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야의 마음 이제부터 어긋남 없으리라
고향 산에 소나무 전나무 울창하고 / 故山松檜鬱蒼蒼
손수 심은 복사나무 홰나무도 벌써 십 년 되었네 / 手植桃槐已十霜
인간사는 자연히 감개할 일 많으니 / 人事自然多感慨
초야의 마음 이제부터 어긋남 없으리 / 野情從此莫乖張
골짜기 안 작은 시냇물 유독 사랑스러워 / 獨憐谷裏涓流水
바위 가에 그런대로 아름다운 집 새로 지었네 / 新築巖邊苟美堂
부끄러워라 이웃 노인 와서 안부 묻는데 / 堪愧隣翁來問訊
백발에도 아직 벼슬을 그만두지 못했음이 / 白頭猶未謝周行
이 시(詩)는 서하 이민서(李敏敍) 선생이 부친인 백강 이경여 선생의 묘소와 그 윗대 왕자 분들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포천군 내촌면에 성묘 차 방문하였을 때 지은 시로 서하집(西河集) 제5권 칠언율시(七言律詩)에 기록된 ‘포천의 묘사에서 우연히 읊다[抱川墓舍偶吟]’라는 제목의 시이다.<서하 이민서 선생은 세종대왕의 8대손이다>.
서하 이민서 선생은 이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차기 정승을 점칠 때 가장 유력한 후보로 오르던 인물이었는데 본인은 세상이 혼탁한 것을 보고 벼슬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는 고향에 내려가 초야에 묻혀 자연 속에서 옛 성현들의 글을 읽으며 지내기를 열망하였다.
그의 인륜도의(人倫道義)를 향한 높은 지조와 절개는 그의 졸기(卒記)에 잘 들어나 있다.
숙종 14년(1688년) 2월2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의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6세였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년에 여러 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정승 될 사람을 점침) 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고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조선왕조실록)
오늘 이 시점에 서하 이민서 선생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것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이렇게 의롭고 지조 있는 인물을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하 이민서 선생이 정언(正言) 시절에 올린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상소문들 중에 가장 대쪽 같은 지조가 들어난 상소문 중 하나일 것이다.
효종 6년 1655년 5월 11일 정언 이민서가 상소하여 간쟁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사기를 높이는 등의 일을 아뢰다. 정언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날로 위태해지고 백성이 날로 야위어 갑니다. 위태하여도 구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고, 야위어도 돌보지 않으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납간(納諫)과 보민(保民)에 관한 말씀을 먼저 아뢰어 보겠습니다.
공론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간쟁(諫諍)은 공론의 근본입니다. 대개 천하의 의리는 그지없고 한 사람의 재식(才識)은 한계가 있으니, 남과 나로 가르고 공과 사로 나눈다면 어찌 천하의 착한 사람을 오게 하여 천하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사람이란 겁내는 자는 많으나 굳센 마음을 가진 자는 적고 무른 자는 편안하나 곧은 말을 하는 자는 위태합니다. 임금이 너그러이 용납하고 틔어 이끌어서 할 말을 다하는 기개를 기르고, 의심 없이 들어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지 않는다면, 누가 지극히 위험한 것을 범하고 지극히 어려운 것을 행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오만하게 스스로 거룩하게 여기고 홀로 총명을 행하며 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뭇 신하를 깔보아 대신을 종처럼 기르고 대간을 개와 말처럼 대하십니다. 분주히 종사하되 뜻에 따를 뿐이고 어기지 못하니 종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속박되어 달리되 울면 쫓겨나니 개와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굴에 잘난 체하는 기색이 나타나고 말이 편벽하여 남을 용납하지 않아 한 마디 말이라도 맞지 않으면 물리쳐 쫓는 일이 계속되므로, 대소 신하가 허물을 바로잡기에 겨를이 없고 머리를 감싸 쥐고 발을 포개면서 두려워 삼가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가 현격하기는 하나 정의(情義)를 서로 보전하고 예법(禮法)을 서로 유지하는 것인데, 초개처럼 여기기만 한다면 어찌 국사(國士)로서 보답하기를 요구하겠습니까. 더구나 문사(文士)·대부(大夫)는 임금이 심복으로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조종조에서는 매우 가까이하는 예우를 하셨으니,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옛일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이어받아 배양에 더욱 힘쓰셨는데 나라를 재건한 공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에 힘입었습니다. 신은 오늘날 가까이하여 믿는 자가 과연 어느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랜 나라에 친신하는 신하가 없어 심복으로 의지할 데가 없고 일을 맡겨도 통괄함이 없습니다. 벌떼처럼 일어나는 젊은이만 취하여 모아내는 일을 구차히 쾌하게 여기어 조정의 대체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원기를 해치니, 전하께서 취사를 그릇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일에는 신하를 대우하는 예가 더욱 박하여 가두고 매 때리는 것을 가벼운 벌로 여기고 차꼬가 관원에게 두루 미치고 오라가 고관에게까지 미칩니다. 사기가 꺾여 잡류가 횡행하고 염치가 아예 없어져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없으니, 국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언로(言路)가 통하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도 못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어질고 충실한 신하에게 심복을 맡기고 정직하고 간쟁하는 신하에게 이목을 붙여서 정성을 미루어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를 굽혀서 말을 들어 임금의 도리가 아래로 통하고 곧은 말이 날마다 들리게 하시지 않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고 전(傳)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서 왕이 되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예전부터 이제까지 백성이 편안하지 않고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정령(政令)과 베푸는 일에 조금이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할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명(敎命)이 내려질 때에 조금이라도 홀아비나 홀어미를 가엾이 여기는 뜻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뭇 신하 중에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관한 말을 어전에서 아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경외(京外)의 신하 중에 전하의 백성이 유랑하여 시달리는 정상을 대궐에 아뢰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슬픈 우리 백성이 한 해 동안 내내 고생하며 근력을 다하여 조세를 바쳐도 힘이 모자라므로 몹시 근심하면서 오히려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덕의(德意)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를 돌보지 않고 바야흐로 무익한 일에 뜻을 기울이시니, 독책(督責)하는 자는 잔혹한 짓을 자행하고 재능을 뽐내는 자는 남보다 더하여 귀염을 사려고 힘씁니다.
추쇄(推刷)는 작은 일인데 거조(擧措)가 너무 엄중하고 과조(科條)가 너무 엄밀하며, 염초(焰硝)를 굽는 것은 말단의 일인데 나라의 반이 소요하고 갇힌 사람이 옥에 가득합니다. 서울 군사가 먹는 것은 날로 늘어 가고 경창(京倉)의 곡식이 축나는 것은 날로 많아집니다. 나라의 큰일이라면 오히려 핑계할 수 있겠으나, 한 궁가에서 쓰는 것이 수 백만금이나 되고 사사로운 자봉(自奉)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고혈은 이미 다 짜냈고 잗단 이익까지 죄다 다툽니다. 법을 세워 넌지시 빼앗고 판매에 세를 매겨 교묘히 거두어들이니, 전하께서 재능과 심산(心算)이 있는 신하를 얻으시더라도 눈앞의 일만 처리한다면 또한 임금이 재물을 다스려 풍족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근본을 맑히고 악의 근원을 막되 백성을 아끼는 것은 절용(節用)에서 시작하고 절용은 생약(省約)에서 시작하여 궁중의 용도(用度)와 군국(軍國)의 모든 수용(需用)을 다 조종 때의 옛 규례와 같이 하소서. 재물이 한없이 들어가는 것을 조금 멈추고 국가의 정항(正項)인 공납(供納)만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사치의 해독은 천재(天災)보다 심한데, 말속(末俗)이 이미 투박해져서 참람하여도 금하지 않으니, 몸소 거친 옷을 입는 교화를 숭상하여 사치한 풍속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대저 오래 쇠퇴한 데에서 약세를 만회하여 중흥의 큰 공적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 사업인데 터덜터덜 느릿하게 걸어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사의(私意)를 구차히 쾌하게 하고 대계(大計)에 소홀히 하여, 본심을 간직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허물을 듣기 싫어하고 일을 하는 데에는 먼저 백성의 재물을 다 씁니다. 잗단 오락에 빠져 금원(禁苑)이 놀이를 구경하는 마당이 되고 사화(私貨)를 불려 내사(內司)가 도피하는 자를 모이게 하는 수풀이 됩니다. 인척을 높여서 관방(官方)이 어지럽고 희노(喜怒)를 경솔히 써서 상벌이 어지러우며, 아첨이 풍속이 되어 사신(私臣)이 등용되고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날로 성하여 덕을 숭상하는 것이 쇠퇴합니다. 깊은 궁중에서 한가히 계시는 동안을 신이 아는 바가 아니나 가무와 여색, 술이 또한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하겠습니까.
뵙건대, 전하께서는 불세출의 자질로 큰일을 할 때가 되었고 만승(萬乘)의 자질을 가지고 여러 대를 이어온 기업(基業)을 이어받으셨으므로 비상한 공적을 머지않아 기대할 수 있는데, 지(志)가 기(氣)에 빼앗기고 의(義)가 이(利)에 가리어져 지사(志士)가 해체되고 백성이 실망하게 하십니다. 전국 때 말세의 임금이 단단히 마음먹고 오래 생각하여 세운 것이 있었던 것만 못하시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上)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조선왕조실록)
생각건대, 위의 서하 이민서 선생의 상소문은 오늘날 모든 공직자들, 언론인이 반드시 읽고 본받아야 할 것이며, 일반 국민들도 힘써 서하 이민서 선생이 바라던 바와 같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의로운 사회풍토를 이루어 가야할 것이다.
2026. 9.28.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