것.
가만히 뒤따라가 문틈으로 남편의 모습을 살펴보니, 한 손에 책을 들고 읽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 이미 남편은 부부의 연(緣)보다는 공부에 연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속가 탄허스님의 아내 이씨는 슬하의 딸이 15세 되던해, 딸은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여비와 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그대로 입산 비구니가 됐다.
딸은 수도 정진중 탄허스님을 15년 모신 서우담 수좌와 인연을 맺어 결혼했다.
정진 중 만난 수좌는 도서 출판 교림 서우담 대표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변방 새(塞), 늙은이 옹(翁), ‘새옹’이라함은 ‘변방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이고, 어조사 지(之),말 마(馬), ‘지마’란 ‘~의 말“이란 뜻이다. 따라서 ’새옹지마‘란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으로 ”인간의 일은 흉한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좋은 일이 나쁜 일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옛날 한(漢)민족은 중국 북방의 이민족을 오랑캐 호(胡)라 하여 크게 두려워했다. 북방 변방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 노인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노인에게 저마다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런데 노인은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아오?”
과연 몇달이 지나자 잃었던 말이 오랑캐 땅의 준마(駿馬)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축하의 인사를 하니, 노인은 “이게 화(禍)가 될지 누가 아오?”
라고 말하면서 조금도 좋아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아들은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데리고 온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발목뼈를 부러뜨렸다. 절름발이가 된 아들을 가엽게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하자, 노인은 “아니오. 괜찮소이다. 이런 일이 복(福)이 될지 누가 아오?”
하고 태연히 대답했다.
일년 후,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나가 십중팔구는 전사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불구라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 무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일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많아 앞 일을 내다보기가 어렵다.
누구나 한 세상 희비(喜悲)가 교차되면서 인생을 살아나간다.
또 다른 희비교차(喜悲交叉)의 이야기가 있다.
옛날 송나라에서 적선(積善)을 많이 한 집에 검은 소가 흰송아지를 거듭하여 낳는 길상사(吉祥事)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와 아들이 차례로 장님이 되는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에 초나라가 쳐들어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큰 환란을 당했지만, 이 아버지와 아들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명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나자 눈이 도로 밝아졌다고 한다.
“화(禍)와 복(福)은 새끼 꼬인다”는 말이 있다. 길한 것과 흉한 것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인간사인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복권에 당첨된 사람 중 7할 가까이가 당첨 전보다 더욱 불행해졌다고 한다. 땀흘려 번돈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일확천금(一攫千金)한 돈이기 때문이다. 횡재(橫財:뜻밖의 재물)한 돈이 횡재(橫災:뜻밖의 재난)를 불러온 것이다.
초승달이 만월이 되고, 만월이 그믐달이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보름달 높히 떳다고 뽐내지 말고 그믐달 되었다고 서러워할 필요가 없다.
달도 차면 기울고, 그믐달도 날이 가면 보름달이 되는 법이다. 인간만사는 새옹지마이다. 그러니 조그만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인생을 여유롭게 살아가라고 새옹지마가 암시하고 있다.
인생(人生)이란 무엇인가?
인생?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이 소중한 것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인생? 암에 걸려서 3개월 후에 죽는다는 판정을 받은 친구가 와서 손을 잡고 울고 위로하고,
그 불행을 슬퍼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못살 사람이 3개월이나 살 사람을 불행하다고 위로해 주고 갔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 수많은 인생에 대한 명언 중에서도 막시무스가
최고의 명언 5개를 골라보았다.
1. 인생이란 불충분한 전제(前提)에서 충분한 결론을 끌어내는 기술이다.
인생이 충분한 전제에서 결론을 내리는 일이라면, 우리가 사는일이 이렇게 서툴고 실수투성이는 아닐 것이다.
인생은 도대체가 전제(前提...먼저 내세우는 것)가 없는 놀이다.
막시무스가 인생에 대한 최고의 명언으로 꼽는 영국의 소설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의 말이다.
2. 인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어차피 당신은 살아 나가지 못할 테니까.
막시무스가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은 표정으로 사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해주고 싶은 얘기다.
아무리 심각해도 인생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없다.
넥타이 풀고 살자.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엘버트 허바드(Elbert Hubbard, 1865~1915)가 남긴 멋진 말이다.
3. 당신은 여기 잠깐 들른 것이다.
서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라.
그리고 가는 길에 꽃향기도 꼭 맡아보아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하늘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쓴 천상병의 세계관과 비슷한 인생관을 담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여기 잠시 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여행자처럼 살자.
살아 있을 때는 지금의 타이거 우즈만큼 유명했던
하겐(Walter Charles Hagen, 1892~1969)이라는 미국의 프로 골퍼가 한 이야기다.
4. 인생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비워서 행복해진 사람은 많아도 채워서 행복해진 사람은 별로 없다.
살면서 욕심이 날 때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뭔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생각하는 말이다.
인생에는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작가 겸 삽화가였던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 1928~ )의 말이다.
5.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그게 전부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이 막시무스의 생활만 돌이켜 봐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을 기억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노력해 본다.
단 하루라도 제대로 말이다.
독설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65~1950)의 인생 관찰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쇼의 묘비명
아일랜드의 천재 극작가 죠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묘비명에는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훌륭한 번역가들이 " 우물쭈물하다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라고 번역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가 말하고자 하는 묘비명의 그 글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일까?
무엇이던지 하고자 하면 당장 시작해보라,
바로 실천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걸어가라는 뜻이리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행동에 옮기라는 것이다.
버나드 쇼는 자기가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다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죽음에 임박하여 자기 삶을 후회하고 반성했다는 것이다.
그러지요.
한번뿐인 인생 우물쭈물하면 후회하지요.
먹거 싶은거 먹고, 하고 싶은일하고, 여행하고 싶으면 여행하고 미루지말고 실천하며 후회하지 말아야지요.
죠지 버나드 쇼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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