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지종과 밀교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심층밀교는 법경 정사(밀교연구소 소장/법천사 주교)가 글을 연재합니다.
(문의 khbbud@chongji.or.kr ☎010-5419-0378)
반야심경(般若心經)_④
이전글다음글목록
반야심경(般若心經)_④
무무명 역무무명진 무명이 없고 또한 무명도 다함이 없으며,
無無明 亦無無明盡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의반야바라밀다고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두려움이 없어서,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느니라.
‘무무명(無無明)’은 무명(無明)이 없다[無]는 뜻입니다.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 즉 지혜가 없다는 것인데, 여기에 무무명(無無明)이라고 하였으니 지혜가 있음을 더욱 강조한 말입니다. 무무명은 무명이 없다, 즉 지혜 없음(無明)이 없다[無]는 것이니 이중 부정으로써 강한 긍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혜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에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은 또 무엇일까요.
‘또한 무명이 다함이 없다’는 말은 무명이 없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무명이라는 그 흔적 자체도 모두 없다는 것이니 ‘지혜있음’을 이중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연필로 잘못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웠는데 글씨뿐만 아니라 그 자국까지 몽땅 없앴다고 한때, 바로 잘못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운 것은 ‘무무면’이고, 그 자국까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몽땅 없앤 것은 바로 ‘역무무명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만 없애도 충분한데 더 나아가 그 자국 흔적까지도 모두 없애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리석음이 없고 또한 어리석음의 흔적마저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그 흔적마저도 없는 것이 완전한 지혜,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무명이 없다’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여기에 무명 자체도 남기지 않고 또 그 흔적마저도 모두 없애는 것이니 정마로 대단한 지혜입니다. 이렇게 무명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 이유는 바로 뒤에 나오는 ‘반야바라밀다’를 언급하기 위함입니다. ‘무무면’ ‘역무무명진’이 곧 지혜,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입니다. ‘무무면’ ‘역무무명진’은 바로 지혜, 반야 바라밀다를 이루기 위한 수행덕목이자 지혜를 닦으로써 얻게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 곧 무무명이요 무무명진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은 곧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서 얻게 되는 지혜, 반야바라밀을 가리킵니다. 역으로 말하면, 지혜, 반야바라밀을 얻는 길은 바로 공(空)의 이치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 정비공이 자동차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어야 수리와 정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으며, 최고의 정비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구조와 정비기술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무명’은 바로 앞의 경문인 ‘무수상행식’ ‘무안의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를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상행식도 없고, 안이비설신의도 없으며,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안계 내지 의식계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일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일체존재 하는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변한다.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입니다.
‘공’을 말하기 위하여 오온, 육근, 육경, 육식을 나열한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것이 지혜인데, 이를 명(明)이라 하지 않고 ‘무무명’이라 역설적으로 표현하였고, 여기에 ‘역무무명진’을 덧붙여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지혜를 강조하면서 이를 얻기 위해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은 ‘내지 늙고 죽는 것도 없고 또한 늙고 죽는 것이 다함도 없다’는 말인데, 이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탈하였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일체가 공(空)하다는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모든 고통을 여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움,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정작 더 큰 고통은 거기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해서 헤매고 허덕이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공하다, 무상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게 되면 모든 고통이 줄어들고 괴로움이 자연 사라지게 됩니다.
‘노사老死)가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노사가 다함이 없다’는 것도 앞의 ‘무무명 역무무명진’과 같은 비유의 설명입니다. 거듭 반복하여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空)의 이치를 알아서 지혜, 반야바라밀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노사(老死)는 12연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경문에는 무명(無明)과 노사(老死)만 언급되었는데, 실은 무명에서 비롯하여 노사에 이르는 12연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노사가 없고 노사가 다함이 없다는 말은 12연기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2연기가 없다’는 것은 12연기를 벗어났다. 해탈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12연기는 우리 인간이 지혜가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결국 집착과 반목, 대립과 갈등으로 평생을 살다가 병들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안고 간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혜롭게 살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살면 평생을 고통으로 살다 괴로움으로 죽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자 연기의 대표적인 교리입니다. 이 12연기의 교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어리석게 살지 말라는 교설(敎說)입니다. 무명(無明) 속에 빠져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롭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12연기는 바른 인생이 아닌 바르지 못한 인생 역정을 나열한 것입니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인생로정(人生路程)이 바로 12연기입니다. 그 답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은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다’는 말인데,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사정제(四聖諦)로서 우리가 수행을 통해 이르러야 할 경지이며, 지혜(智慧)도 마찬가지이며, 닦아서 무언가를 얻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 경지와 지혜와 얻음마저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도(道)의 경지이겠습니까. 우리가 좋고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마저도 없어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 얼마나 고차원적이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완전한 해탈, 열반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空)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고집멸도, 지혜, 얻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 또한 집착과 분별인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챔피언이 되기 위해 피땀을 흘린 권투선수가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뒤, 스스로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좀 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故)’는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것인데, 실은 ‘얻음’이 있지만 얻었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얻음’입니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무상(無上), 무무상(無無上)의 경지를 말합니다. 이런 경지는 바로 반야바라밀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지혜를 얻으면 무무명, 역무명진,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그것마저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밉지만 정말 미워하지 않고, 좋기는 하지만 좋다고 으스대지 하지 않는 마음자리, 또는 모든 것을 이루어 놓고도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겸손 정도에 감히 비유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은 바로 반야바라밀에 의지 할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는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인데,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면, ‘마음에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다.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눈치 보지 않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좋고 싫음에 좌우되지 않으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마음이 바로 서 있고 체(體)가 바르다면 모든 것에 흔들림이 없고 마음에도 고통과 괴로움, 불선(不善)한 감정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람과 물이 걸림이 없이 흘러가는데 아무리 큰 돌이나 태산같은 바위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온갖 험담과 모략,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망 진심이 일어나지 않는 안인(安忍)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그 지혜는 자비를 품고 있는 지혜입니다. 이를 우리는 지비(智悲)라고 말합니다.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으니 대립과 갈등, 고통과 괴로움이 없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해탈, 열반인 것입니다.
결국 지혜,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교설이 바로『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그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해공(解空)입니다. 즉 일체가 공(空)하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공(空)의 이치를 깨달아서 나오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중도적인 삶이 곧 공의 이치를 깨달아서 실천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은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공(空)의 이치를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공하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입니다. ‘헛된 생각,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열반입니다. 전도몽상에서 벗어나고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경지, 즉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완전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 곧 열반입니다. 그것은 지혜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얻었지만 그 지혜에서도 벗어나는 것이 공(空)이며 완전한 해탈 열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공(空)은 바로 앞의 모든 경문(經文)의 내용들입니다. 앞의 경문들은 결국 공(空), 반야바라밀, 열반을 설하기 위하여 나열한 말씀들입니다.
다시 한 번 앞의 경문들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무색 (空中無色)
무수상행식 (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 (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
무무명 역무무명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以無所得故 菩提薩?)
의반야바라밀다고 (依般若波羅密多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心無?碍 無?碍故 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