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맺은 인연 책으로 이어가다
- 뜻밖에 《수필예술》誌 독자의 전화를 받고 -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독자로부터 전화나 편지를 받는 것처럼 반가운 일도 없다. 오늘(2021.09.04)은 뜻밖에도 충남 논산에 거주하는 한 독자로부터 흥미롭고 유익한 전화를 받았다. 전화 통화는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무려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내게 전화하신 분을 ‘K 선생님’이라 부른다. K 선생님은 우선 자신이 내게 전화를 하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그 분은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내 글을 읽었다고 한다. 책 제목은 《수필예술》 제38호(2017년 대전수필문학회 발행). 글 제목은 <저자의 체취가 느껴지는 책>(부제 : 매원(梅園) 박연구 수필가를 그리며) 이라고 했다.
▲ 대전수필문학회에서 발행한 연간 동인지 《수필예술》38호(2017년)에 실린 필자의 졸고 수필 - 어느 독자가 이 책을 논산 버스정류장에서 발견하고 필자에게 전화했다. 이런 일은 문단활동 30여 년만에 극히 드문 일이었다.
대전수필문학회에서 연간 1회 발행한 수필전문지를 버스정류장에서 읽었다니, 논산 지역에는 책을 비치해 놓은 ‘독서정류장’도 있는가 싶어 신선한 뉴스거리로 들렸다. 책을 관계 당국에서 비치한 것인지, 아니면 그 지역에 사는 수필문학회 회원 중에 한 분이 갖다 놓은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책을 버스정류장에 어떤 방식으로 비치해 놓았는지도 궁금했다. 더 신기한 것은 이 책이 발행된 지 4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 글이 수록된 작가도 30여 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내게 특별히 전화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K 선생님은 본론부터 말했다. 내 글에 등장하는 박연구 수필가의 수필 <바보네 가게> 한 대목을 언급하면서 크게 웃었다.
“바보네 가게, 어쩐지 이름이 좋았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쌀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깍쟁이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값을 주고 샀을지라도 싸게 산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런 글을 쓴 분의 체취가 느껴지는 책을 저자로부터 증정받고 문인들끼리 따뜻한 서신을 계속 주고받은 삶의 이야기가 독자로서 매우 진지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K 선생님은 고 박연구 수필가가 생시에 내게 친필 서명하여 보내준 저서 《책과 인생》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독자로서 그 책을 구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음을 비쳤다.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필자인 나의 연락처는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K 선생님은 책의 맨 끝에 필자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수록돼 있더라고 했다. 개인정보를 요즘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시절이라 책에 회원 주소록까지 실었던 것이다.
아무튼, K 선생님은 필자에 대한 예를 깍듯이 갖추면서도, 어떤 벽도 느끼지 않고 가까운 이웃처럼 정겨운 많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목소리도 좋았다. 나지막하면서도 남성 다운 중후한 목소리가 어느 방송국 인기 성우 같았다.
“목소리가 유난히 좋다”고 했더니, 자신은 책도 좋아하지만 노래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래 경력을 자랑스럽게 길게 이어갔다.
특히 배호, 나훈아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데, 노래를 부르면 ‘몸에 화기(和氣)가 넘쳐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했다. 가수로 정식 등록만 안 됐지, 노래 실력은 어딜 가나 인정받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실제 내게 테스트(?)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대중가요 한 곡조를 신명 나게 불러제꼈다. 그가 부른 노래는 나훈아의 <고향 역> 한 소절이었다.
갑자기 ‘노래 이야기’가 튀어나와 <독자와의 대화>가 본래 코스를 이탈한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책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K 선생님은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데,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 그 책은 어떻게든 꼭 사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책을 사더라도 건성으로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일은 없다고 했다. 책을 완전히 독파하고 그 내용을 죄다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했다. 이 시대 보기 드문 독서광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놀라워하면서 크게 감탄하니, K 선생님은 또 다른 자랑거리를 털어놨다.
자녀 자랑이었다. 딸만 둘을 두었는데, 어릴 때부터 혹독하리만치 엄격하게 공부를 다그쳤다고 한다. 자신이 무섭게 학습 지도를 한 덕분에 모두가 명문대를 나와 현재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다닌 대학교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명문대학교’ 출신임을 특별히 자랑스럽게 거듭 강조하니, 나는 슬며시 부러움이 밀려 왔다.
책 관련 대화가 뜻하지 않게 ‘가정사 문제’로까지 발전하여 전화 통화가 다소 길어졌지만, 나도 다른 볼 일도 없기에 그의 말씀을 좀 더 진지하게 경청하기로 했다.
K 선생님은 자신의 신체 모습을 마치 그림 그리듯 자상하게 설명했다. 70줄에 접어든 나이에 비해 남달리 동안(童顏)임을 강조했다. 누가 보든지 젊게 보는 얼굴이어서 스무 살 정도 아래인 50대 나이로 본다고 했다. 얼굴만 동안이 아니라 체력도 남달리 강하고 힘이 세다고 자랑했다. 예를 들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80대 할머니가 쌀 포대를 옮기지 못하여 걱정하시기에 자신이 40kg 쌀 포대 4개를, 그러니까 80kg짜리×2개를 거뜬히 들어 옮겨 드리고, 또다시 꽤 무거워 보이는 식용유 통까지 할머니 댁의 창고에 옮겨 드리니,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시더라는 에피소드까지 들려줬다.
그야말로 힘도 황소처럼 장사인 것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게 하는 사례였다. 건강 좋지, 자식 잘 키웠지, 책 좋아하지, 노래 좋아하지, K 선생님의 얘기를 듣다 보니, 한결같이 내가 부러워할 만한 것들뿐이었다.
내가 K 선생님에게 거듭 ‘대단하다’라면서, 그중에서 남달리 체력이 좋아 기운이 넘친다니, 그제 제일 부럽다고 하니, ‘그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는 듯이 또 한 가지 자랑거리를 소개했다.
자신은 한방계통에서 30여 년을 종사했는데, 약용식물에 관한 강의도 ‘명 강사 반열’에 든다고 했다. 자신의 강의를 들어 본 사람들은 모두가 재미있고 유익하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글을 보니까 공부도 많이 하시고 이력도 대단하실 것 같다’라고 하면서, (당신도) ‘자랑 좀 해 보라’고 이번엔 내게 잠시 자랑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K 선생님처럼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고, 이력도 크게 내세울 게 없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공연히 겸손을 떠는 줄 알고 다시 나의 문단 경력을 물었다. 한평생 경찰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밤낮없이 고생 많이 하고 이제는 퇴직하여 이런저런 형태의 글을 쓰고 있다고 하니, ‘대단하신 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K 선생님과 장시간 주고받은 이야기를 조금도 부풀리거나 뺌 없이 그대로 옮겼다. 이쯤해서 나는 뜻하지 않은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교훈적인 몇 가지 사례를 요약하면,
▲ 첫째, 남자는 K 선생님처럼 씩씩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유의 장점과 남다른 특기는 자화자찬 같아도 표현을 해야 알지, 공연히 점잔을 빼느라고 겸손한 척 해봐야 누가 알아주느냐는 깨달음이다. 요즘은 ‘PR 시대’를 넘어 ‘자기 세일즈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 둘째, 나이가 들면 누구나 말수가 좀 많아진다. 하지만 건강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 비법을 남에게 설파하는 일은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 노년에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일은 사회교육 측면에서도 유익하니,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열정적으로 전파할 것,
▲ 셋째,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자랑해도 흉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고 보니, K 선생님은 나와 동갑네였다. 그는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어디 있나요? 저는 7월생인데 윤 선생님은 4월생이라고 하시니 형님이시네요. 석 달 형님, 하하하! 앞으로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K 선생님과 통화를 끝내면서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책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독자를 만난 것도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니, 졸저 문집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 귀한 전화를 주신 독자에게 <저자 증정본 2권>을 우편 발송하려고 포장해 놨다.
일찍이 내가 <바보네 가게>의 저자 박연구 수필가의 친필 서명 증정본을 받고 ‘저자의 체취를 느낀다’라고 수필로 썼듯이, 귀한 전화를 주신 논산의 독자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지만 보답할 게 마땅치 않다. 책으로 맺은 인연, 책으로 이어가고 싶다.
2021.09.04.
대전에서 윤승원 記
첫댓글 K 선생님, 오늘 저의 졸저 증정본 2권 우편 택배로 부쳤습니다.
저자의 '체취'는 아니더라도, 평소 즐겨 먹은 된장찌개 냄새라도 조금 맡아 보시길 바랍니다.ㅡ 2021.09.06. 저자 윤승원 드림
참으로 자상하십니다. 독자와의 통화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시고, 상대방을 극찬해주시는 성품은 타고난 어머님의 선물 같기도 한 듯하고 명원 누님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따뜻한 정을 거듭 찬탄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분이 항상 즐거울 것입니다. 두 분의 새로운 인연이 다음의 글에서 소개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생활 이야기를 글로 쓴 저자로서 뜻하지 않게 독자를 직접 만난 잊지 못할 경험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 현직 경찰관 시절, 유치장에서 만난 <범죄자 독자>라든지, ▲서점에서 우연히 저의 책을 구해 읽고 제가 근무하는 경찰서까지 직접 찾아와 또 다른 책 선물을 한 보따리 주고 간, 책을 유난히 사랑하는 대전 선화동의 어느 할아버지, ▲ 조선일보에 실린 저의 에세이를 읽고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대전시청 민원실과 대전문학관 등을 통해 수소문하여 장거리 전화를 주신 당진의 어느 전직 군의원님 등 수많은 독자를 만났지만, ▲ 이번에 ‘논산의 K 선생님’처럼 지방 소도시의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저의 글이 실린 책을 읽었다는 독자는 처음입니다. 더구나 동인지에 실린 저의 글을 읽고 직접 전화까지 한다는 것은 일반 독자로서 보통 성의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정 박사님의 따뜻한 소감과 과분한 격려 말씀을 들으니, 그분 독자와의 후속 인연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오기를 바랍니다.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한 독자를 만났으니, 앞으로 많은 얘깃거리가 쏟아지리라 기대합니다. {이어짐}
@윤승원 저의 어머니와 누님까지 빼놓지 않고 찬탄해 주시니,
정 박사님은 참으로 자상하시고, 인정 넘치는 배려심에 감동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원씨와 승원씨를 생각하면서 저의 9순이 되신 누님과 저의 관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 여 동기 간 중에서도 유별나게 자상하고 친절하시며 상대방을 항상 생각하는 모습이 똑 같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이 없는 란에 언급한 점 무례임을 용서해주세요.
누님은 언제나 어머니처럼 자상하시고 동생을 어머니만큼이나 따뜻하게 대해 주시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는 마음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누님과 전화로라도 자주 대화하면 우울했던 마음도 해소되곤 했습니다. 이제 누님도 외로우실 때는 동생에게 전화를 자주 하십니다. 카톡 문자도 자주 보내십니다. 제가 카톡으로 글을 보내면 읽고 또 읽고, 온종일 심심하지 않다고, 이렇게 외로운 노년에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동생이 있어서 좋다고 늘 말씀하시지요. 정 박사님도 그런 자상한 누님이 계시니, 행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정 박사님이 누님 이야기를 하신 것은 본 글의 주제와도 부합합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